< 103 - 생각하기 나름. >
한국의 반응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작년의 구진호가 보여준 훌륭한 활약에 자극받은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앞다투어 KBO의 괜찮은 야수들을 영입했다. 한국 선수들 중 가장 먼저 미국에 진출했던 LA 다저스의 류희주와 구진호가 나란히 큰 부상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메이저리그 열기는 갈수록 뜨거워졌다.
미네소타 트윈스에 입단한 ‘국민거포’ 배병후는 4번 위치에 들락거리며 기대를 받았고, 시애틀 매리너스의 스플릿 계약으로 입단한 ‘조선의 4번’ 이도형은 놀라운 활약으로 메이저리그 계약을 쟁취할 것처럼 보였다. 새로 진출한 선수들 중 유일한 투수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오성현은 특유의 투구 동작에서 나오는 타이밍 빼앗기가 제대로 먹혀들며 불펜의 한 자리를 굳건히 했다.
문제는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에만 몰려 있었다. 첫 번째 선수. 스프링캠프 시범경기에서 27타수를 들어섰지만 단 2안타밖에 기록하지 못한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좌익수, 김호석. 강한 타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미국의 투수들에게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선수. 이형진. 탬파베이의 백업 유틸리티 정도로 살아남을 것처럼 보이던 형진은 정체되다 못해 퇴보하는 것처럼 보이는 타격 때문에 랭카스터의 외면을 받는 중이다. 랭카스터와 탬파베이가 선호하는 운동능력이 좋고 수비가 훌륭한 선수임에도 경기에 잘 나서지 못한다는 건, 생각보다 큰 문제였다.
“야. 금방 정리하고 올라올 거야. 너무 신경쓰지 마.”
형진은 지혁의 위로에 대답하지 않고 더램행 비행기를 타 버렸다. 씁쓸한 결과였다. 아스드루발 카브레라가 FA로 다시 빠져나갔고, 그 자리엔 브래드 밀러라는 수비가 부실한 선수가 영입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형진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면, 올해 반드시 뭔가를 보여줘야 했다. 올해가 그 적기였다. 하지만 그는 목표를 움켜쥐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보다 높은 수준의 야구를 맞닥뜨린 선수들의 적응과 좌절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옆에서 따뜻한 조언이나 충고 따위로 해결해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메이저리그라는 세계 최고의 벽에 부딪힌 한국 선수들은 나름대로 고충을 갖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3월을 보냈다.
지혁만 제외하고.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바깥쪽 싱커가 춤을 추며 빨려 들어가고, 양키스의 유망주인 애런 저지는 큰 몸을 뒤로 돌려 물러나야만 했다. 시범경기 마지막 등판, 양키스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4이닝 동안 안타 두 개만 허용한 완벽한 피칭. 심지어 투구수는 41개밖에 되지 않았다. 이닝당 10개밖에 던지지 않은 셈이다.
라커룸을 빠져나와 클럽하우스에서 간단하게 마사지를 받는데, 홀로 클럽하우스에 남아 있던 FOX의 에디터 샘 호킨스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문. 아주 훌륭한 피칭이었어요.”
“고맙습니다.”
“내가 당신을 몽고메리에서 처음 봤을 때가 아직도 생생한데 말이죠. 지금은 몰라보게 성장해 버렸네요.”
“그러게요. 시간 참 빠르죠?”
호킨스는 그 말에 껄껄 웃었다.
“시간이 빠르다뇨! 빠른 건 당신이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겨우 2년 전이에요. 정확히는 2년도 안 됐지. 그 사이에 몽고메리 비스킷츠의 선발투수가 탬파베이 레이스의 두 번째 선발투수가 된 거예요.”
그는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첫 시즌에 후반기에 올라왔을 때는 타자들이 적응을 못했다고 할 수도 있어요. 투구폼도 그렇고, 공도 낯설고. 싱커는 아주 위력적이었고. 그런데 풀타임 첫 시즌을 치르면서는 또 커브를 장착해서 돌아왔어요. 이 커브가 당신의 레퍼토리를 다양하게 만들어 줬어요. 이제는 낮은 공만 노리고 있을 수 없게 됐죠.”
“하하. 저를 부끄럽게 만드시려고 작정을 하셨네요.”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난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이라는 투수에. 그리고 내 작명 센스에.”
“작명 센스? 미스테리 피쳐, 그거요?”
“네. 미스테리 피쳐. 올해는 또 어떤 미스테리함을 숨기고 있나요? 싱커, 커브에 이은 제 3의 무기는 뭐예요?”
지혁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지만 말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그런 건 없어요. 하하. 그동안은... 뭐.”
신에게서 새로운 재능을 받지는 않았다. 새로운 재능을 언제고 계속 충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선수 생명이 뭉텅이로 깎여 나가는 일이니까. 쉬는 내내 생각했다. 지난 시즌 15승을 거두었다는 건 증명이었다. 지금의 투구로도 충분히 손에 꼽히는 투구를 할 수 있다는 증명의 일종.
물론 지금 당장 클레이튼 커쇼나 데이비드 프라이스, 크리스 세일 같은 투구를 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아마 앞으로도 영영 그런 피칭은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5승을 거둔 바 있는 지금의 지혁은, 어떤 팀에서든 2선발은 충분히 맡을 수 있는 투수다. 탬파베이에도 크리스 아처라는 차세대 에이스만 없었다면, 팀의 넘버 원 투수는 아마 지혁일 것이다.
“그럼 이번 시즌에 보여줄 당신의 미스테리함은 뭔가요?”
“그런 건 없대도 그러시네. 목표는 있죠. 더 좋은 투수가 되는 것.”
“원론적인 얘기네요. 기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대답이죠.”
“제일 클래식한 대답이라고 해 주세요. 하하.”
어떤 팀에서든 2선발은 맡을 수 있는 투수에서, 어떤 팀에서도 에이스급 투수를 맡을 수 있는 투수가 되는 것. 이 간격을 메우는 게 올해의 목표다. 더 좋은 투수가 되는 것.
공의 위력을 더 배가시키고, 공의 제구를 더 완벽하게 하는 일. 타자의 생각을 읽고, 타자의 준비 자세를 읽고, 타자의 생각의 허점을 찌르는 일. 선수 생명을 소모해가면서 더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일보다, 마운드 위에서 선발투수로써 더 성장하는 것. 이것이 지혁이 첫 번째 선발투수로, 나아가 에이스로 발돋움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고 지혁은 판단했다.
“더 좋은 투수라... 알겠어요. 어떻게든 기사를 한 번 만들어 보죠. 쉽지 않겠지만. 데스크에서 까여도 날 원망하진 말아요, 문. 하하.”
*
“여보세요?”
“문. 패트릭입니다.”
“와우. 오랜만이네. 세일럼은 좀 어때요?”
“어떻긴. 그냥 그렇죠. 어차피 야구하는 곳은 다 똑같아요.”
“오늘 마이너리그 개막했죠? 후지는? 첫 경기 선발로 나간다면서요.”
지혁은 패트릭의 전화를 받자마자 후지의 안부를 물었다. 짧다면 짧은 겨울이었다. 12월, 1월, 그리고 2월 초중반까지. 겨우 두 달하고 조금 더 같이 보냈을 뿐이지만 후지에게 꽤 정이 많이 든 탓이다. 후지 녀석이 워낙에 어린 동생마냥 살갑게 군 탓도 있지만, 신과 있었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상대는 오직 후지뿐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후지 미유타는, 매우 공교롭게도, 지혁과 같은 지구에 속한 보스턴 레드삭스의 유니폼을 입었다. 졸지에 맞닥뜨려야 할 상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후지가 보스턴을 선택한 건 패트릭의 강한 추천 때문이었다. 지혁은 아직도 지혁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도 패트릭이 내뱉었던 강한 확신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보스턴은 메이저리그 전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팀이 될 겁니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새로운 단장에 데이브 돔브로스키가 취임했고, 돔브로스키는 돔브로스키다웠다. 돔브로스키 특유의 공격적인 스타 선수 영입 러시가 이어졌다.
탬파베이의 레전드이기도 한 데이비드 프라이스가 악연이 얽힌 보스턴의 빨간 유니폼을 입었다. 게다가 메이저리그 최고의 마무리로 손꼽히는 크레이그 킴브럴도 데려왔다. 여기다가 준비가 되어 있는 유망주들이 폭발도 어우러질 것이다.
보스턴은 분명히 월드시리즈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은 팀이다. 게다가 계약금도 가장 많이 제시한 팀이기도 했다. 후지는 주저하지 않고 보스턴을 택했고, 보스턴도 그에 응답하는 듯 시즌 스타트도 싱글 A나 더블 A가 아닌 트리플 A 팀인 세일럼 레드삭스에서 시작하게 했다.
“후지는... 괜찮아요.”
“괜찮다구요?”
“음,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 패트릭이 말을 꺼내길 주저하는 것처럼 들려서, 지혁은 귀를 한 번 후볐다. 어떤 상황에서든 본인이 맞다고 생각하는 말은 무조건 하고 마는 사람이 패트릭인데. 심지어 탬파베이 소속인 지혁을 코앞에 둔 자리에서도 보스턴이 지구 우승을 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그였는데.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음.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네. 솔직하게 말하죠.”
“네.”
“데뷔전, 8이닝 노히트, 몸에 맞는 공 하나. 최고구속 98마일. 투구수 88개. 승리투수에요.”
아찔하게도 쳤네. 사고. 지혁은 속으로만 되뇌었다.
“보스턴 지역지에 슬슬 기사가 나갈 때가 됐는데. 기자들이 난리도 아니었어요. 감독도 그렇고.”
“헤드라인은 뭐라고 뽑힐 것 같아요?”
“아마, 뉴 린스컴이 보스턴에 도래했다.”
“예이, 예이. 당연히 그렇겠지.”
순간적으로 두 사람 사이의 핸드폰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지혁은 그가 겨우내 보아왔던 후지의 투구를 떠올렸고, 패트릭은 지혁이 후지의 투구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다.
“패트릭.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이제 당신을 잘 알고 있으니까.”
“뭘 안다는 소리입니까?”
“지금쯤, 아마,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면서 한 쪽 주먹을 꽉 쥐면서 서성거리고 있겠죠. 스스로도 모르는 버릇이려나? 어쨌든. 티는 안 내지만, 조급할 겁니다. 그러니 당신의 감정을 존중하는 거죠.”
“흐응.”
패트릭의 말대로다. 후지가 잘 던졌다는 소식은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지혁과 같은 입장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와 계약을 한, 막내 동생 같은 후지가 잘 던져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다른 하나는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특급 투수의 등장에 대한 공포감과 승부욕이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전화를 쥐지 않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가 있었다.
“... 정답. 영상통화 하는 줄 알았네요.”
“당신이랑 하루 이틀 붙어 있었던 건 아니니까. 어쨌든, 신경 쓰고 있을 게 분명하지만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여긴 세일럼이지 보스턴이 아닙니다. 후지가 던진 상대도 트리플 A의 타자들이지 메이저리그 타자들이 아니고. 마음을 좀 편하게 먹어요. 당신이 다른 투수들한테 조언하는 것처럼. 그대로요.”
“난 그런 조언 같은 거 안 하거든요.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는 말 같은 건 안 해요. 그냥... 음, 괜찮다고 말하죠.”
“내가볼 땐 대책 없이 괜찮다고 하는 것보다는 내 방식이 더 나은 것 같네요. 어쨌든 후지의 투구는 후지의 투구고, 당신은 당신의 투구를 하기 바랍니다. 홈 시리즈 잘 해요. 난 보스턴에 들렀다가 돌아가겠습니다.”
“그러죠.”
평소 같았으면 바로 끊었어야 할 패트릭이 잠시 지혁의 답을 기다리다가 통화를 끊었다. 더없이 냉정한 패트릭이 나름대로 지혁을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8이닝 노히트라...”
누군가의 앞길을 제대로 가로막을지도 모르겠네. 지혁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토론토 타자들의 스윙 영상이 끊임없이 반복재생 되고 있는 태블릿으로.
*
- Baseball is coming! 개막전. 크리스 아처의 12K에도 불구하고 토론토에 3-5 패배.
크리스 아처가 2년 연속 홈 개막전 선발로 등판한 탬파베이는 토론토에게 첫 경기를 내주었다. 아처는 3회 두 번째 타자부터 6회 첫 번째 타자까지 9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아내는 기염을 토했지만, 수비의 집중력이 아처를 도와주지 못했다.
게다가 토론토의 선발 투수 케빈 스트로먼에게 8이닝 동안 1점 밖에 뽑아내지 못한 타선도 무기력했다. 9회말 새로 합류한 디커슨의 투런 홈런으로 따라가는 듯 했지만 결국 패배.
그리고 2차전 선발은 지혁이었다. 좌완 투수에게 악몽을 선사하는 팀,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상대다. 물론. 지혁이 노히트 노런을 잡아냈던 그 팀이기도 했고.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