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 토론토 킬러. >
2016시즌 메이저리그 베이스볼, 오프닝시리즈 2차전.
탬파베이 레이스 vs 토론토 블루제이스.
탬파베이 레이스 선발 라인업
1. 로건 포사이드 2B
2. 로건 모리슨 1B
3. 에반 롱고리아 3B
4. 코리 디커슨 DH
5. 데스먼드 제닝스 LF
6. 브래드 밀러 SS
7. 스티븐 수자 주니어 RF
8. 케빈 키어마이어 CF
9. 행크 콩거 C
P. 문지혁.
토론토 블루제이스 선발 라인업
1. 케빈 필라 CF
2. 조쉬 도날드슨 3B
3. 호세 바티스타 RF
4. 에드윈 엔카나시온 DH
5. 트로이 툴로위츠키 SS
6. 크리스 콜라벨로 1B
7. 마이클 선더스 LF
8. 조쉬 톨리 C
9. 라이언 고인스 2B
P. R.A. 딕키.
*
토론토와의 오프닝시리즈 2차전. 플레이 볼이 선언되기 직전. 연습구 대여섯 개를 던지며 손끝의 감각을 확인한다. 불펜에서와 똑같다. 지혁은 마운드에 올라서 한 바퀴를 빙글빙글 돌았다. 3층 관중석이 조금 비긴 했지만, 그래도 개막 시리즈라 그런지 탬파베이치고는 상당히 많은 관중이 모였다.
“매번 새롭네.”
일부러 소리를 내어 중얼거려 본다. 이 조그만 언덕 안에 올라오면 수많은 감정이 스치곤 한다. 하지만 새로운 시즌의 개막이 가져다주는 설렘은 아무리 해를 거듭해도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아주 잠깐 감상에 젖어 있는데, 심판이 지혁을 바라보며 손을 쭉 뻗는다. 또 다시 메이저리그에 선발로 자리잡는 데 성공했다는 새삼스러운 감정을 온전히 느낄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써드!”
토론토의 선두타자 필라는 초구부터 과감하게 배트를 돌렸다. 공이 맞는 순간 내야에서 일제히 콜이 울렸고, 3루수로 나선 롱고리아는 강습 타구를 백핸드로 건져올렸다. 원바운드로 강하게 선상을 공략하는 타구였지만. 너무나도 여유가 넘쳐서 마치 쉬운 펑고 타구처럼 보일 정도였다. 경쾌한 송구가 1루수 모리슨의 미트에 박히며 첫 번째 아웃카운트가 적립된다.
[ 공 한 개로 이번 시즌 첫 번째 타자를 잘 처리해낸 문. 지난 시즌의 돌풍을 이어갈 수 있을지가 관심사입니다. ]
[ 탬파베이 입장에서는 문이 작년처럼 던져 주는 활약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2년차 선수들이 루키 때에 비해서 잘 던지는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문의 페이스가 떨어지면 탬파베이의 페이스도 그만큼 떨어지는 셈이죠. ]
[ 이렇다 할 전력 보강에 실패한 탬파베이니까요. 지난 시즌의 전력이 그 성적을 다시 내 줘야만 조금 더 나아갈 수 있겠죠. 타석에는 2번, 도날드슨. 지난 시즌 아메리칸리그 MVP에 빛나는 타자입니다. ]
도날드슨은 엄청난 타자가 되었다. 기록지에 드러난 숫자로만 봐도 그 대단함을 알 수 있다. 지난 시즌 .297에 41홈런, 그리고 147타점. 방망이를 들고는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리그를 폭격했고, 수비에서도 골드글러브 급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작년의 토론토가 대약진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던 선수.
‘어마어마하네.’
새삼 다시 느껴진다. 저번 시즌 마지막 경기, 한 타석에서 마주쳤을 때의 도날드슨과는 다르다. 시즌 개막 때 집중하지 않고 있는 선수는 어디에도 없다. 게다가 노히트 노런을 헌납했던 투수와 다시 만났으니, 정말 있는 힘껏 끌어올려 놓은 것이다.
지혁은 초구를 던지기 전에 싸인이 엉킨 척 하며 발을 한 번 뺐다. 원정 쪽 대기 타석에서 기다리고 있는 바티스타, 엔카나시온, 그리고 벤치의 툴로위츠키와 콜라벨로. 30홈런 이상을 때려낼 수 있는 우타석에 서는 선수들이 줄줄이 들어설 것이다. 이들 모두 도날드슨과 마찬가지로 집중력을 한껏 끌어올려 놨을 것이고.
‘이럴 때 역으로 가야지. 이럴 때.’
지혁은 깊게 한 호흡을 쉬어 보며 초구를 꽂아넣었다. 바깥쪽 높은 코스, 존에 아슬아슬하게 들어간 패스트볼. 도날드슨이 배트를 내려다 말았다. 93마일까지 나온 패스트볼이 도날드슨의 몸통 높이의 존을 관통했다. 본능적으로 한 마디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후우. 다행이다.”
[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아내는 문. ]
[ 도날드슨이 초구를 놓친 것 같네요. 방금은 도날드슨이 아주 좋아하는 코스였는데요. ]
[ 그렇군요. 바깥쪽 높은 코스. 지난 시즌 저 코스로 들어온 공에 대한 타율이 무려 .471이었습니다. ]
[ 탬파베이의 입장에서는 저 코스로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던져도 안 될 겁니다. 하하. 방금은 운이 좋았어요. ]
초구를 도날드슨이 좋아하는 코스로 선택한 건 약간의 도박이 섞인 배합이었다. 물론 마스크를 쓴 행크 콩거가 아니라 지혁이 주문한 코스였다. 1번타자 필라가 초구를 쳐서 아웃된 마당에, 도날드슨을 비롯한 토론토의 타자들은 최소한 공 하나는 지켜보고 덤빌 것이기 때문이다.
노히트를 내줬던 투수와 다시 만난다는 건 필요 이상으로 신중해진다는 의미를 뜻하곤 했다. 적어도 지혁이 경험했던 야구 인생에서는 그랬다.
“스윙! 스트라이크 투.”
초구를 도날드슨이 좋아하는 코스에 태연하게 넣었으니, 그 다음 공은 그곳에서부터 살짝 빠져나가는 싱커다. 도날드슨의 배트가 따라나왔지만 싱커는 이미 좌타자가 들어서야 할 위치까지 빠져나간 뒤였다.
이후 볼 두 개는 유인구. 원바운드가 될 정도로 낮게 떨어지는 커브 하나와 타자의 앞발 쪽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 하나. 스트라이크 존 낮은 쪽을 재고 있는 도날드슨의 시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공들을 던졌다.
[ 카운트 투 앤 투. 다섯 번째 공을 던지기 위해 싸인을 교환하고 있는 탬파베이의 배터리. ]
[ 정석대로 왔거든요? 높은 공 두 개로 카운트를 잡은 다음에 낮은 공 두 개로 주의를 분산시켰죠. 정석대로라면 여기서 높은 쪽 패스트볼로 승부를 들어가야 합니다. ]
[ 그런 교과서적인 피칭을 할 수 있을지 한 번 보시죠. 던집니다. 루킹 삼진! 존 한복판에 떨어지는 커브로 지난 시즌 MVP 도날드슨을 돌려세웁니다! ]
[ 와우. 저도 당했네요. 하하하. 완전히 의표를 찔렀습니다. 하이 패스트볼을 노리고 있던 도날드슨의 타이밍을 제대로 빼앗아 버렸습니다. ]
오케이. 완벽했다. 하이 패스트볼을 노리게 만든 뒤에, 정중앙으로 떨어지는 커브로 타이밍을 휘둘렀다. 완벽하게 생각대로 되며 1회가 시작되고 있다.
도날드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어진 타석의 바티스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손에 잡힐 것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바티스타의 몸쪽에 박힌 싱커가 그 무릎을 휘청거리게 만들며 평범한 유격수 땅볼을 유도해냈다.
[ 세 타자 삼자범퇴! 지난 시즌 마지막 경기부터 시작해서 10이닝 연속으로 노히트를 기록합니다. 문의 시즌 시작이 아주 좋습니다. ]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지혁을 향해 일제히 마중 나오는 벤치의 선수들과 코치들. 다같이 맞춰 입은 하얀 유니폼과 굳은살 박인 손들이 정겹다. 다시 시즌 모드로 돌아오는 데는 한 경기도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
그 이후로도 지혁의 피칭은 흠잡을 데 없었다. 3회까지 퍼펙트로 9타자를 처리했고, 4회 들어 도날드슨에게 볼넷 하나를 줬지만 바티스타에게 병살타를 유도해내며 이닝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토론토를 상대로 이어진 13이닝 연속 무피안타 행진이 끝난 건 아쉽긴 했지만, 5회도 병살타 하나를 포함해 세 타자로 막아냈다.
[ 좌완 투수에게 강한 토론토가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문이 토론토를 완전히 요리하고 있습니다. ]
[ 믿기지 않네요. 이 정도면 토론토를 상대로 성적이 비정상적으로 좋다고 봐야겠습니다. 토론토 선수들에게 한 번 물어봐야겠네요. 문을 상대로는 왜 이렇게 못 치는 건지 말이죠. ]
[ 6회로 들어섭니다. 하위타선으로 들어가죠. 7번, 선더스. ]
선더스는 조금 특이하게도 좌완에게 꽤나 강한 좌타자다. 그래서 좌타자임에도 오늘 경기 선발로 출장했다. 하지만 첫 타석에는 도망가는 슬라이더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두 번째 타석인 지금도, 지혁의 타이밍에 전혀 손을 못 대고 있었다. 원인은 지혁의 볼 배합에 있었다.
마스크를 쓴 행크 콩거는 작년에 휴스턴 애스트로스에서 뛰었다. 팀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되는 포수인지라 시즌 초반에는 당분간 투수의 생각에 맞추는 리드를 하라는 지시를 받은 채였다. 그래서 어제의 아처도 그렇고, 오늘의 지혁도 그렇고. 투수가 포수를 이끌고 있었다.
‘와우.’
콩거는 스트라이크 선언을 받은 3구를 포구하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솔직히, 내심 엄청나게 감탄하고 있었다. 마운드의 어린 투수는 마치 토론토의 타자들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한 구종과 코스 선택으로 강타자들의 스윙을 유유히 피해다녔다.
“스트라이크! 투!”
제구가 살짝 빗나가 두 개의 볼을 먼저 주고 시작했으면서도 몸쪽을 과감하게 찌르는 싱커 두 개로 곧장 카운트 균형을 맞춘다. 3구와 똑같은 위치를 파고들어온 싱커를 꽤 오래 쥐고 있으면서, 콩거는 떠올렸다. 작년 휴스턴에서 받았던 댈러스 카이클의 공을.
‘빼다 박았네. 공의 스피드도, 싱커의 스타일도. 그리고 경기 운영도.’
물론 커터와 투심, 체인지업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카이클과 세 번째 투구의 레퍼토리는 달랐지만, 전체적인 피칭 스타일은 카이클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다.
타악.
완벽하게 빗맞은 선더스의 타구가 시프트를 걸고 있던 3루수 롱고리아의 앞에 툭 떨어진다. 가벼운 대쉬와 송구로 다시 아웃카운트를 쌓는다. 마운드의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로진을 만지고 있다. 콩거는 잠시 마스크를 벗고 일어났다. 몸이 부르르 떨리며, 살짝 소름이 돋으려 했다. 댈러스 카이클은 지난 해 사이영 상을 수상한 투수라는 걸 기억해 낸 것이다.
‘얘는 대체 뭐야? 대체 어디서 이런 놈이 튀어나온 거지?’
계속해서 홈플레이트에 앉아 공을 받으면서도 이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카이클은 아주 오랫동안 휴스턴에서 공을 들여 키운 유망주였다. 반면 문이라는 한국인 투수는 재작년까지만 해도 들어본 적도 없던 투수였다. 그런 투수가 사이영 상 수상자와 너무도 비슷한 투구를 펼쳐보이고 있다.
“Fuck.”
이어진 타석의 톨리가 초구 패스트볼을 흘려보내고는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해가 안 되지?”
“시끄러워.”
콩거는 플레이트에 앉아 톨리를 슬쩍 도발했다. 정작 이해가 안 되는 건 본인이었다. 어째서 88마일짜리 패스트볼이 초구에 한복판으로 들어온 것인지. 이제는 맞으면 맞는 거라고 생각하고는 전적으로 지혁의 피칭에 의존하고 있는 수준이 되었다. 지혁의 공이 들어오면 미트가 쫓아가는 수준이 되었다.
딱!
2루수 앞으로 힘없이 굴러가는 타구를 때린 톨리가 방망이를 땅에 집어던지며 1루 쪽으로 뛰어나간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톨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콩거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해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그냥 믿고 따라가야 한다. 카이클과 호흡을 맞추던 그 때처럼.
*
“문. 아쉽게 승리를 놓쳤습니다. 하지만 오늘 투구는 정말 좋았는데요. 토론토를 상대로 유독 성적이 좋은 것 같아요. 토론토가 조금 상대하기 편한가요?”
“그럴 리가 있나요. 타선을 한 번 보세요. 하하. 왼손 투수의 입장에서 모든 메이저리그 팀들 중에 가장 상대하기 싫은 팀이 바로 토론토입니다.”
“오늘도 7이닝을 막아내며 안타 세 개와 볼넷 두 개밖에 주지 않았어요. 지난 경기부터 시작해서 16이닝 동안 한 점도 주지 않은 투수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토론토와는 자주 마주쳐야 하고, 가장 강한 타선을 보유한 팀이니까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분석도 열심히 했구요. 나름대로 경기 전에 준비하고 대비한 내용의 피칭을 하려고 했는데, 오늘 잘 통한 것 같네요. 그 덕분인 것 같아요.”
“오늘 9회에 결승 홈런을 때려냈던 트로이 툴로위츠키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어요. 문의 공을 상대하다가 바뀐 투수 파쿼의 공을 상대하는데 너무 쉬워 보였다고 하던데요. 들어보셨나요?”
“아뇨.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뭐...”
지혁은 턱을 살짝 긁으며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파쿼를 도발하기 위한 멘트라고 받아들이고 싶네요. 누가 잘 던지고 누가 못 던졌다고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오늘 파쿼는 운이 없었습니다. 제구가 잘 된 공이었는데도 홈런을 맞았어요. 이런 날도 있는 거죠. 저도 그런 경우가 많으니까.”
“흠.”
조금이라도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기사를 내 보려던 기자 하나가 씁쓸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잠시만요, 기자 여러분. 잠시만요. 문. 여기까지 할까요?”
직원 중 하나가 기자들 사이로 슬쩍 들어와 지혁에게 귀엣말을 했다. 하지만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더 할게요.”
“평소에는 인터뷰도 많이 안 하더니, 올해는 마음을 조금 다르게 먹었나요?”
“작년 투표 때 데인 게 있어서요. 미디어 관리도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아아.”
구단 직원은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뒤로 뺐다. 그리고는 다시 기자들 사이를 피해 빠져나갔다. 지혁은 기자들을 향해 몸을 돌리며 인터뷰를 계속해 나갔다. 기자들의 물음은 끊이질 않았고, 10분 가량을 더 기자들 사이에 파묻혀 있다가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헤이, 문. 오늘은 졌는데도 인기 폭발이네?”
기자들이 빠져나가고 난 뒤 짐을 정리하는 데 이미 퇴근할 준비를 마친 카살리가 다가와 어깨를 툭 친다. 지혁은 그저 웃었다. 속으로만 대답할 뿐이었다.
‘이게 에이스의 숙명이지. 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