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05화 (106/204)

< 105 - 에이스 대접. >

토론토와의 첫 경기에서 비록 승리는 기록하지 못했지만 7이닝 무실점으로 깔끔하게 시즌을 출발한 지혁은 두 번째 경기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전에서도 호투를 이어갔다. 7이닝 동안 잡아낸 삼진이 11개. 멘데스는 삼진 세 개를 당하며 고개를 젓기도 했다. 그 날의 싱커는 단언컨대 메이저리그에 올라와서 가장 날뛴 공이었다.

하지만 좌익수 쪽에서 나온 실책 하나가 모든 걸 어질렀다. 7회 노아웃 상황에서 짧은 외야플라이를 뒤로 빠트린 제닝스의 실책으로 살아나간 주자는 희생타 두 개를 엮어 결국 결승점이 되어 홈에 들어가 버렸다. 불펜으로 올라온 투수들은 지혁이 남긴 주자를 깔끔히 불러들여 줬고. 7이닝 3실점 1자책점의 패전.

심지어 세 번째 경기인 보스턴과의 홈경기는 8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는데도 승리를 얻지 못했다. 불펜으로 나선 콜로메가 동점홈런을 맞으며 승리를 날려먹었다. 첫 승의 달콤함은 네 번째 경기에 가서야 맛볼 수 있었다. 네 번째 경기인 양키스 전을 마치고 난 상태의 평균자책점은 무려 0.89. 하지만 성적은 1승 1패에 불과했다.

“한국에서는 벌써 난리가 났어요. 에이스 대접 제대로 받는 중이라고. 에이스 대접이 무슨 말인 줄은 알죠?”

“당연하죠. 저도 뉴스 봐요. 어쨌든 그건 엄청 좋은 말만 가져오신 것 같은데요.”

“네. 백 마디 욕 속에 하나 있는 좋은 반응이죠. 헤헤.”

낮 경기 등판을 앞둔 지혁은 점심을 먹자마자 햇빛 쏟아지는 캠든 야즈의 한 그늘에 나와 있었다. 취재 차 캠든 야즈를 찾은 예은이 무안한 듯 웃었다. 예은을 비롯한 한국의 기자들이 지혁을 우루루 따라나와 담장에 기대어 해를 피하고 있는 모습이 조금 걸리적거리기도 했다.

저 사람들이 내는 기사들은 오로지 한국의 팬들을 위한 기사이고, 그렇기 때문에 언론이 탬파베이의 팀 사정과 부진한 동료들에 대해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디어가 자극하면, 시청자가 반응한다. 한국의 팬들은 시즌 개막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지만 탬파베이라는 팀에 반감을 키워가고 있다. 물론 팀 동료들이나 코치들이 한국의 언론까지 찾아보는 건 아니지만. 한국의 반응이 지혁의 마음까지 편하게 해 주지는 못했다.

“아, 저기 온다. 호석아!”

“안녕하세요, 예은 누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지혁과 비슷한 덩치의 호석은 기자들이 익숙한 듯 연신 고개를 꾸벅거리며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아이, 무슨 선배야. 오랜만에 봤다고 딱딱하게 구네, 또. 얘 봐요. 기자님들 앞이라고 이러는 거.”

지혁은 고등학교 때 청소년 대표팀 상비군에서 한 번 만났던 호석과의 관계를 까맣게 잊을 뻔 했다. 무려 30년도 더 된 일이었다. 하지만 호석이 ‘오랜만에 봤다고’라고 말하는 순간 그 때의 기억이 확 되살아났다.

지혁과 두 살 차이가 나는 김호석은 당시 청소년 대표팀의 주전 외야수로 맹활약한 바 있었다. 물론 지혁은 불펜에서 구원 등판하는, 짬으로 따지자면 주전자나 날라야 할 선수였고. 1학년이었던 지혁은 상비군에서 잔심부름을 하다가 대회 엔트리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낙마했었다.

기억이 안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때 대표팀 명단에는 다저스의 류희주도, 피츠버그의 구진호도 있었다.

“선배는 니가 내 선배 해야지. 메이저리그 선배.”

“아, 형. 그러지 마세요. 오그라들게.”

“진짜야. 내가 이렇게 웃으면서 농담할 처지가 아니다. 넌 여기서 신인왕도 받은 놈이잖아.”

호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얼굴에 쓴.웃.음. 이라고 쓰여져 있는 듯한 미소. 그는 힘겨운 봄을 보내고 있었다. 스프링캠프에서 말도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부진했던 그에게 볼티모어의 홈 팬들은 개막전 행사에서 긴 야유를 뿜어댔다. KBO에서 스타 대접만 받던 호석에게는 지독하게도 낯선 대접이었을 것이다.

4월이 다 지나가는 동안 그가 선발 출장한 게임은 딱 3경기. 그동안 들어선 타석이 17타석이 전부. 지금쯤 포기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포기는 언제나 생각했을 것이다. 패전처리로 뛰던 시절 지혁이 그랬던 것처럼.

“형. 컨디션은 좀 어떠세요?”

“컨디션은 여기 온 다음부터 나빴던 적이 없어. 공에 적응이 안 돼서 그렇지.”

“오늘 나오세요?”

“아니. 너 자식, 왼손이잖아. 우리 감독님은 왼손 상대로는 나 절대 안 써 줘. 이미 결정 났어.”

“쇼월터? 그 양반도 소문 자자해요. 세상에 그런 고집이 또 없다고.”

“하하.”

기자들 앞에서 소속팀 감독의 뒷담화를 하기는 좀 그랬는지 호석이 멋쩍게 뒷머리만 긁는다.

“자. 사진부터 좀 찍을게요. 오늘 너무 더워서, 원. 아직 봄인데 왜 이렇게 더워?”

“그래요. 우리 사진부터 빨리 찍고 얘기해요.”

사진기를 목에 매단 기자들이 우루루 몰려들었다. 아직 이런 광경이 조금 낯선 지혁과는 달리 호석은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대화를 나누는 듯한 포즈, 훈훈하게 악수를 하는 포즈 등을 여러 컷 찍고 나서야 기자들의 시선이 조금 멀어졌다. 그제야 조금 조용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싶어지자, 지혁은 은근히 호석에게 몸을 기댔다.

“형. 들어쳐야 돼요.”

“뭐?”

“들어쳐야 된다구요. 스윙을, 제가 타자가 아니라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어퍼 스윙을 해야 해요. 무조건 공을 띄워 보내야 돼요.”

“그게 말처럼 되냐. 난 그런 건 둘째 치고 공이나 좀 봤으면 좋겠다. 타석에 들어가야 뭐라도 하지.”

“형. 지금처럼만 하면 충분해요. 기회는 분명히 와요. 리카드 걔 저랑 마이너리그에서 같이 뛰었거든요. 제 친구긴 한데 그래도 걔 지금은 지 실력보다 엄청 잘하고 있는 거예요.”

지혁은 낮게,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김호석이 메이저리그에서 결국 실패하고 만 이유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도 한국에서 난리를 피워댔었으니.

“들어쳐서 외야로 보내세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장타를 노리셔야 해요. 그리고 스윙은 무조건 세게. 여기는 삼진 많이 먹는 건 아무도 뭐라고 안 해요. 타구는 세게, 멀리. 이게 포인트예요.”

“... 그래?”

“네. 안타 아무리 많이 쳐도 이치로 정도 되지 않으면 별로 의미가 없어요. 살아남는 방법은 무조건 장타. 형 말마따나 제가 미국 물은 먼저 먹었으니까. 제 말대로 한 번 해 보세요.”

호석은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지혁도 고개를 끄덕여 줬다.

“형. 주제넘은 것 같지만 시즌은 길어요. 오래 보세요. 기회 금방 올 거예요.”

“그래. 고맙다. 한 번 해 볼게.”

“오늘 경기 끝나고 밥이나 한 번 먹어요. 오랜만에.”

“그러자. 근처에 한식당 있어.”

“제가 연락드릴게요.”

“고맙다. 오늘 잘 해.”

“네. 형도. 힘내세요.”

경기 시작 전, 호석과의 짧은 만남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지혁이 호석을 다시 본 것은 경기가 시작되고 난 후 볼티모어의 벤치에서 계속 연습 스윙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

“와. 진짜 내가 이 팀 경기는 복장이 터져서 못 보겠다. 복장이 터져서!”

광고가 나가는 동안, 한국의 스포츠 채널의 중계 담당 PD와 해설자, 캐스터가 한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1대1 스코어인데 경기가 빨리 끝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렇다고 점수가 팍팍 나는 것도 아니고. 허허허. 그렇지?”

“그래도 문지혁이는 확실히 대단해. 어떻게 이런 투수가 나왔나 싶어요, 위원님.”

“맞아. 멘탈이 좋아. 오늘 탬파베이 잔루가 몇 개지?”

“지금까지... 보자, 11개네요.”

“잔루가 11개인데 점수가 한 점 났어. 그런데 마운드에서 하나도 흔들리는 모습이 없잖아. 이게 대단한 거야, 김 PD.”

시즌 첫 번째 한국인 맞대결이 될지도 모른다는 꿈을 안고 야심차게 중계를 편성했지만, 예상대로 호석이 선발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지혁의 등판 자체로도 이슈몰이가 되기는 하지만 요새 탬파베이의 기세로는 이슈몰이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건덕지가 없었다. 한국의 키워드는 오직 하나였다.

‘에이스 대접’.

지혁이 등판한 경기에서 탬파베이의 타자들은 이상하게 힘을 못 썼다. 수비에서도 실책이나 실책성 플레이가 잦아서 아슬아슬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투구는 압도적이고 공은 충분히 좋은데, 경기에서 이기지를 못하고 있는 패턴이 반복된 것이다. 한 달 내내.

오늘의 볼티모어 전도 마찬가지였다. 지혁은 5이닝을 막아내는 동안 매니 마차도에게 맞은 솔로홈런 한 방을 제외하고는 완벽한 피칭을 하고 있었다. 삼진 7개를 잡아내는 동안 볼넷은 1개만 내줬고, 빗맞은 안타 하나만 내주었다.

명실상부한 팀의 좌완 에이스가 되었다고 증명하는 피칭이었다. 단체로 홈런을 노리는 듯한 볼티모어에게 높은 패스트볼과 커브를 기가 막히게 섞었고, 마치 노리는 공을 알고 있다는 듯한 느낌으로 농락하는 피칭을 선보이는 중이다.

반면 볼티모어의 선발인 우발도 히메네스는 특유의 들쭉날쭉한 제구력으로 보는 사람의 억장을 다 무너뜨리는 롤러코스터 피칭을 했다.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출루하겠는데 대체 왜 저렇게 휘두르는지 모르겠네. 와, 내가 미쳐.”

김 PD의 넋두리는 김 PD만의 것이 아니었다. 야구를 지켜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히메네스는 5회를 던지는 동안 투구수 112개를 기록했다. 탬파베이의 타자들이 얻어낸 사사구만 해도 9개였다. 5이닝 동안 9개.

하지만 그렇게 쌓아놓은 주자가 홈에 들어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루상에 주자를 두세 명씩 쌓아놓고 결정적인 순간 포크볼에 삼진을 당하는 탬파베이의 타자들은 단체로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보였다.

[ 기븐스의 7구! 아아. 루킹 삼진. 루킹 삼진으로 돌아서는 로건 모리슨. 투 아웃 만루가 됩니다. ]

[ 놓쳤어요. 바깥쪽 공인데... 제구가 잘 된 공은 아닌 걸로 보였거든요. 지금 저 공에 스윙이 나오지 않은 것은 정말 아쉽네요. ]

[ 과연 탬파베이는 문지혁 선수에게 득점 지원을 해줄 수 있을까요. 투 아웃 만루. 타석에는 브래드 밀러가 들어섭니다. ]

6회초에도 기회를 잡았지만, 탬파베이는 원 아웃 만루의 기회를 살려내지 못했다. 랭카스터 감독이 모자를 집어던지며 더그아웃을 빠져나가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고, 스윙 삼진을 당한 브래드 밀러가 헬멧을 내동댕이치는 모습도 반복해서 화면을 타고 흘러나왔다.

“씨부랄! 야구 못 보겠다. 암 걸린다고, 암 걸려!”

김 PD의 목소리도 편집실 안을 쩌렁쩌렁 울렸고 말이다.

*

- 문지혁, 시즌 2패째... 평균자책점 1.31인데 이래도 되는가?

- 아! 홈런. 7회 역전 홈런에 울고 만 문지혁. 6이닝 2실점 호투했으나 패전.

4월의 마지막 경기에서 문지혁이 시즌 2패째를 떠안았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홈 경기장인 캠든 야즈에서 열린 이날 경기에서 문지혁은 6이닝 동안 삼진 8개를 잡아내고 피안타를 딱 3개만 허용하는 호투를 펼쳤지만, 솔로 홈런 두 방에 아쉬운 눈물을 흘렸다.

더욱 아쉬운 것은 문지혁의 호투를 지원해주지 못한 타선의 빈약함이었다. 문지혁이 마운드를 책임진 6회까지의 공격에서 탬파베이는 무려 16명의 타자가 출루했으나 그 중 들어온 점수는 단 한 점에 불과했다. 1회와 2회, 4, 5, 6회에 모두 잔루 만루를 기록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 (하략)

- 야 시발, 이게 야구냐? 이게 팀이냐?

? 진심으로 얘네 크보에 데려다 놔도 팀 타율 3할 안되겠다. 진짜 사람새끼가 한명도 없음.

? 아니 대체 마이너리그에 선수가 얼마나 없으면 저딴 새끼들을 계속 쓰는 거임?

? 마이너리그도 똑같이 답없음.

? 브래드 밀러 저새끼 오늘 삼진 3개 잔루 8개ㅋㅋㅋㅋ 한 타자가 잔루 8개 이거 말이 되는 기록임?

- 문크라이... 방어율 1.31에 1승2패...

? 1.31에 2패ㄷㄷ 기록으로 보니 체감이 확 되네.

- 내가 뭐라도 할 테니까 지혁아 제발 팀 탈출해라. 이 팀에서 야구하는 거 진짜 눈뜨고 못보겠다.

? 아고라에 3백만명 서명하면 이적한다는데 사실인가요?

선발투수들의 평균자책점이 메이저리그 1위인 탬파베이는, 아메리칸리그 꼴찌의 타격지표와 꼴찌에서 세 번째에 올라 있는 불펜 지표 때문에, 4월 성적이 9승 13패에 그치고 말았다.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5개 팀 중 5위.

아아. 혹독한 4월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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