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06화 (107/204)

< 106 - 전화위복. >

5월. 5할 승률에서 조금 못 미치는 성적. 여전히 메이저리그 하위권을 맴도는 타격 성적이지만, 그래도 선발 라인업에 오르는 타자들 중 1할 대를 치는 선수는 두 명으로 줄어들었다. 아주 미세하지만 나아지고 있는 것도 보였다.

6월. 몇몇 클래스 있는 선수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 중에서도 에반 롱고리아는 유독 힘을 내고 있었다. 선발투수들이 내색하지는 않아도 마음고생을 꽤 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는 것처럼. 작년과 재작년에 부진했던 롱고리아는 허리 통증에서 벗어난 이후로 자신의 원래 모습을 되찾는 중이다.

7월.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에 돌입할 때 탬파베이의 성적은 36승 54패. 사실상 이번 시즌은 와일드카드 진출을 포기했다. 올스타에 한 명도 못 보낸 건 당연한 일이었고.

물론 경기 내용은 훨씬 좋아지기는 했다. 롱고리아가 힘을 내니 앞뒤의 타자들이 우산 효과를 받았고, 2루 주전을 확고히 차지한 로건 포사이드가 2할9푼 언저리를 꾸준히 유지해줬다.

콜로라도에서 데려온 코리 디커슨은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장타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브래드 밀러, 로건 모리슨. 이적해 온 초반 쉽게 적응하지 못했던 밀러와 모리슨은 2할 초중반대로 타율을 끌어올렸고, 홈런만큼은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예상 범주 안에 들어가 있던 일입니다.”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 동안, 체임 블룸은 이례적으로 MLB 네트워크 방송에 출연했다. 토크쇼도 아니고 인터뷰도 아니고 청문회도 아닌 것이 대체 무슨 컨셉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혁과 패트릭도 TV 앞에 앉아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중이다.

“우리는 작년에 예상보다 좋은 성적을 거뒀습니다. 선수들의 분투 덕분이었죠. 그건 분투였어요, 마이크.”

“그렇군요.”

“야구를 할 때 언제나 좋은 모습을 보일 수만은 없는 겁니다. 이것도 사람이 하는 운동이니까요. 잘 될 때도, 안 될 때도 있는 거라고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린 랭카스터 감독을 선임하고, 새로운 선수들을 수급하면서 이 과정을 언젠가는 한 번 거칠 거라고 예상했었죠. 그게 작년이 아니라 올해가 된 것 뿐입니다.”

“작년에 비하면 너무 드라마틱한 하락이라는 지적이 있어요. 공격은 아닙니다, 체임. 어떻게 생각하세요?”

“매우 안타까운 일이에요. 많은 팬 분들이 아시겠지만, 우리 구단은 돈이 없습니다. 감당할 수 있는 재정의 한계 안에서 최대한 효율이 좋은 선수들을 영입하려다 보니,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는 도박을 해야만 합니다. 구단은 여전히 효율이 좋은 선수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지만, 그 선수들은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다고 증명된 선수들은 아니죠. 활약해 줄 수 있는 확률도 당연히 그렇고요.”

“으흠. 스몰마켓 팀의 고질적인 문제라는 말씀이시군요.”

“다른 스몰마켓 팀을 보죠. 전부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적은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말이라도 못 하면.

내심 전력 보강에 소극적인 탬파베이 프런트에 불만을 갖고 있던 지혁은 헛웃음이 나왔다. 선수의 입장에서 프런트를 바라보는 시각은 언제나 비슷할 수밖에 없다. 어느 팀에 있더라도 항상 승리하기를 원하고, 항상 우승을 목표로 하는 건 누구나 다 같으니까.

프런트라고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스몰마켓 팀의 비애는 언제나 비슷한 양상을 띌 수밖에 없다. 올해만 봐도, 팀에 부족한 장타력을 메우기 위해 데려온 브래드 밀러와 로건 모리슨, 코리 디커슨이 홈런 수를 증가시켰지만 그만큼 수비력이 떨어졌다.

그동안 제이크 맥기를 축으로 버텨 온 불펜도 소위 말하는 ‘로또 긁기’가 2년 연속 실패하며 성적이 처참해졌다.

“체임의 말은 안타깝지만 전부 사실이에요.”

패트릭은 그나마 양 쪽의 입장을 다 이해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탬파베이에 걸려 있는 예산 안에서는 한 해에 3백만 달러를 줘야 하는 불펜 투수도 영입하기 힘들죠. 그러니 일 년을 메이저리그에서 버틸 수 있는 불펜을 주워서 써야 하는 위험부담을 항상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결과는...”

“그만. 나도 알아요. 동료들을 공격하고 싶지는 않네요.”

“뭐, 그렇다면.”

한국의 팀에서도 한 때 뛰었다던 다나 이블랜드가 선발 투수들의 승리를 날려먹은 게 몇 번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블랜드를 대체할 수 있는 좌완 불펜이 전혀 없다는 게 더 비극이었고. 선수들과 코치들, 그리고 이블랜드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실력이 안 되는 걸 가지고 타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번 시즌은, 그냥 경험을 쌓는 차원이라고 생각해요.”

“하. 경험이라.”

“당신은 메이저리그에 올라와서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잖아요?”

“... 네. 뭐.”

가끔은 패트릭이 정답을 말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야구에서 밥 먹듯이 흔하게 일어나는, ‘루징 팀’에서의 시즌을 보내는 일. 너무나 흔하고 당연한 일이지만, 회귀한 생에서까지 이런 시즌을 보낸다는 게 마뜩찮았다. 게다가 주어진 시간도 점차 짧아지고 있고.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한 시즌이었다.

*

8월. 보스턴의 후지 미유타가 메이저리그에 드디어 데뷔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이슈를 몰고 다니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팀 린스컴이 떠오르는 폼, 팀 린스컴이 떠오르는 공, 팀 린스컴이 떠오르는 구속으로 메이저리그에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기 시작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정도의 도핑테스트와 인터뷰를 빙자한 청문회도 필수적으로 거쳐야만 했고.

그래도 패트릭과 후지가 심혈을 다해 고른 통역사는 일을 제대로 하는 편이었다. 처음 데뷔했을 때 들이닥쳤던 의문에 꼭 필요한 내용에만 대답하고, 나머지는 그냥 무시해버렸다.

라쿠텐 시절 평범하고 깔끔하기 그지없던 폼으로 던지다가 야구선수로서의 재능이 없다고 판단한 후지는 같은 언더사이즈 투수인데도 메이저리그를 호령했던 팀 린스컴의 투구폼을 따라 하기 위해 1년 내내 2군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인터뷰가 모든 걸 종결시켰다.

‘어떻게 이런 폼으로 던지게 되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렇게나 압도적인 공을 던지다니!’가 중요한 반응일 뿐이다. 그 외의 질문에는 일절 대답하지 않고 그저 경기에만 집중하는 후지의 모습에 의문들은 점차 사그라져 갔고, 환호가 늘어났다. 시간이 해결해 준 셈이다.

함박웃음을 지은 건 보스턴뿐이다. 기존의 프라이스, 포셀로에 후지까지 투입된 보스턴의 투수진은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며 승승장구해 나갔다. 전반기의 보스턴이 지난 2년에 비해 대약진을 거두었다면, 후반기의 보스턴은 문자 그대로 승승장구였다.

프라이스, 포셀로, 후지가 등판한 경기에서 80% 이상의 승률로 승리를 거두었고 E-ROD와 벅홀츠가 등판한 경기에서는 50%의 확률로 승리를 가져갔다. 압도적인 승률로 일찌감치 동부지구 1위를 점찍었다.

그리고 8월 말. 뉴욕 양키스와의 홈경기. 지혁의 시즌 26번째 등판.

“으악!”

지혁의 외침이 트로피카나 필드를 순식간에 고요하게 만들었다. 디디 그레고리우스의 잘 맞은 라인드라이브 타구가 마운드 쪽으로 향했고, 투구 동작을 마치고 수비 동작으로 전환하기도 전에 지혁의 글러브 낀 오른쪽 손목을 강하게 때려버린 것이다. 지혁은 곧장 마운드에 드러누웠고, 교체되었다.

첫 부상이었다. 새로운 삶을 살면서 얻은 첫 번째 부상. 공을 던지는 왼팔이나 어깨, 허리, 다리 같은 투구할 때 사용하는 부위가 아닌, 오른손에 입은 부상. 곧장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병원에서 수많은 차트들을 찍고 검사하는 와중에도, 닥터 로즈베리의 심각한 표정을 보는 와중에도. 타구에 직격당한 오른쪽 손목보다 머리가 훨씬 더 아팠다.

‘신에게 맡겨야 하나? 아니면 그냥 재활해야 하나?’

언젠가 부상을 당하면 어떻게 해야겠다고 세워둔 계획이 없지는 않았다. 신이 부상을 낫게 해 주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치료기간의 두 배를 필요로 했다.

“문. 오른 손목 골절입니다. 수술하셔야 해요.”

“수술하고 재활하는 데 얼마나 걸리죠? 다시 완벽한 상태로 돌아오기까지요.”

지혁은 책상 건너에 앉은 로즈베리의 입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오래 걸리면 큰일이다. 제발!

“글쎄요. 이 정도라면 한 3개월?”

“아. 다행이네.”

“다행...? 부상당하고 와서 내 앞에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인생에서 처음이네요. 그래도 깔끔하게 부러졌어요. 다행이라면 다행이네요. 뼛조각이 어디로 튀지도 않았고, 뭉개져서 으스러지지도 않았고. 여기 엑스레이 좀 봐요. 깔끔하게 세 동강.”

“말씀이 살벌하신데요?”

“아주 수술하기 좋게 똑 부러졌다는 의미에요. 수술도 무리 없이 잘 될 거예요. 이건 수술을 잘못하기가 더 어려워요. 재활도 뭐, 재활이랄 것도 없어요. 오른손을 쓰지만 않으면.”

“다음 시즌에는 영향을 줄까요?”

“이 세상 모든 부상은 항상 영향을 주죠. 몸이란 건 그런 거니까요.”

“그런 원론적인 이야기 말고요.”

“하! 좋아요.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손목이 부러져서 경기 중에 실려 온 사람이 아니라, 그냥 건강검진이나 받으러 온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얘기해 줄게요. 깔끔할 거예요. 투구에 아무런 영향도 안 줄 거고, 지금처럼 팽팽 잘 돌아갈 거예요. 됐나요?”

“그래요. 바로 그 말을 원했어요. 땡큐. 미스 로즈베리.”

“미스 아니거든요. 닥터라고 불러줘요.”

로즈베리가 왼손에 낀 반지를 한 번 흔들어보이고는 다른 차트를 띄워냈다.

“아직 안 끝났어요, 문. 이건 왼팔이에요. 팔꿈치를 한 번 봐요.”

“어디가 팔꿈치죠?”

“여기요.”

지혁이 보기에는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로즈베리는 이곳저곳을 짚어가며 현재 지혁의 왼팔이 어떤 상황인지 브리핑을 해 줬다. 전문적이고 어려운 단어는 쉽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었다.

“이 차트를 봤다면, 부상을 안 당했어도 내가 투구를 말렸을지도 몰라요. 당신은 운이 참 좋네요.”

“팔이 위험한 상태라는 거죠?”

“네. 휴식이 필요해요. 인대가 탄력을 많이 잃었어요. 인대의 탄력은 쉽게 회복되지는 않지만, 당신이 어차피 공을 던지지 못할 3개월에 겨울 휴식까지 포함하면 그래도 많이 나아질 거예요.”

“싱커를 많이 던진 탓인가요?”

“모든 공을 던질 때마다 영향을 받겠지만, 네. 싱커 때문에 더 도드라지게 무리가 갔을 테니까.”

“쉬면 낫는 건 맞습니까?”

“투구를 하는 것 보다는 확실히 낫죠. 쉬어야 해요. 쉬어야만 하고.”

마치 병원에 처음 방문한 어린아이처럼, 지혁은 계속 물었고 로즈베리는 계속 대답했다. 선수로써 한 번의 인생을 더 살고 있는 지혁은 아주 사소하고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집요하게 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의사를 상대할 때만큼은. 그 자리에 앉아 로즈베리와 30분이 넘게 문답을 나눈 지혁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맙습니다.”

“수술 스케줄은 구단을 통해 연락이 갈 거예요. 일단 오늘은 그 캐스트 풀지 말고 집에서 대기하세요. 아무 일도 하지 마세요. 아무 일도. 그냥 누워서 TV나 보다가 잠드시면 돼요.”

“하하. 걱정 마세요.”

지혁은 호탕하게 웃으며 주치의실을 나섰다.

“오늘 시즌 아웃이 된 사람이 웃어도 되는 거야?”

로즈베리의 이해할 수 없는 중얼거림이 귀에 들렸지만,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

“신님.”

“불렀나? 왜, 부상을 치료하려고?”

“아뇨. 손목 부러진 것 따위에 선수 생명을 6개월이나 걸 수는 없죠.”

오히려 이건 전화위복이었다. 어차피 지구 꼴찌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시즌, 두 달 정도 빨리 전열에서 이탈한 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조금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휴식이 필요한 시점에 휴식을 갖게 된 일이었다. 오른손은 부상을 전부 치료하고 난 후에 투구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쉬면 될 일이었다. 중요한 왼팔에 이상신호가 보일 조짐이 있었고, 그걸 해결하기 위한 휴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오히려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이다.

“그래? 그럼 날 왜 불렀는가? 후지도 나를 자주 찾아서 요새는 좀 바쁘다네. 흐흐.”

“이번 시즌 평가를 좀 듣고 싶어서요.”

“자네의?”

“네.”

“평가라고 할 것도 없지 않은가? 흐흐. 팀이 꼴찌잖아.”

신은 농담이랍시고 한 말이었지만 지혁은 진지했다.

“꼴찌 팀의 에이스로 충분했냐, 이 말이죠. 그러니까... 신님이 지금까지 지켜 본 투수들 중에, 역사적으로 봤을 때.”

“흐흐. 자네.”

신이 모처럼 클클거렸다. 마치 처음 만났던 날처럼.

“새로운 뭔가를 원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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