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 전화위복(2). >
신이 흥미로워하는 것을 보며 지혁은 어깨를 살짝 으쓱거렸다.
“새로운 뭔가? 아뇨. 새롭지는 않고. 여기서 더 변화구를 추가해서 레퍼토리를 바꾸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어요. 있는 것만 잘 던져도 충분하죠. 있는 것만. 잘.”
“흐흐. 말이야 쉽지.”
“지금 제가 던지는 공을 더 잘 던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게 하나 있어요. 지금처럼 기교와 볼 배합으로 승부를 보는 것도 좋지만. 지금의 공을 더 잘 살리려면...”
“패스트볼이군.”
신이 말을 끊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시즌을 던지면서 확실하게 알았어요. 지금 던지는 패스트볼은 전생에서 던지던 최고의 공이랑 비슷해요. 아마 제가 던질 수 있는 공 중 가장 좋은 공인 것 같은데. 저번 생에서 던졌던 제일 좋은 공이랑 지금이랑 비슷하니까요.”
“으흠. 타당한 판단이네. 단기간에 많이 늘었지.”
“3년 만에 여기까지 왔으니까, 많이 단축했네요. 하하. 이제 시행착오를 하지는 않으니까.”
지혁은 오른손에 칭칭 감아 놓은 기브스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이제부터는 더 좋아져야 할 시간이에요. 그리고 그 가장 기본이 바로 패스트볼이죠.”
기본 중의 기본. 투구의 원론. 빠르고 강한 패스트볼.
지금 지혁이 던지는 싱커는 타자의 배트를 충분히 불러낼 수 있을 만큼 위력적이다. 타자의 배트에 공을 맞춰 주면서 수많은 그라운드볼을 만들어낼 수 있다. 던지면 던질수록 공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었고, 메이저리그에서 풀타임 2년차를 맞은 올해의 공은 지난해보다 더 좋아졌다.
지혁은 여전히 그라운드볼 유도 능력이 매우 좋은 투수였다. 리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니까. 싱커는 스트라이크 존 낮은 쪽을 공략하기에 가장 좋은 무기가 되었다.
후지가 던지는 커브를 발전시킨 공도 메이저리그에서 써드 피치로 던지기에 손색없는 공이 되었다. 스트라이크 존 높은 쪽을 노리는 패스트볼과 조합된 커브는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공이었다.
작년 후반기부터 수없이 던지면서 손끝에 감각을 익혔고, 단순히 낙폭이나 제구를 컨트롤하는 것을 넘어 볼 배합의 이점도 어느 정도 파악했다. 팀이 일찌감치 포기한 시즌을 보내는 동안, 지혁도 여러 가지 실험을 할 수 있었던 덕을 조금 봤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이 두 가지 공의 효과를 더욱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빠른 패스트볼이 필요하다는 게 지혁의 결론이었다.
평균적으로는 90~91마일 정도, 힘써 던지면 92마일, 정말 전력투구를 하면 93~94마일 내외를 오가는 지금의 패스트볼은 물론 느리다고는 할 수 없는 공이다. 특히 좌완투수라는 걸 감안하면. 지금의 스피드도 메이저리그 평균 정도는 된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 손에 꼽을 수 있는 투수들 중에서 지혁과 비슷한 구속을 가진 투수는 단 한 명. 휴스턴의 댈러스 카이클밖에 없다. 그러나 카이클의 올해는 처참했다. 기교파 투수의 한계라는 건 그렇게 갑자기 드러나곤 한다. 제구가 아주 약간이라도 흔들리면 얻어맞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혁도 두 시즌은 괜찮았지만, 언제 올해의 카이클처럼 무너질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보다 빠른 공이 필요했다. 선수들의 구속은 갈수록 빨라지고 있고, 선발 투수들의 패스트볼 평균 구속이 93마일에서 94마일까지 나오는 세상이 왔다. 메츠의 노아 신더가드는 100마일을 심심찮게 던지고, 96마일 이상을 던지지 못하는 투수가 오히려 더 희귀해지기 시작할 정도다. 그런 시대에 들어섰다.
“빠른 패스트볼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필요한 거죠.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흐흐. 본인의 공에 본인이 만족할 수 있느냐의 문제겠지.”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모자라다. 이게 제 심정이에요. 확신이기도 하고.”
“그래?”
“네. 확실해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보다 빠른 패스트볼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걸 가장 극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게 바로 후지의 데뷔전에서였다. 후지는 보스턴의 역사적 라이벌인 뉴욕 양키스와의 데뷔전에서 7이닝을 소화하며 삼진 13개를 잡아냈다. 그 중 한가운데 꽂은 99마일짜리 패스트볼로만 5개를 잡아냈다.
처음 보는 폼이 낯설어서? 그럴 리가 없다. 린스컴의 투구폼은 양키스의 모든 타자들이 숱하게 보고 겪은 폼이었다. 제구가 완벽해서? 그것도 아니었다. 후지는 무식할 정도로 존을 좁게 썼다. 그냥 존 안에다 때려 박은 피칭이었다. 스피드와 구위. 그것이 후지가 성공한 유일한 이유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2마일이면 돼요. 누구의 공을 달라고 하지도 않을게요. 패스트볼 구속 2마일만 올려주세요.”
“좋네.”
“대가는요?”
“2년으로 하지. 쿠팩스에게도 1마일에 1년을 받았으니.”
“2년...”
“아까워 말게. 자넨 그 2년을 내고 얻었어야 할 후지의 커브를 소모값 없이 얻었잖은가.”
또 다른 내기라도 걸까 생각했지만, 지혁은 이내 포기했다. 신인왕을 두고 경쟁했던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다. 뭔가 내기를 한다고 하면, 이번엔 경쟁해야 할 상대들이 리그의 수위권 선수들이 될 터다. 차라리 중압감과 부담감에서 벗어나 깔끔하게 구속을 올려놓는 게 마음이 훨씬 편할 것 같았다.
“좋아요. 2년. 평균구속 2마일입니다.”
“자네 선수 인생이 몇 년 남았지?”
“올해로 9년. 2년 소모하면 7년 남네요.”
지혁은 씨익 웃었다. 7년이면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작년에는 15승. 올해는 어려운 와중에도 9승. 여기에 더 빨라진 패스트볼, 그리고 더 시너지 효과를 받을 싱커와 커브. 이 공이라면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 될 것이다.
“자. 이제부터는 마음 놓고 쉬어야겠어요. 어차피 손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으니까... 정말 오랜만이네요. 이런 휴식은.”
“잘 쉬는 것도 중요하지. 흐흐. 잠시 주어진 휴식을 즐기게나.”
8월 말. 오른손이 부러진 채로 일찌감치 시즌을 마감했다. 그 어느 때보다 3개월 이후가 기다려지는 휴가가 찾아왔다.
*
오른손 손목 골절은 여러모로 이득이 되었다. 투구에 영향을 주는 손이 아닌데다가 조용히 무리가 가고 있던 몸에 휴식을 준다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섰다.
첫째. 구속이 상승한 것에 대한 명분이 생겼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 팔꿈치와 어깨에 가해지고 있던 부담을 털어내고 재활 과정에서 근육량을 늘려 힘을 붙였다고 하면 가뿐하게 끝날 일이 된 것이다.
투구가 가능하다는 평가가 내려지고 난 뒤 처음으로 던져 본 공은 그 어느 때보다 짜릿했다. 평소 같았으면 88마일에서 90마일 정도 나왔어야 할 정도의 힘으로 던진 패스트볼이 92마일이 찍힌 것을 보고는,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시즌이 끝난 이후이고 부상에서 막 돌아온 직후의 투구여서 전력피칭을 하지는 않았지만, 몸을 제대로 만든 뒤 전력으로 공을 뿌리면 어떤 공이 날아갈지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혁에게 훨씬 더 크고 실질적인 도움이 된 두 번째 이유. 바로 WBC 대표팀의 호출을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 것이다. 이건 애초에 지혁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문제였다.
한국인 메이저리거들 중 누구도 소집에 응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한국의 팬들과 야구 관계자들의 신경이 곤두섰다. 다저스의 류희주도 부상이고, 텍사스의 최성수도 부상 위험을 이유로 대표팀 소집에 곤혹스러운 스탠스를 취했다. 김호석과 배병후는 메이저리그 적응과 생존을 위한 소집 거부라는 명분이 있었다. 그리고 저들은 그 동안 국가대표팀에서 헌신해온 바가 있으니, 팬들도 어느 정도 이해해주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지혁은 국가대표팀 소집을 거부하기 껄끄러운 부분이 있었다. 갑자기 등장한 젊은 스타플레이어. 게다가 메이저리그 신인왕까지 수상한, 한국 팬들 입장에서는 반드시 대표팀에 불러야만 하는 선수. 그런 선수가 지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입은 부상과 재활 과정은 WBC 대표팀을 합법적으로 거절할 수 있는 가장 큰 명분이었다.
“문. 한국에서 또 연락이 왔는데.”
“똑같이 대답해 줘요. 누누이 말했지만 너무 단호해도 안 되고, 너무 여지를 둬도 안 돼요.”
“이쪽 사람들은 왜 이렇게 질척거리는지 모르겠네. 한 번 안 된다고 했으면 좀 이해를 하지.”
“너무 그렇게 말하지 마요. 저쪽도 나름대로 급하니까.”
“흐응.”
“인터뷰는 어떻게 할래요? 한국에서 메이저리그를 중계하는 공식 채널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는데. 현재 상태를 파악하고 싶다는데요.”
“음. 직접 나가서 말하는 게 좋을까요?”
“크게 도움은 안 될 것 같은데. 내셔널리즘이 강한 국가에서는 특히.”
“그럼 힘들다고 하죠, 뭐.”
“이번 겨울은 아주 조용히 넘어가는 걸로 합시다. 모든 일정을 다 정리하고, 아주 조용히. 밖에는 그냥 치료와 재활에만 전념하는 걸로 알리고. 실제로도 좀 쉴 필요가 있어요. 당신은.”
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그럴 생각은 없어요. 이번 겨울에는 싱커랑 커브 제구를 더 다듬을 생각이에요.”
“하. 안 됩니다. 좀 쉬...”
“아! 그러고 보니 후지는요? 후지는 WBC 나간대요?”
“... 아뇨. 걔는 이번 월드시리즈 진출을 놓친 것 때문에 아직도 열 받아 하고 있어서. WBC 같은 건 생각도 안 하고 있던데.”
“아직도? 하긴... 아깝긴 했지. 후우. 어쨌든 요새는 모처럼 마음이 좀 편하네요. 꽤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술술 풀리네. 이제 날이 조금 풀리면 몸을 끌어올리는 일만 남았네요. 하하. 싱커랑 커브 제구를 더 날카롭게 잡으면, 내년에는 진짜로 일 한 번 낼 수 있겠어요.”
패트릭은 한숨만 내쉬며 도리질을 쳤다.
“당신은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완전히 루저 같은 느낌을 줬었는데.”
“루저라구요? 내가?”
“완전히 그랬죠. 엄청나게 다크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고. 쓸데없이 감만 좋다고 하고. 주위를 돌아볼 여유 같은 것도 없어보였고. 아주 전형적으로 인생의 루저 같아 보였었습니다.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하하. 너무 직설적인데요?”
하지만 꽤 재밌는 평가였다. 패트릭을 처음 만났을 때라. 패전처리로 결국 은퇴하고 난 직후였으니까. 게다가 새로운 삶을 얻고 나서도 방출당한 직후였으니까. 지혁도 모르는 새 그런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요? 지금은?”
“지금은 조금 메이저리그 투수다워졌다고 해야 할까. 처음 몽고메리에 들어가서 투구를 할 때는 싱커를 잘 써먹기 위해 조바심을 냈었고. 싱커가 자리를 잡고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고 난 후에는 써드 피치가 부족한 것 때문에 자신감이 없어 보였고. 또 어느 샌가 커브를 익히더니 그 다음에는 갑자기 신인왕에 연연하면서 혼자 전전긍긍했잖습니까.”
“그랬나?”
“엄청나게. 옆에서 볼 때 당신은 매 년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인상을 줬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부상을 당하고 나서부터는 어느 정도 여유가 좀 생긴 것처럼 보입니다.”
패트릭이 지혁의 인상을 연도별로 나누어 줄줄 읊자, 새삼스럽게 지금까지의 일이 떠올랐다. 패트릭의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선수 생명을 소진해 가면서 재능을 얻고, 재능을 얻은 만큼 단기간에 결과를 내야만 한다는 압박에 시달려 왔던 것도 분명히 맞는 말이었고. 지혁 스스로는 몰랐지만, 옆에서 보기에는 꽤나 조급한 것처럼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흠... 지금 생각해 보면 작년 시즌이 여유를 좀 준 것 같기도 하네요.”
“이해합니다. 탱킹 팀에서 시즌을 보내는 건 최악의 경험 중 하나지만, 그런 긍정적인 효과도 있죠. 몇몇 선수들은 꼴찌 팀에서 한 시즌을 보낸 이후 급격하게 성장하기도 합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마음을 비우고 야구를 하다 보면, 실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니까.”
작년, 2016시즌. 승수보다 패수가 훨씬 더 많은 씁쓸한 한 시즌이었지만, 패트릭의 말처럼 오히려 여유를 갖고 야구를 할 수 있는 시즌이었기도 했다. 그 동안 가져왔던, 단기간에 성적을 내야만 한다는 강한 부담에서 벗어났던 한 시즌이었다.
물론 그런 시즌을 다시 보내라고 한다면 당장 트레이드를 해 달라고 요청할 것이다. 선수 생명도 얼마 남지 않은 마당에 다시는 그런 루징 시즌을 보낼 수는 없지.
그런 시즌에서 탈피하기 위해서. 조금 더 압도적인 피칭을 하는 투수로 거듭나기 위해서 패스트볼에까지 투자했다. 그러니 이번 시즌은 반드시 성적을 내야만 한다. 이전 시즌과는 완전히 다른 한 해가 되어야 한다.
지혁이 세워 둔 최소한의 목표는 신인왕을 받았던 풀타임 첫 시즌의 성적. 15승 이상의 승수에 3점대 이하의 평균자책점. 그 성적을 목표의 최소치로 잡아두었다.
“이번 시즌은 다를 겁니다. 나도 당신이 말한 그 ‘몇몇 선수들’ 중에 한 명이라는 걸 보여줄게요.”
“하하.”
패트릭이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렇게만 해 주면, 나도 좋은 소식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겁니다. 성적을 내요, 문. 그 외의 것들은 내가 담당하니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혁은 대답했다.
“돈 워리. 성적 냅니다. 더 압도적인 투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