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 커브의 비밀은? >
탬파베이에 입단하고 나서 벌써 네 번째 스프링캠프에 합류했다. 선수들도, 코칭스탭들도, 그리고 프런트의 사람들도 올해는 눈빛이 다르다. 작년 처절했던 실패는 탬파베이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예전 연두의 표현을 빌리면, 탬파베이 2.0 시절. 프리드먼과 매든의 시대를 보내면서 언제든 컨텐딩에 도전할 수 있는 전력과 시스템을 갖추었었다. 몸값이 저렴하고 효율이 좋은 선수들을 시장에서 영입해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거두었고, 훌륭한 유망주를 천천히 준비시키며 꾸준히 메이저리그에 올려보냈다.
그 시스템은 메이저리그의 모든 스몰마켓 팀을 통틀어 가장 훌륭하게 운용되었고, 시스템적으로 움직이는 탬파베이는 최소한 중상위권 이상을 매 년 유지하는 팀이었다.
그런 전통과 관습이 작년에 처참하게 무너졌다. 시즌 초반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탬파베이는 중반에 채 다다르기도 전에 일찌감치 선두권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중반부에 치고 나가지도 못했다. 동력을 잃은 팀과 함께 한 시즌을 보내는 일. 탬파베이의 구성원들에게는 낯선 경험이었다.
그래서인지 선수들의 눈빛에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이번 스프링캠프는 단순히 몸을 끌어올리는 기간이 아니라, 작년에 무너졌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준비 기간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랭카스터의 연설도, 체임 블룸과 에릭 닌더의 격려도, 스프링캠프에 초대된 선수들의 마음가짐도 모두 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
자존심 회복. 정상 탈환.
“전력에 비하면 허황된 목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허황?”
스프링캠프 첫 날부터 랭카스터를 인터뷰하던 기자 한 명이 랭카스터의 사나운 기세에 몸을 움찔거렸다. 랭카스터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대답했다.
“전력은 까 봐야 아는 겁니다. 그리고 목표는 항상 높게 잡아야 하는 거고.”
“감독님. 올 시즌 선발 로테이션을 어떻게 꾸리실 예정이십니까? 드류 스마일리가 시애틀로 트레이드되면서 로테이션 두 자리에 구멍이 났는데요.”
다른 기자 한 명이 황급히 끼어들어 화제를 돌렸다.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경기에 나가는 순서는 컨디션에 따라서 달라질 겁니다. 스프링캠프에서부터 스스로를 증명해야 할 선수들이 많으니까. 특히 올 시즌은 어리고 재능 있는 선수들이 많아서 기대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블레이크 스넬 같은 선수들을 기용할 거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스넬도 기회를 받아야 하는 선수고, 경기에서 던지면서 더 성장해야 하는 선수입니다. 그리고 다른 선수들 중에도 눈여겨 볼만한 선수들이 있고.”
“그게 누구죠?”
“지금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어쨌든 우리 팀 로테이션에서 확실하게 자리를 보장받은 선수는 딱 두 명밖에 없습니다. 크리스 아처. 지혁 문. 알렉스 콥은 부상 후유증이 있어 신중하게 다룰 겁니다.”
기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랭카스터의 말을 받아썼다. 기자들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랭카스터가 굉장히 전투적이고 열의에 불타고 있다는 것을. 일반적인 팀들이 스프링캠프에서 여유 있게 시작하는 것과는 다르게, 기합이 제대로 들어가 있는 행동과 말투였다.
굳이 랭카스터를 인터뷰하는 기자들뿐만이 아니라 선수들이나 코치들에게 붙어서 녹음기를 들이대고 있는 기자들도 모두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
2017 메이저리그 팀별 프리뷰. 탬파베이 레이스.
- 작년, 만년 꼴찌 시절인 탬파베이 데블레이스 시절 이후로 최악의 시즌을 보낸 탬파베이 레이스. 70승에 간신히 턱걸이한 성적은 지금까지 언제나 다크호스의 위치에 있었던 탬파베이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몇몇 전문가들은 프리드먼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원래 자리’를 찾아갔다고 혹독하게 지적하기도 하지만.
하지만 올해의 탬파베이 레이스는 각오가 남다르다. 작년에 새로 팀에 들어오며 적응이 필요했던 선수들도 어느 정도 적응을 마쳤고, 랭카스터의 인터뷰에 언급된 것처럼, 유망주들도 의욕이 넘친다.
그러나 의욕이 있다고 성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탬파베이의 부문별 성적을 짚어보면 문제는 명확하다. 리그 최하위인 컨택률, 그리고 더 이상 붕괴하기도 어려운 불펜.
전체적으로 봤을 때, 투수진은 지난해보다 오히려 나빠졌다. 랭카스터 감독은 두 명의 선발만이 로테이션을 확정했다 말했지만, 세 번째 선발투수인 알렉스 콥과 네 번째인 제이크 오도리찌도 충분히 로테이션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기대할 수 있는 한계가 명확한 투수들이다. 부상 이후 이전의 모습을 찾지 못한 콥과 안정적이지만 성장이 정체된 듯한 오도리찌는 업사이드를 기대하기 힘든 투수다.
더 큰 문제는 다섯 번째 선발투수와 불펜이다. 일단은 탬파베이 팜 내 최고의 유망주인 블레이크 스넬이 5선발 자리를 꿰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스넬이 무너질 경우, 탬파베이의 5선발 후보는 은근히 부실하다.
FA로 영입했지만 부상을 안고 있는 네이선 이오발디, 스윙맨을 오가며 선발 경쟁을 하는 에라스모 라미레스와 맷 안드리스 정도가 후보군이지만, 이들 역시 큰 가능성을 걸기는 어려워 보인다.
불펜은 더 심각하다. 알렉스 콜로메와 브래드 박스버거를 제외한 모든 선수들이 의문부호를 갖고 있다. 엑세비어 세데뇨 한 명만이 좌완인 것도 문제다. 문제는 이 빈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선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탬파베이가 쓰고 있는 돈은 이미 구단 재정 상황에 비해 최대치에 이르러 있고, 더 이상 시장에서 좋은 불펜을 살 수 없는 상황이다.
모든 부분에서 저번 시즌보다 나아져야만 하는 탬파베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개선이 시급한 부분은 바로 공격력이다. 지난 시즌 홈런 개수는 많았지만 부족한 타율과 출루율 때문에 고생했던 선수들 ? 코리 디커슨, 브래드 밀러, 로건 모리슨, 스티븐 수자 주니어 ? 같은 선수들의 각성이 필요하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선수들의 부상을 관리하는 것이다. 지난 시즌 중반부터 케빈 키어마이어가 팀을 이탈한 이후, 탬파베이 외야의 생산성은 공격과 수비 양 측면에서 모두 극적으로 퇴보했다. 만약 올해도 비슷한 입지의 선수들, 그러니까 키어마이어나 롱고리아 같은 선수들이 부상으로 팀을 이탈하게 된다면 작년의 참사를 다시 겪게 될지도 모른다.
... (하략)
*
외부의 분위기는 여전히 비판적이고 냉소적이다. 많은 기자들, 전문가들, 팬들이 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년과 전력에서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내부의 분위기는 그 비판적인 시선에 저항하고자 하는 의욕으로 불타고 있다. 특히 어린 선수들에게서 강한 의지가 보였다. 작년에 부진했던 선수들도 마찬가지고. 샬럿 스포츠 센터의 전통적으로 화기애애하고 느긋했던 스프링캠프가 올해는 마치 전지훈련이라도 온 것처럼 뜨겁다.
지혁도 그 속에 녹아들었다. 작년 9월부터 야구를 못 했으니, 다섯 달 만에 정식으로 공을 던지는 중이다. 물론 1월부터 개인적으로 폼을 끌어올리기는 했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운동을 하는 건 꽤 오랜만이다. 포수 자리에 앉아 있는 선수들도, 마운드의 살짝 높은 감각도.
뻐엉!
“와우. 95마일.”
“공 좋아졌죠?”
“그래. 어떻게 이렇게 구속이 뛰었어?”
“푹 쉬어서 그렇죠, 뭐.”
힉키는 스피드건을 내려다보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전력으로 한 번 던져봐. 딱 세 개만.”
“코치님도 참. 하하.”
제구를 잡기 위해 힘을 빼고 컨트롤에 집중하는 연습을 하던 지혁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최고구속이 얼마나 나올지 설레는 마음을 안고, 마운드 위에서 모든 힘을 다해서 공을 뿌렸다. 물론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제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존에서 빗나가는 공이었지만...
“97!”
“뭐? 97?”
크. 이 맛이구나. 공을 손에서 놓는 순간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지며 미트를 찢을 것처럼 박히는 맛이.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도, 미트에 공을 꽉 쥐고 있는 포수의 모습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혁의 눈에는 여전히 마운드에서부터 홈플레이트로 뻗어나가는 패스트볼의 잔상이 남아있었다.
겨우 2~3마일 차이라는 녀석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다. 1마일의 차이가 야구장에서는 어마어마하다. 구속을 키우기 위해서 몸을 비대하게 만들고, 아무리 근육을 키워도 인간의 상승폭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마다 다른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누구나 다 죽어라 노력을 한다. 그리고 지혁은 전생에 그 한계를 톡톡히 맛봤었다. 진짜 모든 힘을 다 해도 94마일 이사을 기록해본 적이 없었는데. 신을 만난 게 좋긴 좋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된 거야?”
“하하. 너무 많이 묻지 마세요.”
그 다음 공은 96마일, 그리고 그 다음 공은 97마일. 전력으로 뿌리면 이 정도 구속까지 낼 수 있다. 이제 지혁도 엄연히 강속구 투수가 된 것이다. 메이저리그에서도 강속구로 분류될 수 있는 투수. 이 속도를 경기 내내 유지할 수는 없겠지만, 반드시 필요한 순간에 타자들의 예상보다 빠른 공을 집어넣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무기가 될 터였다.
“자. 다시 커브부터!”
지혁은 글러브를 팡팡 치며 포수를 닦달했다. 빠른 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시너지는 모두 다 얻어야 했다. 그 첫 번째 과제는 커브의 제구력을 더 가다듬는 일이었고. 평소의 스프링캠프 때보다 훨씬 과하다고 할 정도로 공을 던졌다. 던지면 던질수록, 제구는 아주 조금씩 좋아진다. 아주 조금씩.
*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그래. 반갑다. 컨디션이 좋아 보이네?”
“아아.”
국가대표팀의 WBC 해설을 맡은 중계 위원인 김승우가 탬파베이의 훈련장을 찾았다. 지혁은 훈련을 마치고 승우에게 다가가 모자를 벗고 깍듯하게 허리를 굽혔다.
“쉰 기간이 좀 오래 돼서 오늘은 오버페이스를 조금 했네요.”
지혁은 혹시라도 WBC 대표팀에 차출되는 것을 끝끝내 거부한 것을 두고 한 마디를 들을까봐 최대한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게다가 승우의 옆에는 따라붙는 카메라와 방송국의 PD, 작가들도 있었다. WBC 문제로 괜히 한국의 팬들을 자극할 필요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몸 생각해, 임마. 너 부상당했을 때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희주도 골골대고 있는데 너까지 다치면 안 되지.”
“네. 조심하겠습니다.”
“여긴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WBC 2라운드 경기장 답사 차원에서 미국에 왔다가 잠깐 들렀다. 나도 미국은 오랜만이라서 조금 더 즐기다가 돌아가려고.”
“아. 대표팀...”
지혁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카메라 쪽으로 슬쩍 돌아갔다.
“실전 감각도 떨어져 있고, 아직 컨디션도 잘 안 올라와서... 또 팀에서도 안 보내 주겠다고 못을 박았구요.”
“야, 나도 다 알아. 괜찮아. 사정이 다 있는 거지. 괜찮아. 자꾸 변명하려고 그러면 더 이상해져.”
“네.”
“그냥 메이저리그에서 네 야구나 잘 해. 그거면 되니까. 그게 국민들한테 큰 위로가 되는 거야.”
김승우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말을 내뱉자, 한 편에서 작가 한 명이 손에 든 종이뭉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으로 작게 동그라미 싸인을 보내기도 했다.
“오케이? 그럼 이제 그만 찍죠? 대충 건질 그림은 다 건졌고, 여기 오디오도 안 들어갈 거 아냐. 안 그래요, 박 PD님?”
“그래. 카메라 커트할게요.”
박 PD라는 사람이 들고 있던 6mm 카메라의 빨간 불이 사라지자, 김승우가 지혁의 허리를 툭툭 치며 웃었다.
“야. 이제 오프 더 레코드다. 너, 대표팀 합류 안 한 거 잘 한 거야.”
“예?”
“이번 대표팀은 힘들겠더라.”
목소리를 잔뜩 낮춘 김승우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이번 대회도 망했어. 애들 수준도 너무 떨어지고, 수준도 떨어지는 놈들이 의욕도 없어. 겉멋만 잔뜩 들어가지고... 어휴. 그러니까 관심은 너한테 더 쏠릴 거야. 한국에서는 뭐 나쁜 소리도 좀 나오고 하겠지만. 엿이나 먹으라고 하고 여기서나 잘 해. 쓸데없는 데 감정 쏟지 말고.”
“아,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알겠습니다.”
“됐어. 알겠다고 할 것도 없고 모르겠다고 할 것도 없어. 그냥 메이저리그 선배가 너한테 말해 주는 거야. 편하게 들어. 괜히 대표팀에 마음 쓸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어차피 못 올라갈 팀이니까. 그 쪽에 합류해서 몸 상하는 것보다 여기서 천천히 끌어올리는 게 너한테 훨씬 좋은 일이 됐어.”
지혁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작년에 커브가 엄청 좋아졌던데. 요새도 커브만 던지냐?”
“네. 제구에 신경 쓰고 있습니다. 커브는 몰리면 장타를 많이 맞아서요.”
“그렇지. 그래도 내가 선수 시절 때는 커브 좀 던졌는데. 너보다 내가 잘 던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조언 하나 들어볼래?”
“어유, 그럼요. 물론이죠.”
“커브 제구를 잡으려면 릴리스포인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머리야.”
“머리요? 볼 배합이나, 타이밍이나 이런 것들은 보통 벤치나 포수가 잡아줘요.”
“아니, 임마. 그 머리 말고. 니 머리. 공 던질 때의 니 머리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느냐. 이게 중요하다고.”
“...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