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 조언자. >
김승우는 직접 야구공을 집어들어 투구자세를 취해 보이며 말했다.
“내가 메이저에서 뛸 때 막 은퇴하려던 베테랑 한 명이 말해준 거야. 자, 봐.”
김승우는 가볍게 스트라이드를 뻗었다. 그리고 그가 치켜든 오른팔이 글러브에서 멀어지고, 가장 멀리 떨어졌다가 이내 채찍처럼 휘둘러져 나왔다. 그는 팔이 가장 정점에 다다랐을 때 스윙을 정확하게 멈췄다.
“여기서 머리는 어디를 보고 있지?”
“포수 쪽이죠.”
“맞아. 모든 선수들은 여기서 홈플레이트를 바라보고 있어야 하잖아. 그리고...”
아주 짧은 동작만을 취했을 뿐인데 이미 상체가 앞으로 넘어가고 하체의 중심도 앞쪽으로 순식간에 옮겨갔다. 이미 힘은 다 전달되었다. 이제 손가락 끝으로 때리는 일만 남았다. 지금까지의 투구 동작은 너무 당연해서, 뭐가 문제라는 건지 알아챌 수 없을 정도다.
“릴리스포인트가 여기라고 치자고. 그리고 이렇게 릴리스에서 공을 놓는 순간. 이 순간에 머리가 어떻게 되는 것 같아?”
“음. 앞으로 쳐지겠죠?”
“그래. 선수들마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앞으로 나가는 힘이 전달되니까 머리도 자연스럽게 아래를 향하게 되지. 특히 너는 조금 더 그런 편이더라.”
어정쩡하게 투구 동작에서 멈춰 있던 김승우가 몸에 힘을 쭉 빼고는 간단한 스윙으로 투구 동작을 마무리지었다. 그의 오른팔이 앞으로 쭉 휘둘러지고, 반원을 그린 팔이 완전히 스윙을 끝냈다. 그리고 그 팔 스윙이 마무리되는 순간에야 김승우의 머리가 사선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내 머리를 잘 봤어?”
“네.”
“어때?”
“음... 늦게 움직인다는 느낌? 완전히 스윙이 끝날 때까지 딱 고정되어 있는 느낌이네요.”
“맞아. 역시 메이저에서 구르는 놈들은 다르네. 한국에 있는 녀석들은 아무리 말해줘도 모르던데.”
김승우는 환하게 웃으며 쥐고 있던 야구공을 지혁에게 건네줬다.
“알잖냐? 내가 선수시절일 때 제구가 안 좋아서 고생 많이 했던 거.”
“하하.”
“몬트리올에서 뛸 때지. 조이 에이셴이라는 선수가 있었어. 그 사람도 뭐 엄청 잘 던진다거나 뚜렷한 이름을 남긴 투수는 아니었는데. 제구 하나는 진짜 좋았던 선수였거든. 그 사람은 은퇴 날짜만 재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내가 가서 물어봤어. 어떻게 해야 제구가 그렇게 좋을 수 있냐고.”
김승우는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말을 이어갔다.
“난 어렸고, 살아남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다 해보려고 발악을 할 때였지. 에이셴이라는 선수가 잘 하는 선수도 아니었는데 내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 어쨌든 뭐라도 하려고 한 번 물어봤는데, 그 사람이 내 머리 얘기를 딱 하는 거야. 공을 던질 때 제구가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머리가 흔들려서라고.”
공을 던지는 순간, 그리고 팔이 끝까지 넘어가는 순간까지 머리는 항상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투구와는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머리를 고정시켜 놓는 것은, 놀랍게도 제구를 잡는 데 상당히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김승우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한 번 들어보니까 그럴 듯 해. 머리를 잡아두고 던지다 보면 제구가 또 잘 잡히고. 그 다음부터는 제구가 흔들릴 때마다 머리를 체크하게 되더라고. 그리고 신기하게 제구가 안 될 때는 꼭 머리가 흔들리고 있더라. 그러니까 너도 한 번 체크해 봐. 릴리스 순간 머리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제자리에 있지는 않은지.”
“흐음...”
“이걸 과학적이나 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 중심을 잡는 역할은 보통 머리가 아니라 하체가 하는 거니까. 나도 많은 코치를 만나봤지만 누구도 머리가 어떤 위치에 어떻게 있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거든. 실제로 제구가 기똥찬 놈들 중에 머리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녀석들도 있고 말이야.”
“그렇죠. 저도 처음 들어 보는데.”
“어떤 이론이나, 전문적인 코칭이나, 그런 쪽으로는 아마 머리를 언급한 사람은 많이 없을 거야. 대신 이건 있지. 이 조언은 짬밥에서 나온 거라는 거.”
김승우는 약간 어리둥절해 있는 지혁의 등을 툭툭 쳤다.
“사회인야구 뛰면 아저씨들이 그런다더라. 야구는 구력이라고. 그 말이 어느 정도 맞아. 짬밥에서 나오는 경륜은 무시 못 하는 거야. 하하. 그러니 한 번 체크해 봐. 메이저리그에서 결국 실패한 퇴물 투수의 조언을 받은 퇴물 선배의 말이지만. 만약 한 번 체크해 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냥 훌훌 털어버려. 퇴물의 충고니까. 하하하.”
“선배님. 그런 말씀 마세요.”
김승우는 껄껄 웃었다. 그리고 김승우의 말대로, 머리를 고정해 놓고 던진 커브들의 제구가 훨씬 더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한 지혁도 뒤늦게 껄껄 웃었다. 김승우의 말대로였다. 책에 적혀있지 않은 짬밥의 힘은 위대했다.
*
“스트-라이크! 투!”
[ 공 두 개로 단숨에 카운트를 몰아넣은 문. ]
[ 변화구 제구가 아주 날카롭네요. 몸쪽 낮은 쪽으로 떨어지는 커브. 바깥쪽 낮은 쪽에 걸쳐 들어오는 백도어성 커브. 커브 두 개가 양 끝을 정확하게 갈랐습니다. ]
[ 이번 시즌의 전망을 밝게 만들어주네요. 말씀드리는 순간 싱커에 헛스윙을 내는 지안카를로 스탠튼. 3이닝을 소화하면서 삼진 6개를 잡아내는 문입니다. ]
[ 탬파베이는 이번 시즌에도 확실한 원투 펀치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제 풀타임 3년차에 접어들고 있는 문이기 때문에 말이죠. 이제는 증명이 됐다고 봐야 합니다. ]
스프링캠프 시범경기가 시작된 날부터 지혁은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작년에 오랜 기간을 쉬었던 지혁은 몸을 착실하게 끌어올릴 시간이 충분했다. 쉬는 기간 동안 패스트볼의 구속을 끌어올린 지혁은 그 효과를 배가시키기 위한 전략도 효율적으로 개발했다.
카운트를 잡는 공으로 커브와 싱커를 주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는 김승우의 조언으로 더 좋아진 제구력이 크게 일조했다. 쳐도 좋은 타구를 만들어낼 수 없는 위치로 변화구를 던져 유리한 카운트를 선점한 뒤, 생각보다 빠른 패스트볼로 먹힌 타구를 만들어내는 패턴을 개발할 수 있었던 셈.
시범경기에서부터 지혁은 다양한 패턴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아직 패스트볼도 전력으로 뿌리지는 않고 있었다.
‘아껴둘 수 있는 건 아껴 놓고. 좋아진 건 더 보여주고.’
지혁의 작전은 명확했다. 이제는 모든 구단으로부터 강한 견제와 분석에 시달릴 게 확실한 시즌이다. 날카로워진 제구를 선보이되, 마지막 히든카드인 97마일을 상회하는 공 하나 정도는 아껴두고 시즌 중에 중요할 때 보여주면 된다.
지혁의 호투 덕분에 탬파베이의 시범경기 성적도 아주 훌륭하게 만들어졌다. 작년 메이저리그 전체 30개 구단 중 28위를 했던 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경쾌한 출발이었다. 1선발이자 에이스 역할을 해줘야 할 크리스 아처도 WBC 대표팀을 대비해 일찌감치 몸을 끌어올렸고, 알렉스 콥은 내년에 FA가 되는 것을 염두에 둔 듯한 한결 신중한 피칭으로 든든하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번 스프링캠프 기간에 탬파베이의 샬럿 스포츠 센터에서 눈에 띄는 점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어린 유망주들의 급성장이다. 투타를 가리지 않고 어린 선수들이 랭카스터의 라인업에 들었고, 시범경기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라는 동기부여가 주어진 어린 선수들은 다른 팀들의 선수들이 경기 감각을 익히기 위한 시간에 펄펄 날아다녔다.
투수진의 대표주자는 블레이크 스넬이다. 작년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던, ‘2015년 올해의 마이너리그 선수’ 출신. 블레이크 스넬. 유망주답게 상대적으로 가벼운 공 때문에 장타를 많이 허용하며 한계를 보여줬던 스넬은 겨우내 몸을 단단히 불려 왔다. 공에 구위를 붙이기 시작하자 스넬의 공은 상당히 위력적으로 변해갔다.
또 다른 선수는 포사이드를 LA 다저스로 보내면서 받아 온 호세 드 레온. 드 레온은 아직 몸이 완전히 만들어지지 않아 가벼운 불펜 피칭만 소화하고 있었지만, 경기에 나서지 않고 불펜에서 공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동료들의 많은 기대감을 자아내게 하는 선수였다. 괜히 미래의 1선발 감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트리플 A까지 올라온 브랜트 허니웰. 지혁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선수기도 했다. 그리고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투수가 되는 선수기도 하고.
“허니! 나갈 준비 하라고!”
지혁이 3이닝을 매조지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올 때, 한 쪽 구석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허니웰이 불펜으로 막 향하고 있었다.
“야, 허니! 잘 해라. 쟤네 별거 아니야.”
“오케이! 고마워요, 문!”
지혁은 주먹을 들어 허니웰과 한 번 맞댔다. 어울리지 않는 하이톤의 목소리지만 허니웰의 목소리는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목소리였다.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허니웰이 불펜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지혁은 스프링캠프 첫 날을 떠올렸다.
*
지혁이 허니웰을 실제로 처음 본 것은 스프링캠프 첫 날이었다.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에는 이번 시즌 처음으로 합류한 허니웰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리고 앳된 1995년생 투수였지만, 그럼에도 확실하게 눈에 띄는 압도적인 한 구종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와. 저 공 뭐예요, 코치님?”
“너, 쟤 모르냐?”
“누군데요?”
“허니웰.”
“아, 허니웰! 쟤가 걔구나.”
스프링캠프 첫 날에 불펜을 지나가다 이상한 궤적의 공을 본 지혁이 허니웰을 전생의 기억에서 떠올려 낸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포수 뒤쪽에서 본 공은 그야말로 마구 같은 궤적을 그렸다.
“그래. 저 공은 진짜 마구야.”
“저도 알아요. 저 공 진짜 어마어마하죠. 메이저리그에서 당장 써먹어도 통할 걸요.”
“말투가 뭐 그래? 방금 전까지는 모른다며?”
“하하. 이름을 들으니까 생각났어요. 저한테도 얘기가 워낙 많이 들리는 친구라서.”
“저 녀석만 계획대로 성장해 주면 내년이나 내후년에는 분명히 투수진이 훨씬 더 좋아질 거야. 하하.”
힉키는 넉살맞게 웃었다. 탬파베이의 투수진은 그야말로 미래가 창창한 것처럼 보이는 유망주의 산실이나 다름없었다. 지혁이 메이저리그에서 자리를 꿰차는 동안, 마이너리그에도 그런 선수들이 나타난 것이다. 스넬이 그렇고, 트레이드로 데려온 드 레온이 그렇고, 또 다른 수많은 선수들이 있다.
마운드의 허니웰이 공을 던졌다. 역시나 믿을 수 없는 궤적을 그리며 공이 휘어졌다.
휘이익-
뻥!
“스트라이크! 브랜트! 아주 좋아!”
“감사합니다. 히히.”
허니웰은 마운드에서 꽤 이상한 웃음소리로 크게 웃었다. 조금 덜떨어진 친구처럼 보일 수도 있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방금 지혁의 눈을 의심하게 만든 저 공만큼은, 덜떨어졌다는 표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공이었다.
우완 투수인 허니웰이 손끝에서 공을 놓는 순간 우타자 기준에서 바깥쪽으로 멀어지다가 다시 안쪽으로 말려 들어오는 공. 역회전이 걸리는 순간부터 떨어지는 공은 낙폭도 대단히 훌륭했다.
스크류볼. 미국 야구에서 명맥이 끊긴 줄 알았던 스크류볼 투수가 세상으로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상한 웃음소리와 함께.
“쟤랑 친해지면 나중에 콩고물 짭짤하게 떨어지겠어요.”
“뭐?”
본능적으로 중얼거린 지혁의 말에 힉키가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콩고물은 임마, 니가 저 녀석한테 떨어트려 줘야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메이저리그 팀에서 2선발을 확정해 놓은 놈이. 유망주한테 비비려고? 정신 차려.”
“하하. 쟤는 진짜 크게 될 것 같아서 그래요.”
“내가 보기엔 니가 더 크게 될 수 있는 놈이야. 오히려 그래서 너한테 부탁을 좀 하려고 했는데. 저 놈한테 멘토 역할을 좀 해 줘. 쟤는 마운드 위에서의 기복이 좀 있는 편이고, 감정 컨트롤이 아직 좀 약하거든. 넌 멘탈은 확실하니까.”
“제가요?”
“그래. 이제 너도 밑에 놈들을 좀 챙길 때가 됐어. 마이너리그에는 너를 보면서 던지는 녀석들도 많거든. 초특급 깜짝 스타니까.”
“누가요? 대체 누가 저를 보고 꿈을 키워요? 하하.”
“많아. 오늘 여기에도. 일일이 읊어줘? 후도 그렇고, 스타넥도 그렇고...”
“아오! 됐어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어요. 누군가의 우상이라니... 으. 말도 안 돼.”
힉키는 농담을 곁들였지만 얼굴 표정만큼은 진지했다.
“하지만 네가 멘토가 될 수 있다는 것만큼은 사실이야. 스프링캠프 기간 동안 마이너 애들을 좀 잘 이끌어 봐. 꼭 살갑거나 친근하게 굴지 않아도 돼. 뭔가...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힉키의 말은 너무나 진지해서, 지혁이 농담으로 되받아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힉키와 농담따먹기를 하고 있는 그 동안, 마이너리그의 몇몇 선수들은 지혁을 곁눈질로 쳐다보고 있었다.
“... 정말인가 보네.”
라이징 스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투수에서 일약 메이저리그 신인왕까지 따낸 사나이. 지금의 마이너리그 선수들에게 지혁은 일종의 롤 모델이나 다름없다는 걸, 그 눈빛들이 증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