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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처리, 회귀하다-110화 (111/204)

< 110 - 유망주 천국에서 3년 차 선수라는 건. >

그 눈빛들을 한 번이라도 마주하고 나면 몸가짐 하나도, 작은 마음가짐 하나도 모든 게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좀 부담스럽기도 해요.”

“하하. 문.”

“네?”

“잘 왔어. 에이스의 세계에.”

지혁이 속마음을 털어놓자 롱고리아가 환하게 웃었다.

“넌 아직 어린 투수라서 직접적으로 말하기가 좀 꺼려졌었는데. 결국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된 거야. 너도 이제 다른 녀석들을 이끌 수 있는 존재가 된 거지. 마운드 위에서도, 마운드 아래에서도.”

“... 그런가요? 역시 아직 좀 익숙하지 않아서.”

“곧 익숙해지게 되어 있어. 그리고 책임도 그만큼 뒤따르게 되어 있고.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빨리 적응하는 게 좋을 거야. 하하. 성적을 잘 내는 선수들을 보면서 동기부여를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잖아? 마이너에 있는 녀석들이 보면 너는 존경의 대상이지. 네가 쉴 때 뭘 하는지, 밥은 뭘 먹는지, 커피는 찬 걸 먹는지 뜨거운 걸 먹는지도 일일이 다 따라하려고 할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나이가 많았을 때의 지혁도, 나이 어린 에이스의 버릇과 루틴을 따라하기 위해 애쓴 적이 있었던 정도이니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꿈의 무대에서 데뷔하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게 마이너리그 선수들이다. 불과 몇 년 전의 지혁도 그랬었고.

“걔네들한테 어떻게 해 주는 게 좋을까요?”

“워워. 위대한 멘토는 ‘뭘 어떻게 해 주는’ 사람이 아니야. 자연스럽게 보고 따라할 수 있게, 마음 속에서 우러나와서 따를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이지.”

“그 말이 훨씬 더 어렵게 들리는데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이 말은 진심이었다. 경험에서 배울 수 없는 영역이라고나 할까. 남들의 뒤꽁무니를 잡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일을 누군가에게 가르쳐야 한다면, 지혁은 족집게 과외 강사처럼 얘기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롤 모델이 되어 실력과 행동으로 이끌어야 하는 자리는 익숙하지 않았다. 아니,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어. 어차피 네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다 관찰 대상이니까. 편하게, 늘 하던 대로 해. 내가 쓰는 방법을 하나 말해주자면, 너도 녀석들을 관찰하는 게 좋을 거야.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조언을 해줄 수 있으려면 말이지.”

롱고리아는 손을 들어 반대편 외야를 가리켰다.

“우익수 쪽에서 연습하고 있는 녀석 보이지? 제이크 바우어스. 쟤는 내가 좀 지켜보고 있는 녀석이야. 외야수긴 하지만. 자, 지금 봐. 수자가 펑고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지. 그리고 바우어스는 뒤쪽에서 수자를 지켜보지도 않고 키어마이어랑 웃고 떠들고 있어.”

“키어마이어가 또 이상한 농담이나 하나 보네요.”

“그렇게 넘기는 것도 좋지만. 나는 저런 걸 관찰하다가 마음에 담아 두는 거야. 그리고 바우어스가 실책을 하나 하면 나중에 가서 은근슬쩍 얘기하는 거지. 지적하는 느낌은 아니지만, 그냥 은근히 흘리는 거야. 펑고 때 조금 더 집중을 하면 좋을 것 같다고.”

롱고리아는 자신의 눈에 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가 다시 틀어 지혁의 눈에 가져다댔다.

“아이 씨 유. 나는 너를 보고 있다. 이런 걸 주지시키는 거야. 아주 작은 태도 하나를 지적하는 일이지만, 스타들의 그런 관심은 쟤네들한테는 꿈과 희망이 된다고. 이 팀의 제일 잘 나가는 스타플레이어가 마이너리그에 있는 나한테 관심을 주는구나 싶은 거지.”

휴우. 지혁은 한숨을 내쉬며 멋쩍게 웃었다. 새 옷을 처음 사 입었을 때의 어색한 느낌이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지만. 옷은 입으면 입을수록 익숙해진다. 그것처럼 누군가를 이끌어야 하는 역할도 하면 할수록 익숙해질 것이다.

*

“헤이. 브랜트. 안녕.”

“안녕하세요, 문!”

다리를 양쪽으로 쭉 벌리고 앉아 허리를 있는 힘껏 굽혀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허니웰이 갑자기 상체를 벌떡 일으키더니 환하게 인사했다. 막상 허니웰에게 다가오긴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지혁도 허니웰의 앞에 앉아 같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나한테 무슨 할 말 있나요?”

“응? 아니. 딱히, 뭐.”

“아. 히히.”

조금 어색한 시간이 지나갔다. 지혁은 허니웰과 나란히 앉아 몸을 풀었지만,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힉키 코치가 뭐라고 했더라. 마운드 위에서 기복이 좀 있고... 컨트롤이 잘 안 된다고 했었나? 뭐였지? 뭔가 도와줘야 하는데.

“야. 혹시 너 제구 잘 안 되냐?”

“응? 가끔요. 그냥 아무 것도 안 될 때가 있어요. 히히. 마음먹은 대로 하나도 안 들어가는 날.”

“비디오 돌려 보면서 머리를 체크해 봐.”

“머리? 머리요?”

“응. 혹시 공을 던질 때 머리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흔들리지는 않나 한 번 살펴 봐. 나도 얼마 전에 알게 된 거야. 머리를 잡으려고 신경 쓰다 보니까 확실히 제구가 좋아지더라.”

“... 아하!”

“왜?”

“생각해보니까 안 좋을 때 상체랑 목이 생각보다 많이 흔들렸던 것 같아요. 진짜 머리가 흔들려서 그랬나?”

“그, 아닐 수도 있으니까. 너무 무턱대고 믿지 말고 아니다 싶으면 털어내 버려. 괜히 밸런스나 흐트러질라.”

“아니에요! 진짜로 그랬던 것 같은데. 한 번 잡아 볼게요. 루키 오브 더 이어가 해 준 말인데, 맞겠죠. 고마워요, 문!”

허니웰은 뭔가 생각난 듯 희희낙락하며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하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아마 비디오 룸으로 가는 것일 테다.

“하아. 이거 생각보다 힘드네.”

지혁은 머리를 긁으며 씁쓸하게 되뇌었다.

작년 크리스 아처가 유독 더 힘들어했던 것이 떠올랐다. 투수진의 조장 역할과 클럽하우스의 리더 역할, 게다가 코칭스태프와 선수들 간의 교각 역할까지 도맡았던 아처는 정신적으로 상당힌 피로감을 느꼈을 법 했다. 그게 마운드 위에서의 피칭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던 게 분명했고. 아처가 지난해 거둔 19패라는 최악의 성적, 다패왕 타이틀을 가져간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지난해는 아처 혼자서 그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부상에서 신음하고 있던 알렉스 콥은 라커룸에 있는 시간보다 병원에 있던 시간이 훨씬 더 길었고, 드류 스마일리와 제이크 오도리찌는 타고난 성격이 누굴 이끌만한 사람은 못 되었다. 지혁은 이제 갓 풀타임 1년차를 마친 선수였을 뿐이고. 불펜의 선수들도 1년 계약으로 잠깐 탬파베이에 머무른 선수들이 많았기에, 아무도 아처를 도와줄 수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달라야만 한다. 그게 코칭스탭들이 바라는 것이기도 했고, 선수들 스스로 느낀 것이기도 했다. 아처의 짐을 누군가가 같이 져 줘야 한다. 그리고 그 적임자가 지혁이었다. 풀타임 3년차가 되었다는 것. 이미 메이저리그 선발 로테이션의 한 자리를 굳건히 차지했다는 것. 지혁에게 자격조건이 충분하다는 의미였다.

“해야 하는 일이면 해야지, 뭐.”

쉽지 않은 일이지만, 또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지혁은 허니웰이 떠나간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누군가를 찾아나섰다. 멘토를 필요로 하는 선수들은 차고 넘쳤다. 메이저리그를 바라보며 꿈과 희망으로만 먹고 사는 어린 유망주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일은 확실히 어색한 일이다.

어쩌면 지혁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팀을 위한 일이라면, 그리고 동료를 위한 일이라면 해야만 한다. 익숙해지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

3월.

스프링캠프의 야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한편 다른 쪽에서는 WBC가 뜨겁게 불타올랐다. 미국 대표팀에 뽑힌 크리스 아처는 한 경기에 등판해서 완벽한 투구를 뽐냈다. 도미니카 대표팀에 뽑혀 간 마무리 알렉스 콜로메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강렬한 100마일짜리 패스트볼을 꽂아 넣으며 기세를 올리기도 했다.

“하핫. 즐거워하네. 크리스 녀석.”

“그러게요. 작년엔 저렇게 웃는 걸 잘 못 봤는데.”

크리스 아처가 선발 등판한 경기는 단 한 경기뿐이었다. 개막전, 콜롬비아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4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이후로는 각 팀에서 모인 즐비한 슈퍼스타들의 출장 시간을 보장해 줘야 한다는 이유로 벤치에만 머물렀다. 하지만 아처는 모처럼 정말 해맑게 웃고, 진지하게 야구를 하고 있었다. 카메라를 타고 흘러나오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지혁은 대표팀의 차출에 응하지 않은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아처가 저렇게까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반쯤은 죄책감이 들기도 했고 반쯤은 부럽기도 했다.

국가대표팀이라. 국가를 대표해서 뛰는 팀이라.

지금 상황에서라도 좋으니 당장 대표팀에 합류해 달라고 해도 똑같이 거부하겠지만, 4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특별한 이벤트의 차원이라면 한 번 고려를 해볼 법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아처가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팀에서 즐겁고 재밌는 야구를 하다가 돌아오면, 아처도 새 시즌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도미니카 대표팀으로 합류한 콜로메도 마찬가지다. 지난 시즌 릴리버로 전환한 뒤 환골탈태하며 뒷문을 확실히 잠가 주었던 콜로메는 WBC에서도 확실한 존재감을 피력했다.

“두 녀석이 WBC에서 기분 잔뜩 내고 돌아오면 여기서도 활력이 좀 돌겠네. 안 그래, 문?”

“그러게요. 하하.”

“아- 나만 잘 하면 되는 건가?”

“알렉스. FA 앞두고 너무 욕심내다가는 몸 상한다.”

“그렇다고 대충 할 수도 없잖아? FA인데.”

“저도 연장계약 하고 첫 해라 뭔가 보여줘야 돼요. 아니면 욕 엄청 먹을 텐데. 어휴.”

“케빈. 넌 수비만 해도 돈값은 충분히 하잖아. 너무 싸게 계약했어. 아무리 봐도.”

자리를 확실히 잡지 못한 유망주 선수들이 WBC를 볼 시간에 공을 한 번이라도 더 던지는 사이, 지혁을 비롯해 롱고리아와 알렉스 콥, 키어마이어 같이 팀 내 입지를 확보한 선수들은 TV 앞에 모여 앉아 WBC를 감상하며 잡담을 나눴다.

그렇게 시즌 개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비참할 정도로 추락했던 작년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 탬파베이 선수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환경에 맞게, 각자의 나름대로 페이스를 끌어올리고 있다. 이번 시즌에는 작년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줘야만 한다는 각오다.

아처와 콜로메는 WBC에서 슈퍼스타들과 함께 감각을 끌어올리고 있다. 탬파베이의 프랜차이즈이자 팀을 지탱하는 롱고리아는 여전히 든든하게 중심을 잡고 있고. 알렉스 콥은 FA를 앞두고 필사적인 각오를 다지고 있고, 키어마이어는 초대형 연장계약을 맺은 이후 진가를 증명해야만 한다는 의지에 불타고 있다.

“아. 나도 공이나 조금 더 던져야겠어요. 다들 제 역할을 하는데, 나도 내 역할을 해야지.”

“오오. 그래. 첫 시즌 신인왕을 탔을 때보다 더 잘 던지라고. 올해는.”

“15승보다 더? 하하.”

“아니라는 말은 안 하네?”

키어마이어가 진담 반 농담 반 식으로 지혁을 자극했다. 의자에서 일어나 글러브를 챙겨 든 지혁은 클럽하우스를 빠져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목표는 높게 잡아야지. 신인상 한 번 타 봤으니까...”

모두가 지혁의 뒷모습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올해는 MVP 정도?”

“우우- 미친놈!”

“쟤도 캐릭터 많이 바뀌었어. 목에 힘 많이 들어갔네.”

물론 동료들의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지만. 지혁은 정말로 결심하고 있었다. MVP까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첫 시즌보다는 반드시 좋은 성적을 내겠다고. 그게 이 팀에서 꼭 만들어내고 싶은 목표였다.

*

“자. 올 시즌도 다들 힘차게 가 보자고.”

벤치코치인 케빈 캐쉬가 박수를 짝짝 치며 2017년 봄 스프링캠프 시범경기의 마지막 팀 미팅을 마무리 지었다. 선수들도 박수를 치며 서로를 향해 고생했다는 덕담을 나누었다.

2월 초순 소집된 스프링캠프에 모였던 60명 남짓의 선수들은 이미 거의 다 흩어졌고, 25인 로스터를 확정짓기 직전 서너 명의 경쟁자들만 남아 있는 캠프는 이미 단출해졌다. 랭카스터와 캐쉬는 몇몇 선수들을 불러 감독실로 데리고 갔다. 그 중 한 자리에 브랜트 허니웰도 끼어 있었다.

“문. 고마웠어요. 머리를 잡아라! 내 인생 최고의 조언이었어요.”

“뭘 또 인생 최고의 조언까지야. 넌 재능이 충분하니까 올 해 안에 분명히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메이저리그에서. 그 때까지 열심히 해.”

“히히. 역시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땡큐!”

허니웰은 여전히 지나칠 정도로 해맑은 웃음을 보여주며 트리플 A로 내려갔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백업 포수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커트 카살리도 내려갔고, 외야에서 곧바로 데뷔할 것처럼 보였던 제이크 바우어스와 1루수 후보였던 케이스 질라스피도 내려갔다.

이틀 앞으로 다가온 2017 메이저리그 시즌 개막전을 앞둔 25인 최종 로스터가 발표된 순간이었다.

2017년 탬파베이 오프닝데이 로스터.

투수 : 크리스 아처, 문지혁, 알렉스 콥, 제이크 오도리찌, 블레이크 스넬, 맷 안드리스, 에라스모 라미레스, 점보 디아즈, 엑세비어 세데뇨, 대니 파쿼, 토미 헌터, 알렉스 콜로메. (12명) 포수 : 데릭 노리스, 헤수스 수크레. (2명) 내야수 : 에반 롱고리아, 팀 베컴, 브래드 밀러, 로건 모리슨, 다니엘 로버트슨, 리키 윅스 주니어 (6명).

외야수 : 케빈 키어마이어, 스티븐 수자 주니어, 코리 디커슨, 말렉스 스미스, 피터 버죠스(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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