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11화 (112/204)

< 111 - 시즌 스타트. >

오프닝데이. 개막전.

한국에는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미국에서는 그런 말은 없지만, 첫 단추를 어떻게 꿰는지가 흐름을 좌우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랭카스터 감독도, 캐쉬 벤치코치도, 그 외의 수많은 코치들도 하나같이 첫 경기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다녔다.

모든 사람들이 첫 경기를 중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특히 탬파베이에게는 첫 경기가 지난해의 모든 악운을 떨쳐낼 수 있는, 또 떨쳐내야만 하는 경기다. 그래서 특별히 더 중요했다.

새로 온 선수들의 적응 실패, ‘쉬어가는 해’로 인식했던 프런트와 스탭들의 인식 변화 등으로 부진했던 2016 시즌을 완전히 뒤엎어버려야 할, 2017 시즌의 첫 경기인 것이다. 안 좋은 기억들을 단번에 씻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해야 하는 경기.

물론 상대가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양키스. 그리고 양키스의 에이스, 다나카다. 그래서였을까? 거의 모든 매체와 전문가들이 개막전 승리는 양키스의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어는 탬파베이의 지역지인 탬파베이 타임스의 기사조차도 ‘아처에게 모든 것을 의지한다’는 타이틀을 뽑았다.

“올해는 개막전도 꽉 차지를 않았네.”

“우리가 작년에 좀 말아 먹었어야지.”

“업보라고? 아무리 그래도 개막전인데.”

“밖에 비도 와. 비 오는 날에 이 구장에 오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그래도 이 정도면 개막전이라고 나름 많이 와 준 것 같네.”

탬파베이의 핵심 선수들 몇몇은 경기가 시작되기 전 관중석을 둘러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탬파베이라는 구단이 워낙 비인기 구단인데다가 구장인 트로피카나 필드도 접근성이 너무 떨어지는 곳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관중들이 꽉 차는 일은 일 년에 한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이례적인 일이다. 그리고 오늘은 그 이례적인 날이 되어야만 했던 날이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실패했다.

“씁쓸하네요.”

지혁이 중얼거렸다. 다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마음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프로라면 누구나 다 미친 듯이 열광해주는 관중들 앞에서 경기를 치르고 싶어 한다. 거대하고 장엄한 경기장을 가득 메운 인파가 뿜어내는 에너지는 글이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한 느낌을 준다.

프로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한, 관중과 팬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리고 오늘, 새로운 시즌을 시작하는 날에 그 압도적인 에너지의 응원을 받고 싶었다.

“억지로라도 끌고 와야지. 야구로.”

“에반.”

롱고리아는 이 팀의 프랜차이즈다. 팀이 만년꼴찌일 때부터, 암흑기 중의 암흑기를 거쳤을 때부터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을 때까지. 이 팀에서만 자신의 모든 프로생활을 보낸 사람이다.

“야구만 잘 하면 관중들은 모이게 되어 있어.”

롱고리아의 말에 씁쓸함이 묻어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해탈의 경지에 오른 듯한 말투에서는 왜인지 알 수 없는 자신감도 묻어났다.

“2008년에 월드시리즈에 갔을 때도, 개막전이 매진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해. 그리고 2011년에 우리가 기적 같은 역사를 썼을 때도 그랬어. 시즌을 치르면 치를수록, 우리가 잘하면 잘할수록. 갈수록 관중석의 빈자리가 없어지는 그 느낌도 짜릿하거든.”

“오. 그 말 좀 멋있는데요?”

“난 관중석을 꽉 채우는 게 우리가 이뤄내야 할 목표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 구장이 외딴 곳에 지어져 있고, 우리 구단이 인기가 없고, 이런 건 다 핑계야. 야구만 잘 하면 사람은 모여. 야구만 잘 하면.”

롱고리아의 말에 선수들이 입을 앙다물었다. 개막전을 찾아준 팬들을 위한 각종 이벤트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즐거워하는 관중들을 바라보며, 또 군데군데 비어 있는 파란색 좌석을 바라보며. 다들 전의를 불태웠다. 롱고리아의 말대로다. 야구를 더 잘 해서, 저 빈자리를 사람들로 채워나가야 한다. 이번 시즌에는.

*

- 탬파베이 레이스, 개막전 대승!

2017년 메이저리그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 게임에서 탬파베이가 기분 좋은 7대3 승리를 거뒀다. 3년 연속 개막전 선발투수로 나선 크리스 아처가 7이닝 동안 2실점으로 호투했고, 롱고리아의 투런 홈런과 1년 계약으로 팀에 잔류한 로건 모리슨의 솔로 홈런을 포함해 3이닝 만에 7득점을 몰아친 타선의 집중력도 돋보였다. 특히 그 동안 탬파베이가 고전해 왔던 양키스의 다나카 마사히로를 상대로 한 대량득점이 반갑다.

... (중략)

한편 하루 쉬고 열리는 5일 2차전에는 신인왕 출신의 한국인 좌완 문지혁이 선발투수로 나선다. 양키스의 선발투수는 부활을 노리고 있는 C.C. 사바시아로 내정됐다.

*

지혁을 비롯해 탬파베이의 모든 구성원의 기분이 한껏 달아올랐다. 뉴욕 양키스를 만난 홈 개막전에서 생각하지 않았던 패턴의 대승을 거두었다. 그것도 천적이나 다름없던 다나카를 상대로.

좋은 의미가 아니겠지만, 많은 미디어와 팬들은 ‘탬파베이스럽지 않은 승리였다’며 자축하고 있었다. 초반에 대량 득점으로 출발했고, 아처는 마운드에서 스스로 무너지지 않았다. 불펜도 다섯 점의 리드를 지켜냈다.

출발이 아주 훌륭했다. 그리고 이건 수치로만 드러나는 단순한 1승의 의미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압도적인 지구 꼴찌 후보로 거론되었던 탬파베이가 그 전문가들 모두에게 큰 엿을 먹여 줄 준비를 해 놓은 상태라는 것을 보여준 한판이다.

“첫 시리즈부터 위닝으로 가자고, 문.”

그리고 더 중요한 것. 개막전에서의 승리가 단순한 1승으로 돌아가 버리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일. 2차전 승리다. 기세를 살려 가는 것. 랭카스터도 그 사실을 지혁에게 끊임없이 주입시켰다. 힉키 코치도 랭카스터의 옆에서 계속해서 거들었다.

지혁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말을 그냥 들었다. 두 번째 경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고 있다. 수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고, 수없이 맞닥뜨려 본 상황이었다. 물론 지혁이 그 역할을 주도적으로 맡아야 했던 적은 별로 없지만.

그것 말고도 작년과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랭카스터 감독과 힉키 코치의 접근 방법이었다.

풀타임 1년차 때? 루키에게 경기가 가진 의미를 부여하며 부담을 안겨 줄 코칭스탭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가서 편하게 던져! 책임은 내가 진다.”

랭카스터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작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기 결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네 투구 내용이야. 네 투구에 자신감을 갖고 집중해. 후회하지 않는 투구를 하면 그걸로 돼.”

힉키 코치는 투수가 가져야 할 평정심만을 강조했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시즌을 시작하자마자 연승으로 치고 나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더 얘기할 필요도 없겠지?”

“부담을 가지지 말라는 말은 못 하겠군.”

“하하. 코치님도 감독님도 부담을 팍팍 주시네요.”

“이제 마냥 편하게 마음먹고 던져야 할 그럴 위치는 벗어났어, 넌. 오히려 부담을 가지고 그걸 이겨내는 것으로 증명해야 할 위치에 올라왔지. 무슨 말인지 알겠지?”

“물론입니다.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하구요.”

경기가 시작되기 20분 전. 모든 워밍업과 불펜 피칭까지 전부 마쳐두고 그저 경기 시작만을 기다리고 있는 지혁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랭카스터와 힉키는 끝끝내 지혁이 마운드에 올라가기 직전까지도 그러고 있었다.

- 오늘의 선발투수를 소개합니다! No. 18! 지-혁! 무우우우운!

입술을 앙다물고 한껏 들이마신 숨을 참으며 더그아웃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여전히 듬성듬성한 빈 좌석이 보이는 구장의 꼭대기부터 시선을 끌어내리면서, 지혁은 마운드로 뛰어올라갔다. 얼마 없는 관중들이지만 이제는 지혁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이 구장에 없다.

“푸하아.”

길게 참아왔던 숨을 내뱉었다. 새삼스럽게 뒤를 돌아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깨에 이만큼 큰 짐을 짊어지고 있던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아마 고등학교 때가 아니었을까?

승부에서 멀어져 있던 패전처리 투수 시절. 그리고 뭐든지 마음먹은 대로 다 하라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지난 2년. 이제부터는 그 때와는 다른 마음으로 경기에 임해야 할 시즌이 온 것이다. 에이스다운 책임감을 가져야 할 시즌, 첫 경기다.

“자, 패스트볼부터!”

포수 장비를 쓰고 홈플레이트에 주저앉은 오늘의 포수 데릭 노리스가 미트를 펑펑 두드렸다.

“으쌰!”

깔끔한 기합과 함께 손에서 빠져나간 공이 작년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훨씬 빠른 스피드로 미트에 꽂힌다. 패스트볼을 던질 때마다 없던 자신감도 생겨날 정도로 만족스럽다. 괜히 2년이나 더 소비해서 패스트볼 구속을 끌어올린 게 아니다.

싱커도, 커브도. 던지는 순간에 머리를 단단히 고정하고 목표로 하는 위치를 똑똑히 지켜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작년보다 훨씬 더 안정된 제구력을 뽐낼 수 있다. 뽐내야만 한다. 지난해의 부상 이후로 한 단계 더 성장했다는 것을, 더 강력한 존재감을 뿜는 투수가 되어 돌아왔다는 것을 메이저리그의 다른 팀들에게 보여줘야 할 시간이, 마침내 왔다.

양키스의 선두타자, 브렛 가드너가 타석에 들어섰다.

*

2017 메이저리그 베이스볼, 오프닝시리즈 2차전.

탬파베이 레이스 vs 뉴욕 양키스.

탬파베이 레이스 선발 라인업.

1. 스티븐 수자 주니어 RF

2. 케빈 키어마이어 CF

3. 에반 롱고리아 3B

4. 리키 윅스 주니어 1B

5. 팀 베컴 SS

6. 브래드 밀러 2B

7. 데릭 노리스 C

8. 다니엘 로버트슨 DH

9. 피터 버죠스 LF

P. 문지혁

뉴욕 양키스 선발 라인업.

1. 브렛 가드너 LF

2. 개리 산체스 C

3. 그렉 버드 1B

4. 맷 홀리데이 DH

5. 자코비 엘스버리 CF

6. 스탈린 카스트로 2B

7. 체이스 헤들리 3B

8. 애런 저지 RF

9. 로날드 토레예스 SS

P. C.C. 사바시아

[ 양키스의 1회초 공격이 시작되겠습니다. 타석에는 브렛 가드너. 탬파베이의 선발투수는 부상에서 복귀한 문입니다. 지난 시즌 8월, 공교롭게도 양키스와의 경기였죠. 디디 그레고리우스의 타구에 오른쪽 손목을 정통으로 맞으며 부상을 당했었습니다. ]

[ 문지혁 선수의 기록을 보면, 근 4~5년 동안 이렇다 할 잔부상 없이 풀타임 시즌을 소화했었거든요. 그러다가 타구에 손목을 맞고 골절을 당하면서 휴식을 갖게 됐는데요. 지난해 8월 중순부터 쉬기 시작했으니 6개월 만의 실전 등판인 셈이네요. ]

[ 그렇습니다. 스프링캠프에서 문의 성적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4경기에 등판해서 13.2이닝을 던졌고, 자책점은 3점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게 사사구가 단 1개밖에 없었다는 것이로군요. 삼진은 22개였습니다. ]

[ 지적하신 부분이 꽤 인상적입니다. ]

[ 말씀드리는 순간 초구 스트라이크. 가드너의 몸쪽을 찔렀습니다. 94마일의 패스트볼. ]

[ 말씀을 이어가자면, 이 선수의 제구력이 지난 시즌이나 지지난 시즌, 그러니까 루키 오브 더 이어를 수상했던 시즌보다 조금 더 좋아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타자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구역을 날카롭게 공략하고 있어요. ]

[ 2구는 볼입니다. 바깥쪽에서 떨어지는 싱커. ]

[ 이 공도 보세요. 꽉 찬 지점에서 떨어지는 아슬아슬한 공입니다. 저 공에 스윙을 내면 강한 타구를 만들기 힘들 수밖에 없죠. ]

지혁은 뒤편에서 들려오는 야수들의 격려를 들으며 몸을 굽혀 로진을 듬뿍 묻혔다. 초구는 몸쪽 낮은 쪽에 꽂히는 패스트볼. 2구는 바깥쪽 낮은 코스에서 떨어지는 싱커. 두 개 모두 스트라이크 존 양 쪽의 모서리를 정확하게 찔렀다. 겨우내 제구에 신경을 쓴 보람이 느껴지는 두 개의 공이었다.

노리스가 보내 온 싱커 싸인에 고개를 끄덕인 지혁은 간결하게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막상 경기가 시작되고 나자 부담감이니 책임감이니 하는 것들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노리스가 존 경계선에 대고 있는 미트. 그리고 그것을 똑바로 쳐다보고 흔들리지 않아야만 하는 머리. 이것에만 오롯이 집중했다.

“으랴차!”

가드너의 허리춤 쪽을 향하던 싱커가 마지막 순간에 직각에 가깝게 떨어졌다. 노리스의 미트에 그대로 빨려들어갔다면 스트라이크 존 꼭지점에 아주 정확하게 빨려들어갔을 것이다. 가드너의 뒤늦은 스윙이 미트에 들어가려던 공을 간신히 끄집어냈다. 하지만 공의 위력을 전혀 이겨내지 못했다.

[ 2루수 앞으로 흐릅니다. 밀러가 대쉬하면서 잡아내 1루로. 2루수 땅볼로 시즌을 시작하는 문입니다. 원 아웃. ]

좋아. 출발이 뜻대로 되었다. 지혁은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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