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12화 (113/204)

< 112 - Dominant. >

두 번째 타자로 타석에 들어선 선수는 개리 산체스. 지난해 메이저리그에 콜업되어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53경기에서 무려 20개의 홈런을 때려낸 어마어마한 파워의 소유자다. 산체스의 혜성 같은 등장 덕분에 양키스는 주전 포수인 브라이언 맥캔을 트레이드 시켜버릴 정도로, 그에게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지혁은 1루 쪽 양키스의 벤치로 시선을 슬쩍 돌렸다. 개리 산체스뿐만이 아니다. 오늘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그렉 버드, 애런 저지, 로날드 토레예스 같은 선수들은 모두 이제 막 메이저 맛을 보기 시작하는 어린 선수들이다. 양키스가 아주 오랫동안, 야심차게 준비해 온 ‘코어’ 유망주들이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헤이. 개리. 웰컴 투 메이저.”

하지만 마운드의 지혁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존의 양키스가 데리고 있었던 노장 선수들. 그러니까 데릭 지터나 에이로드, 텍세이라, 벨트란, 맥캔 같은 선수들은 전생의 지혁이 별로 마주치지 못했던 선수들이었다. 지혁과는 세대가 달랐던 선수들. 오히려 처음으로 상대해야 했던 시대의 아이콘들이 훨씬 더 버거웠다.

하지만 개리 산체스나 애런 저지 같은 선수들은 다르다. 지혁이 전생에서 뛸 때와 비슷한 세대를 이루었던 선수들이고, 그 말은, 그만큼 지혁도 저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혁에게는 훨씬 더 익숙한 라인업이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산체스의 약점. 나이를 먹어도 고쳐지지 않던 스윙의 사각지대. 무릎쪽을 파고들다가 마지막에 무브먼트를 보여주는 공. 지혁의 싱커가 정확하게 그 위치를 파고들었다.

탁!

[ 초구를 때립니다! 하지만 높이 솟는 공. 내야를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유격수 베컴이 옆으로 몇 걸음 옮겨가서... 그대로 잡아냅니다. 투 아웃. 공 네 개로 투 아웃을 만들어냅니다. ]

산체스는 물론 앞으로 더 성장할 선수지만, 지금의 산체스는 지혁이 보기엔 약점투성이다. 그것도 수많은 언론과 분석가들이 검증해 낸 공식적인 약점이 아주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어진 그렉 버드의 타석도 마찬가지다. 커다란 체구, 다리도 엄청나게 길고 팔도 긴 버드가 허리를 살짝 구부린 자세로 타석에 들어서 있는데 어디로 던져야 할지가 표시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스윙. 스트라이크 원.”

떠오르는 듯한 느낌까지 주는 높은 쪽 코스. 저 긴 다리와 긴 팔을 이용해서 낮게 떨어지는 공을 잘 퍼올리는 녀석이지만, 버드가 가진 지금의 스윙으로는 오히려 눈높이에 가까운 공에 반응하기 쉽지 않다. 더구나 그 공이 95마일을 넘어가는 빠른 패스트볼이라면 더더욱.

[ 2구. 높은 코스의 패스트볼. 볼입니다. 이번엔 참아내는 그렉 버드. ]

[ 와우. 구속을 좀 보세요, 마크. ]

[ 96마일이군요? ]

[ 문의 패스트볼 구속이 조금 올라간 것 같지 않나요? 스프링캠프에서도 93~94마일을 유지해 왔었거든요. 그런데 이건 지난해 전력투구를 할 때의 구속이란 말이죠. ]

[ 3구.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커브입니다. 체크스윙인가요? 스윙을 선언하는 주심. 스트라이크입니다. 얘기를 마저 해 보죠. 마침 자막이 나오는군요. 지난 시즌 문의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90.9 마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패스트볼은 93마일 밑으로 떨어진 공이 없네요. ]

“으쌰!”

4구. 지혁은 가장 빠른 구속의 공을 집어넣었다. 아슬아슬하게 존 근처에 걸친 공이 노리스의 미트에 정확하게 꽂혔다. 버드는 가장 먼 쪽에 꽂힌 공을 바라보며 움찔거렸고, 그 순간 심판도 스트라이크 존을 애매하게 설정한 듯 주춤거렸다.

[ 97마일! 스트라이크 콜! 루킹 삼진으로 그렉 버드를 돌려세우는 문입니다. 와, 97마일? ]

[ 농담인가요? 하하. 믿을 수 없네요. ]

[ 루키 오브 더 이어 출신의 깜짝 스타 문이 자신의 능력을 더 끌어올려 온 것 같습니다!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무리하는 문의 이 표정을 보세요.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

마운드 위에서 주심의 스트라이크 콜을 지켜보는 일. 그리고 그 순간 뒤돌아 전광판에 뜬 구속을 확인하는 일이 이렇게까지 짜릿한 일이었던가?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스스로 던진 공에 소름이 돋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97마일. 97마일이다. 156km다. 방금 그 공이 지혁의 손에서 떠난 게 정말 맞는 것인지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순식간에 날아가 타자의 스윙조차 무시한 채 미트를 찢을 것처럼 박히는 빠른 공을 던지는 게 이런 느낌이었다니. 황홀하다는 말로는 전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예에쓰!”

더그아웃으로 돌아와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마지막 공의 찌릿거리는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빨리 마운드에 올라가고 싶어서 온몸이 근질거렸다.

*

[ 그저께 열린 1차전은 초반부터 탬파베이가 대량 득점으로 앞서나갔습니다만, 이번 2차전은 정반대의 양상입니다. 치열한 투수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양 팀 스코어는 1대1. ]

[ 6회말까지 마친 사바시아의 오늘 투구는 그의 전성기 시절을 보는 것 같네요. 물론 구속은 그때보다 떨어졌지만, 구석구석을 찌르는 코너워크와 훌륭한 볼 배합으로 탬파베이의 타선을 돌려세우고 있습니다. ]

[ 사바시아의 투구도 훌륭하지만요.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탬파베이 타선의 리스크가 드러나고 있다고 봐도 될까요? 좌타자가 너무 많다는 점 말이죠. ]

[ 그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물론 한 경기로 판단하기는 힘들겠지만요. 좌완을 상대하기 위해 리키 윅스 주니어라던지 다니엘 로버트슨, 피터 버죠스 같은 우타자를 투입했습니다만 로건 모리슨이나 코리 디커슨의 공백은 확실히 느껴지네요. ]

[ 좌완 사바시아를 상대로 고전하고 있는 탬파베이. 하지만 마운드에 선 든든한 버팀목이 여전히 건재합니다. 문. 7회초에도 올라왔습니다. ]

6이닝 3피안타 1피홈런 1실점. 사사구는 하나도 없었다. 3회초 선두타자였던 체이스 헤들리는 아주 어려운 코스로 잘 던진 싱커를 퍼올렸다. 그 공은 운이 없게도 폴대 바로 옆을 스치며 넘어가버렸다. 정말 짧은 코스였다. 투수로서는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홈런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실점을 하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이후에 다섯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워 버렸다. 지혁은 그렇게 살려 나온 기세를 7회에도 그대로 이어갔다.

선두타자로 나선 그렉 버드를 상대로 던진 초구. 96마일의 패스트볼이 한가운데로 들어갔지만 버드가 스윙을 따라오지 못하고 큰 헛스윙. 경기가 후반으로 흘러왔지만 공의 구위는 죽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한 구였고, 이 공은 타석에 들어서야 하는 양키스의 타자들에게 강한 무력감을 전해줬다.

“좋아! 공격적으로 몰아쳐!”

관중석에서 들린 목소리였는지, 더그아웃에서 나온 목소리였는지, 아니면 등 뒤의 야수들이 외친 소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지혁의 귀에 들려온 그 말 그대로. 공격적으로 스트라이크 존을 공략해나갔다.

2구, 패스트볼. 94마일이 나온 공이 버드의 배꼽 앞을 스치며 빨려들었다. 간신히 커트해냈지만 뒤로 흐르는 파울. 그리고 3구. 변화구 타이밍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버드는 스트라이크 존 높은 쪽에 들어온 95마일짜리 강속구에 전혀 대처하지 못하고 힘없이 방망이를 거두었다.

[ 공 세 개로 스트라이크 아웃! 오늘 경기 탈삼진 8개째입니다. ]

다음 타자는 맷 홀리데이. 양키스에서 커리어의 마지막을 불태우기 위해 합류한 베테랑 타자.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베테랑이지만, 홀리데이도 배트의 스윙 스피드가 확연히 떨어져 있었다. 배트 컨트롤 같은 테크닉은 더 이상 흠 잡을 데가 없을 정도로 농익었지만, 젊음을 이겨낼 수 있는 파워가 떨어진 타자.

[ 패스트볼! 삼구삼진! 97마일짜리 패스트볼을 따라가지 못하는 맷 홀리데이입니다. 트로피카나 필드가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문입니다! ]

지혁은 완전히 기세를 탔다. 그리고 양키스의 타자들은 주눅들었다. 이미 공을 던지기 전부터 승부는 나 있는 상태였다. 단 한 개의 공도 힘을 빼면서 볼을 던지고 싶지 않을 지경이었다. 5번으로 나선 엘스버리를 상대로도 두 개의 공으로 파울 두 개를 만들어내며 순식간에 카운트를 몰아넣었다.

[ 거칠 것이 없는 문입니다. 이번에도 투 스트라이크를 선취합니다. 그리고 3구! ]

이번 이닝의 기록지는 깔끔할 것이다. 패스트볼 8개를 던졌고, 마지막 공은 눈높이에서 뚝 떨어지는 커브. 몸쪽 높은 공인 것처럼 출발했던 공이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에, 엘스버리는 몸을 비틀어 맞으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은 정확하게 노리스가 미트를 대고 있던 존 안쪽으로 빨려들었다. 그리고 지혁은 공이 미트에 빨려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머리를 완전히 고정한 채 홈플레이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예에에에쓰!”

“문! 문! 문!”

관중석이 들썩였다. 포수 뒤쪽에 앉은 관중들이 전부 일어나 자신의 저지를 흔들며 지혁의 이름을 연호했다.

[ 공 아홉 개로 삼진 세 개! 또 하나의 진기한 장면을 만들어내는 탬파베이의 문입니다. 오늘 그야말로 날을 잡았습니다! ]

[ 삼진 10개네요. 와우. ]

[ 스탠딩 오베이션이 나오네요. 관중들이 일어나는 게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

이번 시즌은 아주 느낌이 좋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며 마운드를 내려오는 지혁에게는, 누구나 다 알아챌 수 있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 무형의 기운을 뽑아내는 지혁을 향한 아낌없는 박수와 성원이 쏟아졌다. 돌아온 에이스의 품격이었다.

*

“문. 첫 등판인데 투구수는 이 정도면 적당해.”

“지금 몇 개죠?”

“92개.”

“한 이닝 정도 더 던질 수 있겠는데요?”

이온 음료를 단숨에 들이마신 지혁은 왼쪽 어깨를 주무르며 대답했다. 하지만 힉키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부상에서 복귀한 몸이야. 감독님은 7이닝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는데.”

분명, 시즌은 길다. 초반부터 투구수를 너무 많이 가져가는 건 시즌 후반에 분명 독이 되어 돌아올 여지가 충분하다. 랭카스터나 힉키의 생각은 너무나 명확하게 알고 있지만.

지혁은 대답하지 않고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운드에는 양키스의 핵심 불펜요원 중 한 명인 델린 베탄시스가 올라와 있고, 타석에는 루키 다니엘 로버트슨이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다.

“코치님. 전 이제 루키 애들을 이끌어줘야 할 만한 위치에 올라왔죠. 코치님이 말씀하신대로. 부담을 느끼면서 결과로 증명해야 할 자리에요.”

“하. 그래.”

“선수기용은 전적으로 감독님의 권한인 건 알지만...”

힉키는 이미 지혁의 의중을 읽은 듯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승리를 챙겨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좋아. 건의해 보지.”

“아이싱하지 않고 있겠습니다.”

로버트슨이 베탄시스의 춤추는 듯한 너클 커브를 따라가지 못하고 헛스윙으로 물러난다. 9번으로 나선 피터 버죠스도 마찬가지. 그리고 수자 주니어가 9구 승부 끝에 볼넷을 골라 출루할 때 즈음, 랭카스터와 이야기하던 힉키 코치가 다시 지혁에게 다가왔다.

“딱 한 이닝만 더. 100구를 넘기면 다음 이닝은 꿈도 꾸지 말라시네.”

“충분합니다. 혹시 8개로 막으면 한 이닝 더 가능한가요?”

“Come on, 문. 이제 겨우 첫 경기일 뿐이야.”

“하하. 농담이에요. 알겠습니다. 그 이상 욕심내지는 않을게요.”

키어마이어가 베탄시스의 초구 빠른볼을 공략했지만, 우익수 쪽으로 뻗어나가던 공에 힘이 빠지며 플라이로 물러난다. 그리고 지혁은 글러브를 집어들었다.

“한 이닝만 더.”

조금이라도 더 마운드에 있고 싶다. 마운드에 올라섰을 때 느껴지는, 상대 타자들의 공포감과 무력감을 조금 더 맛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마운드로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지혁이 교체되지 않고 다시 마운드로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관중들이 다시 한 번 열렬한 환호로 그를 맞아주었다.

[ 8회에도 탬파베이는 여전히 문으로 갑니다. 92구를 던졌는데, 아직 여력이 있다고 본 것 같군요! ]

[ 이전 이닝의 강력한 임팩트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투구수 9개로 삼진 3개를 만들어 낸 선수니까요. 여전히 구위가 살아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피칭 아니겠습니까. ]

[ 6번부터 시작합니다. 스탈린 카스트로. ]

카스트로를 처리하는 데도 공 세 개만이 필요했다. 제구가 살짝 흔들려 투 볼을 먼저 내준 상황이었지만 싱커의 무브먼트가 여전히 살았고, 배트의 밑둥에 맞춘 공은 지혁에게 그대로 돌아왔다. 원 아웃.

이어진 타석, 체이스 헤들리. 헤들리는 4구 째 높은 패스트볼을 건드렸다. 꽤 멀리 가는 타구였지만 외야에는 키어마이어가 있다. 한참 달려간 키어마이어는 여유 있게 공을 낚았다.

투 아웃, 8번 애런 저지. 초대형 유망주이자 양키스 팬들이 가장 기대하고 있는 유망주 순위에서 지난해의 산체스보다도 높은 위치에 자리한 저지는 어마어마한 덩치로 지혁을 위협했다. 하지만 그 역시 이미 말릴 수 없는 지혁의 투구에 힘없이 물러났다. 3루 땅볼.

[ 원더풀. 이 이상으로 문의 투구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8이닝동안 안타 3개만 내주며 1실점. 탈삼진은 10개. 완벽한 피칭입니다. ]

[ 양키스가 어제 오늘 고생을 상당히 많이 하네요. 하하. ]

“난 할 만큼 했다. 자식들아. 승리 좀 챙겨 줘라.”

지혁은 모자를 벗고 마운드를 내려오며 중얼거렸다. 첫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며 시즌을 시작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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