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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처리, 회귀하다-114화 (115/204)

< 114 - Asian Invasion. >

따아악!

호쾌한 타구음이다. 본능적인 환호가 더그아웃 여기저기서 튀어나왔고, 반대로 관중석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시즌 초반 탬파베이의 공격을 최일선에서 이끌고 있는 코리 디커슨이 또 다시 특유의 검객 타법을 선보였다. 첸 웨이인의 몸쪽 투심 패스트볼을 풀스윙으로 잡아당긴 타구는 말린스 파크의 우측 담장을 새카맣게 넘어가 버렸다.

“후오오오! 예쓰!”

최근의 폭발적인 질주는 탬파베이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을 자극시켰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자극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랭카스터 감독이었다. 안 그래도 야인에서 복귀한 이후 그 지도력에 의문을 품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기에 이번 시즌은 랭카스터 개인적으로도 중요한 시즌이었다. 그런데 기대하지 않았던 공격에서 훨씬 더 좋은 성적이 나오고 있으니, 그가 고무된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컴 온! 코리! 넌 최고야!”

랭카스터는 솥뚜껑 같은 손으로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디커슨의 엉덩이를 퍽퍽 때렸다. 저건 아마 좀 아플 거다. 디커슨의 이상하게 올라간 입꼬리도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분명히 기분은 좋을 것이다. 디커슨은 잔뜩 업된 목소리로 제일 끝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혁에게 말했다.

“슈퍼 문! 이 정도면 필요한 점수는 다 줬지?”

“하하. 오케이. 고마워, 코리. 나한테 맡겨.”

4회초 터진 디커슨의 쓰리런 홈런. 이 홈런으로 탬파베이는 4대0의 리드를 안게 되었고, 넉 점이라는 점수는 올해의 지혁에겐 든든하기 그지없는 점수였다. 지난해까지 소위 ‘에이스 대접’을 받는답시고 호투를 한 경기에서도 승리를 챙기지 못하고, 심지어 패전까지 떠안아야 했던 일을 떠올리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받았으면 나도 대접을 해 줘야지.”

자신감이 하늘 끝까지 치솟아 있다. 특히 2년을 소모해 빠른 공의 구속을 전반적으로 끌어올린 이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이후의 투구에서 지혁은 쓰리런 홈런을 선물 받은 대접이라도 하듯 여유 있는 피칭으로 아웃카운트를 잡아먹었다.

경기 초반 최고 97마일까지 나온 패스트볼을 앞세워 윽박지르는 피칭을 했다면, 중반에 들어서부터는 구속을 끌어올리지 않고 힘을 뺀 91~92마일의 패스트볼이 까다로운 코스를 찔렀다.

패스트볼처럼 날아오다가 홈플레이트에 한참 다가와 움직이며 빠져나가는 싱커는 빗맞은 공을 유발했고, 특히 주자를 둔 상황에서 효과를 봤다. 4회말 스탠튼을 상대로, 5회말 리얼무토를 상대로, 그리고 6회말 옐리치를 상대로 모두 병살타를 유도해낸 싱커는 이제 브랜든 웹이 전성기 시절 던지던 공 같은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 밀어칩니다, 하지만 2루수 정면. 브래드 밀러가 여유 있게 잡아서 1루에 천천히 던져줍니다. 7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는 문! 탬파베이의 연승에 다시 한 걸음을 추가할 것처럼 보입니다. ]

[ 엄청난 페이스네요. 오늘 경기에서의 7이닝을 던져서 벌써 51이닝을 책임지고 있어요. 그 동안 자책점은 8점에 불과합니다. ]

[ 놀라운 투구 내용이네요. 오늘도 마이애미를 꼼짝 못하게 틀어막았고 말이죠. 자, 경기는 8회로 갑니다. 원정팀 탬파베이가 5대0으로 리드하고 있습니다. ]

5월의 시작을 알리는 첫 경기인 마이애미와의 경기에서도 지혁은 자신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뽐냈다. 풀타임 첫 시즌에서 확인했던 공의 구위는 해를 거듭하면서 점점 더 좋아지고 있었고, 경기 운영과 볼 배합 싸움, 타이밍 싸움은 18년의 프로 경력이 있는 지혁에겐 가장 커다란 장점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화룡점정을 찍어준 패스트볼의 구속 상승.

존재감이 약할래야 약할 수가 없는 조건이 완성된 것이다. 4월 한 달의 기록을 줄 세운 성적표를 뽑아들면, 지혁의 이름은 수위권을 다투고 있다. 명백히, 리그의 에이스 중 하나로 손꼽힐 수 있게 된 셈이다. 지혁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선수들의 면면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휴스턴의 에이스. 사이영 위너 출신의 댈러스 카이클. 지난해 완전히 침몰했던 카이클은 올해 다시 재작년의 위엄을 되찾았다. 5승 무패, 1.21의 평균자책점.

보스턴으로 합류한 리그 대표 좌완, 크리스 세일. 불운의 아이콘이지만, 압도적인 탈삼진 능력을 바탕으로 WAR(선수 당 승리기여도), 조정방어율에서 리그 1위.

미네소타에서 부활하고 있는 어빈 산타나. 산타나에게 크게 기대한 사람은 없었으나, 왕년의 구위와 제구를 되찾으며 1점대 평균자책점과 4승을 쓸어 담았다.

그리고 그 밑에 한 무리를 이룬 선수들의 네임밸류도 결코 밀리지 않는다. 탬파베이의 에이스 크리스 아처, 작년 사이영 상 수상자인 릭 포셀로, 클루버가 부상으로 빠진 사이 클리블랜드의 에이스 자리를 꿰찬 카를로스 카라스코 같은 선수들이 있다. 이제 막 부상에서 회복하고 있는 데이비드 프라이스, 코리 클루버도 이 무리에 합류할 예정이고.

말로만 들어도 어마어마한 선수들이다. 그리고 그 선수들과 비교해서 지혁은 전혀 꿀리지 않는,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좋은 선수로 손꼽히고 있었다.

“문. 당신이 4월의 선수 후보로 뽑혔어요.”

“하. 그건 기대도 안 해요.”

“하하.”

마이애미 원정에서 돌아온 이후 모처럼 맞은 하루의 휴식일. 지혁은 구단이 오랫동안 요청해 왔던 지역 행사 중 하나에 참여하러 이동하고 있었다. 패트릭은 자신의 버릇대로, 수많은 자료들을 계속해서 검토하면서 이 말 저 말을 내뱉었다.

“계속해서 후보로 언급되고 있으니까. 혹시 모르는 일입니다.”

“이봐요. 패트릭. 당신답지 않네. 솔직히 이건 힘들잖아요?”

“그렇긴 하죠. 다만 난 조금 아쉬워서.”

“뭐가 아쉬워요? 어차피 당신이 데리고 있는 선수가 이 달의 선수를 수상할 텐데.”

“훗.”

패트릭은 부정하지 않았다. 지혁은 들고 있던 이번 시즌 투수 기록을 정리한 순위표를 내려놓았다. 분명 기분이 좋았다. 꿈도 못 꿀 만한 일이 현실이 되었으니까. 심지어 클레이튼 커쇼조차도 현재까지의 기록만 놓고 보면 지혁보다 밑에 있다. 꿈이라면 깨지 말았으면 싶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까지 훑어 봤던 대단한 투수들. 그리고 지혁. 이 모든 선수들보다 더 위에 자리한 존재가 한 명 있다. 평균자책점 0점대. 초반에 작은 어깨 통증으로 두 경기를 건너뛰었지만, 등판한 다섯 경기 중에서 두 경기를 완봉승으로 장식한 괴물.

‘후지...’

새까맣게 선팅을 한 창 밖을 바라보며, 지혁은 후지를 떠올렸다. 이미 보스턴의 초신성을 넘어서 리그를 폭격하는 투수로 자리잡은 존재. 후지 미유타. 여전히 전화를 할 때마다 실없는 목소리로 형이라고 부르는 녀석.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목소리와 표정으로 애교를 부리다가도 또 마운드에 올라가서는 괴물 같이 돌변하는 녀석.

후지가 이 달의 선수를 수상할 것이다. 등판 횟수가 적은 게 유일한 흠이지만, 성적만 놓고 보면 만장일치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다. 언론은 진작에 달아올랐다. 제 2의 린스컴이라는 수식어는 모든 매체에서 사용하는 공식 별명이 되어버렸고, 특히나 극성맞은 보스턴 지역의 언론과 팬덤 덕분에 이미 리그 최고의 투수로 손꼽히는 지경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보스턴으로 간 건 정말 최고의 선택이었지.’

지혁은 옆에서 노트북에 코를 박고 있는 패트릭을 한 번 돌아보았다.

“난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기를 원해요.”

후지의 한 마디만을 듣고, 후지에게 들어왔던 수많은 계약 제안서들 중 딱 세 개만을 남겨놓은 장본인이 바로 패트릭이었다. 뉴욕 양키스, 시카고 컵스, 그리고 보스턴 레드삭스의 것이었다.

패트릭이 세 구단을 택한 이유는 아주 명확했다. 세계 야구계에서 가장 강력한 팬덤을 보유한 팀, 그리고 그 팬덤의 강력한 의지를 한 곳으로 집중해 줄 지랄 맞은 언론이 존재하는 도시.

“당장 우승할 수 있는 팀으로 가야만 해요.”

후지의 이 말에 양키스의 계약서가 탈락했고.

“지혁이 형이랑 자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후지가 아주 작게 중얼거린 말에 컵스의 계약서도 치웠다. 그리고 패트릭의 냉철한 시선은, 언제나처럼 정확하고 날카로웠다. 보스턴은 자타공인 리그 최강팀이 되어 버렸고 후지가 그 최강팀을 앞장서서 이끄는 선수가 되었으니까.

‘후지의 입장에서는 좋은 선택이었던 건 맞는데. 하필이면 우리 지구일 건 또 뭐야.’

같은 아메리칸리그에 있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운데, 같은 지구라니. 후지와 패트릭의 일에 끼어들 수는 없었다. 이건 지혁의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후지가 보스턴으로 간 건 지혁에게는 아주 안 좋은 일이었다. 후지는 지혁과 자주 볼 수 있다며 좋아했지만, 그 말은 탬파베이 레이스가 후지가 이끄는 보스턴 레드삭스와 숱하게 마주쳐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번 시즌 탬파베이는 개막 초반에 보스턴을 만난 뒤 아직까지 만남이 없다. 어깨 통증이 있던 후지가 없었을 때의 보스턴을 만난 것이 천운이라면 천운일까? 작년, 지혁이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하고 난 후 후지의 보스턴을 상대했던 탬파베이는 그에게서 단 한 점도 빼앗아내지 못했다.

‘지금 타격 컨디션이 좋다고 해도... 후지한테 점수를 뽑을 수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팀이 매우 잘 나가고 있고, 지혁도 한 손 안에 꼽힐만큼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탬파베이 레이스보다 한 단계 높은 순위에 보스턴 레드삭스가 있고, 지혁보다 한 단계 높은 기록을 만들어내고 있는 후지 미유타가 있다. 벽은, 여전히 높다.

“문. 도착했어요.”

“여긴 벽이 왜 이렇게 높죠?”

“무슨 뜬금없는 소립니까? 병원에 담벼락이 있는 건 당연하잖아요. 그렇게 높지도 않은데요.”

“... 됐습니다.”

지혁이 차에서 내리자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구단 직원이 후다닥 달려왔다.

“어서 와요, 문. 크리스는 먼저 와서 안에서 기다리고 있고, 케빈은 아직 오고 있다네요. 자. 들어가요.”

“반가워요, 제이미. 당신도 고생이 많네요.”

“하하. 샐러리맨이란. 알죠?”

제이미라는 구단 직원은 자신의 다크 서클을 가리키며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곧장 얼굴색을 바꾸었다. 그는 구단의 이런 이벤트와 행사 프로모션을 오랫동안 담당해 온 프로페셔널이었다. 제이미는 발걸음을 옮기려는 지혁의 팔을 잡고 단단히 일렀다.

“자, 문. 병원 안으로 들어가면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표정 관리를 좀 해야 할 거예요. 알았죠? 지금은 뭐랄까, 좀 피곤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걱정이 있는 표정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조금 더 밝게. 부탁해요.”

제이미의 말대로다. 병원에 들어서자 지역 방송 기자들이 몰려 있는 간이 인터뷰장이 따로 설치되어 있고, 기자들이 바글바글하다. 이미 한 무리의 기자들은 크리스 아처를 둘러싸고 있다. 병원에 들어선 지혁을 발견한 한 무리의 기자들이 지혁에게로 카메라를 돌렸다.

“헤이, 크리스! 나 왔어.”

“슈퍼- 문! 헤이!”

아처는 인터뷰도 잠시 멈추고 지혁에게 다가와 요새 팀 내에서 유행하는 핸드쉐이크를 툭툭 해 보였다.

“여기서까지 해야 돼? 이거?”

“응. 애들이 엄청 좋아하거든.”

“이걸? 애들이?”

“아까 잠깐 병실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아이들이랑 이 핸드쉐이크만 수십 번은 했어. 하하.”

아주 잠깐의 이야기만 나눴을 뿐인데, 기자들 중 한 명이 참지 못하고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문지혁 선수. 아메리칸리그 이 달의 선수 후보에 오르셨는데요. 기분이 어떠신가요?”

“아, 뭐. 글쎄요. 영광스러운 일이죠. 저처럼 경력이 오래되지 않은 선수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요.”

“상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보스턴의 후지 미유타가 손꼽히고 있어요. 수상 가능성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후지는 좋은 투수예요. 엄청난 기록을 만들어냈고요. 저는 상에는 큰 욕심이 없습니다. 물론 주어지면 영광스럽게 받겠지만요. 제 기록에 자랑스럽지만, 후지가 받아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성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들과의 인터뷰는 케빈 키어마이어가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에이전트인 패트릭이 곁에 있어서 민감한 질문은 사전에 잘라낼 수 있었다는 점이랄까. 어쨌든 아처와 함께 키어마이어를 기다리던 지혁은 몇몇 기자들에게서 다음 날 기사의 헤드라인을 미리 엿들을 수 있었다.

‘Asian Invasion(아시아의 침공) - Fuji vs Moon.’

지혁이 신과의 가슴 떨리는 계약을 하는 동안, 뒷일을 생각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갈아 넣은 후지. 후지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최소한 후지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지혁의 앞을 막아서는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될 게 확실했다. 언론들이 대결 구도를 만들어 간다는 건 그 증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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