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 마녀. >
에반 롱고리아라는 팀의 상징이 있지만 그는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위대했지만 식상한 얼굴이기도 했다. 게다가 요새는 트레이드설까지 솔솔 피어나오고 있다. 탬파베이 구단은 새로운 얼굴을 내세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그렇다면 주인공이 되어야 할 선수들은 명확했다.
20대 선수들 중에서 팀의 유이한 장기계약자인 크리스 아처, 케빈 키어마이어. 그리고 지혁이다. 그렇기에 구단은 대외적인 행사에 세 선수를 자주 쓰고 싶어했다. 물론 경기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여야만 했지만. 어쨌든 그래서 오늘도 세 선수가 모인 것이다. 그리고 마이너리그 팀의 몇몇 선수들도 같이 모였다.
“와아아-!”
선수들이 병원 2층으로 올라섰다. 올라서자마자 보이는 따뜻한 파스텔톤의 벽지로 도배해 둔 커다란 휴게실에서 기다리던 아동용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이 선수들에게로 몰려들었다.
환자복이나 병원복이 아니라 유니폼까지 챙겨 입힌 제이미의 수완이 조금은 작위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막상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선수들은 그런 걸 느낄 겨를도 없었다. 아이들의 표정과 행동이 너무나 해맑아서, 아빠 미소가 걸리지 않으면 이상할 지경이었다.
“문! 문! 있잖아요, 어, 보스턴이 쎄요, 아니면 탬파베이가 쎄요? 어, 그리고 있잖아요!”
“문! 문은 슈퍼맨이에요? 우리 아빠가, 슈퍼문이 아니라 슈퍼맨이라고 맨날 그랬어요오~”
꼬마아이들의 어리광을 보고 있자니 야구 생각 같은 건 순식간에 싹 달아났다. 이렇게 해맑고 순수한 아이들이 어딘가 아파서 병원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서, 그래서 가슴이 더 먹먹했다.
후지와의 대결 구도를 만들어가려는 언론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려 했던 기분은 이미 날아가버렸다. 지혁과 선수들은 그렇게 아이들을 품에 안고 한참을 놀아주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가슴이 찌르르할 뿐이었다.
*
“슈퍼 문! 안 가면 안 돼요?”
“하하. 얘들아. 다음에 또 올게. 그 때는 선물도 많이 사가지고 올 테니까 그 때까지 씩씩하게 잘 있어.”
“히이잉. 무우우운~ 가지 마요~”
세인트 피터스버그의 외곽에 위치한 아동 병원. 마지막까지 매달리는 아이들과 사진을 찍어 주고, 한 번씩 안아주고 난 뒤에야 지혁은 간신히 문을 나섰다. 해맑은 아이들이 어린 나이부터 병원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아득해진다. 먹먹한 가슴으로 병원을 돌아섰다.
“시간 날 때마다 자주 찾아와야겠네.”
지혁은 중얼거렸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면서, 아주 다양한 순간에,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새삼스러운 감정이 차오르곤 한다. 지금도 그렇다. 이전의 생에는 팀 전체의 행사 차원에서 학교를 방문하거나, 아니면 쓰레기를 치우는 봉사활동을 하거나 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팀의 얼굴로 인정받은 선수들만 몇몇 초대해서 만든 자리는 경험해본 적이 없다.
이제 지혁은 누군가의 슈퍼스타다. 낯간지러운 닉네임이지만 지혁의 이름 앞에 덧붙은 ‘슈퍼’라는 닉네임도 그걸 가리켰다. 특히 병마와 싸우는 어린 아이들에게 그런 대상이 된다는 건 특별한 기분이었다.
조금 더 강한 책임감과, 조금 더 강한 의지를 불태우게 하는 그런 기분. 단순히 팀의 동료로써 느껴야 했던 부담이나 책임감과는 궤를 달리하는 특별함이 지혁을 사로잡았다.
조금 더 잘 해서, 조금 더 멋진 모습으로. 어떤 역경이나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슈퍼맨의 모습을. 저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건 참 멋진 일일 터다.
“문!”
잠시 동안 감상에 빠져 있을 틈도 없다는 듯, 패트릭이 지혁을 불렀다.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통화를 하면서도 나머지 한 손으로 그가 해야 할 일들을 부지런히 챙기면서.
“타요. 수고했습니다.”
“수고랄 건 없고. 자주 와야겠네요.”
패트릭은 지혁을 태우자마자 차를 몰았다.
“스타들이란 그래야죠. 특히 아이들한테는 꿈과 희망의 존재여야 하니까. 그나저나 이 곳이 마음에 들었다니 조금 의외네. 야구 말고 다른 건 생각도 안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요.”
“원래 그랬어요. 막상 눈을 돌려보니까 마음이 조금 달라진 거지.”
“그럼 구단에서 요청해 들어오는 행사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응해주겠습니다. 사인회도 있고, 방송도 있고... SNS를 통해 올라가는 라이브 스트리밍도 있어요. 내가 그 동안 커트해 왔었는데. 생각 바뀌면 언제든 말해요.”
“음... 네.”
“생각이 좀 바뀌었다니 마침 잘 됐네요. 흠.”
패트릭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랜디? 네, 패트릭 에이버리입니다.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론이죠. 아, 지금 가고 있어요. 그런데...”
누군가와 전화를 하던 패트릭은 지혁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문과 함께 가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어디를? 지혁은 의아한 눈으로 패트릭을 바라보았지만, 패트릭은 눈을 한 번 찡긋거리기만 한 채 전화를 이어갔다.
“그럼요. 네. 아뇨, 잠깐. 구단 사무실은 조금 꺼려지는데요. 아무래도 원정길 아니겠어요? 우리 입장에서는요. 이런, 랜디! 너무 그러지 마세요. 우리 모든 면에서 공정하게 하자고요. 좋아요. 이건 어때요? 내가 근사한 식사를 대접하죠. 아직 저녁 안 먹었죠?”
평소의 냉정하고 날카로운 패트릭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연극을 하는 것처럼 한 톤 높인 목소리로 통화를 이어나갔다. 뭐랄까, 조금 밝고 개방적인 사람처럼 보인다고 해야 하나?
“휘유.”
패트릭은 전화를 끊자마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낮은 한숨을 내쉬는 패트릭은 다시 원래의 말투로 지혁에게 말했다.
“자. 딜을 하러 갑시다.”
“무슨 딜이요? 아니, 지금 무슨 일을 꾸미는지부터 먼저 말해요. 랜디라는 사람은 대체 누구고, 또 왜 그렇게 가식적인 모습으로 통화를 했는지부터. 나랑 관련된 일인 건 맞죠?”
“당연하죠. 당신 일이 아니면 이 여자한테 잘 보여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여자? 랜디라는 그 사람 여자에요?”
“구단 직원이고, 매우 특별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죠. 앤드류 프리드먼의 직속 후배였던 사람이고, 지금 자리에 앉아 있는 체임 블룸보다도 선배였고. 물론 지금의 직급은 블룸보다는 낮지만요. 그리고 프리드먼이 랜디를 승진시킨 이후로, 단 한 차례도 인사이동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 전혀 감이 안 잡히는데요. 그냥 직설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패트릭은 정말 오래간만에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탬파베이 레이스의 재무담당국 연봉조정대상팀 팀장. 랜디 마가리타. 우리 같은 에이전트들은 마녀라고 부르는 사람이죠.”
“연봉...조정대상팀?”
고개를 끄덕인 패트릭은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온 틈을 타 지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만 묻죠. 탬파베이에서 장기계약을 제시했습니다. 할 겁니까?”
*
지혁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패트릭은 척 봐도 엄청나게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특별히 더 비쌀 게 분명한 작은 방으로 들어가 랜디 마가리타를 기다렸다.
“간단한. 미팅이라고. 했을 텐데요.”
지혁은 일부러 말을 끊어가며 중얼거렸다.
“긴장할 필요 없어요. 간단한 미팅입니다. 어쩌면 오늘은 계약과 관련한 말은 전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런 레스토랑까지 와야 하는 겁니까?”
“첫 인상을 남기는 자리니까.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게 나쁘게 작용할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후. 이런 데서 만나는 데 너무 간편한 복장인 게 마음에 걸리는데요.”
“하하. 조금도 신경 쓸 필요 없어요.”
패트릭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 바닥의 프로페셔널은 당신이 아니라 나니까. 그냥 편하게, 얼굴이나 한 번 본다고 생각해요.”
“랜디가 어떤 사람이지 설명이라도 좀 해 줘요.”
“흐음. 짧은 시간에 설명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닙니다. 랜디는.”
“그래도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 봐요.”
늦장을 부리는 패트릭을 보며 지혁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연봉조정대상팀의 팀장이라. 지혁은 롱고리아의 별명을 떠올렸다. 한국의 팬들은 그에게 ‘롱노예’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에반 롱고리아. 그 특별한 활약과 무게감, 상징성, 위압감, 신뢰감. 모든 것을 감안할 때 롱고리아의 계약은 헐값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계약이었다. 굉장히 작은 규모의 탬파베이 레이스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랬다. 6년 1750만 달러. 롱고리아만큼 팀에 강한 영향을 끼치는 선수가 다른 팀에서 받는 연봉에 비하면 이 이상 쌀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한 금액이다.
크리스 아처도 그렇다. 6년에 2550만 달러. 물론 서비스타임을 1년도 채우지 않은 상황에서 큰 규모의 계약을 맺은 선수긴 하지만, 장기적으로 꾸준히 사이영 컨텐더를 노릴 수 있는 투수의 연봉치고는 굉장히 싼 편이다.
이번 시즌에 돌입하기 직전 6년 장기계약을 맺은 케빈 키어마이어도 염가계약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6년 5000만 달러. WAR로 줄을 세우면 수비만으로도 10위권 안에 들어갈 수 있는 키어마이어는 이번 해 연봉이 고작 300만 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헐값이다. 만약 연봉조정 대상이 되어 중재에 들어갔다면? 아무리 못해도 6~700만 달러는 받지 않았을까?
“탬파베이는 항상 돈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돈이 없는 구단에서 아처나 키어마이어 같은 선수들을 잡아둘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 중에 한 명이 바로.”
패트릭은 방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일어섰다. 그러면서 낮게 속삭였다.
“저 사람. 랜디 마가리타죠.”
지혁은 정말 깜짝 놀랐다. 프리드먼 시절부터 일을 해 온 마녀라고 불리기에는 너무 젊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한 주먹 안에 들어갈 것 같이 작은 얼굴에 빛나는 것 같은 금발머리와 하얀 피부. 이 사람이 야구단 프런트에서 일한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조금은 까칠해 보이는 안경을 썼지만 어딜 가더라도 빠지지 않을 게 확실하다.
“문. 반가워요. 같은 팀에서 월급 받는 처지인데, 얼굴은 처음 보네요. 저는 랜디 마가리타예요. 탬파베이 레이스 프런트 오피스의 연봉조정대상팀장이죠.”
“아, 예. 반갑습니다. 문지혁입니다.”
“어머? 호호. 자기소개는. 우리 팀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가 그럴 필요는 없어요.”
“랜디. 반가워요. 우린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렇죠?”
“패트릭. 여전히 핸섬하네요.”
랜디는 패트릭을 바라보며 눈꼬리를 반달 모양으로 만들며 웃었다. 패트릭이 실수했다. 랜디가 마녀라고? 말도 안 되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그녀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가 있다면, 그게 바로 마녀일 것이다.
“앉아요. 오늘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 먹고 일만 했더니 배가 너무 고파서 안 되겠어요.”
“오, 당연하죠. 얼른 주문해요.”
몇몇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모임을 유쾌하게 만들어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랜디가 딱 그런 여자였다. 무슨 농담을 해도 랜디가 하면 재미있었고 웃음이 나왔다. 단순히 랜디가 아름다워서 그런 게 아니다. 대화술이라고 해야 할까? 입을 여는 순간 상대방을 순식간에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당기는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 바로 랜디 마가리타였다.
“그래서 케빈이 말했어요. 오, 랜디. 나는 우익수 자리에 문이 서 있어도 DRS(작자 주 ? 디펜시브 런 세이브, 수비를 객관적인 수치로 나타낼 수 있는 지표)에서 플러스를 거둘 수 있어요. 그래서 다음에 문을 우익수 자리에 세워 두고 펑고 타구를 쳐 보기로 했어요. 호호.”
“하하하. 키어마이어 허풍은 알아 줘야죠.”
“그렇죠? 문, 사람 볼 줄 아시는데요?”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로도 사람을 집중하게 만들고, 웃게 만드는 랜디 때문에 지혁도, 패트릭도 모처럼 환하게 웃으며 자리를 즐겼다. 웬만해서는 어떤 모임에도 잘 참가하지 않는 지혁이었지만, 만약 랜디 마가리타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개최한다면 참여하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고 흥미로운 자리였다. 식사는 환상적이었고, 대화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랜디는 아름다웠다.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패트릭, 문. 미안한데 아직 일이 남았어요. 구단으로 돌아가 봐야 해요.”
랜디 마가리타의 표정은 세상 모든 감정을 다 담고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오죽했으면 랜디보다 지혁이 더 아쉬웠을 지경이니까.
“그럼 일어나야죠. 당신처럼 바쁜 사람을 오래 붙잡아두고 있는 것도 실례니까.”
“패트릭. 당신 매너는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요. 나라도 반하겠어요.”
“그럴 일 없으면서, 생색은. 어쨌든 즐거웠어요. 오늘은... 아주 의미 있는 사전 미팅이었네요.”
“응? 무슨 말인지 난 잘 모르겠네요? 호호.”
랜디는 눈썹을 들어올리며 너스레를 떨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매무새를 한 번 만진 랜디는 지혁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자주 보고 싶어요, 문. 크리스나 케빈, 그리고 에반처럼요.”
“네, 그럼요. 당연한 말씀을. 하하. 언제든 환영입니다.”
랜디가 아쉬움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방문 너머로 사라지자, 순식간에 방의 분위기가 바뀌어버렸다. 새삼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의 이 방은 오로지 랜디의 무대였다는 것이.
“후우. 느낌이 어때요? 탬파베이의 마녀를 만난 느낌이?”
“음...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요?”
“당연하죠. 우리 둘 뿐인데.”
“처음 몇 분 동안은 당신 말이 실수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아니었어요. 저 여자는 마녀가 맞아요.”
“하하하! 좋습니다. 아주 의미 있는 출발이네요.”
패트릭은 차갑게 식은 스테이크를 포크로 집어 먹으며 말했다.
“재계약은 없는 겁니다. 저 마녀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지혁도 스테이크를 하나 집어 삼켰다.
“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