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16화 (117/204)

< 116 - 중요한 게 뭔데? >

랜디 마가리타와의 첫 번째 식사는 지혁과 패트릭 모두에게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남겼다. 랜디는 단 한 순간도 계약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속으로라도 계약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는지조차도 명확하지 않았다. 마치 오래 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듯이, 편안하고 재미있는 식사 자리를 가지기만 했다.

“계약 얘기를 조금이라도 끌어내 보려고 그 비싼 레스토랑의 비싼 방으로 들어갔는데도...”

패트릭도 쓴웃음을 지었다. 많은 에이전트들이 쓰는 방법이다. 비즈니스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환경으로 유도하는 것. 아직 계약 얘기를 꺼내기에 시기상조라는 건 랜디도, 패트릭도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급한 건 랜디다. 그런데도 랜디는 입도 꿈쩍 않은 것이다.

“그런데 패트릭. 나한테 장기계약을 제시하기는 할까요?”

“당연합니다. 당신 정도의 성적을 내는 투수를 잡아 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놓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구단에 돈이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조건이 괜찮다면 이야기를 들어볼 만은 하겠죠?”

“글쎄요. 나의 최소 요구치를 맞춰줄 만큼 여윳돈이 있지는 않을 겁니다.”

현재 지혁의 계약은 최소연봉에 걸려 있다. 풀타임 3년차인 올해를 마치면 연봉조정이 가능한 해로 접어든다.

메이저리그의 연봉조정신청 제도는 꽤나 독특하다. 선수가 요구하는 금액과 팀이 제시하는 금액 사이에서 타결을 짓지 못하면 연봉조정위원회로 선택권을 넘겨야 한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연봉조정위원회는 양측의 주장 중 보다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쪽을 선택해 준다.

만약 선수와 구단이 내용을 조율하지 못하고 연봉조정위원회로 결정권이 넘어가고 나면, 더 이상의 절충은 없다. 연봉조정위원회가 선택한 한 쪽의 연봉을 따라야만 한다.

그리고 지혁의 성적 추이를 살펴봤을 때, 지혁과 패트릭은 내년 연봉으로 최소한 700만 달러 이상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예상 성적을 아주 보수적으로 잡아도 그렇다.

탬파베이는 그 돈을 지급할 여유가 마땅치 않은 팀이다. 메이저리그를 통틀어 가장 가난한 구단 중 하나이고, 관중동원이 가장 떨어지는 팀이니까. 탬파베이의 재정으로는 지혁을 감당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탬파베이는 팀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할 선수들을 일찌감치 점찍어 저렴한 장기계약으로 묶어두는 선택을 한다. 연봉조정위원회로 넘어갔다가 감당할 수 없는 연봉을 지급하게 되면 시즌 전체의 계획이 흔들거리니까.

에반 롱고리아의 계약, 크리스 아처의, 케빈 키어마이어의 계약이 모두 그랬다. 이들은 제 3자가 보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한 계약으로 오랜 기간 팀에 남기로 했다. 그런 계약을 유도해 낸 장본인이 바로 랜디 마가리타이기 때문에, 에이전트들은 랜디를 마녀라고 부르는 것이다.

“당신이 팀에서 차지하는 존재감을 고려했을 때, 랜디가 계약을 제시할 수 있는 건 올해가 마지노선입니다. 이번 시즌이 끝나고 탬파베이가 제시하는 어떤 연봉도 말도 안 되는 조건이 되게끔 만들 수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제시하는 조건을 감당할 수 있는 여유도 없죠.”

지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뭔가 더 말을 꺼내려다가 말았다. 중요한 고민을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돈이 중요한가?

프로 선수에게 연봉은 자존심이다. 그리고 자존심이 아니기도 하다. 많은 연봉을 받는 건 선수의 가치를 증명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기도 하다. 오히려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특히 탬파베이 같은 스몰마켓에 몸담고 있는 구성원들은 더더욱 그렇게 생각한다. 돈이라는 건 언제나 만족감의 문제니까. 최소연봉을 받고 있는 지금조차도 억대 연봉이고, 살아가는 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정도로 부족하지 않다. 훨씬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는 롱고리아나 아처, 키어마이어가 탬파베이에 남은 이유는, 아마 돈보다 중요한 뭔가를 더 우선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조금 더 알아 볼 필요는 있겠네요.”

“좋아요. 그때까지는 무조건 보수적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굳이 당신이 나서서 계약을 해야겠다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어요.”

패트릭이 장기 계약을 하겠냐고 물어봤을 때, 지혁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일단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랜디와 첫 식사를 마치고 난 이후에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마음 한 구석에 남은 찝찝함을 다른 일로 덮어버리기로 했다. 패트릭은 당분간 페르난도 멘데스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클리블랜드에 머물기로 했고, 지혁은 야구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

“야, 문! 어제 랜디 마가리타랑 밥 먹었다며?”

“어? 어떻게 알았어요?”

“랜디가 내 와이프랑 친하거든. 어제 얘기를 들었나 보던데?”

롱고리아가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지혁에게 슬쩍 다가왔다.

“랜디는 처음 만났어?”

“음, 네.”

“재밌는 사람이지.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 하하.”

“유쾌한 여자던데요? 말도 잘 하고, 유머 센스도 좋고.”

“맞아. 사려 깊고, 센스도 있어. 엠마의 첫 번째 유모차도 랜디가 선물해 줬다니까.”

“와우.”

자타공인 딸바보인 롱고리아는 모자 안쪽에 자그맣게 붙여 놓은 엠마의 사진을 꺼내 다시 헤실거렸다. 참, 나. 저 표정은 야구장 위에서 압도적인 상징성을 뽐내는 롱고리아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딸이 그렇게나 좋을까. 아이가 참 예쁘고 천사 같긴 하네. 롱고리아의 어깨 너머로 사진을 흘깃 보던 지혁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에반. 랜디랑은 언제부터 친해졌어요?”

“아, 글쎄.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던 시즌이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2년째 시즌에 계약했죠?”

“응.”

“혹시 랜디가 그 때부터 당신의 가족들이랑 친했나요?”

“랜디? 음... 그랬지. 우리 가족들, 그 때 여자친구였던 내 와이프랑 다 같이 식사도 몇 번 했어. 우리 가족들도 랜디를 아주 좋아하셨고.”

“오케이. 알겠습니다.”

“이것 좀 봐, 문. 엠마가 처음으로 일어선 날이야...”

지혁은 몇 분 정도 롱고리아와 맞장구를 쳐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워닝 트랙을 따라 달리면서, 머릿속으로 랜디 마가리타를 떠올렸다.

지금 탬파베이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랜디를 참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지혁과 랜디는 고작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랜디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은 몇 번 더 만나면 풀릴 것이다.

“하아, 후우.”

우익수 쪽 폴대에서 좌익수 쪽 폴대까지 달린 지혁은 몸을 돌려 다시 반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탬파베이와의 계약을 떠올렸다.

만약 장기계약을 거절한다면? 탬파베이가 감당할 수 없는 연봉을 제시하고, 조금의 감정 싸움을 거치고, 그 연봉을 감당할 수 없게 된 탬파베이는... 아마 그를 트레이드할지도 모른다. 혹은 다른 선수들을 정리해 페이롤을 짜내고 짜내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고.

“트레이드라.”

트레이드. 트레이드. 지혁은 달리면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탬파베이는 좋은 팀이다. 생각이 열려 있고 젊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프런트가 있다. 랭카스터 감독과 코칭스태프들과도 정이 많이 들었다. 모두 좋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선수들도 그렇다. 지혁이 이번 생에 들어와 4년째 몸담고 있으면서 탬파베이 레이스라는 팀에 개인적으로 실망한 적은 단언컨대 없었다. 안 좋았던 기억을 짜내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문제는. 너무나 불확실한 팀이라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야구를 꾸준히 잘 할 수 있는 선수들이 팀에 몇 명 없다.

돈으로 채워야 할 부분을 유망주에게 기대야만 하는 팀이다. 물론 훌륭한 유망주 성장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팀이긴 하지만 유망주는 어디까지나 유망주일 뿐이다. 오랜 시간 메이저리그에서 검증이 된 선수들을 완벽하게 대체해달라고 바라는 것은 무리이고,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항상 전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팀인 것이다.

이번 시즌만 봐도 그렇다. 지난해 드디어 검증을 끝내고 메이저리그 정상급 선수가 된 2루수 로건 포사이드가 팀을 떠났다. 그도 연봉조정을 앞에 둔 채였다. 그리고 포사이드의 반대급부로 들어온 선수는 특급 유망주인 호세 드 레온이다. 포사이드의 빈자리는 유망주인 다니엘 로버트슨이나 포지션 변경을 한 브래드 밀러가 메우고 있다.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이다. 탬파베이는 언제나 언더독인 셈이다. 언제나. 돈이 없는 한, 영원히 그럴 수밖에 없다.

“후우.”

다시 우익수 쪽 폴대로 돌아온 지혁이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반대로 달려나갔다. 탬파베이에 남게 된다면, 월드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을까? 정상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을까? 그리고 나아가,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중요한 것을 찾아나가는 과정이었다.

*

- Let’s go rays! Let’s go rays!

비록 얼마 없는 관중들이지만, 1루 쪽 관중석에서 응원의 외침이 터져 나온다. 지혁의 등 뒤와 양 옆, 3개의 베이스에 모두 주자가 들어차 있었다. 3대3 동점 상황, 2아웃 만루. 타석에는 캔자스시티의 알렉스 고든. 오늘 지혁에게서 안타 두 개를 빼앗아 낸 선수였다.

‘싱커라고?’

포수 마스크를 쓴 수크레의 싸인이 오늘 이상하게 거슬렸다. 지혁의 리듬과는 묘하게 맞지 않는 요구가 몇 개 있었다. 그리고 쎄한 느낌이 들면 어김없이 안타를 맞거나 볼이 빠졌다. 싱커를 가리키는 싸인을 보자마자 가슴께가 싸한 느낌이 들어, 발을 빼며 로진을 다시 묻혔다. 뒤에서 야수들이 글러브를 치며 몇 마디 격려를 보내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다시 마운드에 서서 허리를 굽힌다. 수크레는 다시 싱커 싸인을 보냈다. 이게 벤치 쪽의 싸인인가 싶어 1루쪽 주자를 흘깃 살피며 벤치 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힉키는 미동도 없이 서 있다. 지혁은 수크레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수크레는 검지 하나로 손을 바꿔 들었다.

‘여기서 패스트볼이라...’

이미 100구를 훌쩍 넘어섰다. 물론 고든의 배트스윙 스피드가 아주 빠른 편은 아니지만, 구속이 상승한 지금의 공으로도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지혁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수크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커브 싸인을 보냈다. 그리고 커브 싸인을 보자마자 뭔가 기분이 착 안정되는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이고 자세를 잡았다. 수크레는 척 봐도 미심쩍다는 몸짓으로 포구 자세를 한 번 고쳐잡았다.

지혁의 엄지손가락이 힘차게 공을 튕겨올렸다. 힘이 조금 들어갔나 싶을 정도로 높게까지 치솟았던 공에 강한 탑 스핀이 걸리며 떨어져내리기 시작하고, 고든도 타이밍을 맞춰 배트를 출발시켰다. 무지개 같은 포물선을 그리는 공이 미트 앞까지 다다랐을 때 고든의 배트도 홈플레이트 위를 시원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강한 회전이 걸린 공은 마지막 순간에 조금 더 떨어지며 고든의 배트 아래를 통과했다.

[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알렉스 고든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면서 위기를 탈출하는 문입니다. 기어이 7이닝을 3실점으로 끊어냅니다. ]

[ 오늘 경기 내내 커브가 별로 말을 듣지 않았잖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커브를 선택했네요. 아주 과감하고 담대한 선택이었습니다. 떨어지는 커브에 고든이 따라오지 못했습니다. 무릎이 완전히 무너졌어요. ]

[ 캔자스시티 로얄스의 무서운 추격을 기어이 막아세웠습니다. 랭카스터 감독의 저 미소를 좀 보세요. 올 시즌 마운드에 서 있는 문은 정말 든든하게 느껴질 겁니다. 스코어는 여전히 3대3, 동점 상황이 유지됩니다. 이제 7회말 공격으로 갑니다. ]

“푸우. 다행이다.”

앞으로 달려나가는 힘을 억제하던 하반신에 힘이 풀리며 주저앉았다. 막아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경기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캔자스시티 로얄스와의 홈경기에서 지혁은 7이닝 동안 112개를 던지며 3실점했다. 4월의 페이스가 비상식적으로 좋았기에 오늘의 결과는 퍽 아쉬웠다.

물론 매일 완벽한 투구를 할 수는 없다. 괴물 같은 성적을 계속 유지하고 싶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은 아니다. 단순히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이든, 아니면 캔자스시티의 선수들이 컨디션이 좋았든. 페이스가 한풀 꺾인 건 분명했다.

더그아웃에 앉지 않고 곧장 클럽하우스로 빠져나왔다. 차가운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아내며 어깨에 아이싱 용 압박붕대를 둘둘 둘렀다.

“문, 마사지 하실 건가요?”

“아뇨. 경기 끝난 이후에요. 지금은 조금 쉬려고요.”

“네.”

근처에 대기하던 클러비 하나를 보내버린 뒤, 클럽하우스 안 쪽 TV에서 보스턴과 양키스의 동부지구 경기가 방송되는 것을 지켜보며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 헛스윙 삼진! 99마일, 한복판! 경기 끝납니다. 크레이그 킴브렐이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웁니다. 보스턴이 쾌조의 질주를 계속합니다. 오늘의 승리투수는 후지 미유타. 패전투수는 다나카 마사히로. 후지 미유타는 7이닝 동안 삼진 14개를 잡아냈습니다. 애런 저지에게 허용한 솔로 홈런 한 방을 제외하고는 완벽한 경기를 했습니다. ]

쓰읍. 입맛이 꽤 썼다. 저건 왜 페이스가 떨어지지도 않아?

후지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스크린을 통해 흘러나온다. 몇 초 동안 그 장면이 이어지다가,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보스턴의 다음 일정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뉴욕 양키스와의 3연전이 끝나고 나면 팬웨이 파크에서 탬파베이 레이스와의 4연전 시리즈가 예정되어 있다.

“그러면...”

왼쪽 어깨에 감아 둔 압박붕대를 주무르며, 계산했다. 지혁의 다음 등판은 아마 보스턴 원정일 것이다. 상대 투수는 후지 미유타일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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