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 빅뱅의 서막. >
5월 8일과 9일, 10일에 치러진 캔자스시티 로얄스와의 3연전에서 탬파베이는 루징 시리즈를 당했다. 굳이 지혁의 투구 내용만 그런 것이 아니라, 팀의 타격 싸이클도 조금씩 하락세로 돌아선 듯한 시리즈였다.
지혁이 선발 등판했던 첫 경기에서는 불펜 등판한 오스틴 프루잇이 패전을 뒤집어썼고, 두 번째 경기에서는 알렉스 콥이 6이닝 5실점으로 무너졌다. 마지막 경기에서 홈런 3개를 폭발시키며 분위기를 반등시키기는 했지만, 캔자스시티의 땜빵 선발인 메이니스를 공략했다는 점에서 완벽히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다.
이어진 시리즈는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원정 2연전. 선발 로테이션이 고약하게 꼬인 탓에 탬파베이의 5선발인 블레이크 스넬과 시애틀의 뉴 에이스 제임스 팩스턴이 맞붙었고, 전력 차이대로 패했다. 2차전에서 이와쿠마를 공략하며 1승 1패는 맞추었지만, 전체적으로 팀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동안 보스턴 레드삭스는 양키스와의 시리즈에서 2승 1패를 기록하며 페이스를 유지했다.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의 1위 보스턴은 2위 탬파베이와의 격차를 세 게임 반 차이로 넓히며 독주를 예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5월 14일. 미디어들이 주목하는 초대형 빅 매치가 다가왔다.
2017년 메이저리그 베이스볼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보스턴 레드삭스(후지 미유타, 6-0, 1.33) vs 탬파베이 레이스(문지혁, 6-0, 1.88).
*
13일 휴식일이 있는 건 탬파베이 레이스와 랭카스터 감독에게는 정말 다행이었다. 특히 최장거리 비행인 시애틀 원정길을 다녀온 직후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의 끝판왕, 보스턴과의 이번 시리즈가 의미하는 건 생각보다 더 크다.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거리가 충분했고, 반드시 이기고 싶은 경기다.
“우리는 도전자입니다. 보스턴이 우리보다 강하고, 보스턴의 페이스가 우리보다 좋습니다. 하지만 이번 도전에서 반드시 의미 있는 결과를 얻어내고 싶습니다.”
랭카스터가 신중한 표정으로 인터뷰했듯,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시리즈는 아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상황도 아니다. 보스턴의 전력이 탬파베이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투타의 밸런스도 완벽하게 잡혀 있고 불펜은 철벽이나 다름없다.
지난 시즌 MVP급 활약을 선보인 중견수 무키 베츠, 이번 시즌 신인왕을 점찍어 둔 거나 다름없다는 좌익수 앤드류 베닌텐디, 리그 최고의 유격수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젠더 보가츠. 세 명의 어린 선수가 타선을 이끌고 있고 더스틴 페드로이아와 헨리 라미레즈, 미치 모어랜드 같은 베테랑들이 중심을 잡는다.
투수진은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의 전력이다. 후지 미유타. 크리스 세일. 릭 포셀로. 드류 포머란츠와 스티븐 라이트로 구성된 로테이션에 이제 곧 프라이스도 DL에서 돌아오니까. 흠을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는 구성이다.
“대니. 질문 하나만 더 해도 될까요?”
“물론, 팀.”
“탬파베이 레이스가 지난해 후지 미유타를 상대로 두 경기를 만났습니다. 한 점도 뽑아내지 못했고, 안타도 두 게임에서 다섯 개를 쳐냈을 뿐이었는데요. 이번 시리즈 1차전에서 후지를 만납니다. 어떻게 대처하실 생각인가요?”
“흐음.”
랭카스터는 잠시 머뭇거렸다. 낯선 아시아인의 퍼포먼스에 메이저리그 전체가 당황했다. 아무도 이 현상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일본의 2군 선수였다는 듣도 보도 못한 선수가 갑자기 팀 린스컴이 되어 재림한 현상. 보스턴과 같은 지구에 속해 있는 팀들은 그 이해할 수 없는 기현상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좋은 투수입니다. 지금 리그에서 가장 도미넌트한 투수 중 한 명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게 공략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 타자들은 집중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후지를 상대로 기회가 많이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한 번의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놓치지 않고 점수로 연결시켜 준다면, 그것만 된다면 승산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보스턴의 타격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 모습이신 것 같네요?”
“리그에서 가장 도미넌트한 투수 중 다른 한 명이 우리 팀에도 있으니까요.”
“하하.”
기자들 중 몇몇이 웃었다. 랭카스터도 기자들을 상대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처음 탬파베이에 부임해서 미디어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때는 농담을 섞거나 회견장에서 웃는 행위는 일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년 부진한 성적을 겪으며 지긋지긋하게 물어뜯는 기자들과 안쓰러움을 공유한 모양이었다. 랭카스터는 간혹 이를 보이며 웃기도 하며, 자연스럽게 질문들의 초점을 지혁에게로 맞추었다.
“문! 마침 랭카스터 감독도 언급했으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질문하겠습니다.”
회견장의 모든 카메라와 시선이 랭카스터의 옆에 앉아 있는 지혁 쪽으로 돌아갔다. 지혁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랭카스터 감독을 쳐다봤다. 랭카스터는 웃으며 커다란 손으로 지혁의 등을 두드릴 뿐이다.
“네티즌들이 지난 한 달 동안 열광했던 게 바로 당신과 후지, 두 선수의 투구였습니다. ‘아시안 인베이젼 신드롬’이라고도 부르던데요. 맞대결을 앞두고 기분이 어떠신가요?”
“음. 사실 외부의 평가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제 성적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후지는 저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내고 있죠.”
지혁은 어색한 듯한 웃음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모자가 조금 들썩거렸고, 이건 인터뷰에 나오기 전부터 랭카스터 감독과 입을 맞춘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감독님도 말씀하셨던 대답을 저도 하고 싶네요. 저는 후지에게 도전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전해서 이겨내야겠죠.”
“오호.”
기자들의 손이 바빠졌다. 리그에서 패전을 기록하지 않고 있는, 1점대 방어율을 유지하고 있는 단 세 명의 선수. 후지 미유타, 문지혁, 그리고 댈러스 카이클. 다시 말해 지금 아메리칸리그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고 있는 투수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소심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으세요, 문. 공격은 아닙니다. 방금 발언은 조금 자신감이 떨어져 보이는데요. 혹시 다른 말씀을 추가하실 건 없으신가요?”
“글쎄요. 지금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승률이 높은 팀이 보스턴 아닌가요? 저는 지난해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던 컵스보다도 올해의 보스턴이 훨씬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보스턴이 최강팀이라고 생각하고, 그러니 조금 낮은 자세로 접근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 뿐입니다.”
“으흠.”
지금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두 투수의 대결 구도로 만들어가고 있는 언론들 입장에서는 조금 당혹스러울 법 했다. 빅뱅이라든지, 아니면 리그에서 가장 뜨거운 좌완과 가장 압도적인 우완이 만난다든지 하는 캐치프라이즈를 잔뜩 만들어낸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했을 터다. 랭카스터와 지혁, 그리고 탬파베이가 이렇게까지 잔뜩 웅크릴 것이라고는.
이후의 기자회견은 계속 비슷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기자들은 랭카스터 감독과 지혁이 보스턴을 자극하고 으르렁거리며 맞부딪히는 그림을 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철저하게 스스로를 낮추며 발톱과 이빨을 감추었다. 기자회견을 하면 으레 나오는 멘트인 ‘자신이 있다’거나 ‘이길 수 있다’ 같은 형식적인 대답도 듣지 못했다. 그저 ‘최선을 다하겠다’나 ‘열심히 하겠다’ 정도의 답변만 반복되었다.
그러니 기사도 그렇게 나올 수밖에.
보스턴 글로브로 대표되는 보스턴의 지역지에서는 이미 승부에서 8할의 우위를 점했다며 지혁과 랭카스터를 비웃기 시작했다. 탬파베이의 지역지는 최강자에게 도전하는 겸손한 자세라고 평가했지만, 결코 낙관적인 예상을 내놓지는 못했다.
“이 정도면 됐겠지?”
“네. 감독님. 충분해요.”
“역시 이런 건 내 스타일은 아니야. 뭐가 되든 들이받아야 하는데.”
“그건 경기장에서나 그렇게 하면 되죠. 중요한 건 후지를 조금이라도 흔드는 거니까요.”
기자회견을 마치고 팬웨이 파크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랭카스터는 조금 짜증을 냈다. 그는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었다. 기자들이 당황했던 것도, 그간 보여준 랭카스터의 방식과는 완전히 판이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몸을 완전히 낮추는 것은 지혁이 제안한 방법이었다. 물론 코치들과 프런트와의 교감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진행한 인터뷰였다. 만약 랭카스터가 평소처럼 인터뷰를 했다면, 지금쯤 언론은 마치 전쟁이라도 할 듯한 기세로 자극적인 기사들을 터뜨려 댔을 것이다.
“네 말처럼, 후지인가 뭔가 하는 애송이가 흔들렸으면 좋겠군.”
“저도요. 이렇게까지 했는데. 조금이라도 흐트러지길 기대해야죠.”
이렇게까지 몸을 굽히면서 보스턴의, 후지의 기를 살려준 것을 통해 지혁이 노리는 것은 딱 하나였다.
마운드에서 온전히 의식할 수 없는 자만심. 아주 실낱같은 것이라도, 무의식적인 것이라도 좋았다. 아주 조금이라도. 공 단 한 개라도. 허투루 던지게 만들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다.
지혁은 지난 생에 18년을 구르면서 온갖 비참한 경험을 다 했다. 마운드 위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모두 다 느껴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물론 지금도 마운드 위에만 올라서면 하루하루 새로운 감정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건 언젠가 경험해 봤던 감정이다.
하지만 후지는 그게 없다. 회귀를 한 투수도 아니고 언론을 많이 상대해 봤던 녀석도 아니다. 지금 린스컴의 독특한 폼에서 나오는 구위와 파괴력, 그리고 일본인 투수 특유의 제구력까지 겸비한 후지는 공의 능력으로 리그를 호령하고 있다.
지혁에게는 있고, 후지에게는 없는. 오로지 경험에서만 우러나올 수 있는 부분. 평정심을 유지하는 능력.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멘탈. 공략해야만 하는 것은 이 부분이다.
후지에게서 약점을 찾고 집요하게 물어뜯으려면. 우선적으로, 또 절대적으로 멘탈을 공략해야 한다. 방심을 유도하고, 자만심을 유발하고. 경기를 알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휘몰아 넣는다. 생각을 어지럽히고, 평정을 잃게 만들고, 공의 선택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후우우.”
팬웨이 파크에 도착한 지혁은 이 을씨년스러운 구장에 들어서서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경기 하루 전인데도 벌써부터 긴장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해야지. 여기서 못 잡고 가면 앞으로는 더 힘들어질 테니까.”
지혁과 후지의 첫 번째 맞대결. 동시대에 신의 영향을 받은 두 명이 같이 존재했던 것은 지금이 처음이고, 또 그 두 사람이 맞대결을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메이저리그의 상황, 아메리칸리그의 상황, 동부지구의 상황, 보스턴의 상황, 그리고 탬파베이의 상황. 모든 것을 통틀어 지금까지 가장 주목받는 매치업이라는 것보다도, 개인적인 입장이 훨씬 더 크게 다가온다.
후지는 결국 언젠가 넘어야만 할 존재였다. 지혁은 결코 하지 못했을 선택을 한, 선수 생명을 올-인한 존재. 어찌보면 극단적인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팬웨이 파크가 긴장감에 물들기 시작했다.
*
[ 선데이 나잇 베이스볼! 오늘 메이저리그를 시청하는 팬 여러분들께는 작은 축제와 다름없습니다. 내셔널리그에서는 전통의 라이벌인 다저스와 자이언츠가 맞붙습니다. 두 팀의 대결은 아주 클래식한 매치업이죠. ]
[ 전통 그 자체죠. ]
[ 그 매치업의 두 명의 주인공. 세계 최고의 투수 클레이튼 커쇼와 자이언츠의 심장인 매디슨 범가너입니다. 엄청난 대결이죠. ]
[ 아마 이 지구상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대단한 맞대결일 겁니다. ]
[ 하지만! 오늘의 이 경기를 주목하셔야 합니다. 아메리칸리그에서 가장 뜨거운 두 명, 그것도 두 명의 아시안이 이 경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일본산 괴물 후지 미유타. 그리고 탬파베이 레이스의 슈퍼 문, 문지혁. 두 선수 나란히 이번 시즌 6승 무패,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중입니다. ]
호들갑스러운 캐스터와 해설자의 만담이 끝나는 타이밍에 ESPN이 야심차게 준비한 두 선수의 하이라이트 필름이 절묘하게 흘러나온다. 마운드에 선 두 선수를 클로즈업한 얼굴에서 땀방울이 멋들어지게 흘러내리고, 지혁의 깔끔한 투구 동작과 후지의 역동적인 투구 동작이 한 화면에서 오버랩된다.
지혁의 왼팔에서 출발한 꿈틀거리는 싱커에 파란 불이 붙어 날아가고, 후지의 오른팔에서 출발한 대포알 같은 포심은 빨간 화염 속에 휩싸여 중앙으로 질주한다. 그리고 두 공이 만나 폭발하는 순간. 반으로 갈라지는 화면에 지혁과 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Asian Invasion. Prolusion of Big Bang.
(아시아의 침공, 빅뱅의 서막)
마치 SF 블록버스터 영화의 티져 영상을 보는 듯이 장엄하고 화려한 비디오 클립이 끝나고 나자, 일요일 밤의 빅매치를 관람하기 위해 팬웨이 파크를 가득 채운 관중석 쪽으로 카메라가 돌아간다. 보스턴을 상징하는 빨간 좌석과 빨간 유니폼을 입은 관중들이 한데 어울려 알아볼 수 없는 핏빛 파도가 너울거린다.
[ 많은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오늘 경기가 이번 시즌에서, 최소한 전반기에서는 가장 중요한 경기가 될 거라고 말이죠. 중요한 일전을 치러야 할 양 팀의 선발 라인업을 보시죠. 먼저 공격에 나서는 탬파베이 레이스입니다. ]
1. 코리 디커슨 ? DH
2. 케빈 키어마이어 ? CF
3. 에반 롱고리아 ? 3B
4. 스티븐 수자 주니어 ? RF
5. 로건 모리슨 ? 1B
6. 브래드 밀러 ? 2B
7. 팀 베컴 ? SS
8. 데릭 노리스 ? C
9. 콜비 라스무스 ? LF
[ 우완 투수인 후지에 상대하기 위해 탬파베이는 좌타자들이 대거 기용되었습니다. 브래드 밀러는 최근 성적이 좋지 않은데도 선발로 출장했고, 라스무스도 가벼운 부상이 있었지만 출장했네요. ]
[ 그나마 탬파베이는 좌타자 라인업이 더 강한 편이죠. 당연한 선택입니다. ]
[ 보스턴 레드삭스의 수비 위치도 한 번 보시죠. ]
1. 무키 베츠 ? RF
2. 더스틴 페드로이아 ? 2B
3. 젠더 보가츠 ? SS
4. 앤드류 베닌텐디 ? LF
5. 헨리 라미레즈 ? 1B
6. 파블로 산도발 ? 3B
7. 크리스 영 ? DH
8. 재키 브래들리 주니어 ? CF
9. 크리스티안 바스케즈 - C
[ 강합니다. 보스턴도 정말 강해요. 라인업을 보자마자 강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군요. ]
[ 특히 좌타자는 베닌텐디 한 명밖에 없죠. 좌투수인 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까다로울 겁니다. ]
[ 과연! 오늘의 이 경기는 누구의 승리로 돌아가게 될지. 어떤 대결이 펼쳐질 것인지. 일요일 밤, 모든 팬들의 시선이 이곳 보스턴으로 쏠려 있습니다. 광고 후에 시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