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 빅뱅(1). >
보스턴 상공에서 밤하늘을 비추는 카메라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어딜 보아도 별빛 하나 보이지 않는 그런 날씨였다. 달빛도 가려버린 회백색 먹구름으로 가득찬 보스턴의 밤은 어두침침하기만 하다.
하지만 카메라가 방향을 급격하게 틀어 아래를 비추자, 가로등들이 빛나고 있는 보스턴의 중심에 가장 화려하게 번쩍거리는 팬웨이 파크가 있다. 어둡고 쓸쓸한 느낌이 묻어나오던 화면에 완전히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외야의 한 쪽 구석이 도로에 잘려 있는 듯한 애매한 모형의 공간에는 녹색 잔디와 갈색 다이아몬드가 빛나고, 그 공간을 둘러싸고 새빨간 물감이 가득 차 있다.
카메라를 싣고 있는 드론이 급격하게 하강했다. 카메라의 줌이 순식간에 외야의 잔디를 지나쳐 마름모꼴 내야를 활강해 더그아웃의 입구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한 선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낡은 계단을 올라서 빨간 모자를 고쳐 쓰고는, 글러브를 허리에 끼우고 빠른 속도로 달려나온다.
- 이예에에에!
- 후지! 후지! 후지! 후지!
보스턴의 강력한 팬덤에게 지금 가장 큰 환호를 받는 사나이. 크리스 세일이나 데이비드 프라이스보다도 훨씬 더 환영을 받는 투수. 후지가 1회초 첫 투구를 위해 마운드에 올라섰다.
“코리. 만약 실투가 들어온다면 자신 있게 휘둘러. 그게 아니라면 최대한 공을 오래 보는 거야.”
“옛, 써.”
랭카스터는 직접 대기 타석까지 나가 한 쪽 무릎을 꿇고 후지의 연습 피칭을 바라보는 디커슨에게 소리를 내질렀다. 지금은 크게 소리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후지에게 큰 환호가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랭카스터는 고개를 끄덕인 디커슨의 헬멧을 두드려주고 자리로 돌아왔다.
“푸우. 짜증나는군.”
랭카스터는 입술을 털어냈다. 야구는 절대적인 게임이 아니다. 상대와 나의 전력 차이를 절대적으로 계량할 수는 없다. 어떤 팀이라도 열 번 싸우면 최소한 세 번은 이길 수 있는 스포츠고, 그렇기 때문에 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하느냐’다.
나만 잘 하면 이길 수 있는 스포츠가 야구였기 때문에, 랭카스터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항상 ‘오늘은 어떤 플레이를 어떻게 하자’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이번 대결은 너무나 중요해서, 마음가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나도 잘하고 상대도 잘하는 야구로 맞붙어서는 이길 수 있는 확률이 지나치게 적었다.
이 경기의 포인트는 후지를 흔드는 일. 평소의 후지처럼 공을 던질 수 없게 하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한 초반 포석은 절대적으로 투구수를 늘리는 것이다.
[ 드디어 경기가 시작됩니다. 타석에 탬파베이의 1번 타자 코리 디커슨이 들어섭니다. 이번 시즌 현재까지 타율 .313과 홈런 8개를 치고 있죠. 작년과 비교해서 훨씬 더 훌륭한 페이스입니다. 지금까지는요. ]
[ 그렇습니다. 콜로라도에서 이적한 이후 쿠어스 필드 효과를 누리지 못하면서 진면목이 드러났다는 평가가 있었는데요. 올해는 그 평가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있습니다. 특히 장타가 두드러지고 있죠? ]
[ 그렇습니다. 장타율이 .753입니다. 엄청난 수치죠. ]
지혁은 씁쓸한 마음으로 난간에 기대어 후지의 투구를 지켜보았다.
초구. 98마일, 포심 패스트볼. 바깥쪽에 살짝 걸친 스트라이크. 디커슨은 주문대로 그저 공을 바라보기만 했다. 2구. 몸쪽에서 마지막 순간에 살짝 말려들어가는 투심. 존 가장자리를 찌른 공에 이번에는 구심이 볼을 선언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같은 코스에 같은 공을 다시 꽂아넣은 후지는 이번에도 볼 판정을 받았다. 두 개 연속으로 아슬아슬한 공이 볼 판정을 받자 보스턴 관중들이 구심에게 긴 야유를 뿜어냈다.
[ 오늘 몸쪽이 조금 타이트한 것 같군요. ]
[ 그렇네요. 바깥쪽으로 다시 나가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
[ 4구! 다시 몸쪽! 이번엔 스트라이크. 손이 올라갑니다. 99마일. 하하. 포심을 꽂아넣었습니다. ]
[ 터프하게 승부하네요. 반 개 정도씩 넣었다 뺐다 하는 형태가 아니라, 잡아줄 때까지 힘으로 때려 넣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
[ 아직까지 스윙을 내지 않고 있는 디커슨. 후지의 5구, 파울. 간신히 맞췄습니다. ]
[ 저 체인지업도 대단합니다. 80마일 중반까지 나오는 빠른 공이 순식간에 멈춰버리는 기분일 거예요. 디커슨이 집중력이 좋았습니다. ]
후우. 보는 사람조차 안도의 한숨이 나오게 만드는 피칭이다. 집요하게 몸쪽을 노리는 빠른 공 위주의 투구를 고집하다가 바깥쪽에서 떨어져 내리는 체인지업. 디커슨이 타격감이 좋은 타자가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밸런스가 무너졌을 것이다.
“좋아, 코리! 커트 잘 했어!”
오늘 휴식일인 크리스 아처가 난간을 뛰어넘어 나가서 박수를 치며 소리를 질러댔다. 디커슨은 아처의 말을 듣기라도 했는지, 다음 공으로 들어온 100마일의 포심도 커트해냈다.
[ 디커슨이 방망이를 짧게 잡고 있네요. 장타를 조금 포기하더라도 출루에 신경을 쓰겠다는 뜻일까요? ]
평소 방망이를 길게 잡고 맞든 아니든 풀스윙을 휘두른 디커슨은 접근 방식을 바꾸었다. 한 뼘은 짧게 잡은 방망이를 가지고 끈덕지게 물어졌다. 6구와 7구도 파울을 만들어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8구째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크게 헛친 디커슨은 삼진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디커슨이 첫 타석에 보여준 의지만큼은 명백했다. 탬파베이와 랭카스터는 이 경기를 7회 이후의 싸움으로 보고 있었다. 키어마이어도, 롱고리아도. 모두 같은 전략으로 타석에 들어섰다.
*
[ 1회말 보스턴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타석엔 무키 베츠. 자. 후지 미유타는 1회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웠습니다. 파괴력을 그대로 증명했는데요. 과연 슈퍼 문은 어떤 피칭을 보여줄까요. ]
지혁은 깊은 심호흡을 여러 번 하며 팬웨이 파크에 아로새겨진 보스턴 타자들의 라인업을 되짚었다. 후지와 직접적인 맞대결을 펼쳐야 하는 타자들이 자존심을 조금 굽히면서까지 그를 괴롭히기로 했다. 랭카스터도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질척질척한 야구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결정은, 지혁이 보스턴의 타선을 상대로 점수를 주지 않고 버티는 것을 절대적인 전제로 하고 있었다. 지혁이 일찌감치 리드를 허용해버리면, 후지는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먹고 치려면 치라는 식의 투구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런 흐름으로 간다면 안 그래도 낮은 확률은 더욱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한 점도 주지 않는 투구를 한다. 그게 투수에게 얼마나 큰 압박으로 돌아오는지를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 문의 초구. 싱커입니다. 베츠의 무릎 높이를 파고 들어가는 싱커. 91마일입니다. ]
[ 올 시즌 패스트볼의 구속이 좋아졌고 작년부터 던진 커브도 좋은 공이지만, 역시 문의 트레이드 마크라면 바로 저 싱커입니다. 지금 공 보세요. 휘둘러서 맞췄다면 꼼짝없이 3루 땅볼입니다. ]
포수인 데릭 노리스는 최대한 점수를 주고 싶지 않아하는 지혁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듯, 계속해서 싱커 승부를 이어갔다. 큰 것 한 방의 위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공이 싱커니까. 패스트볼이나 커브는 한 번 제대로 맞으면 멀리 날아가지만, 싱커는 아니다.
파악!
4구 연속으로 싱커를 던지자 베츠도 참지 못하고 방망이를 냈다. 하지만 손잡이 안쪽에 맞은 공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베츠의 방망이를 산산조각 냈다.
[ 유격수가 앞으로 대쉬, 팀 베컴이 주워들고 1루로! 베츠를 잡아냅니다. 첫 타자부터 방망이를 부러뜨리는 문. 가볍게 시작합니다. ]
[ 심상치 않네요. 하하. ]
두 번째 타자인 페드로이아는 체구가 작고 무릎도 잔뜩 굽히는 편이라 낮은 쪽을 공략하기 쉽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이것저것 잴 이유가 없다.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다. 지혁은 계속해서 낮은 쪽에서 움직임이 심한 싱커를 던졌다.
“파울!”
“파울!”
“볼.”
“파울!”
페드로이아도 베테랑답게 조준해야 할 공을 명확하게 정한 듯 했다. 마지막에 빠져나가는 싱커는 어떻게든 건드려 바깥으로 내보내고, 존 아래로 떨어지는 공에는 체크스윙까지 나오지 않고 참아내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싱커. 여기서는 그래도 싱커야.”
굽힐 수는 없지. 지혁은 이를 악물고 더 힘차게 팔을 비틀었다. 마지막 순간에 실밥을 때리는 손아귀에도 더 강한 힘을 줬다. 한 발이라도 먼저 밀려나지 않을 각오다.
[ 밀어칩니다, 하지만 2루수 밀러가 기다립니다. 오! 한 번 떨어뜨립니다만 황급히 다시 잡아서 1루로. 아웃. 살짝 더듬었습니다만 처리했습니다. ]
[ 이런 경기에서는 실책 하나가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칩니다. 밀러뿐만 아니라 양 팀 수비수들이 모두 바짝 긴장하고 있어야 할 거예요. 벌써부터 분위기가 뜨겁지 않습니까? ]
[ 말씀대로입니다. 보스턴의 3번, 이번 시즌 타율 .355를 기록하고 있는 젠더 보가츠가 들어옵니다. 이번 시즌 보스턴에서 가장 뜨거운 타자죠. ]
[ 개막 전 WBC에 참가했던 선수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페이스입니다. 타격감이 최고조에 다다랐어요. 요새 스윙이 완벽합니다. ]
[ 양키스와의 3연전 시리즈에서 16타석에 들어서 안타 7개를 뽑았습니다. 그 중 홈런이 2개였네요. 과연 오늘은 어떨까요? ]
보가츠는 자신만만했다. 초구부터 과감하게 스윙을 돌렸다. 다분히 싱커를 의식한 어퍼 스윙이었지만, 오늘 지혁의 공은 만만치 않았다. 그냥 보스턴을 상대로만 해도 지고 싶지 않았을 텐데, 상대 투수가 후지다 보니 오늘은 절대 질 수 없다는 의지가 강하게 담겨 있었다.
[ 초구, 빠른 타구! 유격수 정면. 라인드라이브로 그대로 움켜쥡니다. 문도 세 타자를 깔끔하게 돌려세우면서 1회를 마무리합니다. 오늘 주목받았던 양 팀의 두 투수 모두 1회를 완벽하게 출발합니다. ]
[ 벌써부터 느낌이 나네요. 대단한 경기가 될 것 같습니다. ]
지혁은 모자를 벗으며 팬웨이 파크의 무대에서 내려왔다. 후지가 세 명을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기세를 올렸고, 지혁은 세 명을 내야 안에서 처리하며 응수했다. 두 사람의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
2회초.
스티븐 수자 주니어, 우익수 플라이. 로건 모리슨, 삼진. 브래드 밀러, 삼진.
2회말.
앤드류 베닌텐디, 1루수 파울플라이. 헨리 라미레즈, 몸에 맞는 공. 파블로 산도발, 6-4-3 병살타.
3회초.
팀 베컴, 3루수 앞 내야안타. 데릭 노리스, 삼진. 콜비 라스무스, 중견수 플라이. 코리 디커슨, 삼진.
3회말.
크리스 영, 투수 땅볼. 재키 브래들리 주니어, 3루수 땅볼. 크리스티안 바스케즈, 유격수 땅볼.
4회초.
케빈 키어마이어, 삼진. 에반 롱고리아, 유격수 땅볼. 스티븐 수자 주니어, 3루수 직선타.
4회말.
무키 베츠, 기습번트 안타. 더스틴 페드로이아, 희생번트. 젠더 보가츠, 3루수 플라이. 앤드류 베닌텐디, 삼진.
*
양 팀 투수 모두 빗맞은 안타만 하나씩 허용했고, 자신의 스타일로 상대 타선을 찍어눌렀다. 지혁의 싱커는 점점 더 변칙적인 움직임으로 춤을 췄고, 후지의 포심 패스트볼은 이닝을 거듭하면 할수록 더 파워가 넘치는 듯 보였다. 보스턴의 심장부인 팬웨이 파크가 점점 더 고요해져 갔다. 숨 막히는 승부에 마음을 졸이는 사람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이다.
반면 멀리 떨어진 플로리다의 세인트 피터스버그에서 모니터 너머로 그 승부를 지켜봐야 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시끄럽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미키 볼드는 업무를 가장한 농담따먹기를 하고 있는 사원들을 있는 힘껏 째려본 이후 TV의 볼륨을 키웠다.
“팀장님! 새 보고입니다. 이것 좀 보세요. 실시간 해쉬태그 데이터 중에 1위, 3위, 4위를 다 문이 차지하고 있어요. 미쳤네, 미쳤어. 하하. 난리 났어요.”
“웃어?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탬파베이의 마케팅팀 담당의 신입사원 중 하나가 휴대폰의 SNS를 가리키며 웃자, 대머리 팀장인 미키 볼드가 눈썹을 휘날리며 그를 타박했다. SNS가 불타오르는 건 물론 좋은 일이지만. 볼드는 탬파베이의 녹을 먹고 살고 있는 한 지금 마운드 위의 상황보다 더 중요한 건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MLB 네트워크 동시접속자 수 얼마야?”
“계속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어요. 다저스 대 자이언츠의 경기가 쫄딱 망했어요. 커쇼가 3실점, 범가너가 6실점. 이렇게 무너진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네요. 그쪽에서 빠져나온 시청자들이 우리 경기로 들어오고 있나 봐요.”
“타당한 추측이네. 광고는?”
“절 미치게 만들고 있죠. 이 광고는 넘길 수도 없게 만들었다구요! MLB 네트워크도 일을 참... 오, 이런. 또 트래픽 다운이네요. 다시 보려면 30초짜리 광고를 다 봐야 해요. Holy shit!”
“그래. 그건 아주 잘 됐네. 광고가 미친 듯이 팔린다는 얘기니까.”
볼드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에 송송 난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미키! 현재 상황은 어때요?”
“아, 체임?”
프리드먼한테 고약한 것만 배웠군.
볼드는 중얼거리며 문을 박차고 들어온 체임 블룸을 맞이했다. 프리드먼은 경기 중 SNS를 담당하는 마케팅 팀을 찾는 걸 좋아라했다. 볼드가 40년 넘게 야구만 봐 온 야구광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기 도중에 가장 많은 돈이 들어오는 곳이 바로 SNS와 유투브였으니까.
하지만 프리드먼은 볼드가 야구를 어떻게 보는지 이야기하는 걸 듣는 걸 좋아라했다. 그리고 프리드먼이 데리고 다니던 블룸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정확하게 50 대 50. 이 승부의 결과는 신도 모를걸요.”
“좋네요. 신께 커피라도 좀 바칠까요? 우리 쪽으로 웃어 달라고.”
“농담이 실없는 것도...”
프리드먼을 닮았구만. 볼드는 속으로만 웅얼거렸다.
“그나저나... 저 친구는 여길 또 왜 왔죠?”
볼드는 문을 열고 커피를 한 아름 사들고 들어오는 랜디 마가리타를 가리켰다.
“야구는 같이 봐야 재밌죠. 신에게 커피도 바칠 겸, 당신 이야기도 들을 겸, 랜디에게 당부도 할 겸. 어쩌다 보니 여기서 모이게 됐네요. 하하.”
체임 블룸은 너드처럼 웃었다. 랜디 마가리타가 SNS 팀에게 커피를 하나씩 돌리는 동안, 탬파베이의 5회초 공격도 소득 없이 끝났다. 세 타자가 무기력하게 물러났다.
“휘유. 슈퍼 문. 한 방 제대로 먹여 줘.”
볼드의 웅얼거림과 함께, 5회말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