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19화 (120/204)

< 119 - 빅뱅(2). >

5회말, 선두타자는 5번, 헨리 라미레즈.

마치 보스턴의 전설적인 타자 중 한 명이었던 매니 라미레즈처럼 머리를 땋아 치렁치렁 늘어뜨린 그가 뒤뚱거리며 타석에 들어섰다. 풍선껌을 쫙쫙 씹어대는 폼에서 그의 악동 기질이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다. 그리고 여느 베테랑과 악동들이 그러하듯이 타석에 들어서면서부터 지혁을 잡아먹을 것처럼 째려본다.

기싸움이라면 피할 이유가 없는 지혁도 헨리를 노려보며 마운드에서 준비를 마쳤다. 헨리는 전성기에서 많이 벗어난 타자다. 그런데도 지난 시즌 30홈런을 때려냈으니, 그의 천재적인 타격 재능만큼은 인정해 줘야 한다. 어려운 승부를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은 1회나 지금이나 똑같다. 아직 후지를 공략하지 못했으니까.

“볼.”

헨리 라미레즈의 몸쪽을 찔러 들어간 포심 패스트볼은 분명히 플레이트를 스쳐 들어갔다. 하지만 구심은 태연하게 몸을 일으키며 볼을 외친다.

“왜?”

지혁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구심도 사람이고, 슬슬 분위기에 영향을 받을 때가 되기는 했다. 하지만 방금 전 공 같은 꽉 찬 공에 손을 들어주지 않으면 이 타석의 플랜이 어그러진다. 골치가 조금 아파졌다.

‘다시 넣어 봐.’

노리스의 싸인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같은 코스, 같은 공.

지혁도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한 공에 볼 판정을 받은 오기가 반 정도 담겼고, 이 코스로 스트라이크를 잡아내야만 반대편에서 움직이는 싱커가 효과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반 정도 담겼다. 우타자의 몸쪽 낮은 쪽을 노리는 크로스카운터... 이런. 잠깐.

“씨바.”

지혁이 와인드업에 들어가는 순간, 앞발을 약간 닫아 두었던 헨리가 상체와 허리를 슬그머니 열었다. 살짝 든 왼쪽 다리가 평소 놓여야 하는 지점보다 약간 바깥쪽에 놓이고, 공이 품에 달려들 때까지 끝까지 기다리고 있던 배트가 벼락처럼 몰아쳤다.

헨리는 알고 있었다. 방금 전의 그 공은 분명한 스트라이크였다는 것을. 그리고 베테랑만이 느낄 수 있는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같은 코스로 다시 들어올 것을 예감하고, 미리 앞발을 열어놓은 타격자세.

특유의 강한 손목 힘으로 공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휘두르는 헨리의 스타일이 빛을 발했다. 원래대로라면 꽉 찬 몸쪽 코스의 공이었어야 할 패스트볼은 헨리가 휘두르는 순간 스윗 스팟에 정확하게 맞는 중앙에 자리했다.

따아악!

“제발. 제발. 제발 넘어가지 마.”

아웃이 될 궤적은 절대로 아니었다. 까마득하게 솟구친 공이 넘어가지 않고 야구장 안으로 도로 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할 마지막 보루는 오로지 좌측의 압도적으로 높이 솟은 펜스 뿐이다. 그린 몬스터. 보스턴의 상징이고 팬웨이 파크의 명물인 저 높은 장벽이 공을 막아주는 수밖에 없다. 지혁은 좌익수 쪽을 애타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좌익수 콜비 라스무스는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부터 바로 잡아내려는 생각은 버렸다. 타구의 궤적을 쫓으면서, 만약 그린 몬스터에 공이 맞고 떨어진다면 그 낙구 지점은 어디인지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공이 휘는 정도, 휘어지는 방향, 공의 스핀을 고려했을 때 펜스에 맞고 떨어질 위치.

그리고 나서는 거대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공을 기다릴 뿐이었다. 간절한 바람이 통했을까. 3층 높이의 그린 몬스터 최상단을 때린 타구가 그대로 수직 낙하했다.

헨리는 건방지게도 타구를 바라보며 처음 몇 발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 맞는 순간에는, 패스트볼을 들어올리는 바로 그 순간에는 무조건 넘어갔다고 확신했는지도 모른다. 만약 작년의 패스트볼을 던졌다면 헨리의 타구는 지금까지도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구속도 끌어올렸고, 그만큼 공에 실리는 힘도 좋아졌던 게 마지막에 지혁을 살렸다.

[ 이 타구! 좌측! 그린 몬스터... 상단에 맞고 떨어집니다! ]

[ 워후. 운이 좋네요, 탬파베이. ]

[ 라스무스가 곧장 캐치합니다. 그대로 2루로 뿌려 봅니다! 승부가 되나요? ]

그리고 감히 야구 앞에서 건방졌다면, 응당 책임을 져야 했다.

헨리는 뒤늦게 1루를 통과해 2루로 달렸지만 펜스플레이를 완벽하게 준비하고 있던 라스무스는 공을 잡자마자 곧장 디딤발을 디뎠다. 한 스텝도 딛지 않고 그 자리에서 2루로 총알 같은 송구를 뿌려넣었다. 외야에서부터 쏘아져 오는 공이 지혁의 눈에는 마치 아롤디스 채프먼의 미사일처럼 보였다.

퍼엉!

촤르르윽.

2루에서 공과 선수가 만났다. 2루수 밀러가 공을 받으면서 글러브를 베이스 위에 댄 순간 헨리 라미레즈의 스파이크도 베이스 위에 닿았다. 비대한 몸집의 헨리가 일으킨 흙먼지가 작게 피어올랐다가 사뿐하게 내려앉는 순간, 2루심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웃!”

“What? Hell no!”

헨리는 곧장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 요청에 의한 판정에서도 번복은 없었다. 자신의 오만한 주루 탓에 초대형 타구를 치고도 객사한 헨리는 뚱한 표정으로 더그아웃으로 복귀했다. 팬웨이 파크의 관중들은 헨리에게 보내는 것인지 심판에게 보내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긴 야유를 쏟아냈다.

“살았다. 진짜 위험했네.”

베테랑다운 노림수를 가지고 나온 헨리가 베테랑답지 않은 주루로 지혁을 살렸다. 그야말로 천당과 지옥을 오간 기분이다. 다시 마운드에 서서 또 다른 베테랑 플레이어 산도발을 지켜보면서, 벌렁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했다.

흐읍. 흐으읍.

입술을 꽉 다물고 코로만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 지혁은 끊임없이 되뇌었다.

“지금의 내가 후지보다 나은 건 멘탈밖에 없어. 멘탈이 흔들리면 안 돼. 멘탈이야.”

다른 구장이었으면 꼼짝없이 홈런이었을 타구를 맞고, 그 다음 공을 어떻게 던질 수 있느냐. 여기서 후지와의 차이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스트라이크!”

[ 초구! 헛칩니다. 산도발. 공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와, 지금... 98마일? 98마일입니다. 문의 최고구속 아닌가요? ]

[ 한복판에 들어갔는데 놓쳤네요. 아마 방금 전 타구를 허용한 뒤에 문이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인데요? ]

[ 문. 대단합니다. 두 번째 공, 헛스윙! 산도발이 패스트볼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지금은 97마일입니다. 높은 패스트볼 두 개로 단숨에 카운트를 몰아넣는 문. ]

신중하자. 지혁은 노리스의 패스트볼 싸인을 거절했다. 지금 산도발이 패스트볼에 전혀 따라오지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방금 헨리의 타구가 머리에 남았다. 같은 코스의 같은 공을 고집해서 크게 데일 뻔 했는데 또 비슷하게 갈 수는 없지.

그래서 선택은, 커브였다. 오늘 경기에서는 다섯 개도 던지지 않았던 공. 그리고 이번엔 허를 제대로 찔렀다. 이미 공이 떨어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산도발은 타격을 포기하고 더그아웃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루킹 삼진.

탬파베이 더그아웃의 모든 선수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슈퍼 문이었다.

*

“예쓰!”

“호우! 씨부랄, 이것 참, 심장이 벌렁거리네.”

6회말, 주자 두 명을 쌓아놓은 상태에서 앤드류 베닌텐디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운 문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마운드를 내려간다. TV 모니터를 통해 그 장면을 바라보던 미키 볼드는 옆에 체임 블룸과 랜디 마가리타가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욕설을 내뱉었다.

“호호.”

랜디가 유쾌하게 웃자, 볼드는 멋쩍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원래 야구를 볼 때는 원초적인 감정에 충실해야 하는 거라고. 술도 좀 하고, 담배도 피우고 하면서...”

“그랬다간 꼼짝없이 해고당할 걸요? 여기서 그랬다간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지. 어휴.”

볼드는 계속해서 돋아나는 땀을 연신 훔쳤다. 6회까지 0대0의 팽팽한 경기.

투수전은 보는 사람을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양 팀이 다 정신없이 때려대는 타격전을 볼 때는 시원하고 호쾌한 맥주 한 잔이 당긴다면, 양 팀 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듯한 조마조마한 투수전을 볼 때는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담배가 꼭 당기곤 했다. 볼드는 책상 위에 놓아둔 담뱃갑을 계속 쥐었다 내려놨다 하며 안절부절해 했다. 일종의 금단증상이다.

“볼드. 나가서 담배 한 대 태우고 와요. 괜찮으니까.”

“그래도 됩니까?”

“물론. 안 될 게 뭐가 있어요?”

체임 블룸은 볼드의 마음 속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귀신 같이 볼드를 내보냈다. 혹시라도 7회초를 놓칠까 전전긍긍하던 볼드는 발에 용수철이라도 달린 듯 담뱃갑을 쥐고 튀어나갔다. 사무실을 빠져나간 볼드를 확인하자마자 랜디가 입을 열었다.

“이 페이스대로라면 우리는 문을 못 잡아요.”

“...”

“체임. 난 진지해요. 돈이 필요해요.”

“돈이 필요한 건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랜디.”

체임 블룸은 씁쓸하게 웃었다.

“케빈은 올 해 300만 달러로 스스로 만족했어요. 플로리다 생활을 즐기고 있고, 심지어 여자친구도 플로리다 태생이에요. 유망주들의 성장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고요. 팀에 남아서 뭔가 해낼 수 있다는 의욕이 가득해요. 내가 케빈을 설득할 수 있는 조건이 충분했다고요. 하지만 문은 그게 아니에요. 플로리다에 애정이 있다고 보기도 힘들고, 우리 팀에 큰 애정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랜디는 어느 때보다도 빨리 말했다. 그녀도 굉장히 다급하다는 뜻이었다.

“문이 돈에 욕심을 내는 성격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건 확실해요. 문의 에이전트는 패트릭 에이버리고, 그 사람이 있는 한 적은 돈으로는 절대 문을 못 잡는다는 거.”

“장기계약을 간다면 총액 규모는 어느 정도로 예상하고 있죠?”

“최소 6년, 8천만 달러. 아마 그 이상...”

“불가능하네요.”

“더 위험한 건 뭔지 아세요? 패트릭이 얼마 전부터 은근슬쩍 정보를 흘리고 있다구요. 보스턴에서 문에게 관심이 많다고.”

블룸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보스턴이 여력이 있다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체임! 보스턴이에요. 보스턴 레드삭스가 여력이 없다는 말처럼 어울리지 않는 말은 세상에 또 없을 거예요.”

“후지, 프라이스, 세일, 포셀로... 그리고 문이라고. 하. 미쳤구만. 데이브 돔브로스키가 단단히 미쳤어.”

“이 페이스대로 문이 유지해준다면, 연봉조정위원회에 넘어가도 연 7백만 달러는 우습게 나올 거예요. 확신할 수 있어요.”

“하아.”

지혁과의 장기계약을 성공시키지 못한다면. 풀타임 4년차인 내년 시즌부터는 연봉조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리고 지금의 성적을 유지한다고 하면, 그 연봉조정위원회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지혁에게 온전히 돈을 지급해 줄 여유가 탬파베이에게는 없다.

“그렇다면... 문이 못 던지기를 바라야 하나?”

“그를 잡고 싶다면. 솔직하게 말할게요. 문은 롱고리아나 아처, 키어마이어랑은 달라요. 야구 외적인 것들로 설득할만한 여건이 하나도 없어요. 정말 아무것도 안 잡혀요. 가족도, 친척도, 자녀도, 하다못해 여자친구도 없다구요.”

“랜디, 랜디. 당신이 이 바닥에서 전설적인 마녀로 통한다는 걸 난 알고 있어요.”

랜디는 그 예쁜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으에에~ 이런 마녀가 돼서 마법이라도 부린다면 정말 좋겠네요.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 해 보겠지만, 지금 시점에서 나는 미리 밑밥을 깔아 두겠어요. 난 못 해요. 못 잡을 가능성이 95% 이상이에요.”

“5%의 가능성은?”

“탬파베이 레이스의 월드시리즈 우승. 그걸 넘어서 왕조의 구축. 이것밖에 답이 없어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할 수 있는 팀에서 나가고 싶어할 선수는 얼마 없을 테니까.”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한숨소리는 TV 모니터 속에서 나오는 청량한 타구음에 묻혔다. 7회초의 선두타자 케빈 키어마이어가 전력으로 1루로 달리고 있었다.

[ 실책이 나옵니다, 보스턴 레드삭스. 수비를 그렇게 잘 하는 재키 브래들리 주니어가 공을 더듬었습니다. 4회와 5회, 6회를 모두 삼자범퇴로 처리했던 후지 미유타. 4이닝 만에 루상에 주자를 내보냈습니다. ]

[ 노 아웃에 주자가 나간 건 처음이군요.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탬파베이가 이 기회를 놓친다면 오늘 경기는 잡아낼 수 없을 것 같네요. ]

[ 겨우 무사 1루에 이런 표현을 하기는 조금 민망합니다만, 탬파베이 레이스, 이번 경기에서 가장 좋은 찬스를 맞았습니다. 후지 미유타는 이런 찬사를 들을 자격이 있는 투수죠. ]

“뭐야! 어떻게 나갔어?!”

담배 냄새를 빼지도 않고 황급하게 사무실로 뛰쳐들어온 볼드가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손을 내밀었다. 블룸과 마가리타는 씁쓸한 표정으로 하이파이브를 해 줄 수밖에 없었다. 탬파베이는 이겨야 한다. 하지만 지혁은 져야 한다. 그를 잡기 위해서는.

“정말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네.”

“뭐가? 랜디, 무슨 말인데?”

“별 거 아니에요. 아니지. 엄청 별 건데, 아직 얘기해줄 수 없는 일이죠.”

“후우.”

뜬구름 잡는 듯한 랜디의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해하던 볼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큰 충격이 화면 너머에서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What the fuck?!”

[ 오, 마이, 갓. 에반 롱고리아. 번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

[ 와우...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

[ 자존심을 내려놓았다고 해야 할까요? 음... 굉장히, 어, 말을 조심하게 되네요. 후지가 1루로 견제를 한 번 던져 봅니다. 에반 롱고리아가 다시 더그아웃을 응시합니다. 케빈 캐쉬 벤치코치가 복잡한 싸인을 보내고 있습니다. ]

[ 일반적으로 복잡한 싸인은 번트일 확률이 높아요. 조마조마하네요. ]

롱고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헬멧을 손으로 세게 내리쳤다. 멀리서 보기에도 얼얼할 정도로 스스로를 강하게 내리친 롱고리아는, 후지를 향해 바라보며 두 무릎을 낮게 굽혔다. 그리고 방망이 절반 정도를 짧게 붙잡은 뒤 내밀었다.

의도는 명백했다. 보내기 번트.

팀의 자존심, 팀의 혼, 탬파베이의 프랜차이즈. 에반 롱고리아가 말이다. 모두가 충격에 휩싸였다. 팬웨이 파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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