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 빅뱅(3). >
롱고리아를 향해 던진 후지의 초구는 높게 빠져나가는 99마일짜리 포심이었다.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는 바스케즈가 껑충 뛰어 잡아야 할 만큼 많이 빠졌다. 공을 때리는 순간에 끝까지 누르지 못하고 손에서 힘이 빠졌다는 방증이다.
2루로의 스타트를 염두에 두고 있던 키어마이어가 재빨리 1루로 복귀했다. 만약 미트 끝에 저 공이 빠지기만 했더라면.
탬파베이의 선수들이 일제히 긴 아쉬움을 쏟아냈다. 하지만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 있었다. 후지도, 바스케즈도, 그리고 보스턴의 모든 선수들도 이 상황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린다는 것이다.
팀 내 최고의 타자다. 지난해 36개의 홈런을 때려냈고, 올해도 시작은 조금 부진했지만 벌써 7개의 홈런을 기록한 슬러거이기도 하고, 팀 내에서 디커슨과 수자를 제외하고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하고 있는 교타자이기도 하다.
굳이 비교하자면, 지난해까지 보스턴에서 뛰었던 데이빗 오티즈가 희생번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황하는 게 당연하다.
2구.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져 갔다. 번트를 쉽게 대 주지 않겠다는 의미였을까?
후지는 체인지업을 던졌다. 낮게 깔려 오다가 마지막 순간에 제법 큰 낙폭을 보여주며 떨어지는 공은 원바운드가 되어 홈플레이트에 맞았다. 그리고 롱고리아의 번트 타구의 방향에 집중하고 있던 바스케즈가 댄 미트와 허벅지 사이로, 그 공이 빠져나갔다.
“가! 가! 바로 가!”
롱고리아는 벌떡 일어서자마자 손을 휘저었다. 1루 주자 키어마이어도 이미 2루를 향하고 있었고, 여유 있게 2루로 살아 들어갔다. 카운트 투 볼. 노 아웃에 2루. 벼락이 치듯 게임이 흔들리고 있다.
게임 내내 공격적으로 존을 공략하던 후지가 번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롱고리아에게 볼 두 개를 연속해서 던진 건 후지의 당황을 의미했다.
그리고 깔끔하게 블로킹했어야 할 공을 뒤로 흘려버린 건 포수인 바스케즈의 당황을 뜻했다.
2루 베이스에 제대로 커버를 들어가지 못하고 2루수 페드로이아와 유격수 보가츠가 겹쳐버린 것, 공이 빠졌을 때 중견수 재키 브래들리 주니어가 한 발 늦게 백업을 온 것. 이런 것들은 보스턴 야수들이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점수 못 내면 지겠다, 지겠어.”
“최소한 저는 한 점도 안 줄 건데요.”
“니가 주든 누가 주든. 이 기회 놓치면 우린 점수 못 내.”
힉키가 계단 위에 한 발을 걸쳐 놓고는 다리를 달달 떨며 말했다.
“그래도 저 어린 일본 녀석이 이렇게 흔들리는 건 처음 보네.”
“만약 마이크 트라웃이 번트를 대겠다고 하면 난 좋다구나 하면서 한가운데에 집어넣을 텐데.”
“자기 일 아니면 말은 쉽지. 나라도 당황했을걸.”
마운드 위의 당황하는 후지가 낯설어 보여서 중얼거린 말인데. 옆에 있던 알렉스 콥이 얼른 지혁의 말을 받았다.
“지금까지랑은 분위기가 다르긴 하네. 아마 투수가 되고 나서 처음 겪어보는 상황인가 본데?”
“그렇죠. 경험이 별로 없으니까. 아마 처음일걸요. 아시아에서도 4번이 번트 대는 건 흔하지 않으니까요.”
“기회가 왔어. 자, 다들 목소리 좀 더 내 봐! 지금이야! 허쓸!”
콥이 난간에 기댄 선수들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두 손을 들어보였다. 선수들도 콥에 응답하듯이 모두가 기대하고 있었다. 후지가 발을 한 번 더 빼며 2루에 견제 모션을 취한다. 그러자 보스턴의 존 패럴 감독이 직접 마운드로 몸을 이끌고 나왔다. 타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롱고리아가 방망이를 빙그르르 돌리며 대기 타석으로 빠져나왔다.
“한 점. 한 점만 내 줘. 내가 지킬 테니까.”
지혁이 중얼거린 걸 듣기라도 한 듯, 롱고리아가 지혁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혁도 고개를 끄덕여준 뒤 시선을 마운드로 옮겼다.
내야수들과 감독에게 둘러싸여 두 손을 허리에 얹고 통역을 거쳐 이야기하는 후지. 겉으로 볼 때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후지를 잘 알고 있는 지혁은 알 수 있었다. 이미 평소의 후지가 아니라는 것을.
[ 존 패럴 감독이 내려갑니다. 노 아웃에 주자 2루. 타석엔 에반 롱고리아. 번트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요. 과연 롱고리아는 2루에 주자가 나간 상황에서도 번트를 댈까요? 병살의 가능성은 없어졌잖아요? ]
[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두 팀의 절박함을 어떻게 평가할 수가 없네요. ]
지금 마운드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또 방금 패럴 감독까지 나와서 어떤 주문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지금 귀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라면. 지혁의 머릿속에 빠르게 그림이 그려진다. 마치 파노라마처럼, 몇 초 후의 일이 머리에 그려지는 것 같다.
[ 롱고리아가 일어섰습니다. 무릎을 굽히지 않는군요. 타격으로 갑니다! ]
[ 주자를 3루로 보낼 수만 있으면 됩니다. 그렇죠. 롱고리아 정도 되는 선수에게는 충분히 바랄 수 있는 주문이죠. 주자를 3루로 보내는 건요. ]
[ 후지, 투 볼로 몰렸습니다. 3구. 3구! 볼! 3구도 볼입니다. 여기서 노 스트라이크 쓰리 볼로 몰려버립니다. 7회에 들어서 처음으로 대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
후지가 짜증이 나는 듯 마운드의 흙을 한 뭉텅이 툭 차 버렸다. 오늘 경기에서 탬파베이 타자들이 후지를 쓰리볼 카운트까지 몰아넣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6이닝을 던지며 92개의 투구를 하는 동안, 후지는 단 한 번도 쓰리볼을 허용하지 않았었다. 가지고 있는 폭발적인 구위로 그저 존 안에 쑤셔넣었고, 탬파베이는 그 공들을 커트하다가 몰린 카운트에서 안 좋은 타격을 했다.
그러니 이 기회는 유일한 것이다. 후지의 멘탈이 흔들렸고, 그는 스스로 자충수를 두고 있다. 번트를 대 주지 않으려고 어려운 피칭을 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접어들었다.
[ 볼 카운트 쓰리 볼. 과연 이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경기 후반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후지! ]
후지가 허리를 굽혀 포수의 싸인을 확인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몸 앞에 가지런히 모아둔 글러브를 순식간에 앞으로 뻗으며 왼발을 있는 힘껏 앞으로 내뻗는다. 마운드에서 떨어지는 것 같이 엄청나게 긴 스트라이드. 그리고 그 폭발적인 자세에 힘을 그대로 실은 오른팔이 마치 공을 찍어내리듯이 때렸다.
처음 공이 후지의 손에서 떠나는 순간. 공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커브야!”
왜인지는 모르겠다. 후지의 공이 손에서 떠나는 순간에서야 지혁은 알 수 있었다. 저 공은 린스컴이 던지던 커브가 아니라, 후지가 일본에서부터 던지던 커브였다. 어째서 린스컴의 포심이나 투심, 체인지업을 두고 여기서 이런 선택을 했을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혁의 외침이 홈플레이트에 닿기도 전에, 공은 이미 홈플레이트 눈앞에서 폭포수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떨어지던 공이 스트라이크 존 한복판에서 바스케즈의 미트에 빨려들려 할 때, 어마어마한 스피드로 휘둘러져 나온 롱고리아의 방망이가 시야 바깥으로 공을 날려버렸다.
따아아악!
어마어마한 타구음과 함께.
[ 날아갑니다! 쭉쭉 뻗어갑니다! 쓰리볼에서의 과감한 배팅! 이 과감함이 탬파베이에게... 두 점을 선사합니다! 에반 롱고리아! ]
팬웨이 파크에서 가장 깊숙한 곳, 센터 쪽 펜스를 아슬아슬하게 넘어 관중석 사이로 공이 쏙 사라지는 순간, 승부가 끝났다.
1루 베이스가 비어 있는 쓰리볼 상황. 연이은 실책으로 당황하고 있는 투수. 타격하지 않고 공 하나를 지켜보는 게 너무나도 당연했던 그 상황에 롱고리아는 커브를 노리고 있었다.
“커브를 노렸어요? 대체 왜?”
“나도 몰라! 그냥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 여기서는 커브라고.”
넘치는 아드레날린 때문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 롱고리아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지혁에게 대답했다. 경기 내내 압도적인 스피드와 구위의 패스트볼 위주의 투구를 해 온 후지가 커브를 던질 것이라는 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오로지 타석에 있는 롱고리아만이 승부의 감을 발휘했던 것이다.
“야구... 정말 알 수 없네.”
커브를 선택한 후지, 그리고 커브를 눈치채고 있었던 롱고리아. 교훈은 뼈저렸다. 승부 무대에서의 경험은, 그 어떤 재능보다 강할 수 있다는 것. 마치 신이 그렇게 말하며 웃고 있는 것 같았다.
*
[ 9회말. 이미 108개를 던진 문이 다시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랭카스터 감독의 이 배짱을 좀 보세요. 2대0의 리드 상황에서 선발투수에게 다시 기회를 줬습니다. 하하. ]
[ 브래드 박스버거, 알렉스 콜로메. 지난 시즌 2점대 초반의 평균자책을 보여주고 40개 이상의 세이브를 합작해 낸 두 선수가 불펜에 대기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문을 올리네요. 끝까지 대단한 승부입니다. ]
[ 정말 선데이 나이트 베이스볼에 어울리는 야구입니다. 여러분은 엄청난 경기를 함께하고 계십니다. ]
[ 아마 제 생각에는, 후지 미유타가 9회까지 128개를 던지면서 끝까지 마운드를 지킨 것에 대한 응답인 것 같네요. 보스턴은 9회까지 후지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문을 먼저 내리지 않겠다는 기세의 표현인 것 같아요. ]
타석에는 공교롭게도 헨리 라미레즈가 다시 들어선다. 5회말, 지혁에게 커다란 타구를 빼앗아내며 베테랑의 힘을 보여줬던 헨리는 5회보다도 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타석에 섰다. 하지만 지혁은 헨리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지혁의 시선은 오직 노리스의 손가락 끝에만 가 있다.
“절대로 신중하게 갈 거야.”
포수인 노리스에게 미리 단단히 이야기 해 두었다. 오늘 경기는 베테랑들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감, 승부에 대한 촉이 좌우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운이 따른 덕분에 헨리 라미레즈의 타구는 그린 몬스터를 넘기지 못했고, 에반 롱고리아의 타구는 센터 담장을 넘긴 것이다.
한 번 교훈을 얻었는데도 과감하게 공만 믿고 들어갈 우둔한 투수가, 지혁은 아니다. 오랜 경력은 이럴 때 도움이 된다.
“볼.”
“볼.”
“스트라이크!”
“볼.”
계속해서 유인구 승부. 큰 것 한 방으로는 동점이 되지 않는다. 헨리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테고, 몰린 카운트에서는 웬만해서는 참아야 한다. 하지만 5회의 그 타구가 계속해서 머리에 맴돌 것이다. 보스턴의 우세로 흘러가던 경기를 어이없는 주루사로 뒤바꿨던 주인공이니까. 이 공에는 무조건 배트가 나올 것이다.
“으쌰!”
마지막 순간에 팔을 비틀어내는 데 아주 경쾌한 느낌이 들었다. 9회까지 던졌는데 체력 소모도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날아가는 싱커가 도중에 휙 꺾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헨리의 배트에 맞은 공은 순식간에 마운드로 되돌아왔다.
[ 쳤습니다, 투수 강습! 오우! 허벅지에 맞았습니다. 다시 공을 주워 1루로 송구. 헨리 라미레즈는 투수 땅볼로 물러납니다. ]
[ 허벅지인가요? 어느 쪽이죠? ]
[ 헨리 라미레즈의 강한 타구가 문의 몸에 맞았는데요. 곧장 트레이너가 올라옵니다. 이 경기, 아직도 모르겠는데요? 의외의 상황이 9회에 또 나옵니다. ]
“아오, 썅. 아파.”
마운드 앞쪽, 잔디와 흙의 경계선에 맞은 공이 불규칙하게 튀어올랐다. 분명히 글러브를 제 위치에 대고 있었는데. 공이 허벅지 쪽으로 날아오는데 몸을 틀어 옆쪽에 맞은 게 다행이었다. 살과 근육만 가득 있는 부위에 맞았다.
“괜찮아? 뼈야?”
“아니에요. 완전 깔끔해요. 그냥 피멍만 좀 들고 말 거예요.”
“교체할까?”
“괜찮다니까요? 이 경기 교체 안 해요. 제가 끝까지 갑니다.”
얼얼한 허벅지를 글러브로 열심히 문대며 지혁은 몸을 일으켰다. 보스턴의 더그아웃 난간에 기댄 후지가 분한 눈빛으로 마운드를 지켜보고 있는 게 느껴진다. 후지가 9회까지 던졌는데, 여기서 끝내고 내려갈 순 없다. 그냥 허벅지가 조금 아프면 될 일이다.
“후아. 두 개 남았네요, 코치님.”
“불펜에 준비는 다 됐어. 이미 한참 전부터.”
“내려가서 오늘 쉬라고 하세요.”
지혁은 짐짓 허세까지 부렸다. 힉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려갔다. 이 경기는 증명의 한 판이 될 것이다.
[ 스윙! 헛스윙 삼진! 117번째 공입니다. 산도발을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투 아웃. 오늘의 빅뱅, 승패가 결정나기까지 아웃카운트 한 개 남았습니다. ]
[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네요. 환상적입니다. ]
팬웨이 파크 관중석에도 빈자리가 꽤 생겨났다. 이미 8회말이 끝난 시점부터 관중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었다.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긴 야유를 뿜어대며 지혁을 압박했지만, 그런 것에 흔들릴 시기는 진작에 지나갔다. 지혁의 시야에는 오직 타석의 크리스 영과 노리스의 미트만 보일 뿐이다.
[ 6구, 때립니다! 높이 뜹니다! ]
94마일까지 떨어진 패스트볼이었지만, 크리스 영은 제대로 맞춰내지 못했다. 빗맞은 타구가 로켓처럼 보스턴의 밤하늘로 높이 떠올라갔다. 그리고 그 공이 떨어지는 곳에는 케빈 키어마이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 경기 끝! 보스턴 레드삭스와 탬파베이 레이스의 경기. 후지 미유타와 지혁 문의 맞대결. 승자는 탬파베이입니다! 양 팀 투수들이 모두 완투를 기록하는 대단한 투수전이었습니다. ]
[ 행복하네요. 엄청난 경기를 중계했습니다. ]
[ 문, 시즌 7승째를 거둡니다. 후지, 시즌 첫 패를 떠안습니다. 두 아시아 투수의 자존심 대결에서 먼저 앞서나가는 건 탬파베이의 슈퍼 문입니다! ]
하아. 얼얼한 오른쪽 허벅지와 찌릿거리는 왼쪽 팔의 감촉을 그대로 느끼며, 지혁은 보스턴 하늘에 대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