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 물밑작업. >
“형. 다음엔 내가 무조건 이길 거예요.”
“힘들어 죽겠다. 좀 쉬자. 오늘 무지하게 던졌으니까, 너도 관리 잘 하고 자라.”
“내가 다음에는 이길 거라구요.”
“니 맘대로 하세요.”
“끊어요.”
두 사람의 첫 맞대결이 끝난 뒤. 후지는 꽤 많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럴 법도 하다. 그에겐 시간이 이번 시즌을 포함하더라도 1년 반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이미 짧은 시간에 리그를 폭격하는 선수가 되어버렸고, 아메리칸리그에서 임팩트만 놓고 보면 세 손가락에 들어가는 투수가 되었지만. 여전히 후지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지혁에게 브레이크가 걸린 건 치명상이었다. 리그에서 무패를 유지하고 있는 투수가 두 명이나 있는데, 먼저 1패를 기록하며 뒤쳐졌으니까. 평균자책점에서는 아직도 리그 1위를 고수하고 있지만 후지가 지혁이나 카이클보다 윗급의 선수라고 단정 지어 말하기도 힘들다.
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후지는 신과 정말 어려운 계약을 했다. 만약 지혁에게 그런 딜을 하자는 신이 있다면, 아마 한 대 때렸을지도 모른다.
“얘, 끊었어요.”
“하하. 오늘 화가 좀 났나 본데.”
“당연히 화가 났겠죠.”
패트릭은 흐뭇하게 웃었다. 자신이 데리고 있는 두 명의 투수가 이번 시즌 최고의 투수전을 만들어냈으니 당연하다.
“그나저나, DL에 올라간다고요?”
“두 번 등판을 거르겠대요. 난 괜찮다는데도 감독님이 워낙 강하게 말씀하셔서...”
9회말 헨리 라미레즈의 타구에 허벅지를 맞은 건 팀에게 좋은 명분이 되었다. 그냥 멍이 든 걸 제외하고는 아주 멀쩡했다. 힘이 조금 덜 들어가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뭐, 운동선수라면 달고 사는 부상이니까. 하지만 최근 경기에서 공을 꽤 많이 던지기도 했고, 지난 시즌에 200이닝을 넘긴 투수이다 보니 랭카스터도 휴식을 강제했다.
“눈앞에 너를 달고 다니면 쓰고 싶어지니까, 아예 15일 DL에 올라가.”
“15일이요? 너무 오래 쉬는데요?”
“어차피 트리플 A에 준비된 놈들도 많아. 써 봐야 할 녀석들 천지라고. 차라리 지금처럼 팀에 여유가 좀 생겼을 때 쉬어. 2위 자리를 추격당하거나 하면 쉬고 싶어도 못 쉬니까.”
“저는 괜찮은데...”
“얘기는 끝이야. 가, 쉬어. 보름 뒤에나 야구장에 나와. 그 전까지 코빼기라도 비쳤다가는 벌금 매길 거야.”
“하. 감독님. 저 최저연봉이에요.”
“그러니까 나오지 말라고.”
랭카스터는 단호했다.
“나도 어느 정도 공감이 가긴 하네요. 좀 쉬는 것도 필요하니까. 워낙 이닝도 많이 던졌고. 기왕이면 병원에 가서 검진도 한 번 싹 받아요.”
“심심하겠네. 보름 동안은요.”
“심심할 틈이 있으면 다른 팀 분석이나 좀 하고, 그러면 되지.”
패트릭의 말에 지혁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거야 늘 하는 일인데.
“기왕 쉴 거면 어디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고. 쉴 거면 확실하게 휴양을 하는 거도 나쁘지 않습니다.”
“됐어요. 그냥 집에 있어야죠. 움직이는 게 더 귀찮아요.”
지혁은 손사래를 쳤다. 어딜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만히 집에 있는 게 훨씬 나았다.
“그래. 그냥 푹 쉬어야겠다.”
그냥 침대에 몸을 던졌다. 차라리 아무 생각 안 하고 재충전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야구 생각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2주 정도를 보내기로 했다.
*
작전은 실패했다. 야구선수가 시즌 중에 야구를 떠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1차전을 마치고 곧장 탬파로 돌아온 지혁은 집에서 보스턴 원정시리즈 세 경기를 TV로 지켜봤다. 지혁이 첫 경기를 잡아냈지만, 보스턴과 탬파베이의 전력 차이는 어찌할 수 없었다.
2차전, 보스턴의 5선발 드류 포머란츠와 탬파베이의 땜빵 선발 맷 안드리스의 대결. 보스턴의 승리. 3차전, 크리스 세일과 알렉스 콥의 맞대결. 세일에게 삼진 15개를 헌납한 타선의 속절없는 패배. 그리고 4차전. 릭 포셀로와 제이크 오도리찌의 팽팽했던 대결이었지만 불펜에서 차이가 났다. 9회 끝내기를 허용하며 3연패.
탬파베이와 보스턴의 차이는 더 벌어졌다.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는 보스턴의 독무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2위 탬파베이와 1위 보스턴의 격차보다, 탬파베이와 3위 양키스와의 격차가 더 미세해졌다.
“사흘 만에 좀이 쑤신다는 얘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어쩔 수 없지. 준비는 다 했습니까?”
“네. 근데 지금 시점에 꼭 단독 인터뷰를 해야 하는 겁니까? 팀 분위기가 안 좋아서 신경이 좀 쓰이는데.”
“필요합니다. 여러 가지 차원에서.”
“맨날 그렇게만 대답하지 말고, 이유를 좀 알려줘요. 그래야 내가 어떻게 인터뷰를 할지 대충 감이라도 좀 잡죠.”
“흐음...”
패트릭은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일을 잘 알려주지 않았다. 패트릭의 그런 방침에 크게 불만을 갖지는 않는다. 워낙 능력이 좋고 천재적인 에이전트니까. 무슨 일을 맡겨도 자신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결과를 가져오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다.
“음... 얘기를 해 줘야 하나. 잘 모르겠네.”
“그냥 한 번 믿어 봐요, 좀.”
“당신의 계약 관련해서. 체임 블룸과 랜디 마가리타한테 압박을 넣을 겁니다.”
“... 아. 이 인터뷰가 그런 내용인가요? 계약에 관련한?”
“계약 문제? 아뇨. 아마 그런 질문은 없을 텐데요. 나와도 내가 끊을 거고. 그냥 평범한 인터뷰를 할 겁니다. 아주 평범한.”
“그럼 이 인터뷰가 어떻게 압박이 된다는 거죠?”
지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패트릭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 인터뷰는 사전작업이에요. 메시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죠. 누구와, 어디서, 어떤 이유로 인터뷰를 하느냐가 중요하지.”
“설명.”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미국의 4대 스포츠를 강타하고 있는 지역의 대표들을 연달아 인터뷰한다는 컨셉이에요. 지역을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스타를 뽑고 있죠. 당신이 플로리다 대표가 된 셈이죠. 하하. 이쪽이 워낙에 스포츠가 부실하다 보니까. 마이애미의 스탠튼 쪽으로 가려던 걸 내가 붙잡았습니다.”
“지역의 대표...라.”
“지난 달 특집이 누구였는지 알아요?”
“당연히 모르죠. 장난합니까?”
“클리블랜드. 르브론 제임스였어요.”
워후. 대단한 사람이네.
“지역을 상징할 수 있는 사람은 초특급 슈퍼스타밖에 없어요. 지역과 연관 지을 수 있는 스타들은 가치가 훨씬 뛰기 마련이죠. 그리고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이 세상에서 그런 광고를 가장 잘 하는 잡지고. 그쪽에서 나온다던 에디터랑 어느 정도 얘기가 됐으니까, 그냥 에디터가 이끄는 대로 하면 됩니다.”
패트릭은 자신만만했다. 솔직히 말하면 설명을 들어도 아직 감이 잘 잡히지는 않았지만, 대충 이 인터뷰를 잡은 의도는 알 수 있었다.
걱정되는 건 하나였다. 구단과의 관계가 껄끄러워 지는 것. 트레이드를 요구하게 될 거라면 감수해야 할 부분이긴 하겠지만, 적어도 시즌 중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몇몇 선수들이 구단과 안 좋게 나갈 때의 그 분위기를 지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쉬라고 DL에 보내놨더니 뒤통수를 치는 격 아닙니까?”
“구단에는 그렇게 비칠지 몰라도, 선수와 팬들에게는 절대 그렇게 안 보일 겁니다. 좋은 조건을 받아야만 하는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 거예요. 날 믿어요.”
*
- [SI] 플로리다에 높이 뜬 달, 슈퍼 문의 이야기.
글러브를 옆구리에 낀 지혁의 모습이 표지 커버를 장식했다. 무려 네 면에 걸쳐 자세하고 디테일하게 쓰인 지혁의 스토리는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이제는 방송과 미디어에서 하도 많이 다뤄져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데이토나 컵스 시절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구단 역사상 첫 퍼펙트게임을 기록했던 이야기, 메이저리그에 올라와서 신인왕을 수상하기까지의 여정...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 오래 살아본 건 아니지만, 플로리다가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는 말에는 동의합니다. 특히 야구선수가 살기에는 말이죠. 언제나 따뜻하고, 컨디션을 만들기도 좋고... 또 전 시끌벅적한 곳보다는 조용한 곳을 좋아하거든요. 플로리다는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곳이지만, 또 탬파 지역은 사람이 그렇게 많지도 않아요. 제 스타일에 가장 잘 맞는 곳이 바로 이곳이 아닐까 생각해요.”
랜디 마가리타가 지혁의 인터뷰를 읽어내려갔다. 야구선수 문지혁의 스토리에 지역적 색채를 덧입힌 기사가, 하필이면 이 때.
“패트릭이 꾸민 일이 분명해요.”
“골치 아픈 사람이네.”
“어쨌든 이건... 어필이네요. 빨리 계약을 제시하라는 어필. 아니면 연봉조정위원회까지 가겠다는 뜻으로 보여요.”
“푸우.”
프리드먼이 왜 그렇게 담배를 많이 태웠는지. 블룸은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에이전트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비열하고 교활하다. 언론이나 미디어는 구단에 들이대는 비판적인 시선을 에이전트와 선수들에게는 제시하지 않는다. 계약이라는 게 구단과 선수 사이의 갑을 관계를 정의하는 것이라고 할 때, 문지혁 정도의 가치를 가진 투수를 상대로 계약을 제시해야 하는 구단은 철저한 을이 될 수밖에 없다. 탬파베이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돈이 없는 을이고.
“환상적인 인터뷰네요. 구독자들에게 플로리다와 탬파베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잔뜩 어필하고 있어요. 계약에 대한 얘기는 털끝만큼도 없지만, 이건 분명한 어필이에요. 꾸물거리다가는 플로리다의 슈퍼스타를 잃게 될 거다, 뭐 이런.”
랜디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95%의 확률로 못 잡는다고 했었나요?”
“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물론이죠. 카이클마저 패배를 하나 쌓았어요. 아메리칸리그에서 유일하게 남은 무패 투수에요. 가치가 갈수록 올라가고 있죠.”
“투표는 어떻게 되고 있죠?”
“올스타 투표? 그것도 또 문제죠. 지금 순위는... 3위네요. 아직 예단할 수는 없지만 이 페이스라면 무난하게 뽑힐 것 같네요.”
얼마 전 시작된 올스타 투표. 선발투수 부문에 이름을 올린 지혁은 지금까지 세 번째로 많은 득표를 기록하고 있다. 리그 최악의 비인기 팀이 탬파베이라는 걸 감안하면 대단한 페이스였다. 다른 구단의 팬들도 지혁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고.
“올스타에까지 올라가면 가치는 또 뛰어요. 차라리 지금...”
“결판을 내자?”
“네.”
랜디는 각오를 촉구하고 있었다. 구단은 때를 기다리고 있다. 언제쯤 계약을 제시할 것인지. 패트릭이 그 계약을 뻥 차버릴 게 뻔하다고 해서, 계약을 제시하지도 않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분명히 만나서 의지를 전해야만 한다. 반드시 잡고 싶다고. 구단에 남기고 싶다고. 만약 지혁의 가치가 지금보다 더 상승해 버린다면, 시작점도 점점 상승할 것이다.
“좋아요. 문을 불러요. 패트릭이라는 에이전트도.”
“이번 주말이면 될까요?”
“음. 다나카랑 붙는 날이 이번 토요일인가? 우리가 질 것 같은 날에 불러요. 팀에 책임감을 조금 느낄 수 있게.”
“책임감? 빨리 탈출하고 싶어 하지는 않을까요?”
“아, 그런가.”
일정 하나조차도 골치가 아팠다. 가뿐히 밥이나 먹으며 가벼운 농담으로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기에. 아주 세심한 것 하나까지도 전부 챙겨야 했다. 조금이라도 지혁의, 패트릭의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다면 곤란해진다. 안 그래도 곤란한 상황인데, 더욱.
“아. 그러고 보니 통계담당 팀에 문을 알고 있다는 신입이 한 명 있었는데.”
랜디는 어디서 식사를 할 건지 레스토랑을 뒤지다 말고 되뇌었다.
“누구죠?”
“모르겠어요. 통계팀은 워낙 바쁘니까... 그 쪽 팀장한테 한 번 물어볼까요?”
“당장. 무조건 많은 정보를 모아봐요.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니까.”
체임 블룸은 씁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빨간 펜으로 달력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 동그라미 안에 지혁을 가둬둘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
5월 27일, 토요일. 지혁이 DL에서 풀리기 전 마지막 주말. 패트릭과 지혁이 랜디에게 근사한 식사를 샀던 그 레스토랑에서. 네 명이 모였다.
문지혁. 탬파베이의 슈퍼 문.
패트릭 에이버리. 문지혁의 에이전트. 천재이자 악마.
체임 블룸. 탬파베이 레이스의 부사장 겸 단장.
랜디 마가리타. 탬파베이 레이스 재무담당국 연봉조정대상팀 팀장.
“문!”
체임 블룸은 지혁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몽고메리에서 처음 봤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됐네요. 이런 자리를 갖게 될 정도로. 시간이 참 빨라요. 서비스타임 3년이 순식간에 지나가네. 하하.”
“그러게요. 그 때부터 저한테 워낙 잘 해 주셔서 항상 감사했는데. 이렇게 승진까지 하셔서 이런 이유로 따로 만나게 되네요.”
“그 때 참 좋았죠. 난 일찍부터 당신을 알아봤다니까요.”
“랜디. 오늘 평소같지 않네요? 훨씬 더 아름다운데?”
“없는 말을 너무 잘 해요, 당신은. 그게 문제야. 호호. 패트릭. 반가워요. 오늘도 잘 생겼네요.”
“어디 가서 빈말로 빠지는 사람이 아니죠. 당신도. 하하.”
앞으로 지혁의 야구 인생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탬파베이 레이스라는 팀이 어떤 방향으로 목표를 설정할 것인지. 그런 것들이 정해지는 아주 중대한 자리였다.
어색한 기류 속에서 첫 인사를 한 네 명은 자리에 앉아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처음 몇 분간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밥만 먹었다. 먼저 포문을 연 건 패트릭이었다.
“자. 그럼 본격적인 이야기를 한 번 해 볼...”
벌컥.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던 레스토랑에 의외의 인물이 한 명 들어왔다. 패트릭의 말을 자르고.
“죄송합니다. 너무 늦었나요? 오늘 경기 예상분석이 조금 늦어져서요. 죄송합니다.”
탬파베이 레이스의 사원증을 여전히 목에 단 채로, 헐레벌떡 뛰어왔을 게 분명한 신입사원이 숨을 몰아쉬며 문 앞에 서 있었다. 지혁과 패트릭의 눈동자에 어쩔 수 없는 강한 의문이 담겼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지혁은 궁금증을 이겨내지 못했다.
“연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