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 변화 or 탈출. >
자리가 제일 불편한 사람은 연두일 것이다. 패트릭의 에이전시를 떠나 졸업을 하고, 다른 곳에서 간단하게 인턴 생활을 하다가 이번 해부터 탬파베이 레이스의 프런트 오피스에서 일을 하게 된 신입사원에 불과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네가 여기 있어?”
“정확하게 무슨 자리인지 듣고 오지는 못했어. 부사장님이 호출하셨다길래 온 건데...”
지혁 쪽으로 몸을 살짝 굽힌 연두가 입술을 꽉 깨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혁은 반대 쪽으로 몸을 숙여 패트릭에게 물었다.
“얘 나오는 거, 알고 있었습니까?”
“아뇨.”
“...”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체임. 연두는 왜 부르셨죠? 이건 좀 이상하네요.”
“문. 당신이 처음 만난 단장이 앤드류 프리드먼이었죠. 그래서 난 조금 불안했어요.”
“대답부터 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블룸은 뿔테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접어놓았다. 그의 얼굴에 지금껏 나타난 적 없던 수심이 깊게 드리워졌다.
“앤드류였다면 당신을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앤드류는 사람을 휘어잡는 부류의 단장이거든요. 비전이 명확하고, 몇 년 앞을 정확하게 내다보는 사람이기도 하니까요. 게다가 사람을 순식간에 반하게 만드는 뭔가도 가지고 있죠. 나만 해도 그에게 반해서 이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이고. 에반 롱고리아도, 크리스 아처도, 모두 프리드먼이 세워둔 계획과 비전의 공감해서 장기 계약을 맺었으니까요.”
휘유. 가벼운 한숨을 내쉰 체임 블룸은 전형적인 대학생 너드처럼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난 오늘은 솔직해지기로 했어요. 이게 당신을 잡기 위해 할 수 있는 내 전부입니다. 나는 프리드먼만한 깜냥이 못 돼요. 인정합니다. 앤드류 프리드먼의 방식을 옆에서 보고 배웠지만, 결국 앤드류 프리드먼처럼 할 수는 없어요. 그는 천재니까. 나는 아니고. 천재를 따라가지는 못한답니다.”
“그래서 계약과는 전혀 관련 없는 연두까지 자리에 불렀습니까?”
“네. 비겁하고 무례해 보일 수는 있지만. 당신이 우리 구단에 미련을 가질 수 있게 만들 수 있다면 뭐든 해야만 했어요. 미안합니다. 세 사람 모두. 여러분끼리의 인연을 이용해보려 했어요.”
블룸은 순순히 인정했다. 1년 정도 같이 일했던 연두를 식사 자리에 불러서까지 지혁의 마음을 탬파베이에 붙잡아 놓고 싶은 것이다.
‘뭐, 그럴 듯하네.’
그리고 블룸의 작전은 지혁에게 인간적인 동정을 불러일으켰다. 처음으로 든 감정이 연민이었다. 무려 메이저리그 구단의 부사장에게 드는 감정이 연민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지혁이 만나 본 그 어떤 프런트 관계자도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낮추지는 않았다.
“일단, 우리 먹죠. 먹으면서 얘기해요. 연두? 연두 씨도 편하게 먹어요. 괜찮으니까.”
랜디 마가리타가 스푼을 들 때까지 누구도 밥을 먹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패트릭도 조금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가 아무리 천재적이고 때로는 악마 같은 능력을 발휘하는 에이전트라고 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프런트와 만나 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식기가 그릇을 때리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레스토랑 안에 남았다.
“문을 얼마나 남기고 싶어 하는지, 구단의 입장은 잘 알았습니다. 방법이 조금... 껄끄럽긴 하지만.”
정적을 깬 패트릭은 연두 쪽을 한 번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탬파베이 레이스라는 구단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에이전시에서 일하던 것도 때려치우고 결국 구단에 입사한 녀석이었다. 1년의 인턴을 끝내고 정직원으로 채용하려고 했을 때, 다른 쪽의 일을 알아보고 싶다고 할 때부터 심상찮은 인연이다 싶더니 이런 자리에서 이런 방식으로 다시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체임. 당신이 솔직해지기로 했다고 했으니,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죠. 이 자리에서는 서로 조금의 거짓말도 하지 않기로 하고.”
“좋습니다. 랜디?”
랜디는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올해, 500만 달러. 내년은 800만 달러까지 올릴 수 있어요. 그리고 5년차인 내년에는 1200만 달러, 6년차에는 1300만 달러. 점차 올려가서 7년차에는 1500만, 8년차에는 1500만에 팀 옵션. 총 6년 6800만 달러.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재정 상황 안에서 드릴 수 있는 최고액이에요.”
패트릭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확실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금액이긴 하네요. 올해 연봉이 마음에 들지 않긴 하지만. 내년에 8백만이나 주실 여력이 있으신가요?”
“있는 힘을 다해 비틀어 짜낼 거예요.”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필요하겠네요.”
패트릭과 랜디의 시간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구단의 재정 자료와 1년 수입액,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 같은 말들이 오갔다. 경제학적 관점으로 접근해야 하는 전문용어들이 튀어다니고, 연봉의 실수령액과 세율, 지혁의 집 문제 같은 부차적인 이야기들도 계속된다.
확실히 두 사람은 ‘난 놈’들이긴 한 모양이었다. 마치 모든 자료가 머릿속에 다 들어있는 듯 식사를 하면서 주고받는 두 사람의 대화에 지혁도, 블룸도 끼어들지 못했다.
“... 알겠습니다. 검토해 볼 만 하네요.”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제안을 했어요.”
“그렇네요. 돈만 놓고 보면.”
패트릭은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는 듯이 지혁에게 고개를 돌렸다. 종용하는 표정이었다. 이제 지혁의 생각을 말할 타이밍이라고.
“크흠, 흠.”
체임 블룸과 랜디 마가리타, 그리고 연두의 시선이 모두 지혁 쪽으로 모아졌다.
아마 이 자리에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거라고 기대는 하지 않았겠지만. 탬파베이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마음을 잡아보기 위해 지혁과 탬파베이 사이에 존재하는 유일한 접점인 연두도 수소문해 불러냈고, 돈도 패트릭이 생각한 것보다 그 이상을 준비했다. 물론 그게 빅마켓 구단으로 간다고 했을 때 지혁이 받을 수 있는 돈보다야 적겠지만.
“먼저... 고맙습니다. 구단에서 나를 얼마나 좋은 투수로 생각하는지, 또 얼마나 잡고 싶어하는지는 충분히 알았어요. 아무리 그래도 연두까지 이 자리에 부른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요. 무슨 일이라도 다 해 줄 수 있다는 의지만큼은 알겠네요.”
긍정적인 신호처럼 보이는 대답에 블룸의 표정이 아주 조금이나마 펴진 것 같았다.
“하지만 걸리는 데가 있네요. 그리고 이 의문을 해결해줄 수 있을지, 난 잘 모르겠어요.”
“뭐죠?”
“월드시리즈 우승.”
지혁은 물을 한 잔 들이켰다.
“내 커리어에서, 난 반드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해야만 합니다. 그런 꿈을 꾸지 않는 야구선수가 얼마나 되겠는지 모르겠지만요. 이 팀에서 내가 그 목표를 차지할 수 있을까요? 체임. 당신의 대답을 듣고 싶은데.”
“월드시리즈 우승이라... 우린 같은 꿈을 꾸는군요. 앤드류 프리드먼조차 해내지 못했던 결과를 나도 차지하고 싶네요.”
“감상으로 돌아가지 마세요. 이 자리에서는 현실적인 얘기를 해야지 않겠습니까.”
“가능하다고 봐요, 난.”
“어떻게?”
“당신이 팀에 남고, 크리스 아처와 원투펀치를 이뤄 주고. 롱고리아가 타선에서 힘을 실어주고, 키어마이어가 수비의 중심을 잡고. 나머지 선수들이 준수한 활약을 해 주고 우리가 공들여 키우고 있는 유망주 몇 명이 터져 준다면...”
“그래서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정말로?”
“안 될 건 없죠.”
“...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인 것 같네요. 좋아요. 다시 물어볼게요.”
지혁은 작심한 듯 블룸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내가 재계약을 맺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번 시즌이 끝나고 FA가 되는 알렉스 콥을 잡을 여력은 있나요? 내년에 올해보다 더 연봉이 올라갈 제이크 오도리찌는? 올 시즌 타선에서 도움이 되고 있는 로건 모리슨이나 콜비 라스무스는 내년에 잡을 수 있겠어요? 저 선수들이 모두 정상적인 몸 상태로, 기대보다 더 큰 활약을 해 줘도 월드시리즈에 도전할 수 있는 여력이 있을까 말까한 전력인데.”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지금 지구 2위를 달리고 있는 팀의 에이스가 할 법한 말은 아니지만, 탬파베이 레이스가 전력만 놓고 봤을 때 강팀이냐고 묻는 건 대답이 뻔한 질문이었다. 전문가들이나 평론가들은 여전히 탬파베이가 후반기에는 순위가 쳐질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지금의 호성적은 그저 언더독의 열풍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대다수다.
“날 잡는 데 돈을 다 쓰면, 다른 선수들을 잃겠죠. 그리고 다른 선수들을 잃은만큼 우리의 전력은 더 나빠질 거고. 언제 월드시리즈에 도전할 수 있겠습니까?”
블룸은 대답하지 못했다.
프리드먼은 탬파베이의 상황에 너무나도 꼭 맞아서 도저히 어떻게 돌이킬 수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떠났다. 전체적인 주머니는 늘어나지 않지만, 언제든 강팀의 턱밑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위치에는 존재할 수 있는 시스템. 없는 돈으로는 메이저리그에서 주목받지 못하던 선수를 효율적으로 주워 복권을 긁고, 그 없는 돈이나마 마련하기 위해 유망주를 키워 팔고, 다시 더 어린 유망주를 받아 키우는 것이다.
“우린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적이 있어요. 아쉽게 고배를 마셨지만. 그런 날이 또 올 수 있을 거라고 난 믿습니다. 우리가 판단하기에는 충분히 재능 있는 선수들이 모여 있습니다.”
“마이너리그에?”
“네.”
“내가 언제까지 선수 생활을 할 줄 알고요?”
“...뭐라구요?”
지혁은 살짝 흥분해서 본심을 내보이고 말았다. 진실을 모르는 패트릭이 표정을 조금 찌푸렸다. 객관적으로 봐도 계약 자리에서 도움이 되는 발언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선수 생활이 올해를 제외하고 7년밖에 남지 않은 지혁은 서서히 쫓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계약 자리는, 어쩌면 지혁의 남은 선수 생활을 전부 걸고 하는 계약이나 다름없었다.
장기계약을 맺고 나면 두 번째 기회는 없다. 줄어가는 선수 생명 속에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구단의 변화, 혹은 탈출. 두 개 중 하나는 필요한 시점인 것은 확실했다.
“구단의 비전이 변해서 윈 나우(Win now) 모드로 들어가지 않는 한, 나는 계약을 맺을 생각이 없습니다. 체임.”
“하아.”
체임 블룸의 한숨을 끝으로 식사 자리는 끝났다. 더 이상 누구도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이어갈 수 없었다.
지혁은 탬파베이 구단의 본질적인 전환을 요구했다. 프리드먼이 짜 놓은 시스템의 붕괴를 요구한 셈이다. 그리고 당장 탬파베이가 월드시리즈 진출이 가능한 모드로 전환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마이너리그에 쌓아놓고 있는 유망주들을 연봉 보조를 포함한 트레이드에 포함시켜 당장 훌륭한 전력이 되어줄 수 있는 선수들과 트레이드하는 것.
지혁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고 지혁을 구단에 잔류시키거나, 아니면 지혁을 내보내고 구단의 시스템을 유지하거나. 블룸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이것뿐이었다.
“다음에 또 보죠. 어쨌든 우린... 자주 만나야 할 것 같군요.”
블룸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지혁에게 악수를 청했다. 아마 마지막 악수가 될지도 모른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블룸의 손을 잡았다. 이제 공은 블룸에게로 넘어갔다.
*
2017년 5월 30일. DL에서 복귀한 지혁의 첫 번째 등판. 상대는 텍사스 레인저스였다. 지혁은 흐름을 타고 있는 최성수에게 커다란 2루타 한 방을 허용하며 1실점했지만, 나머지 선수들 중에게 안타 2개만 허용하는 피칭으로 6.2이닝을 틀어막았다.
2017시즌 8승 무패, 방어율 1.80.
지혁의 가치가 천정부지로 뛰쳐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탬파베이의 재정 상황을 알고 있는 다른 팀들이 흘리는 군침도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모두들 쉬쉬하면서도 지혁과 탬파베이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계약이 어긋나거나 연봉조정위원회로 넘어가 버리는 순간, 초대형 매물이 시장에 쏟아질 게 너무나도 명백해 보였다.
변화, 아니면 탈출. 선택지는 두 개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