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24화 (125/204)

< 124 - 브랜트 허니웰. >

구단이 콥의 트레이드를 발표한 그 날, 지혁이 등판한 경기, 대 볼티모어 오리올스 전. 경기를 이겨야 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겠냐마는 이 경기는 이기고 싶은 이유가 한가득이다.

첫째. 시즌이 시작된 이래 계속해서 보스턴에 이어 2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어제 패배하며 양키스에게 2위 자리를 내주었다. 양키스는 애런 저지를 필두로 한 어린 선수들이 앞장서 기세를 타고 있었고, 탬파베이는 갈수록 초반의 기세를 잃어버리고 있다. 새로운 달에 들어섰고, 분위기를 전환할 필요가 있다.

둘째. 알렉스 콥이 떠나기 전 남긴 명연설 때문이었다. 탬파베이 레이스라는 팀에 대해 가지고 있던 콥의 애정이 담뿍 담긴 그 연설은 선수들을 자극시키기 충분했다. 물론 탬파베이를 그저 거쳐 가는 팀으로 여기는 선수들도 많다. 하지만 최소한 롱고리아나 키어마이어, 베컴 같이 탬파베이에서만 프로 생활을 해 온 선수들은 눈에서 불꽃을 태웠다. 이 경기는 콥을 위한 경기이기도 했다.

셋째. 지혁의 네 번째 10승 도전 경기라는 점. 5월 30일 경기에서 시즌 8승째를 수확한 이후 두 번의 등판에 승패 없이 물러났다. 타자들이 제때 도와주지 못하기도 했고, 지혁도 꼬박꼬박 2실점 이상씩을 하며 약간은 아쉬운 피칭을 했다. 6월 중순에 미네소타 트윈스를 상대로 8이닝 1실점으로 9승째를 거두었지만, 그 뒤 세 번의 등판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마지막 세 경기는 모두 불펜이 승리를 날려먹었다. 셋업맨이자 필승조인 브래드 박스버거가 다시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한 게 컸다. 클로져인 알렉스 콜로메는 든든하게 버티고 있지만, 그 콜로메까지 가는 길이 험난하기 그지없다. 득점지원을 제대로 해 주지 못한 타자들, 승리를 여러 번 날려먹은 불펜 투수들 모두가 지혁에게 10승째를 선사해 주기 위해 마음을 다시 먹은 상태.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 날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의 집중력은 평소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숏!”

매니 마차도의 타구가 쏜살같이 지혁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강한 타구가 마운드 뒤쪽 잔디를 때리며 불규칙하게 튀어오른다. 재빨리 2루 쪽으로 뛰어가던 유격수가 불가능해 보이는 동작에서도 몸을 틀어 반대로 글러브를 내밀었다.

[ 건져냅니다, 맷 더피! 그대로 1루로 송구, 잡아냅니다! 와우. 장담하건대 이 주의 수비입니다! ]

하얀 유니폼에 묻은 진갈색 흙을 툭툭 털어낸 더피가 여유 있게 글러브를 들어올렸다. 지난해 맷 무어의 트레이드 대가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넘어온 맷 더피는 오랜 DL 생활을 청산하고 복귀한 첫 경기에서부터 환상적인 수비를 선보였다.

만약 탬파베이가 앞으로 희망을 걸 수 있는 상황이 있다면, 콥처럼 나가는 선수들이 많을 만큼 더피처럼 돌아올 선수들도 많다는 것일 터다.

지혁은 더피의 환상적인 수비에 보답이라도 하듯, 이어진 타자인 크리스 데이비스와 조나단 스쿱을 모두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데이비스를 상대로는 춤추는 싱커가 몸쪽에서 바닥까지 떨어져내렸고, 스쿱을 상대로 던진 패스트볼은 97마일을 기록하며 바깥쪽 가장 먼 곳에 틀어박혔다.

[ 6회까지 허용한 피안타는 단 두 개. 삼진 7개째를 기록하며 무실점으로 깔끔하게 투구를 마칩니다. 문. 오늘만큼은 시즌 10승에 성공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투구입니다. ]

[ 수비가 도와주면 이 선수가 얼마나 무서운 투수인지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이닝이었네요. 그라운드볼을 만들어냈을 때 그 공을 처리해줄 수만 있다면 문을 공략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

[ 만약 오늘 경기에서 이대로 승리를 가져가게 되면, 메이저리그를 통틀어 여섯 번째로 10승을 달성하는 투수가 됩니다. 이미 10승 이상을 기록하고 있는 선수들은 휴스턴의 댈러스 카이클, 보스턴의 후지 미유타와 크리스 세일. 다저스의 클레이튼 커쇼와 애리조나 디백스의 잭 그레인키입니다. ]

*

“문. 6점이나 앞서고 있어. 이번 주에 4일 쉬고 한 번 더 등판할 거야. 비가 안 오면. 오늘은 여기서 그만 던져.”

“벌써 말입니까? 아직 90개도 안 던졌는데요.”

“로테이션대로 가면 다음 경기가 휴스턴이야. 휴스턴은 강하니까, 차라리 그 때 전력으로 오래 던져. 그리고 그 경기 뒤에는 쉬지도 못하고 올스타 게임에 나가야 하잖아.”

“아직 3이닝이나 남았는데...”

지혁이 은근슬쩍 불안함을 내비쳤다. 불펜 투수들이 들었을 리는 없지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까지 불펜이 날려먹은 승리가 꽤 된다. 야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게 다 지혁의 승리로 돌아왔다면 지금 12승.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

“어떤 마음인지는 아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동료를 믿어야만 해. 그게 야구야.”

랭카스터는 단호했다. 여러 가지 계산이 겹친 결정을 내린 것을 알고 있는 지혁도 찝찝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아이싱 하겠습니다.”

“그래. 쉬라고. 저 어린놈을 한 번 믿어 봐.”

“어린놈이요?”

“그래. 쟤.”

불펜에서부터 더그아웃 앞까지 뛰어갔다 왔다를 반복하고 있는 키 큰 투수가 지혁의 시야에 들어왔다.

“쟤를 올리시려구요?”

“응. 6점 리드에 하위 타선이야. 1이닝 정도 시험하는 데 이만한 상황이 또 없지.”

“볼티모어는 꽤 부담스러울텐데. 워낙 힘이 좋아서요.”

“하하! 네 놈 데뷔전에서 미겔 카브레라한테 제대로 한 방 먹었다며? 디트로이트 3-4-5번을 상대했던 놈이 볼티모어 하위타선을 상대할 놈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건 좀 이상하지. 그리고 또 알아? 지금 맞아두면 네 녀석 같은 투수가 될지도 모르지.”

글쎄. 지금 이런 투수가 된 건 그 홈런 때문은 절대 아닌데.

지혁은 아이싱을 받지도 않고 불펜 쪽으로 걸어나갔다. 알렉스 콥이 트레이드된 자리에 오늘 올라온, 의외의 선수. 왜 블레이크 스넬이나 테일러 게리어리가 아니고, 저 녀석이 먼저 올라왔을까?

지혁은 녀석의 등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브랜트 허니웰이 계속해서 뜀박질을 하며 땀을 내고 있었다.

*

[ 7회초입니다. 탬파베이가 6회말 터진 윌슨 라모스의 솔로 홈런으로 7대0으로 리드하고 있습니다. 오, 지금 투수가 바뀐 것처럼 보이는군요? ]

[ 그렇네요. 문이 내려갔습니다. ]

[ 탬파베이가 투수를 바꿨습니다. 투수는... 브랜트 허니웰입니다. 오늘 콜업되었죠. 탬파베이 레이스의 팀 내 유망주 랭킹 2위, 베이스볼아메리카 기준 전체 유망주 순위 22위입니다. 언젠가 데뷔할 거라고 예상되던 선수였습니다만 생각보다는 좀 이르군요? ]

[ 그렇습니다. 탬파베이는 블레이크 스넬이 아직 더램에 있는데요. 메이저리그 경험이 있는 선수들을 제치고 허니웰을 콜업했습니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

[ 스카우팅 리포트에 의하면 아주 독특한 공을 던져서 유명한 선수입니다. 바로 스크류볼입니다. 부상 위험이 아주 높아서 메이저리그에서는 사장된 공이었죠. ]

[ 네. 독특한 공을 던진다고 합니다. 한 번 지켜볼 필요가 있겠네요. ]

허니웰이 마운드에 선 순간, 지혁은 전생을 떠올렸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전생에서보다 훨씬 빨리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을 것이다. 기억 속에 있는 허니웰의 모습보다 훨씬 더 어리고 앳된 모습으로 마운드에 서 있다. 허니웰의 스크류볼을 봤던 타자들이 뭐라고 말했더라. 악마의 공이라고 했었나?

허니웰이 초구를 던졌다. 루키들이 으레 그렇듯이, 가장 자신 있는 공을 가장 자신 있는 코스에, 가장 자신 있는 느낌으로 던졌을 것이다. 타석에 서 있던 볼티머어의 유격수 J.J. 하디는 초구에 스윙을 내지 않았다. 아니, 내지 못했다.

[ 스트라이크! 방금 이 공... ]

[ 네. 스크류볼이네요. ]

[ 궤적이 상당히 독특합니다. 카메라로 보는데도 궤적이 이상해 보였어요.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던 공이 다시 안쪽으로 들어오네요. 와하우. ]

[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 공은 인상적입니다. ]

포수인 라모스가 움켜쥐었던 공을 더그아웃 쪽으로 휙 던져 준다. 배트보이가 황급히 공을 받아 더그아웃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그거, 내가 줄게. 나 줘.”

지혁은 아이싱을 받는 와중에도 배트보이에게서 공을 이어받았다. 탬파베이에 남을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 팀과 함께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트레이드 데드라인 전에 다른 팀으로 옮기게 될지, 아니면 시즌이 끝나고 나서 팀을 옮기게 될지. 만약 일이 틀어져서 팀을 옮길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미래의 일은 미래의 일이다. 패트릭의 손에 맡겨둘 일에 미리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허니웰이라는 투수는 계속 신경이 쓰인다. 이상한 일이었다.

*

“머리! 문. 봤어요? 머리!”

허니웰은 랭카스터의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그리고 스넬과 게리어리를 제치고 먼저 허니웰부터 불러올린 탬파베이 프런트의 선택도 성공을 거뒀다. 허니웰은 3이닝을 깔끔하게 틀어막고 지혁의 승리를 챙겨냈다.

“봤어. 단단하게 잡아놨더라.”

“당신 덕분이에요. 히히.”

“뭘 또. 제구가 많이 좋아졌더라. 잘 했어.”

이번 시즌 스프링캠프에서 허니웰에게 지나가는 말로 조언해 줬던 내용을, 허니웰은 완벽하게 숙지했다. 어린 선수인 허니웰의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가 제구가 비교적 들쑥날쑥하다는 것이었는데.

마운드 위에서 경험하면서 쌓아야 할 위기대처능력이나 마인드 컨트롤 능력 같은 것들은 둘째치더라도, 그 제구력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잡아야 메이저리그에 데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김승우의 조언을 받았던 지혁이 그대로 돌려준 ‘머리를 고정시켜라’는 조언이 허니웰에게도 톡톡한 효과를 가져다 준 것 같았다.

“야. 이거 네 데뷔 공. 집에 잘 간직해 놔.”

지혁은 바람막이 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공을 챙겨 허니웰에게 쥐어주었다. 시즌 10승을 거두는 데 성공한 지혁과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허니웰에게서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그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기자들이 그 장면을 놓칠 리 없었다.

“문. 10승을 지켜 준 루키에게 직접 공을 챙겨 준 건가요?”

“허니웰? 데뷔를 축하해요. 인터뷰 좀 할 수 있죠?”

두 사람은 곧장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 지혁이 담담하게 인터뷰를 하는 데 비해, 안 그래도 하이톤인 목소리가 들뜬 마음에 카랑카랑해져버린 허니웰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스프링캠프 때 문이 저한테 조언을 해 줬어요. 제 약점을 확실하게 잡아줄 수 있는 효과 만점 짜리였다니까요.”

“어떤 조언이었죠?”

“아, 그건. 비밀이에요. 히히. 나만 효과를 보고 싶으니까요. 밖으로 새어나가는 건 절대 안 돼요.”

“오늘 스크류볼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공에 대해 자신감이 있는 모습이었어요. 메이저리그에서 스크류볼을 던져 보니 어떻던가요?”

“스크류볼은 제가 완전히 통제하기 어려운 공이에요. 던질 때마다 휘어지는 정도나 떨어지는 정도, 또 공의 회전이 매번 다르거든요. 항상 같은 공을 던지기가 어렵죠. 그래서 문제는 제구였어요. 이 공의 제구를 어떻게 하느냐만 제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으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오늘 경기에서는 생각대로 된 모양이네요?”

“네. 문 덕분에.”

오, 이런. 어린 녀석들이 미디어를 대하는 법이란. 최악이었다.

*

- 슈퍼 문, 슈퍼 루키를 지도하다.

- 시즌 10승째를 수확한 슈퍼 문, 허니웰의 마구에 날개를 달다.

- 악마의 구종 스크류볼, 달빛을 따라 메이저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 이런. 골치 좀 아프겠네.”

이런 걸 놓친다면 기자가 아니다. 카메라에도 드러날 정도로 이상한 S자로 휘는 궤적을 그리는 허니웰의 스크류볼은 등장만으로도 임팩트가 대단했다. 그리고 그 배경으로 뜬금없이 지혁이 지목당했고.

물론 일련의 과정들은, 스타라면 피할 수 없는 이슈메이킹이다. 매우 귀찮은 일이기도 하다. 또 다른 측면에서 미디어의 주목이 더해진 셈이다. 지혁은 품 속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꺼냈다. 유일하게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기자인 샘 호킨스의 문자가 와 있었다.

- 문. 허니웰이 그러던데, 당신과 허니웰이 각별한 사이라던데. 기사로 내도 됩니까? :D

각별은 무슨 각별. 그냥 조언 하나 뿐이었다니까. 지혁의 주위에 더 많은 기자들이 몰려들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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