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26화 (127/204)

< 126 - 올스타 게임(2). >

축제 분위기의 말린스 파크에 폭죽이 쏘아올려지고, 파란 하늘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할 때 즈음 경기가 시작되었다. 30개 팀의 유니폼이 한 구장에 모이는 유일한 날. 30개 구단의 가장 뛰어난 선수들이 한 경기장 안에서 같은 경기를 치르는 유일한 날.

하지만 올스타전은 확실히 애매한 경기였다. 시즌 경기처럼 긴장이 극에 달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연습경기처럼 마냥 편한 자세로 임하는 것도 아니다. 이 공간에 모인 메이저리그의 베스트 플레이어들은 각기 다른 마음으로 경기에 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승부욕이 강한 누군가는 이 경기도 반드시 이겨야 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고, 또 친목의 장이라고 생각하는 누군가는 경기 내용보다 친목질에 더 열을 쏟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팀 선수들의 루틴이나 마음가짐 같은 걸 관찰하는 선수들도 있다. 혹시 시즌 중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건질 수 있을까 싶어서. 지혁은 관찰하는 타입이었다.

1회초의 관찰 대상은 마운드에 오른 카이클이다. 내셔널리그의 1-2-3번은 다저스의 코리 시거, 컵스의 크리스 브라이언트와 앤써니 리조. 세 선수가 전반기에만 합작한 홈런 개수가 60개가 넘어서는 어마어마한 타선이다.

“헤이- 나이스 볼!”

카이클의 초구가 예리하게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자, 선발 마스크를 쓴 멘데스가 우렁찬 목소리로 화답한다. 좌타자인 시거의 무릎 높이에 절묘하게 걸친 공이다. 그리고 다음 공은 바깥쪽 존을 타고 흘러나가는 슬라이더. 다시 몸쪽으로 돌아온 투심 패스트볼로 파울을 유도해 카운트를 압박하고, 원바운드 되는 체인지업으로 타이밍을 빼앗은 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바깥쪽 보더라인에 공 반 개만 정확하게 걸친 코스로 패스트볼을 꽂아 넣어 루킹 삼진.

“저 공에 무지하게 당했지. 미친 제구력이라고.”

삼진을 당한 건 내셔널리그의 시거지만 카이클의 공에 두려움을 느끼는 건 아메리칸리그 선수들이다. 저 카이클을 수도 없이 상대하고 계속해서 당하고 있는 타자들.

카이클은 크리스 브라이언트에게 강한 타구를 허용했지만 3루수 마차도의 정면으로 빨려들어가는 공이었고, 3번 리조는 1루수 땅볼로 처리했다. 그리고 카이클이 1회 상대한 세 타자 모두 무릎이 무너지며 스윙했다. 그 정도로 밸런스를 망가트렸다.

“참 나. 정신나간 투수구만.”

아메리칸리그 타자들의 푸념과 감탄이 반쯤 섞인 토로가 더그아웃에 맴돌 뿐이다.

*

“헤에이- MVP! 넘겨버리라고!”

어딜 가든 목소리와 파이팅으로는 빠지지 않는 크리스 아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메리칸리그의 최다득표자는 언제나 그렇듯 올해도 마이크 트라웃이다.

트라웃은 거대한 몸을 이끌고 1회 첫 타석에 들어서 내셔널리그의 선발투수인 맥스 슈어져와 마주하고 있다. 평소의 트라웃을 상대로 하는 투수라면 누구도 입가에 미소를 띌 수 없다. 하지만 마운드의 슈어져는 이번만큼은 아주 미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스윙, 스트라이크!”

탈삼진 능력이라면 메이저리그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슈어져는 확실히 어마어마한 공을 던진다. 그의 슬라이더는 마치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떨어진다. 트라웃도 벼락 같은 스윙으로 대처했지만 이번에는 슈어져의 공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러자 트라웃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승부를 즐기는 입장에서의 웃음은 분명히 공포스러운 것이었지만. 이 경기가 올스타전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지혁은 그런 것들보다 트라웃의 스윙 궤도를 면밀히 살폈다. 떨어지는 공을 본 이후에, 트라웃의 스윙이 어떻게 변하는지.

슈어져는 도망치지 않았다. 96마일인데도 무브먼트가 심한 투심 패스트볼을 존 한복판에 꽂아넣었다. 그리고.

따아아악!

“예에에에쓰!”

트라웃의 방망이에는 자비가 없었다.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에 말도 안 되는 슬라이더에 헛스윙을 한 이후에도 트라웃의 스윙은 정확히 똑같았다. 파워를 싣는 힘도, 귓불 뒤에 존재하던 오른손이 돌아나오는 궤적도, 방망이에 공이 맞는 순간 왼팔을 뻗고 오른팔을 덮어버리는 그 메커니즘도. 완벽하다는 말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으로도 수식할 수 없는 트라웃의 스윙 그 자체.

기록이다. 같은 선수가 올스타전 2년 연속으로 1회, 자신의 첫 타석에서 솔로 홈런을 쏘아올린 것. 메이저리그 역사를 통틀어 마이크 트라웃이 아니면 아무도 해낼 수 없는 기록.

“예에-”

슈어져의 무지막지한 공을 담장 바깥으로 넘기고 돌아온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덤덤한 말투로 아메리칸리그 올스타들의 환영을 받는 트라웃은 특히 투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다.

지혁도 주먹을 툭 맞대 주었지만, 웃을 수 없었다. 같은 팀임에도 그렇다. 현재까지 메이저리그에서 지혁의 공을 가장 잘 치는 타자이자, 메이저리그 모든 투수들의 공을 가장 잘 치는 타자. 마이크 트라웃의 위압감은 같은 더그아웃에 있을 때 더욱 크게 다가왔다.

*

2회초. 아메리칸리그의 두 번째 투수는 후지였다. 누가 봐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시대를 호령했던 팀 린스컴을 연상시킬 수밖에 없는 투구폼 때문에, 내셔널리그의 5번으로 나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포수 버스터 포지와의 대결이 경기 전부터 큰 주목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후지에게서 장타를 뽑아낸 건 홈 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지안카를로 스탠튼이었다. 후지는 손에 묻혀둔 로진가루가 휘날릴 정도로 전력으로 공을 뿌렸는데, 100마일이 찍힌 그 공을 몸 앞까지 바짝 잡아놓고 휘두른 스탠튼은 기어이 좌익수 키를 넘겨 펜스를 단번에 맞추는 2루타를 터뜨렸다. 지혁은 후지의 표정이 묘하게 뒤틀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올스타전이 어떤 목적을 가진 경기이든 간에,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가면 승부욕을 불태울 수밖에 없다. 후지처럼, 세계 최고의 투수가 되어야만 하는 녀석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서일까. 주자를 2루에 두고 타석에 들어선 포지를 향해 후지는 자신의 시즌 최고구속을 기록해버렸다.

“101! 오 마이 갓! 101?!”

말린스 파크 더그아웃에 기대 있던 양 팀의 타자들이 모두 머리를 감싸쥐고 방방 뛰었다. 전광판을 가리키며. 101mph. 심지어 와인드업도 아니고 세트 포지션 자세였다.

“미친놈아. 살살해.”

지혁은 괜히 중얼거렸다. 후지는 그런 존재였다. 무지하게 신경을 써야만 할, 신의 축복 아닌 축복을 받은 라이벌인 동시에. 자신의 인생을 다 걸고 낯선 땅에 와서 하루하루 없어져가는 남은 생에 도전해야 하는 철없는 동생. 그런 동생이 올스타전 같은 무대에서 괜한 승부욕을 불태우고 있으니 마음 한 쪽이 묘하게 거슬린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후지는 평소보다 더 길게 스트라이드를 뻗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기합까지 질렀다.

“몬스터! 재팬 몬스터! 예에에!”

아처는 속도 없는 친구다. 더그아웃 난간을 퍽퍽 내려치며 포지를 삼구삼진으로 돌려세워 버린 후지를 응원하고 있었다. 후지는 다음에 타석에 들어선 브라이스 하퍼를 상대로도 100마일짜리 두 개를 찍어넣으며 삼진을 기록했다. 마지막 타지인 제이슨 헤이워드도 삼진.

2루타를 한 방 맞고 삼진 세 개를 기록해버린 후지는 딱 봐도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마운드를 내려왔다. 쉴 새 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쉬에 벌써부터 내일의 헤드라인이 그려지고 있었다. 아휴.

*

- 3회초! 아메리칸리그의 세 번째 투수입니다. 탬파베이 레이스 ? 지! 혁! ‘더 슈퍼’ - 문!

Boooo-

장내 아나운서의 멋드러진 소개가 끝나자마자 마이애미 홈 팬들이 있는 힘껏 긴 야유를 보낸다. 불펜에서 마지막 공 한 개를 던지고 마운드로 뛰어올라가는 데, 왜인지 웃음이 나왔다. 방금 전까지 더그아웃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관찰하던 일도 다 꿈처럼 느껴졌다.

“올스타전이야. 올스타전.”

마운드 뒤에 큼지막하게 장식되어 있는 MLB 로고와 올스타 매치라는 레터링이 현실 같지 않게 느껴졌다. 전생에서 이렇게 큰 경기에 나선 적이 있었던가? 포스트시즌 한 경기에 패전처리 겸 롱릴리프로 1.2이닝을 던졌던 것. 그건 큰 경기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이미 승패는 기울어진 뒤였으니까.

이 곳, 말린스 파크의 낯선 마운드. 이곳에서 지금부터 상대해야 할 내셔널리그의 올스타 타자들. 그리고 지혁의 뒤에 서 있는 아메리칸리그의 올스타 야수들. 외야에는 마이크 트라웃과 애런 저지가 있고, 내야에는 매니 마차도와 젠더 보가츠가 있다. 그리고 그의 공을 받아주는 포수는 페르난도 멘데스다.

더그아웃 안에 있을 때는 덤덤할 줄 알았다. 평소 같은 경기일 줄 알았다. 클럽하우스에서부터 더그아웃으로 이어진 분위기가 좀 낯설기는 했지만, 그래도 야구는 야구니까.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설레는 마음은 마운드에 올라와서 더욱 짙어졌다. 1회에 봤던 트라웃과 슈어져의 미소가 어떤 의미였는지, 오히려 마운드에 올라와서 조금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멘데스를 향해 연습 투구 몇 개를 던지는데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 이런 기분이구나. 올스타가.

승패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경기. 물론 이기고는 싶고, 완벽한 공을 던지고도 싶지만, 설령 조금 나쁜 공을 던져도 상관없는 경기. 하지만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 자체로도 선수에게는 무한한 영광이라는 뻔하고 진부한 인터뷰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느낌이다.

“플레이 볼!”

멘데스가 미트를 팡팡 두드리며 자리에 앉아 마스크를 내려쓰는 모습. 내셔널리그의 8번 타자인 워싱턴의 2루수 다니엘 머피가 타석에 들어선 모습. 홈플레이트 뒤쪽에 자리잡은 관중들이 머피와 지혁의 모습을 카메라로 촬영하는 모습. 이 모든 광경들이 슬로우 모션처럼 지혁의 시공간을 사로잡는다.

“흐읍-”

후지가 기합까지 써 가며 던졌다고 툴툴대던 걸 떠올릴 새도 없이, 지혁도 던지는 순간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스트라이크!”

92마일이 기록된 싱커. 춤추는 듯한 공이 멘데스의 멋진 프레이밍과 어우러져 미트에 빨려들고, 주심이 오른손을 내밀며 스트라이크 콜을 외치는 순간조차도 몽롱하다. 구름 속에 있는 것처럼. 지혁의 인생에서 가장 황홀한 한 이닝이었다.

*

- 별들의 잔치, 올스타 게임. 아메리칸리그의 6대0 완승.

2017년 메이저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게임에서 아메리칸리그가 5년 연속 승리를 거뒀다. 댈러스 카이클이 선발 등판한 아메리칸리그는 12명의 투수들이 9이닝을 합작하며 단 한 점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경기로 내셔널리그를 압도했다. 이날 아메리칸리그의 투수진은 댈러스 카이클, 후지 미유타, 문지혁, 펠릭스 에르난데스, 크리스 세일, 크리스 아처, 어빈 산타나, 코디 알렌, 켄 자일스, 로베르투 오수나, 크레이그 킴브렐과 잭 브리튼이 나섰다.

... (하략).

*

“고생했습니다. 세 사람 모두.”

“요. 아미고.”

“패트릭.”

“...”

패트릭이 세 선수를 마중하러 말린스 파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후지는 아직도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자식. 꼴랑 2루타 한 방인데.

“잘 즐겼습니까?”

“엄청 재밌었다고. 하하. 세상에는 야구 잘 하는 녀석들이 너무 많아.”

“너무 좋았어요. 이런 느낌은 처음이에요.”

“난 별로. 스탠튼...”

패트릭은 후지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활짝 웃었다. 그리곤 박수를 한 번, 짝 하고 쳤다.

“축제는 끝입니다. 황홀한 건 기억에 남겨 둬요. 전장으로 복귀할 시간입니다. 하하.”

지혁은 여전히 금빛 조명이 반짝거리는 말린스 파크를 한 번 뒤돌아보며, 지금의 느낌이 몸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않게 단단히 가둬놓았다. 나중에 기분이 안 좋을 때 꺼내 돌려보고 싶은 마음으로.

이제는 다시 탬파베이 레이스로 돌아갈 시간이다. 탬파베이에서의 마지막을 잘 장식하기 위해,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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