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28화 (129/204)

< 128 - 멋진 선배. >

지혁의 트레이드 루머에서 파생된 소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스모그처럼 퍼져나갔다. 지혁을 트레이드 할지도 모른다는 건 전반적인 리빌딩을 뜻하는 너무나도 명백한 증거라서, 다른 선수들의 트레이드 루머도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제이크 오도리찌, 에라스모 라미레즈, 수자 주니어, 브래드 박스버거 같이 연봉조정대상인 선수들은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이름이 오르내렸다.

선수들은 로봇이 아니다. 주위에서 흔들어대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존재다. 후반기의 어수선한 분위기와 부진에는 분명 이 트레이드 대란도 한 몫을 했다. 또, 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줄을 단단히 붙잡아야 하지만, 그게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뭐라고 질타할 수도 없다. 프로의 세계에서 스스로 관리해야만 하는 부분이니까.

경기 시작 두 시간 전, 클럽하우스 안은 묘하게 조용했다. 어색하게 눈치를 보는 루키들이 잔뜩 있었고, 지혁을 비롯해 기자들에게 집중 공세를 당한 선수들은 아예 이어폰을 끼고 드러누워 있었다. 벤치코치인 캐쉬는 클럽하우스로 들어와 벽을 쿵쿵 두드렸다.

“자. 오늘 라인업 붙는다.”

캐쉬 코치가 한숨을 길게 한 번 쉬고는, 오늘의 라인업이 적힌 종이쪽지를 벽에 붙였다.

“음.”

제일 먼저 확인한 롱고리아도 묘한 소리를 냈다. 바로 오늘, 아침 일찍부터 비행기를 타고 세인트 피터스버그로 날아온 선수들의 이름이 가득이다.

2017년 7월 23일. 일요일. 트로피카나 필드.

탬파베이 레이스 vs 텍사스 레인저스.

탬파베이 레이스 선발 라인업.

1. 코리 디커슨 DH

2. 제이크 바우어스 LF

3. 에반 롱고리아 3B

4. 로건 모리슨 1B

5. 윌리 아다메스 SS

6. 윌슨 라모스 C

7. 케빈 키어마이어 CF

8. 스티븐 수자 주니어 RF

9. 맷 더피 2B

P. 문지혁 (10-1, 2.18)

텍사스 레인저스 선발 라인업.

1. 최성수 RF

2. 앨비스 앤드러스 SS

3. 조나단 루크로이 C

4. 아드리안 벨트레 3B

5. 조이 갈로 DH

6. 마이크 나폴리 1B

7. 라이언 루아 LF

8. 카를로스 고메즈 CF

9. 루드네그 오도어 2B

P. 다르빗슈 유 (9-6, 3.13).

불펜에 대기하는 호세 드 레온, 제이콥 파리아, 후 치웨이에 기존에 먼저 올라와 있던 브랜트 허니웰, 라인 스타넥까지 합치면...

“루키 천국이네.”

25인 로스터 중에 메이저리그를 처음 경험하는 선수가 7명. 탬파베이는 마지막 칼을 꺼내들었다.

*

“자, 자. 정신 똑바로 차려. 올라오자마자 만세라도 부르면 꼴이 말이 아니잖아. 오케이?”

“윌리. 시프트 싸인을 항상 잘 봐야 해. 내가 싸인 나올 때마다 너한테 확인할 테니까. 절대 집중을 잃으면 안 돼.”

워밍업을 위해 달려나가기 직전까지. 키어마이어와 맷 더피가 데뷔전을 치르는 두 루키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제이크 바우어스와 윌리 아다메스는 다소 긴장된 듯하면서도 또 당차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자. 가자. 뛰어, 뛰어!”

시간이 되자마자 야수들이 전력질주로 더그아웃을 박차고 나간다. 클럽하우스에서 마지막까지 글러브 손질을 하며 텍사스 타선의 스윙을 돌려 보던 지혁도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이 무겁다. 팀 분위기가 꽤 많이 어수선해진 게 마치 지혁의 탓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방송에서도, 신문에서도, 그리고 24시간 풀가동되는 SNS에서도 지혁의 거취 문제는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앞둔 현재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어버렸으니까.

하지만 랭카스터 감독과 코치들도, 그리고 롱고리아를 비롯한 선수들도. 누구도 지혁에게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다. 정말 트레이드 되는 거냐고. 팀을 떠나는 게 맞는 것이냐고.

물론 그 질문을 들었어도 어차피 대답 내용은 같았을 것이다. 모른다. 실제로 지혁도 모른다. 패트릭은 하루에도 서너 개 도시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있지만, 이번 트레이드 데드라인 전에 팀을 옮기게 될지는 지혁도 모른다.

“의지만 있다고 트레이드가 딱 되는, 그런 바닥은 아니니까. 게다가 당신 같은 몸값이면 더더욱. 그러니 일단 야구에만 집중해요. 주위에서 뭐라고 하든 간에.”

패트릭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나흘 쯤 전이었나? 그는 미국 반대쪽 끝인 샌프란시스코로 떠나면서 이런 얘기를 남겼었다. 야구에만 집중하라고. 말은 참 쉬운 일이지, 그게. 후우.

“야, 임마!”

“아? 코치님?”

“딴 생각 할 여유가 있나 보다? 정신 차려. 루키 애들이 너만 쳐다보고 있을 거다.”

“하하. 뭘 또 부담까지 주시고 그러세요.”

“진짜야. 닥치고 빨리 뛰어나가, 시간 없으니까.”

힉키가 지혁의 등을 떠밀었다. 그 손에도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팀이 다시 치고 나가기 위해서는 분위기 반등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신인들을 대거 끌어올려 선발로 출장시킨 거고. 이제 지혁은 팀 내에서 그런 루키들을 끌고 나가야 하는 선수다.

어떤 상황에서도 팀원들이 의지할 수 있는 투수. 반드시 해 줘야만 하는 선수의, 반드시 해 줘야만 하는 타이밍의 경기인 셈이다.

*

하지만 출발이 깔끔하지는 않았다.

“볼.”

심판이 바깥쪽 높은 모서리에서 살짝 비켜간 공에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지혁이 왼손 투수라는 걸 감안하면, 방금 코스는 존을 스치면서 빠져나간 공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심판은 단호하게 1루를 가리켰다.

“베이스 온 볼스.”

최성수는 전성기의 선구안을 되찾은 것처럼, 아슬아슬했던 공에는 배트를 멈춰냈다. 1회초 첫 타자에게 볼넷.

[ 노 아웃에 주자 1루. 8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첫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냈기 때문에 말이죠. 투수가 좀 기분이 나쁜 상황이군요. ]

[ 그렇습니다. 문이 저번 등판에서 조금 안 좋았기 때문에 이번 등판에서도 그 기세가 이어지고 있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

[ 2번 앤드러스. 초구 맞습니다. 오! 바로 번트가 나옵니다. 투수가 재빨리 내려와서 잡고, 2루 늦었네요. 1루로 송구해서 앤드러스를 잡아냅니다. 원 아웃에 2루. ]

[ 텍사스도 알고 있군요. 제프 베니스터 감독도 1회부터 점수를 반드시 뽑고 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

[ 스코어링 포지션에 1회부터 주자가 나갔습니다. 조나단 루크로이로 이어집니다. ]

쳇. 까딱하다가는 1회부터 끌려갈지도 모르겠는데.

기분 나쁜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루크로이는 포수 중에서 수위권에 드는 타격이 훌륭한 타자고, 벨트레는 말할 필요도 없다. 명예의 전당을 예약해 놓은 타자다. 빗맞은 안타라도 하나 나온다면 곧장 실점이다.

“하아. 쉽지 않네. 시작부터.”

지혁은 끊임없이 혼자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표정만큼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이런 위기 상황일 때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야 한다는 강한 무의식은 이미 습관이 되어 버렸으니까. 전생이든 현생이든, 위기 상황에서 더 강해 보여야 하는 게 투수라는 건 변하지 않는 진리다.

[ 루크로이. 초구를 보냅니다. 스트라이크. 96마일짜리 패스트볼입니다. ]

[ 좋네요. 바깥쪽 낮은 쪽에 정확하게 꽉 찼습니다. ]

[ 문. 싸인을 오래 보지도 않습니다. 바로 2구. 헛스윙! 크게 한 번 돌려봤습니다만 싱커가 굉장히 매끄럽게 빠져나갔네요. ]

[ 이게 바로 문의 장점입니다. 위기 상황인데도 스트라이크 존에 굉장히 공격적으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안타를 칠 수 있으면 쳐 봐라, 라고 말하는 것 같죠. 카운트를 잡는데 주저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선수가 리그에서 가장 좋은 투수 중 한 명인 겁니다. ]

밀어치게 만들면 2루 주자가 3루까지 간다. 루크로이가 억지로 당겨치게 만들어서 빗맞은 타구를 만들어내고, 3루수 앞으로 보내는 게 베스트다. 물론 삼진을 잡는다면 더할 나위 없고. 그렇다면 던질 공은 싱커밖에 없다.

[ 3구. 투 스트라이크 노 볼에서... 때립니다. 유격수, 아다메스 건져올립니다. 1루로 송구! ]

어?

지혁은 아다메스의 손에서 1루로 송구가 떠나가는 순간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포수 뒤로 백업을 들어가기 시작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저 공은 무조건 1루수의 키를 넘어가는 공이다. 그 정도로 궤적이 형편없었다.

[ 빠졌습니다! 모리슨의 키를 넘어가는 송구입니다. 2루 주자 최성수는 3루를 돌아서! 멈춥니다, 멈춥니다. 다시 3루로 돌아갑니다. 주자가 두 명으로 늘어납니다. 3루와 1루. 오늘 데뷔하는 루키 윌리 아다메스의 실책이 나옵니다. ]

“야. 이건 너무 전형적이잖아.”

상황이 끝나자 지혁이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자조적으로 내뱉었다. 포수인 라모스는 마스크를 벗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느라 지혁의 말을 듣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다메스의 강인해 보이는 각진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쳐가는 게 똑똑히 보인다. 롱고리아와 더피가 아다메스의 오른손을 가리키며 뭐라 얘기하고 있었다. 아마 송구할 때 너무 급해서 제대로 공을 쥐지 못했다는 말이겠지.

[ 볼넷과 실책이 겹치며 두 명의 주자가 나갔습니다. 1회부터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탬파베이와 문. 타석에 아드리안 벨트레가 들어서는데요. ]

[ 외야로 공을 날릴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한 선수죠. ]

모든 안 좋은 플레이의 결과는 ‘하필이면’이라는 말을 달고 다니곤 한다. 지금도 그렇다.

하필이면 타석에 벨트레다. 하필이면 좋은 활약을 보이다가 부상을 당한 팀 베컴의 공백이 드러나 버렸다. 단 하나의 타구만에. 루키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데뷔해서 첫 번째로 잡은 타구를 실책하며 완전히 기가 죽어 버린 것은 덤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전형적이다. 야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 중 하나. 어수선한 팀 분위기, 도와주지 않는 심판, 긴장한 신인의 결정적인 실책.

“삼위일체네, 삼위일체야.”

경기가 무너지는 조건들이 나란히 마련된 셈이다. 이런 상황을 한두 번 맞이한 게 아니다. 특히 패전처리로 뛸 때는 더더욱 그랬다. 이런 상황에서 선발투수가 버텨주지 못하고 대량 실점으로 이어지면 지혁이 마운드에 올라오곤 했으니까.

지혁은 내야를 일일이 돌아보며 선수들에게 싸인을 보냈다. 상황을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주지하라는 뜻이었다. 원 아웃에 1,3루.

누구라도 한 점을 내 주고 간단하게 지킬 생각을 하겠지만 지혁은 한 점도 줄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점수를 주는 건, 그리고 혹시라도 그 점수가 결승점이 되어버리는 건. 앞길이 창창한 루키 한 명의 야구 인생에 큰 데미지를 주는 일이 될지도 모르니까. 지혁은 마지막으로 유격수 쪽을 가리켰다.

“윌리! 정신 차리라고. 알아들었어?”

아다메스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여전히 눈빛에 당황함이 가득이다.

“아니야. 그 표정 아니야.”

지혁은 타임을 불렀다. 힉키 코치는 1회부터 지혁이 타임을 부르는 것에 잔뜩 당황하며 바람막이도 벗지 않고 마운드에 올라왔다.

“왜? 무슨 일인데? 1회부터 타임이야?”

“얘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정신 못 차리면 큰일 나요. 어떻게든 그라운드볼 만들어서 더블플레이로 끌고 갈 건데, 유격수가 이러고 있으면 그런 공 못 던져요.”

힉키 코치와 야수들이 아다메스를 어르고 달래며 격려하는 동안, 지혁은 라모스와 싸인을 미리 정했다.

“윌슨. 벨트레는 낮은 공을 잘 치니까, 높은 쪽에 싱커를 써 볼까? 어때?”

“그런데 높은 쪽 싱커는 너무 위험해. 눈 근처에서 움직이는 건 잘 따라붙는 스타일이라서.”

“그럼 커브? 커브로 그라운드볼을 만들 수 있겠어?”

“안 돼. 타이밍을 늦춰서 걷어올려도 외야로는 충분히 날아갈 수 있어.”

“그럼?”

“그냥 한 점 주고 가는 게 편할 것 같은데. 1회초인데 한 점 주고 시작해도 괜찮잖아.”

지혁은 롱고리아에게 등짝을 맞고 있는 아다메스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놈한테 메이저 데뷔 선물은 줘야지. 나한테 똥을 던지긴 했지만.”

“선물? 하하.”

“멋진 선배 아니야? 이 정도면?”

“그래. 눈물 나네.”

라모스가 피식, 웃었다. 싱커로만 승부를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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