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29화 (130/204)

< 129 - 멋진 선배(2). >

[ 힉키 코치가 문을 진정시켜주고 내려갑니다. 1회부터 이런 상황에 처하는 게 굉장히 낯선 일입니다. 이번 시즌에 1회에 주자를 3루까지 보낸 적이 두 번째라고 하네요. 전반기 통틀어 1회 실점이 단 한 점이었습니다. 4월 17일 볼티모어와의 경기에서 마차도에게 솔로 홈런을 허용한 게 유일한 1회 실점이었군요. ]

[ 말도 안 되는 기록이네요. 하하. 어쨌든 탬파베이와 문의 입장에서 낯선 일이긴 합니다. 랭카스터 감독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라인업에 어린 선수들을 대거 넣었는데, 하필 그 자리에서 실책이 나왔습니다. ]

지혁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더블플레이를 위해 2루 베이스 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는 아다메스 쪽을 마지막까지 돌아보며 단단히 확인시켰다. 마음을 간단하게 먹는 게 가장 좋지만, 그게 안 될 테니. 차라리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게 낫다.

“후우.”

한숨을 내쉬어 보며 라모스의 싸인을 받지도 않고 바로 세트 포지션에 들어선다. 벨트레는 한 쪽 무릎을 꿇어가면서까지 낮은 공을 끌어올려 치는 타자로 유명하다. 하지만 지혁도 낮은 쪽을 노려 그라운드볼을 만들어야만 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낮은 공을 던지기 위한 가위바위보 싸움이 시작됐다.

“볼.”

초구. 가슴팍 쪽을 향하는 높은 패스트볼. 빗맞은 공이 나오면 짧게 떠오를 수 있는 코스였고, 벨트레는 타격 의사가 없었다. 머릿속엔 아마 싱커 생각밖에 없겠지.

2구. 싱커. 몸쪽으로 바짝 가져다 붙였다. 마지막에 살짝 말려 들어왔지만 조금 낮은 쪽에 박히면서 투 볼.

3구. 다시 싱커. 한복판에서 바깥쪽으로 말려나가는 공이 존에 걸쳤다. 벨트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3구에도 스윙을 내지 않은 건 감사할 일이다. 만약 낮은 공을 노리고 있던 상태에서 공격적으로 휘둘렀다면 외야로 뻗어나가기에는 충분했을 터다.

카운트 원 스트라이크 투 볼. 타자는 공격적인 풀 스윙을 하고 싶고, 타점에 욕심을 내야만 하는 카운트. 방망이를 낼 것이다. 무조건. 라모스가 미트를 하늘을 향하게 들어보이고는 땅 위의 흙을 훑듯이 움직인다. 타자의 발등 쪽까지 떨어져야 한다는 의미.

“윌리. 두 발 뒤로 가.”

지혁은 세트 포지션에 들어서기 전에 아다메스를 뒤로 물렸다. 메이저리그에서 20년 가까이 구른 벨트레도 낮은 쪽 싱커를 노리고 있을 테고, 그 노림수를 낮은 싱커의 힘으로 극복할 작정이었다. 강한 타구가 날아갈 게 분명하다.

“으쌰!”

다리를 들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밀어 던지는 슬라이드 스텝으로 공을 던진다. 최대한 빠른 템포에서, 최대한 강하게. 존 한복판의 낮은 코스로 날아가던 공이 홈플레이트 근처에 다다라서 급격하게 떨어지고, 벨트레의 방망이도 그 궤적을 쫓아 따라나왔다.

따악!

[ 쳤습니다, 투수 쪽! ]

‘아냐! 대면 안 돼!’

빠르고 강한 타구가 지혁의 다리 쪽으로 되돌아왔다. 지혁은 본능적으로 글러브를 가져다 댈 뻔 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오히려 글러브를 들어올렸다. 순간적인 판단이었다.

안 그래도 지혁의 몸에 타구가 가려져 있을 터. 어설프게 글러브를 댔다가 공이 가려지고 튀기라도 한다면, 공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아다메스는 분명히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만약 메이저리그 데뷔전에서, 1회만에 실책을 두 개 기록하기라도 한다면...

지혁의 오른다리 옆을 스쳐 글러브를 댔어야 할 자리를 빠르게 지나간 타구는 2루 베이스 위를 타고 넘어, 거의 잔디 위쪽까지 물러서며 미끄러지고 있는 아다메스의 글러브에.

[ 잡아냈습니다! 아다메스, 2루로. 더피가 피벗, 1루로! 더블 플레이! 실책 뒤에 호수비를 보여줍니다, 윌리 아다메스! ]

빨려들었다. 아다메스의 토스가 2루에서 루크로이를 잡아내고, 걸음이 느린 벨트레가 1루에서 넉넉하게 아웃되는 걸 확인하면서 지혁은 글러브를 팡팡 쳤다.

“나이스, 윌리!”

“오케이!”

야수들이 하나같이 달려들어 아다메스의 뒷통수며 엉덩이를 때려댔다. 1회초 내내 어딘가 쫓기는 듯한 눈빛이었던 아다메스가 이제야 웃는다. 아다메스는 엄지손가락을 입에 맞추었다가 하늘을 가리키는 세레머니를 하며 마음의 짐을 털어내는 모습이었다.

“여긴 돔 구장인데, 무슨. 실없는 놈.”

하늘을 힐끔 올려다봐도 트로피카나 필드의 지붕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지혁도 끝까지 아다메스를 기다려 줬다가 엉덩이를 툭 쳤다.

“야. 이젠 정신 좀 차려라.”

“미안합니다, 문. 실책. 안 하겠습니다.”

“됐어. 빠른 거 잘 잡았으니까 됐다.”

신인들이 많이 올라온 경기다. 신인들에게 바라는 건 팀 분위기를 단번에 바꿔주는 것. 패기 넘치는 플레이로, 겁 없이 덤비는 플레이로. 그게 탬파베이와 랭카스터가 모두 바라는 일이다.

그리고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 신인들이 자기 실력의 120% 이상을 발휘해주는 게 필수적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방금 아다메스가 자신이 범한 실수에서 스스로 벗어난 건 상당히 의미가 있었다.

“운도 좋지. 그게 하필이면 또 정면으로 가네.”

지혁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곳에 털썩 앉으며 땀을 훔쳤다. 솔직히 쫄리긴 했다. 만약 아다메스가 벨트레의 타구마저 놓쳤다면 신인들의 플레이는 물론이거니와 오늘 경기까지 말아먹을 수도 있었으니까.

“야. 문. 너 많이 컸다? 일부러 글러브 뺐지?”

“아. 봤어요? 하하.”

롱고리아는 지혁의 수비 동작에서 위화감을 느꼈던 모양인지 지혁에게 슬쩍 다가왔다. 배팅 장갑을 갈아 끼우면서, 마운드에 올라오고 있는 다르빗슈를 응시하면서도 지혁에게 농담을 건넸다.

“잘했어. 수비하는 놈 입장에서는 편했을 거야. 공이 안 보이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면 놓치기 쉬운데 말이야.”

“걔가 놓치면 경기가 힘들까봐 그랬던 거예요.”

“흐흐. 어린 놈 생각도 할 줄 알고. 진짜 많이 컸어.”

롱고리아는 능구렁이처럼 웃더니 방망이를 빙빙 휘두른다. 오늘 하나 쳐 줄 모양이지.

“당신에 비하면 나도 어린 투수니까. 어디 어린 투수 좀 챙겨 봐요. 하하.”

지혁도 소망을 담은 농담을 건넸다.

*

이후의 경기는 비슷하게 흘러갔다. 작년 토미존 서저리의 여파로 한 해를 통으로 날려먹었던 일본의 원조 에이스 다르빗슈는 자신의 구위를 완전히 되찾았다. 이번 시즌은 그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이후 가장 좋은 페이스로 흘러가고 있었다. 특히 슬라이더가 완전히 살아났는데,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삼진유도율이 가장 좋은 구종 중 하나다.

상대적으로 컨택트보다 장타에 비중을 둔 탬파베이 타자들의 큰 스윙을 유유히 피해 도망가는 슬라이더에 추풍낙엽이다. 초반 한 바퀴를 돌아가는 동안 단 한 명도 배트에 제대로 맞춰내질 못했다.

그 동안 지혁은 마운드에서 꾸역꾸역 버텨냈다. 2회초 원 아웃에서 마이크 나폴리가 당겨친 타구가 원바운드로 펜스를 때리는 2루타로 연결되었다. 이때도 좌익수로 첫 선발 출장한 제이크 바우어스의 수비 위치가 조금 아쉬웠었다. 외야수에게 가장 중요한 첫 발 스타트도 늦었고. 하지만 후속 타자들을 처리하며 버텨냈다.

3회? 최성수에게 빗맞은 안타를, 앤드러스에게는 몸에 맞는 볼을 내주며 어렵게 흘러갔지만 루크로이를 내야 땅볼로 유도하며 이닝을 마쳤고. 4회를 세 타자로 막긴 했지만 5회에도 깊숙한 내야안타를 맞으며 위기에 몰렸다.

“와. 오늘 빡세네.”

지혁은 잠시 마스크를 벗고 마운드로 올라온 라모스에게 투덜거렸다. 5회를 마무리하지도 못했는데 투구수가 80개가 넘어섰으니. 오늘 구심을 맡고 있는 사람과 지혁의 궁합도 잘 맞지 않는데다가, 갈 길 바쁜 텍사스의 타자들도 집중력이 유달리 뛰어나다. 라모스도 약간은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너무 빡빡하게 투구하고 있어서 그래. 초반에는 좀 쉽게 치라고 줘도 괜찮았는데.”

“여기까지 와서 그건 별로 의미 없잖아?”

“그렇긴 하지. 어쨌든 지금처럼, 한 점도 안 주는 피칭 할 거지?”

“응.”

“너도 진짜 어지간히 독한 놈이야.”

경험이 적은 수비수들을 뒤에 세워 놓고 투구를 하는 것은 그만큼의 피로를 동반하는 일이다. 라모스의 말처럼 치라고 던져 주는 피칭은 이제는 할 수 없다. 지금은 1회도 아니고 5회. 먼저 실점하는 건 최악이니까. 지혁은 웃으면서 라모스의 등을 떠밀었다.

“내려가. 빨리 막고 들어가서 쉴 거야.”

[ 원 아웃에 주자는 1루. 타석에 오도어입니다. 오늘 텍사스가 문을 공략할 듯 할 듯 하면서 아직까지 점수를 뽑지 못하고 있는데요. ]

[ 문의 위기관리 능력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제는 뭔가 노련한 듯한 모습까지 보이고 있으니까요. 중요한 순간에 계속해서 빗맞은 타구를 만들어내면서 점수를 주지 않고 있습니다. ]

[ 9번 오도어, 첫 타석에는 2루수 직선타로 물러났습니다. 1루 주자 라이언 루아. ]

지혁과 정면으로 마주서고 있는 1루 주자가 조금씩 시선을 끄는 행동을 한다. 지혁의 주의를 조금이라도 분산시키려는 수작이다. 한참 동안 1루 쪽을 바라보다가 초구를 뿌렸다. 몸쪽에 붙는 스트라이크. 오도어가 애매하게 움찔거린 뒤 3루 쪽에 서 있는 텍사스의 주루코치를 계속 응시한다.

‘뭐지?’

촉이라고 해야 할까. 초구를 던졌을 때 1루 주자인 루아가 가져가던 리드와는 조금 다른, 약간의 위화감이 든다. 반 발자국에서 한 발자국 정도 안 되는 보폭만큼 리드가 늘어났다. 타석에 선 오도어가 방망이를 고쳐 잡으면서도 1루 쪽을 곁눈질하는 것도 보인다.

‘작전인가.’

마운드에 서 있는 경력만큼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지혁이다. 루아와 오도어의 아주 미묘한 변화를, 지혁은 감지해냈다.

재빨리 머리를 굴려 본다. 상황적으로도 작전을 걸 만한 타이밍이기도 하다. 하위타선이고, 선취점이 반드시 필요하고, 오도어의 타격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도 않고.

‘번트? 아니면 히트 앤드 런?’

찰나의 순간 동안 머리에 많은 정보들이 스쳐갔다. 그리고 이럴 때는 경험을 믿고 본능대로 가는 것이 좋다. 라모스가 패스트볼 싸인을 내며 바깥쪽으로 슬쩍 빗겨 앉는 것을 보면서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준다. 그리고 세트 포지션에 들어서서 1루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마치 투구에 들어갈 것처럼 오른 다리를 들고... 홈 쪽이 아니라 1루 쪽으로 뻗었다.

[ 픽오프! 걸렸습니다! 주자가 걸렸습니다. 아, 텍사스 레인저스. 이건 좀 아쉬운데요? 라이언 루아가 1루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2루와 1루 사이에서 런다운... 잡히네요. ]

루아가 완전히 역동작에 걸렸다. 아마 작전이 걸렸을 것이다. 스타트를 끊고 방망이를 공에 가져다대는 형식으로 주자를 진루시키려고 했겠지. 견제구를 많이 던지는 편은 아닌 지혁이기에 반 템포 빠른 타이밍에 스타트를 끊은 게 루아에게는 독이 되었다. 그리고 그 전에 리드폭을 약간 넓혔던 게 꼬리를 잡힌 결정적인 원인이었고.

[ 오늘 텍사스는 주자를 엄청나게 내보내고도 단 한 명도 홈으로 불러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흐름이 점점 안 좋아지네요. 오도어, 2구를 때립니다. 하지만 1루수 정면으로 힘없이 구릅니다. 모리슨이 잡아 베이스 터치하며 쓰리 아웃. 5회에도 주자를 출루시켰지만 여전히 득점하지 못하는 텍사스입니다. ]

*

그 순간, 불펜. 오늘 콜업이 된 세 명을 포함한 다섯 명의 루키들이 쪼르르 앉아서 경기를 보고 있었다. 힉키 투수코치는 그 다섯 명의 등을 한 차례씩 두드리며 지혁을 가리켰다.

“마운드 위에서 어떤 멘탈을 가져야 되는지 봐. 교과서가 저기 있으니까.”

브랜트 허니웰은 진작부터 동경의 눈빛으로 지혁을 관찰하고 있었고. 다른 선수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지혁의 투구에 집중하고 있었다.

“배워. 보고 배워. 저 녀석이 마운드에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루틴이 있는지, 어떤 식으로 덤비는지. 하나도 빼지 말고 다 보고 배워. 너희들한테 이런 기회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니까. 알았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