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 응답하는 후배. >
8회말. 상황은 0대0.
지혁은 6.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고 내려왔다. 투구수가 100개가 넘어간 순간 랭카스터는 지혁을 내리는 선택을 했다. 지혁의 뒤를 이어 등판한 선수는 라인 스타넥. 메이저리그 등판 경험이 적지만 그래도 6월부터 올라온 선수답게 벌벌 떨거나 당황하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1.1이닝을 막아내며 브래드 박스버거에게 공을 넘겼다.
텍사스의 다르빗슈도 7회까지 무실점 피칭을 마치고 내려갔고, 8회말에는 알렉스 클라우디오가 올라왔다. 평균자책점 2점대 중반을 기록하며 텍사스의 뒷문을 든든히 지키고 있는 클라우디오의 가장 큰 장점은 적응하기 힘든 투구폼이다.
190cm에 달하는 좌완 투수가 쓰리쿼터도 아니고 사이드암도 아닌 괴상한 자세에서 던지는 투구는 타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특히 짧은 이닝을 소화하는 불펜 투수이기에.
“문. 마사지 준비 됐는데. 지금 내려갈래?”
“아뇨. 이번 회까지는 마저 보고요.”
랭카스터는 이상한 투구폼의 좌완 클라우디오가 올라왔음에도, 오늘 데뷔 경기를 치르고 있는 제이크 바우어스를 바꾸지 않았다. 네 번째 타석에 들어서는 바우어스는 오늘 호된 신고식을 치르는 중이다. 다르빗슈의 슬라이더에 호되게 당하며 삼진 두 개와 내야플라이 한 개만을 기록했다.
“그것도 루키의 특권이야. 네가 저 슬라이더에 삼진을 먹었다고 해서 손가락질 할 놈은 아무도 없어. 어차피 못 치는 공이니까.”
롱고리아는 끝까지 바우어스를 도닥였다. 커다란 헬멧을 눌러써서 귀를 완전히 덮어버린 바우어스가 그 말을 잘 듣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2번부터 시작하는 이번 회에 선두타자인 바우어스가 출루에 성공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 8회말. 여전히 경기는 팽팽합니다. 0대0. 클라우디오가 초구를 던집니다. 바깥쪽 휘어져 나가는 슬라이더. 제이크 바우어스가 초구 볼을 골라냅니다. ]
[ 오늘 탬파베이가 라인업에 내세운 두 명의 루키가 모두 다르빗슈에게 꼼짝없이 당했는데 말이죠. 랭카스터가 교체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이 뚝심 하나만큼은 인정해 줘야겠습니다. 루키들이 응답해 줄 수 있을까 궁금하네요. ]
[ 2구. 높은 스트라이크. 슬로우 커브가 절묘하게 떨어집니다. 하하. 66마일이네요. 가만히 지켜보는 바우어스. ]
“쉽지 않겠네.”
“타이밍이 하나도 안 맞는데?”
더그아웃에서 얼핏 봐도 바우어스가 배트를 쥔 손이 움직이는 타이밍과 클라우디오의 공이 날아드는 타이밍이 전혀 맞지 않았다. 데뷔전에서 첫 세 타석을 다르빗슈의 공을 보고, 그 이후엔 허리춤에서 공을 날리는 좌완 투수의 공을 보다니.
“쟤도 어지간히 운대 안 맞는 녀석이네.”
모두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괴로울 거라며 중얼거리는 야수들도 있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고, 그저 루키답게, 자신 있게 휘두르기만을 바랐다. 세 번째 공, 66마일짜리 커브가 들어온 이후 날아든 87마일짜리 패스트볼을 바우어스가 호쾌하게 걷어 올리기 전까지는.
[ 때립니다! 와하우, 우측 라인 선상에 떨어집니다! 루키 바우어스가 오늘 경기 탬파베이의 첫 장타를 때려낼 것 같네요! 펜스까지 굴러갑니다, 바우어스는 2루까지. 2루까지 서서 들어갔습니다, 선두타자 바우어스! ]
“히이햐아아!”
“오 마이 갓! 오 마이 갓! 이게 무슨 일이야!”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탬파베이의 선수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더그아웃을 뛰쳐나왔다. 난간에 매달린 선수들이 팔걸이를 퍽퍽 내리치며 2루에서 약간은 어색하게 베이스를 밟고 서 있는 바우어스를 가리켜댔다.
“아. 이건 흐름이 좀 바뀌겠는데?”
클라우디오가 당황했을 것이다. 무조건 잡아낼 수 있다고 믿었던 루키에게 의외의 2루타를 허용했으니. 지혁도 저 감정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반드시 잡아내야만 했던, 잡아낼 것이라고 생각했던 루키에게 의외의 한 방을 허용했을 때 마운드에서 멘탈을 잡는 능력은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클라우디오는 그런 경험이 없다.
“소리 좀 더 내 봐! 좀 더! 잊었나, 너희들? 허슬이야!”
랭카스터가 직접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지금, 8회까지 와서야, 루키들을 대거 끌어올린 대가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번 회에 바우어스를 홈까지 불러들이고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면. 그제야 랭카스터가 원하는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할 것이다.
*
[ 텍사스, 다시 투수를 교체합니다. 이번 회에만 세 번째 투수입니다. 알렉스 클라우디오에 이어 제레미 제프리스, 그리고 다시 키오네 켈라 올라옵니다. ]
2아웃 3루. 텍사스의 베니스터가 원포인트 릴리프를 즉각 투입하며 롱고리아와 모리슨을 잡아냈다. 한 베이스 더 진루했지만 여전히 바우어스는 홈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리고 이 타이밍에 타석에 들어서는 선수가 또 하나의 루키, 오늘 경기를 초장부터 위기에 밀어 넣을 뻔했던 윌리 아다메스다.
“윌리. 한 타이밍 빨리 휘둘러야 해. 쟤 100마일까지 찍는 녀석이니까.”
그야말로 광속구를 뿜어대는 투수다. 텍사스가 자랑하는 파이어볼러. 아다메스도 알고 있다는 듯 입술을 앙다물고 배트를 단단히 거머쥐었다.
“헤이, 루키! 초구부터 자신 있게 돌려!”
지혁도 두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크게 외쳐주었다. 들렸을까 모르겠지만. 아다메스는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 뒤 타석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 탬파베이의 주자가 3루까지 나가있습니다. 한 점 승부로 접어든 오늘 경기, 만약 저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게 되면 탬파베이는 승리까지 아웃카운트 세 개만을 남겨놓게 됩니다. 과연 바우어스를 불러들일 수 있을지. ]
[ 대타를 쓰지 않네요. ]
[ 랭카스터 감독의 믿음은 대단합니다. 윌리 아다메스를 밀어붙입니다. ]
결정적인 순간. 주자도, 타자도, 모두 오늘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르는 1995년생 루키를 세워 둔 탬파베이. 우타자에게는 우완을, 그리고 좌타자에게는 좌완을 투입한 이후 파이어볼러로 찍어누르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텍사스. 이 경기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
승패가 갈렸다. 단 한 개의 공으로.
따아아악!
100마일. 100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이, 키오네 켈라의 초구가 아다메스의 몸쪽을 찌르며 불꽃같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마치 그 공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 듯이, 아다메스는 완벽한 타이밍에서 그 공을 날려보냈다.
“우와아아악!”
“넘어갔다! 넘어갔어! 볼 것도 없어!”
“미친! 미친놈이야!”
깔끔한 타구음만 들어도 공의 종착지를 알 수 있었다. 텍사스의 외야수들이 나란히 한 쪽으로 모여들었지만, 펜스에 매달려 점프를 해 봐도 그 위를 훌쩍 넘긴 곳에 아다메스의 공이 떨어졌다.
“이예에에에에!”
됐다. 랭카스터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야 반등의 첫 발을 떼게 된 것이다. 그것도 루키들의 힘으로.
*
7월 24일. 크리스 아처의 완투승으로 텍사스를 격침했다. 아처의 시즌 10승째.
7월 25일. 제이크 오도리찌가 일찍 무너졌지만, 구원으로 등판한 호세 드 레온이 3.2이닝을 퍼펙트로 돌려세우며 역전승.
7월 26일. 루키 브랜트 허니웰이 악마의 스크류볼을 앞세워 7이닝 2실점 호투. 텍사스와의 4연전을 스윕.
분위기를 탄 탬파베이는 이어진 시리즈인 양키스와의 리턴 매치에서도 거침없는 기세를 이어갔다. 블레이크 스넬은 애런 저지에게 홈런 두 방을 허용했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실점을 억제해냈고, 코리 디커슨과 다니엘 로버트슨, 에반 롱고리아가 백투백투백 홈런을 작렬해내며 역전승으로 시리즈 첫 경기를 가져왔다. 5연승이다.
고무적이다. 특히 신인들이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플레이를 제대로 펼치고 있는 것이 특히 더 그렇다. 바우어스와 아다메스는 물론이고 유틸리티 백업인 로버트슨, 그리고 추가적으로 콜업된 1루/외야 백업인 질라스피도 순조롭게 적응해 나가고 있다.
결과적으로 탬파베이가 바라는 유일한 조건이 마련되었고, 이번 시즌 잔여기간을 어떤 식으로 치러야 할지도 점점 명확해져 갔다.
그리고, 5연승을 거두며 싱글벙글하고 있던 지혁과는 달리 패트릭은 다크서클이 거의 무릎까지 내려온 채로 지혁을 찾아왔다.
“트레이드는. 시즌 끝나고 합시다. 조건이 안 맞아요.”
“그렇습니까? 오케이.”
“차라리 잘 됐어요. 이번 시즌에 몸값을 제대로 올려놓는 게 더 나을테니.”
“어느 구단이 제일 적극적이었어요?”
“궁금해요? 지금까지는 일부러 안 물어봤던 것 아닌가?”
“파토났다고 하니까. 이제는 들어봐도 괜찮잖아요.”
애매한 선수였던 지혁은 이곳저곳을 떠돌았었다. 어느 구단에 들어가든 특별한 감정이 들 것 같지는 않았다. 흔히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라면 누구나 양키스의 핀 스트라이프을 입고 싶어하거나 보스턴의 빨간 양말을 신고 싶어하곤 했다. 혹은 다저스나 자이언츠, 컵스처럼 유구한 역사를 가진 명문팀에 들어가고 싶어하기도 했고.
“제일 적극적이었던 건 다저스에요. 프리드먼이 당신을 좋아하니까. 그리고 다저스에는 절대 줄 수 없다고 생각한 자이언츠가 득달같이 달려들었죠. 하지만 자이언츠는 줄 수 있는 유망주 카드가 마땅치 않아요. 발은 담갔지만, 귀찮기만 했죠. 그리고 다저스가 들어오니까 내셔널리그에서 급해진 컵스도 들어왔고...”
“아, 패트릭.”
지혁은 잠시 말을 끊었다.
“컵스는 빼 줘요. 그쪽은 사실 별로... 가고 싶지 않네요.”
“조 매든이 당신을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감독 중 한 명이던데. 매든에게는 아쉽게 됐네요.”
“아무래도 날 내쳤던 팀에 다시 가는 건 좀 자존심 상하잖아요?”
“나야 뭐, 4년 전처럼 아무 구단이나 잡고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 아니니까. 상관없어요. 컵스는 빼죠, 그럼.”
“컵스가 들어오고, 또요?”
“상도덕에 어긋난다는 걸 알면서도 양키스와 보스턴이 모두 방해 공작에 나섰어요. 자기들이 당신을 데려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몸값을 뛰게 해서 다른 쪽에서 지출을 더 크게 하려는 속셈이었죠.”
“흠.”
지혁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빅마켓이라면 응당 그럴 법 하다. 돈뭉치를 한아름 들고 테이블에 뛰어들었다가 레이스만 반복해서 몸값을 높여둔 뒤 빠지는 것. 빅마켓 팀의 특권이고, 너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걔네들 때문에 이번 이적이 성사되지 않은 탓도 있겠네요?”
“어느 정도는? 특히 보스턴은... 징글징글해요, 아주. 후지를 통해서 하루에도 열세 번씩 연락해 왔을 정도니까.”
“하하.”
양키스와 보스턴은 돈의 힘으로 뭔가 어깃장을 놓아 보려다가 실패했다. 탬파베이가 큰 대가를 받는 것을 방해하려고 시장에 뛰어들었다가 되레 지혁을 두 달 동안 팀에 남겨 놓은 셈이 되었으니.
“어쨌든 난 두 달 동안 휴가나 좀 갈까 싶어요. 최근 열흘 동안 하루에 세 시간도 제대로 못 잔 것 같으니까.”
“마음대로 해요. 나도 탬파베이에서 두 달 바짝 불태우면 되겠네.”
마지막 두 달이다. 8월, 9월. 그리고 가을 야구를 할 수 있게 되면 가을 야구까지. 혹시 또 모른다. 이 팀에서 월드시리즈에 도전할 수 있을지도. 모든 우주의 기운이 다 모이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최근 다섯 경기에서 기세가 제대로 올라온 루키들이 어떤 힘을 내는지 확인했으니까, 혹시 모른다.
*
- 슈퍼 문, 잔류 선언. 초대형 트레이드는 수면 아래로.
- 탬파베이, 문을 지켜내며 포스트시즌을 향해 달려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