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 신인의 한계. >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일찌감치 선두가 결정된 각 지구의 승패 구도에 큰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 시즌은 한 달이나 남았다. 시즌 막판으로 갈수록 더 흥미진진한 컨텐츠를 만들어 팬들의 주목도를 높여야 할 시점인데, 정작 포스트시즌에 합류하게 될 팀들은 이미 결정이 나 버린 상황.
지구 우승을 독보적으로 확정한 팀들은 벌써부터 경험이 없고 실력이 부족한 신인들을 로스터에 채워 넣고 있고,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팀들 역시 신인들을 끌어올려 경험이나 쌓게 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경기의 질은 떨어지고, 관중들은 모르는 선수들만 가득한 경기장에 찾아오려고 하지 않게 된다.
안 그래도 야구의 인기를 나타내는 지표는 갈수록 하락세를 보이고 있고, 특히 젊은 층에서의 이탈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역동적이고 다이나믹한 NFL이나 NBA로 젊은이들의 관심이 빠져나가는 흐름은 꽤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온 약점이다. 그리고 많은 전문가들은 메이저리그의 야구가 떨어지고 있는 이 문제를 두 가지 원인에서 분석하곤 했다.
첫째. 어린 슈퍼스타의 부재.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리고 피부가 하얀 미국인 슈퍼스타의 부재였다. 물론 크리스 브라이언트가 그 자리를 꿰차고 좋은 활약을 이어가고는 있지만, 메이저리그의 전체 규모를 생각했을 때 깜짝 스타가 주기적으로 등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뼈아팠다.
오래 전까지 갈 것도 없다. 워싱턴 내셔널스의 스티븐 스트라스버그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저리그 판에 뛰어들었을 때의 센세이션. 스물 한 살의 마이크 트라웃이 메이저리그를 폭격하며 신인왕과 실버 슬러거, MVP 투표 2위를 쓸어갔을 때의 충격.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핏덩이 같은 선수들의 충격적인 등장과 군림은 멀어진 지 오래다.
둘째. 부족한 컨텐츠와 올드한 스토리텔링. 작년 시카고 컵스가 107년 만의 저주를 깨고 드디어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이번 시즌에는 이렇다 할 컨텐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몇 해 전 캔자스시티가 우승을 했던 것처럼 스몰마켓 팀의 반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짝수 해의 최강자라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처럼 꾸준히 최강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팀도 없다. 이렇다 할 컨텐츠 자체가 없으니 젊은 층에게 어필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 또한 전무하다시피 했다.
이런 와중에,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유일한, 최후의, 마지막 희망을 걸어야 할 곳이 바로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였다. 사무국은 아마 ABC의 존 헤이건이 질문했던 멍청하기 그지없던 그 질문에 꽂힐 수밖에 없었을 터다.
‘뉴 제너레이션 vs 골든 제너레이션’.
유치하고 촌스러운 문구다. 하지만 클래식한 수법이기도 하다. 사람들을 가장 잘 자극할 수 있는 구도.
리그에서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신생 구단이자, 리그에서 가장 작은 마켓의, 리그 최악의 비인기 팀, 탬파베이 레이스. 루키 선수들을 극단적으로 로스터에 많이 집어넣은 팀이자 문지혁이라는 리그에서 가장 위협적인 투수를 가지고 있는 팀.
리그에서 가장 오래된 팀이자, 리그에서 가장 큰 마켓을 자랑하는, 리그 최고의 명문 구단인 보스턴 레드삭스.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는 어린 선수들과 고액 연봉을 받는 베테랑들의 조화가 절묘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동시에 후지 미유타라는 리그에서 가장 파괴적인 투수를 가지고 있는 팀.
스토리는 만들어졌다. 언더독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탬파베이가 압도적인 힘으로 지구 우승을 사실상 확정해 놓은 보스턴과 맞붙는다. 그리고 어떻게든 사람들의 주목을 더 끌어모으기 위해서, 메이저리그 사무국도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시즌 중 뽑아낼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컨텐츠나 다름이 없으니까.
*
탬파베이 레이스의 루키 선수들은 기자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기자들을 떼어 놓는 건 쉽지 않은 일일뿐더러, 루키들도 갑자기 폭발하기 시작한 이 관심을 꽤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슈퍼스타가 된 것 같은 기분일 것이다. 탬파베이라는 극단적인 비인기 구단에서 뛰는 선수들에게는 이런 경험은 쉽게 할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이다.
“들뜨면 곤란한데.”
“저 때는 귀에 아무 것도 안 들어가. 그냥 둬야 돼.”
불펜 피칭을 마치자마자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버린 허니웰을 바라보며, 아처와 지혁은 내심 걱정을 하고 있었다.
“쟤는 성격이 좀 산만하고 그래서...”
“난 별로 걱정 안 해.”
그나마 지혁은 허니웰의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에 걱정을 덜 하는 편이지만, 아처는 달랐다. 특히 아처는 루키들에게 책임감을 느끼는 타입이었다. 그들보다 먼저 메이저리그에 데뷔해서 자리를 잡고 있는 선수들이 루키들의 태도나 마음가짐에 큰 영향을 준다고 믿고 있는 선수였다. 기존의 제임스 쉴즈가 그랬듯이.
“와하하하.”
허니웰에게서 어떤 대답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자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어댄다. 어린 선수 특유의 거침없고 톡톡 튀는 농담이라도 들었으려나?
경기가 시작되려면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지만, 아처는 당장이라도 기자들을 허니웰에게서 떼어내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지혁은 언제나 유쾌하던 아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걸 오랜만에 봤다.
“네가 따끔하게 한 마디 해 줘. 쟤는 널 잘 따르잖아.”
“하아.”
지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잘 할 거라고 생각했고, 또 알아서 잘 해야만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본적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아처가 느끼고 있는 루키들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다. 지혁은 뒤꽁무니에 기자들을 줄줄이 달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는 허니웰을 잠깐 불렀다.
“오, 이번엔 슈퍼 문의 조언 타임인가요?”
“존. 오늘 선발로 나가야 될 투수예요. 이제 혼자만의 시간을 좀 주셔야죠.”
기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혁이 말을 끊었다. 표정 하나 없이, 단호한 말투로.
“이런. 실례했군요.”
그나마 NBC의 존은 이 바닥에서 한참 동안이나 구른 베테랑 기자였다. 지혁이 의미하는 걸 단번에 알아들었다. 기자 무리의 선두에 있던 존이 두 손을 들어보이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기자들도 전부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따라와봐.”
지혁은 허니웰의 손을 잡아끌어 더그아웃 안쪽의 통로로 들어가버렸다.
*
“너. 요새 야구 잘 되니까 재밌지?”
“당연하죠. 히히.”
“그러다 훅 간다. 정신 차려.”
“응? 뭐라고요?”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아직 메이저리그에서 두 달도 안 뛰었으면서. 벌써부터 기자들한테 휘둘리고 인스타그램이나 하고 다니고, 그러고 있잖아.”
허니웰은 쓴소리를 들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야구가 잘 될 때는 아무 것도 몰라. 야구가 얼마나 어려운 건지. 메이저리그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지금 칭찬하는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 같지? 한 경기만 망쳐도 전혀 다른 기사가 쏟아질 걸.”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알아서 할게요.”
“보스턴은 강해.”
“전 휴스턴도 이겼어요.”
자신만만한 루키는 한치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마련이다. 8월 한 달 동안 완벽한 성공을 거둔 루키에게 다른 게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자신감은 하늘 끝까지 솟구쳐 있고, 1초라도 빨리 마운드에 오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을 것이다. 쏟아지는 관심에 어깨에는 힘이 들어가고, 조금 더 멋진 선글라스를 끼고 멋진 차를 타고 싶을 테지.
루키일 적에 괜찮은 성적을 내다보면 자연스럽게 미디어의 큰 주목을 받게 된다. 메이저리그에서 주목할 만한 성적을 거둔 선수들은 모두 이런 과정을 겪어 왔다. 지혁도 물론 마찬가지고.
그리고 그 거대한 관심의 파도에 휩쓸려서 성장하지 못하는 선수들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초반 몇 경기를 잘 하다가 우쭐하게 되고, 그 순간부터 다시는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지 못한 선수들도 한 트럭이다.
“... 좋아. 알아서 잘 하겠지.”
개인의 일은 개인의 일이고, 프로의 세계에서라면 더더욱 개인이 알아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간섭을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단순한 조언에 그치는 게 아니라 간섭의 형태가 되는 순간 관계가 어그러지기 마련이다.
진짜 훌륭한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저 때 견뎌내야 한다. 외부로부터의 강한 관심에 들뜨지 않고, 그 압박에 굴하지 않고, 그 관심이 떠나갔을 때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
지혁이 따로 불렀다는 것 자체에 조금 긴장을 하고 있던 허니웰은 지혁이 물러서자 다시 싱글거렸다. 속으로는 혀를 차면서도, 지혁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스스로 당해 봐야 아는 일을 미리 강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야구의 무서움을 겪어 봐야 항상 겸손한 자세로 임할 수 있게 된다. 누가 알려준다고 해서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럼 난 글러브 손질을 좀 할게요.”
“그래. 인스타그램 하지 마라. 경기 날에는 좀 하지 마.”
“히히.”
지혁이 아는 한, 허니웰은 A급 투수를 넘어서는 선수가 될 것이다. 오늘 경기에서 호되게 한 번 당해보고 나면 정신을 번쩍 차릴 것이다. 정작 보스턴은 제대로 벼르고 단단히 준비하고 있는데 지금의 허니웰은 그걸 돌아볼 만큼 시야가 넓지 않으니까.
“제대로 혼나는 날이 되겠네.”
그리고 마치 예언처럼, 허니웰은 3회를 채 버티지 못했다.
*
따아악-!
“아. 이건 좀 위험... 또네.”
힉키 코치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무키 베츠가 완벽한 타이밍에 잡아당긴 타구가 트로피카나 필드 외야 상단에 꽂힐 정도로 까마득하게 날아갔다. 콜업된 이후 선발에 자리잡아 기세가 꺾인 적이 없던 허니웰이 고생을 단단히 하는 1차전이다. 오늘 경기에서 벌써 세 개째 피홈런이었다.
“힉키 코치! 불펜에 누가 준비돼 있지?”
“지금 라인 스타넥, 후 치웨이 있습니다.”
“후로 갈 거야.”
“옛.”
랭카스터가 곧장 걸어나갔다. 야구공 하나를 손에 쥔 채로, 마운드가 아니라 심판에게 먼저 향했다. 명백한 교체였다.
악마의 스크류볼을 던진다고 잔뜩 포장해 놓은 기자들은 허니웰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분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마운드를 내려오는 녀석의 모습이 안쓰럽다.
“고생했어. 괜찮아.”
“...”
선수들이 내민 손을 간신히 마주치던 녀석이 아무 말도 않고 클럽하우스로 들어가 버렸다. 나름대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보스턴의 타자들은 허니웰의 스크류볼만 집요하게 노리고 들어왔다. 어디에선가 미세한 공략법을 발견하기라도 했는지, 젠더 보가츠와 헨리 라미레즈, 무키 베츠가 때려낸 홈런이 모두 스크류볼을 잡아당긴 타구에서 나왔다.
“가장 자신 있는 공을 가지고 이렇게 얻어맞았으니까 상심이 클 거야.”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면 의미가 없어. 누가 가서 위로를 해 주는 건 중요한 게 아니야.”
아처가 걱정스럽게 허니웰이 사라진 통로 쪽을 돌아보았지만 지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3이닝이 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루키 후 치웨이에게도 같은 말을 해야 했다. 보스턴과의 시리즈는 언제나 그렇지만 참 어렵다. 아니. 야구란 참 어렵다.
거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폭주기관차의 질주가 멈춰섰다. 거짓말처럼. 폭주기관차에 다시 시동을 걸어야 할 사람이 바로 지혁이었다.
물론, 절대 쉽지는 않겠지만.
두 경기를 내준 상태에서의 3차전. 후지와의 두 번째 매치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