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 문지혁 vs 후지, 2차전. >
- 보스턴 레드삭스, 홈런 6개를 뽑아내며 1차전 11대2 대승!
- 보스턴, 탬파베이 원정에서 2차전도 승리하며 위닝 시리즈. 데이빗 프라이스, 친정팀 상대로 완봉승.
- 주목받던 시리즈, 까 보니 허탈. 현격한 전력 차이가 그대로 드러나다.
-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슈퍼 문 vs 재팬 몬스터, 3차전 프리뷰.
언론들에서 김이 빠지는 결과란다. 이래서 경기 전에 기사들을 읽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단 두 경기만에 ‘영 제너레이션’인지 뭐시기인지 하며 치켜세워졌던 루키들이 처참하게 박살난 패배자로 변해버렸다. 이렇게 순식간에 말을 바꾸는 게 기자들이다. 허니웰이 좀 느꼈으면 좋으련만.
“하여튼 냄비 같은 놈들이야.”
태블릿 PC가 비싼 것이긴 했지만, 지혁은 벽에 집어던져 버렸다. 이번 시즌은 이미 와일드카드를 확보한 것이나 다름없다. 보스턴을 따라잡는 건 산술적으로 힘든 일이고 어차피 양키스와 와일드카드를 거쳐 포스트시즌에 올라가야 하는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런 건 기분이 더럽다.
루키들의 기세가 한풀 꺾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언젠가는 겪었어야 할 패배라고 해 두면 편하다. 지난 8월은 지나치게 운이 좋았던 한 달이다.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가을 야구에서 이런 일을 겪는 것보다 차라리 한 달 전에 패배의 쓴맛을 보고 재정비를 하는 게 팀 전체에게도, 또 유망주들 스스로에게도 훨씬 낫다.
하지만 그건 그거다. 내일 등판해야 할 지혁은 보스턴의 이 기세를 끊어내야 했다. 그리고 상심한 루키들의 기세를 다시 살려줄 필요도 있다. 너희들이 당한 패배를 복수해줄 수 있는 팀원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 하여튼 쉬운 게임이 없다니까.”
8월의 질주를 선봉에서 이끌었던 신인들의 기세가 확 꺾였으니, 다시 에이스가 존재감을 발할 차례인데. 하필이면 상대가 후지다. 후지 녀석은 저번 패배를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게 분명했다. 패트릭의 전화도 안 받는다고 하는 걸 보면. 단단히 칼을 갈고 나올 게 뻔하다. 허니웰과 드 레온을 두들기며 타격감이 살아 있는 보스턴의 타선도 부담스럽고.
*
이튿날, 지혁은 가장 먼저 트로피카나 필드에 출근했다. 경기 시작이 오후 여섯시 반인데 오전 열한 시 조금 넘은 시간에 들어갔다. 지혁의 워크 에씩은 항상 좋았지만, 오늘은 평소보다도 훨씬 더 빨리 출근했다. 가장 연차가 안 되는 클러비들 몇몇이 이제 막 선수들의 옷가지를 세탁하려고 라커룸에 들어왔다가 지혁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기도 했다.
지혁은 라커에 짐을 풀어놓자마자 간단한 조깅과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어깨 전체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빠지는 곳 없이 꼼꼼하게 점검했다. 손톱을 다시 다듬어서 혹시라도 깨지거나 금이 가는 일을 방지한다. 이후는 글러브와 스파이크를 손질했다. 그리곤 클럽하우스에 마련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출근하기 시작한 선수들이 일찍 도착해 있는 지혁을 보고 놀라거나 감탄하는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지고 나서, 지혁은 비디오 룸에 틀어박혔다.
“준비를 진짜 많이 했네.”
비디오를 계속해서 돌려보면 알게 된다. 보스턴은 아주 철저하고 완벽하게 준비해서 이번 시리즈에 임하고 있었다. 보스턴의 타자들은 허니웰과 드 레온을 처음 만났음에도 투구폼과 타이밍을 재는 데 전혀 위화감이 없다.
허니웰의 스크류볼은 처음 타석에서 만났을 때 바로 대처하기 어려운 공인데. 보가츠와 라미레즈는 첫 타석에, 베츠는 두 번째 타석에 홈런을 만들어냈다. 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하고 나왔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어디 보자...”
후지와의 지난 첫 번째 맞대결에서 보스턴 타자들이 보여줬던 스윙을 한참 돌려보다가, 어제의 스윙과 비교를 해 본다. 낮은 공에는 어떤 스윙을 하고, 높은 공에는 어떻게 접근하는지. 밀어치는 타이밍의 미세함을 잡아내기 위해 같은 스윙을 몇십 번이나 돌려 본다.
지혁은 이렇게 준비하고 있었다. 부담이 심한 경기일수록, 더 많은 준비를. 투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또 가장 견실한 방법이니까.
*
경기 시작 한 시간 전. 지혁은 외야 한 편에 누워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후지에게 다가갔다. 지혁이 다가오자마자 후지가 몸을 벌떡 일으키고는 대번에 말했다.
“형. 오늘은 안 져요.”
“나도 안 져. 아니, 못 져.”
“나도 못 져요.”
“임마. 너희 팀은 1차전이랑 2차전 가져갔잖아. 한 게임 정도 져 줘라, 좀.”
농담 삼아 건넨 말이었지만, 후지는 눈썹도 꿈쩍하지 않았다. 확실히 승부욕은 진짜 지독스러울 정도다. 그리고 승부욕을 불태우는 건 후지뿐이 아닌 모양이었다. 존 패럴 감독은 지구 우승을 사실상 확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까지 두 게임을 쉽게 가져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내세울 수 있는 최고의 라인업을 뽑아들었다.
지혁과 후지가 마주쳤던 첫 번째 경기에서 완봉패를 당했던 걸 기억하고 있다는 듯이. 복수의 칼날은 후지만 갈고 있는 게 아니라는 듯이.
“형네 타자들한테 전해 줘요. 오늘은 한 점도 안 준다고.”
“굳이 전해줘야 되냐? 그럼 너도 너희 타자들한테 좀 전해라. 살살 좀 해달라고.”
후지는 지혁을 한 번 쳐다보더니 입술을 앙다물고 보스턴의 벤치 쪽으로 가 버렸다. 평소에는 애교도 좀 부리고 살갑게 굴던 녀석이, 정말로 작정을 한 모양이다. 보스턴의 유니폼을 입은 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지혁은 확신할 수 있었다.
“하. 진짜 한 점도 안 줘야 되겠네.”
오늘 경기도 한 점 승부가 될 것이라는 걸.
*
2017년 9월 4일, 트로피카나 필드.
탬파베이 레이스 vs 보스턴 레드삭스.
탬파베이 레이스 선발 라인업
1. 코리 디커슨 DH
2. 케빈 키어마이어 CF
3. 에반 롱고리아 3B
4. 케이시 질라스피 1B
5. 윌슨 라모스 C
6. 제이크 바우어스 LF
7. 스티븐 수자 주니어 RF
8. 맷 더피 2B
9. 윌리 아다메스 SS
P. 문지혁.
보스턴 레드삭스 선발 라인업
1. 앤드류 베닌텐디 LF
2. 더스틴 페드로이아 2B
3. 무키 베츠 RF
4. 헨리 라미레즈 1B
5. 젠더 보가츠 SS
6. 크리스 영 DH
7. 파블로 산도발 3B
8. 크리스티안 바스케즈 C
9. 재키 브래들리 주니어 CF
P. 후지 미유타.
*
[ 시즌 13승 1패, 2.1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있는 탬파베이의 슈퍼 문. 1회초 투구를 위해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오늘은 빅뱅의 리벤지 매치입니다. 첫 대결에서는 문이 후지에게 승리를 거뒀었죠. ]
[ 그렇죠. 둘의 맞대결 첫 경기에서는 후지가 8이닝 2실점 완투패, 문이 9이닝 완봉승을 거뒀습니다. 에반 롱고리아의 투런 홈런 한 방이 그대로 결승점이 되었습니다. ]
[ 그 때는 팬웨이 파크에서의 대결이었는데, 오늘은 트로피카나 필드에서 대결입니다. 이번에는 후지가 복수에 성공할 수 있을지, 아니면 문이 자신의 우세를 지켜낼 것인지. 기세만 놓고 보면 보스턴이 확실히 좋죠? ]
[ 1차전과 2차전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으니까요. 두 경기에서 19득점을 뽑아낸 타선도 불타오르고 있고, 포셀로와 프라이스가 탬파베이의 타선을 꽁꽁 틀어막아 놓았던 것도 영향을 미칠 테고요. 기세는 누가 보더라도 보스턴이 좋습니다. ]
[ 8월 한 달 동안 엄청난 승률을 보여줬던 탬파베이지만 9월에 들어서는 두 경기에서 완패를 당했습니다. 그 분위기를 끊어야 하는 특명을 받고 마운드에 오른 슈퍼 문. 첫 타자를 상대합니다. 1번, 앤드류 베닌텐디. ]
존 패럴이 내세운 보스턴의 라인업에는 여전히 좌타자가 한 명 뿐이다. 2번부터 9번까지 전부 우타자다. 지혁을 저격하다시피 한 라인업은 그대로인 셈이다.
다만 하나 변한 게 있다면, 예전에는 4번에 배치해뒀던 베닌텐디를 1번 자리로 끌어올렸다는 것. 후반기부터 테이블세터에 배치된 베닌텐디는 그제야 제 자리를 찾았다는 듯 맹타를 휘둘러대고 있었다. 하지만.
“보자. 넌 체력이 좀 떨어졌더라.”
글러브로 입을 가리고 중얼거린 지혁은 최대한 빠른 템포로 투구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초구, 패스트볼. 96마일입니다. 스트라이크 존 안에 찔러 넣었습니다. 역시 특유의 공격적인 피칭으로 경기를 시작하는 문입니다. ]
[ 카운트 싸움에서 잘 밀리지 않는 투수죠. 대단한 장점입니다. ]
[ 2구. 다시 패스트볼. 베닌텐디가 배트를 내지 못한 것 같군요. 공 두 개로 스트라이크 두 개를 잡아냈습니다. ]
베닌텐디는 심지어 트리플 A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루키다. 2015년에 드래프트 되어 프로 수준의 단계에서 풀타임을 치른 건 작년이 유일했다. 그런 녀석을 메이저리그에 당장 올려서 쓰고 있으니.
성적이 나오는 건 재능에 의해 가능할지 몰라도, 체력적으로는 분명 힘겨워 하고 있었다. 비디오 속의 베닌텐디는 시즌 초반과는 확연히 떨어진 스윙 스피드를 보여주고 있었다.
“으쌰!”
스윙 스피드가 늦는 신인 타자에게 패스트볼을 던지지 않을 바보 같은 투수는 아마 없을 것이다. 97마일이 기록된 패스트볼이 라모스의 미트를 찢을 것처럼 파고 들어갔다. 제구에 신경을 쓴 공도 아니었다. 오히려 복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공이었지만, 라모스의 미트에 공이 파고들어가고 나서야 베닌텐디의 스윙이 나왔다.
[ 오 마이, 패스트볼 세 개를 던져 스트라이크 세 개를 잡아냅니다! 첫 타자 베닌텐디를 상대로 삼구 삼진으로 경기를 시작합니다, 문! ]
[ 베닌텐디의 스윙이 못 따라 오네요. 하하. 오늘 문이 에이스가 가져야 할 자각을 좀 하고 있나 본데요? 연패를 끊겠다는 강한 의지가 보입니다. ]
베닌텐디가 고개를 저으며 벤치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지혁은 슬쩍 미소지었다. 분석은 충분히 했다.
“너희들이 우리 루키들을 괴롭힌 것처럼. 나도 너희들을 좀 괴롭혀야지.”
대결이 시작되었다. 지혁은 끈질기고 집요하게 보스턴 타자들의 약점만 물고 늘어졌다. 2번 페드로이아에게는 그가 올 시즌 약점을 보이고 있는 낙차 큰 커브를 던져 땅볼을 만들었고, 3번 베츠는 바깥쪽 존에서 살짝 말려나가는 싱커를 던져 헛스윙 삼진을 유도했다.
“임마들아! 그러니까 보고 배우라니까. 문처럼 비디오 네다섯 시간씩 돌려 보란 말이야.”
1차전, 2차전과는 차원이 다른 안정감에 힉키가 아직까지도 침울해 하고 있는 허니웰과 드 레온의 등짝을 내려치며 말했다.
*
[ 1회말. 탬파베이의 공격. 마운드에는 시즌 15승 2패. 평균자책점 1.97의 후지 미유타입니다. 현재 아메리칸리그 평균자책점 1위, 다승은 휴스턴의 댈러스 카이클에 이어 2위입니다. 탈삼진을 좀 보세요. 이번 시즌 지금까지 184이닝을 던지면서 탈삼진이 199개입니다. ]
[ 장담하건대 현재 모든 야구선수 중에서 가장 파괴력 있는 공을 던지고 있죠. 심지어 삼진이 크리스 세일보다도 한 개 많네요. 하하. ]
[ 도대체 이 선수들이 어디서 이렇게 튀어나오는 걸까요. 아직도 의심스럽습니다. 문도 그렇고, 후지도 그렇고요. 자, 타석에는 디커슨. 올 시즌 타율이 .318, 홈런은 무려 32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
올 시즌 탬파베이 최고의 타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디커슨이다. 올스타전까지 나갔던 디커슨은 가공할 파워를 보여주면서 컨택트까지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지난해 타율이 .247에 불과했던 걸 기억하면 정말 괄목할 만한 성장이었다. 하지만 그런 디커슨도 후지의 공을 당해내지 못했다.
[ 이번엔 후지입니다! 디커슨을 삼구 삼진으로 잡아냅니다. 마지막 공은 100마일이에요. 대단합니다. ]
[ 마치 보라는 것 같네요. 문, 당신이 삼구 삼진을 잡아? 그럼 나도 잡아. 이렇게 말하는 것 같죠. ]
디커슨을 삼진으로 돌려세운 후지는 키어마이어를 상대로 엄청난 낙폭의 체인지업으로 연속 삼진을 잡아냈다. 그리고 이전 만남에서 자신에게 치명적인 결승 홈런을 안겼던 롱고리아를 상대로는.
[ 와우! 101마일! ]
[ 정말 온 힘을 다한 피칭이네요. 전력투구에요. 평소보다 몸을 더 많이 틀어서 던지는 것 같은데요? ]
[ 2구, 다시 101마일! ]
101마일을 꽂아댔다.
“저거, 저거... 또 무리하네. 어휴.”
정말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놈이었다. 이번 회까지만 던지고 다시 안 던질 사람처럼, 기합까지 써 가며 머리에 쓴 모자가 벗겨질 정도로 역동적으로 공을 던져대고 있다.
“스윙! 배터 아웃!”
3구째 체인지업에 속지 않고 버텨낸 롱고리아지만, 4구에 들어온 100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결국 커트해내지 못하고 어정쩡한 체크 스윙이 되고 말았다.
“쟤는 나한테 대체 왜 저러는 거야?”
롱고리아가 심통을 부렸다. 지혁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스위치를 켜라고 말하고 있는 거죠.”
“그건 또 무슨 소린데?”
“절대 질 수 없으니까, 전력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자는, 뭐 그런 거예요. 아오. 내일 앓아눕게 생겼네.”
마운드로 올라가며 엄살을 부린 지혁은 어깨를 빙빙 돌렸다. 후지가 저렇게까지 나오는데 대충 애매하게 던질 수는 없으니까. 지혁도 스위치를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