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34화 (135/204)

< 134 - 문지혁 vs 후지, 2차전(2). >

한 시즌은 생각보다 정말 길다. 대다수의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스프링캠프 소집을 위해 2월에 팀에 합류하고 나서 정규 시즌이 끝나는 9월 말까지 7~8개월을 소화한다. 그리고 만약 가을 야구를 하게 된다면 일정은 10월 중하순까지로 늘어난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일지도 모르지만, 빡빡하게 돌아가는 메이저리그 일정을 따르다 보면 그 한 시즌이 정말 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 휴식과 연습, 등판과 경기를 끊임없이 반복해야만 한다. 쳇바퀴를 돌리는 것과 같다. 끝나지 않는 미로를 걷는 것처럼, 계속해서 야구를 할 뿐이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야구를 하고 하고 또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시즌이 끝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조금 더 시각을 넓혀서 보면, 풀타임 시즌을 소화한다는 것 자체가 야구선수에게는 영광적인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부상이든, 부진이든, 슬럼프든, 개인적인 사정이든...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을 다 이겨내고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메이저리그를 풀타임으로 몇 년간 소화하는 선수는 전체 야구선수 중에 정말 극소수의 몇몇 뿐이다.

육체적인 피로가 어마어마하게 쌓이는 건 물론이고 심리적인 데미지는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이 쌓이니까. 그렇게 긴 기간 동안 꾸준히 로테이션을 소화하는 것은 분명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다. 극심한 체력 소모와 스트레스를 견뎌냈다는 증명이다.

그리고 그렇게 증명해내기 위해 선수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한 시즌을 ‘견뎌낸다’. 그리고 한 시즌 내내 반복되는 162경기를 견뎌내기 위한 방법을 찾아낸다.

매일 경기에 나서야 하는 야수들은 조금 다르지만, 투수들은 주로 무감각해지곤 한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똑같은 하루이고, 저번 달에 등판한 경기나 오늘 등판한 경기나 다음 달에 등판한 경기나 모두 똑같은 야구라고 여겨버리는 것이다.

매번 다른 야구를 하면서도, 특별함을 담지는 않는다. 하루에 세 끼를 먹는 것 마냥.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만큼이나 습관적으로 매일의 야구를 한다.

그걸 좋게 포장한 말이 바로 일관성이라는 단어다. 그리고 투수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소이기도 하다. 매일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똑같은 피칭을 할 수 있는 투수는 모두가 사랑할 수밖에 없다.

바로 계산이 서기 때문이다. 툭툭 튀어나가지도 않고, 한두 경기 부진하다고 해서 다음 경기도 속절없이 무너지지도 않는다. 지혁이 바로 그런 투수였다.

“써드!”

롱고리아의 앞에 애매하게 떨어진 타구는 제법 까다로운 바운드로 튀어올랐지만, 유려한 백핸드 캐치에서 이어진 러닝 송구로 타자 보가츠를 잡아낸다. 1루에서 공을 받은 질라스피가 재빨리 내야로 공을 한 바퀴 돌린다.

“나이스 캐치. 힘든 건데. 고마워요.”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지.”

덤덤하다. 멋진 수비를 성공시킨 롱고리아도 그렇고, 그걸 바라보고 있는 지혁도 그랬다. 모든 경기가, 모든 플레이가. 특별하면서도 또 일상적인 것이었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다음 타자인 크리스 영을 상대로는 몸쪽 높은 쪽을 파고들어가는 패스트볼로 루킹 삼진을 이끌어냈다. 심판이 다이나믹한 동작으로 삼진 콜을 외치기도 전에 지혁은 마운드를 내려가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

“후우. 오늘 좀 덥네. 관중이 많아서 그런가?”

“덥다고?”

“응. 나 얼음 담긴 컵 하나만 좀 건네줘.”

더그아웃에 돌아온 지혁은 윗편에서 쏟아지고 있는 관중들의 에너지를 온몸으로 받으며 차가운 이온음료로 목을 축였다. 사실 지혁은 부단히 애를 쓰고 있었다. 평소와 완전히 똑같은 게임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중이었다.

‘똑같아야 돼. 힘이 더 들어가면 안 돼.’

평소처럼 던지면 된다. 그리고 평소처럼 던져야만 한다. 이 게임도 시즌의 162경기 중 1경기에 불과하고, 평소와 다를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겨야만 하는 건 어느 승부에서나 똑같으니까.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바로 마운드에 선 후지 때문이었다.

“Shit!”

후지의 패스트볼은 존 안으로 무자비하게 들어왔다. 코스가 어렵다거나 높낮이가 까다롭지는 않았지만, 그 스피드와 파워만으로 타자들을 압도하는 모양새다. 한복판에 꽂힌 100마일 짜리 포심 패스트볼에 크게 헛치고 만 윌슨 라모스가 크게 욕설을 내뱉었다.

“하. 쟤는 왜 저러지, 진짜.”

지혁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후지는 오늘 분명히 기어를 올린 상태였다. 평소의 후지는 원체 파괴력 있는 공을 던지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심했다.

전성기의 팀 린스컴이 이랬을까? 그와 같은 마운드에 서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오늘의 후지 미유타는 양키스의 에이스인 다나카 마사히로나 텍사스의 다르빗슈 유, 휴스턴의 댈러스 카이클이나 클리블랜드의 코리 클루버에게서 느껴지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파워를 뿜어내는 중이다. 눈에 보이는 투구도, 눈에 보이지 않는 분위기도 그렇다.

시즌 첫 번째 맞대결에서의 패배가 그렇게까지 분했던 것일까. 그냥 똑같은 시즌의 한 경기일 뿐인데. 심지어 승패에 큰 영향을 받는 경기도 아니다. 오늘 후지의 투구가 이번 시즌 보여줬던 것들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건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첫 번째 패배에서의 복수만을 벼르고 있던 것이다.

“이런. 좋지 않군.”

2회말 탬파베이의 공격도 세 명으로 정리되었다. 초구를 때려 빗맞은 내야플라이를 친 질라스피, 100마일 패스트볼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난 라모스,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제이크 바우어스까지. 마치 군림하는 절대자를 목도하고 있는 듯한 공포감이 더그아웃에 스며든다. 특히 어린 선수들이 대부분인 라인업에서 이런 무기력함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다.

그리고 그런 압도적인 투수와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혁의 몸이 끓어올랐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더 괴물 같은 투수를 만날 때 느껴지는 원초적인 저항심 같은 것.

평범한 하루여야 하는데. 똑같은 한 경기여야 하는데.

지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마운드로 다시 올라갔다.

*

[ 헛스윙 삼진! 크리스티안 바스케즈가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이런, 98마일! 문의 최고구속인 것 같군요? 98마일이라뇨, 하하. 엄청나네요. ]

[ 후지가 2회말에 기록한 102마일에 자극을 받은 건가요? 와우. 이것 참. 생각해 보세요, 윌리. 아시아에서 온 투수들이 100마일에 가까운, 혹은 100마일을 넘겨 버리는 투구를 한다는 게 얼마나 낯선 일인지 말이에요. 오늘 경기장에 있는 두 선수는 우리가 아는 상식을 깨트리고 있는 것 같아요. ]

[ 그렇군요. 확실히 대단합니다. ]

구속 따윈 상관하지 않았다. 88마일짜리 패스트볼이든 108마일짜리 패스트볼이든 삼진만 잡아낼 수 있으면 된다. 하지만 후지의 투구가 지혁의 무의식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게 아니면 98마일이라는 구속은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후지가 뿌리는 공들이 지혁의 세포 하나하나를 쥐어짜내고 있는 느낌이다.

콰지직!

9번타자인 재키 브래들리 주니어의 방망이가 처참하게 부서졌다. 지혁은 발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오는 공을 침착하게 주워들어 1루로 가볍게 토스하며 3회를 마무리지었다. 그가 브래들리의 방망이를 부러뜨려버린 싱커는 94마일이 찍혔다. 어깨가 화끈거렸다. 온 몸이 뜨거웠다. 아마 후지의 어깨도 이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둘 모두, 서로를 이기기 위해, On Fire인 상태였다. 확신할 수 있었다.

*

[ 스윙! 코리 디커슨이 오늘 경기 세 개째 삼진을 당합니다. 세 타석에 들어서서 모두 삼진으로 물러나네요. 6회말도 원-투-쓰리. 삼자범퇴로 마무리하는 후지 미유타. ]

[ 믿어지지가 않네요. 지금 몇 시죠? ]

[ 아직 경기가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이제 막 넘어갔습니다. 오, 이런. 딱 68분이 되었네요. ]

[ 오늘은 일찍 퇴근하겠네요. 마운드의 두 투수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해야겠어요. 하하하. ]

[ 플레이 볼이 선언된 지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6이닝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6이닝이 끝나는 동안 양 팀에서 한 명씩밖에 베이스를 밟지 못했습니다. 두 투수 모두 안타 하나씩만을 허용하고 틀어막는 완벽한 피칭 중입니다. 잠시 광고 보시고 7회초 보스턴의 공격으로 찾아옵니다. ]

“Shit. 공이 보이질 않아.”

디커슨이 툴툴거리며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지명타자인 그는 워밍업 시간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빼놓지 않고 후지의 투구에만 집중해 왔다. 심지어 탬파베이가 수비를 하는 동안에는 지혁의 투구를 보는 게 아니라 후지의 비디오를 돌려 보고 왔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두 타석에서 삼진 두 개였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올 시즌 탬파베이 최고의 타자인 디커슨이 이 정도이니 다른 타자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모두가 압도당하고 있었다. 후지에게.

“다들 괜찮아. 편하게 해, 편하게.”

랭카스터는 직접 박수를 치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미처 의식하지 못했지만, 편하게 하라는 말은 랭카스터가 부임한 이래로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그조차도 후지에게 영향을 받은 것일까? 미친 들소인 랭카스터조차도?

“보스턴 녀석들도 문에게 압도당하고 있어. 너희들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녀석들이지만, 저 쪽 녀석들은 아니라고. 너희가 충분히 잘 하고 있는 거야. 편하게 해.”

아. 그런 의미였군.

지혁은 실소를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광판 쪽을 흘깃 바라보니 온통 0의 향연이다. 여섯 개씩 두 줄로 나란히 늘어선 0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새삼스러웠다.

“벌써 7회인가?”

경기가 너무 빨리 진행되어서 그런가? 벌써 6이닝이나 던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후지의 복수심에 불타는 투구는 지혁의 리듬마저도 끌어올렸다. 위대한 투수들 중 몇몇은 경기장의 페이스 자체를 지배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오늘 후지가 딱 그런 모습이었다.

지혁도 그 페이스에 이끌려 텐션을 잔뜩 끌어올린 상태다. 그리고 후지가 페이스를 다운시키기 전까지는 지혁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죽자고 덤벼드는 상대가 있는데 대충 투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지혁의 뇌가 그렇게 지시하고 있다. 분명히 평소의 게임은 아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먼저 내려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으랴쌰!”

7회초에도 변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기합까지 내질렀다. 첫 타자인 페드로이아를 상대로 공 다섯 개를 던지며 내야 땅볼을 유도해냈다. 보스턴의 핵심 타자인 무키 베츠는 빗맞은 플라이로 물러났다. 그리고 마지막 타자는 헨리 라미레즈. 외야에서부터 날아온 공을 받아 글러브 안에서 공을 쥐었다. 쥐었는데.

“응?”

세 번째 손가락에 닿는 느낌이 다르다.

“뭐야, 이거?”

실밥을 때려야 하는 그 부분에 박혀 있던 굳은살이 조금 뜯어져나갔다. 굳은살 안쪽에 박혀 있던 선홍색 생살이 드러나 있다.

“씨바...”

지혁이 마운드 위에서 왼손을 내려보며 중얼거리고 있자, 롱고리아가 마운드로 향해 올라왔다.

“왜? 무슨 일이야?”

이 경기는 그냥 평범한 경기다. 가을야구도 아니고 그냥 정규 시즌의 한 경기일 뿐이다. 굳은살이 떨어져나간 순간, 오늘 경기는 여기서 그만 던져야 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후지의 아우라는, 후지의 복수심은, 후지의 투구는 지혁에게 다른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안 올라와도 돼요. 괜찮아요.”

글러브를 들어올려 롱고리아를 막아 세웠다. 롱고리아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3루로 돌아갔다. 왼손 중지 끝에서 흐르는 찌릿거리는 느낌이 조금 불길했지만. 최소한 한 타자는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헨리 라미레즈가 건들거리며 타석에 들어섰다.

“후우우.”

검지와 엄지로 공을 틀어쥐고, 중지를 실밥 위에 살짝 올려놓았다. 일단 한 타자만. 헨리 라미레즈까지만. 지혁은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글러브를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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