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 욕심은 다음에. >
글러브 안에서 빙빙 돌리던 야구공의 느낌이 이렇게까지 새로울 수 있을까 싶다. 제대로 공을 쥐고 있었지만, 느낌이 참 새롭다. 검지와 중지의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투수의 손가락 끝 감각이 이렇게 예민한 것인지를 새삼 실감한다. 스스로가 투수면서도.
“볼.”
낮은 쪽 존을 공략하려고 했던 공이 생각보다 확 가라앉으며 원바운드로 땅에 박혔다. 공 하나쯤 잘못 던지는 건 그냥 평범한 일이지만. 손가락 끝의 감각이 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마치 손가락 끝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투수가 솔기를 쥐어 때릴 때의 마찰열은 어마어마한 수준이니까. 손끝이 뭔가 찔리는 것처럼 아찔하다.
“이거 안 되려나?”
라모스가 돌려준 볼을 받아 돌아서면서 왼손을 허벅지에 잠시 가져다 댔다. 차가운 유니폼으로 손끝의 열을 식히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막상 손을 허벅지에 가져다 대는 순간 이게 보통 지혁이 가져가던 루틴과는 다른 행동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심 화들짝 놀란 지혁은 최대한 태연하게 로진을 듬뿍 묻혔다.
티가 나지는 않았겠지?
후우욱. 손가락에 묻은 로진 덩어리들이 휘날려 날아갈 정도로 세게 손을 불어준 뒤 주먹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확실히 손가락 끝이 아려오기는 했지만, 이대로 한 타자 정도는 괜찮다. 절대로 먼저 물러나고 싶지는 않다. 후지보다는.
혹시나 티가 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다시 마운드에 서서 라모스의 싸인을 바라본다. 계속해서 다른 감각을 보내고 있는 왼손 중지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지만, 그럼에도 태연해야만 한다. 다른 생각이 나려는 것을 억지로 누르면서 싱커 싸인에 고개를 저었다. 싱커를 던질 때도 실밥을 강하게 때려야 한다.
라모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커브 싸인으로 바꾸자 지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커브는 굳은살이 튿어져 나간 정면 부분으로 솔기를 채는 공이 아니다. 손가락의 옆면을 이용하기 때문에, 무리 없이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때보다 예민한 손 끝에 단단히 힘을 주고 커브를 던졌다. 확실히 패스트볼이나 싱커 때보다는 쓰라린 느낌이 덜하다. 살짝 치솟으려던 커브가 아주 조금 일찍 떨어지기는 했지만 스트라이크 존 낮은 쪽에 스치면서 미트에 꽂혔다.
마지막 순간 떨어지는 공을 살짝 들어올린 라모스의 프레이밍까지 더해져 스트라이크 콜이 나온다. 헨리 라미레즈는 불만스러운 듯이 양 팔을 들어 보인다.
그리고 3구에도 커브. 아슬아슬했던 2구보다 반 개 정도 높은 위치에 정확하게 걸친 공. 이번엔 아주 절묘하게 들어갔다.
[ 커브 두 개로 스트라이크 카운트를 몰아넣습니다. ]
[ 오늘 경기에서는 커브를 그렇게 많이 쓰지 않았었는데요. 라미레즈가 예상하지 못한 공으로 순식간에 카운트를 몰아넣네요. 역시 좋은 투수네요. ]
[ 4구. 과연 어떤 승부를 할지. 한 번 발을 빼 보는 문. 라모스가 타임을 요청하고 마운드로 올라갑니다. ]
“헤이, 문. 왜 계속 싱커에 고개를 저어?”
“음... 그냥. 느낌이 안 좋아서.”
“지금은 명백한 싱커 타이밍인데.”
“커브를 계속 가는 건 안 좋아?”
라모스가 거대한 덩치로 지혁의 입 쪽을 가리며 말했다.
“커브 두 개를 보여줬어. 헨리 정도 되는 놈이면 무조건 타이밍은 맞출 거야. 세 개는 위험해.”
“...”
라모스는 계속해서 벤치를 흘깃거렸다. 외야 쪽 불펜에는 한 명의 투수만 몸을 풀고 있었다. 그마저도 이제 막 캐치볼을 시작한 정도다. 지금까지의 지혁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투구수도 꽉 찬 정도도 아니고.
“너. 문제 있지?”
“아냐. 싱커로 가자.”
손가락을 보여주면 곧장 트레이너가 올라올 것이다. 지혁은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라모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내려갔다. 곰처럼 생겼어도 눈치는 빠른 놈이다. 아마 지혁에게 뭔가 걸리는 게 있다는 것쯤은 알아챘을 것이다.
‘한 방에 끝내야 돼. 한 방에.’
지혁은 마음을 다잡았다. 손가락 끝에 불이 타올라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던질 것이다. 라모스가 미트를 두 번 팡팡 친 뒤 바깥쪽 낮은 쪽 존에 미트를 가져다 댔다. 마지막 공, 싱커. 빠져나가는 유인구를 던지기에는 여유가 없다. 휘두르지 않는다면 루킹 삼진이 되는 곳으로 집어넣는다.
“으아햐!”
와인드업에 이어 싱커를 던지는 그 순간, 손을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들어왔다. 손에서 빠져나가는 공의 궤적이 완벽히 만족스럽지도 않았다. 확실히 두 손가락에 균형이 골고루 실리지 못한 것이다.
타석의 헨리는 고개를 단단히 고정해 놓고 바깥쪽 공에 벼락 같은 스윙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헨리의 공이 지혁의 시야에서 없어져버렸다. 까마득하게 솟은 공이 외야로 향해나간다.
[ 헨리 라미레즈! 외야로! 멀리! 높게! 이 타구는... ]
넘어가려나? 지혁은 타구를 끝까지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괜한 욕심을 부렸다. 그냥 손에 문제가 생겼다고 사실대로 말하고 내려갔어야 했다. 아주 믿음직하지는 못하지만, 동료들에게 맡겼어야 했다. 이대로 경기를 망치게 되면 스스로에게 정말 실망스러울 것이다.
젠장. 눈을 질끈 감았다.
[ 넘어... 아닙니다! 잡아냈습니다! 케빈 키어마이어! 펜스를 타고 올라가서 넘어가는 공을 건져올렸습니다! 오 마이 갓! 슈퍼맨의 슈퍼 캐치! ]
[ 와, 와하하. 키어마이어! 이 수비는 정말 엄청나네요. 이 수비가 문을 구해냈습니다. ]
[ 스틸러. 키어마이어는 명백한 스틸러입니다. 홈런이었어요, 홈런을 훔쳐냈습니다! 슈퍼맨이 아니라 스파이더맨이라고 불러야겠습니다. 펜스를 밟고 기어 올라가서 공을 건져냈네요. 헨리의 이 표정을 좀 보세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하는 표정이죠. ]
홈 팬들이 난데없이 환호성을 내지르고, 내야수들이 이상한 소리를 내길래 눈을 슬쩍 떴다. 펜스에 몸 반을 걸치고 그 위에서 공을 거머쥔 키어마이어가 그때 막 외야에 착지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엄청난 안도감에 맥이 탁 풀려버리는 기분이었다. 터덜터덜 마운드를 내려오는 동안 불이 나고 있는 것 같은 손끝을 매만졌다.
*
“잠시 화장실 좀.”
더그아웃에 내려오자마자 글러브를 벗어둔 지혁은 더그아웃을 빠져나왔다. 클럽하우스에 닿기 전에 마련된 작은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살을 보아하니, 이대로는 더 이상 투구가 힘들 게 뻔했다. 차가운 물을 쫄쫄거리게 틀어놓은 뒤 아직도 마찰열이 남아 있는 손가락을 대 식혔다.
“씨발. 왜 하필이면 오늘이야.”
투수에게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운이 없는 상황이다. 분명히 평소보다 훨씬 강하게 실밥을 때렸고, 훨씬 더 강렬하게 경기에 임하기는 했지만. 굳은살이 떨어져나간 이 건은 단순히 오버페이스여서 그런 것만은 아닐 터다.
그런 일로 손가락에 문제가 생긴다면 후지는 지금쯤 손가락 끝이 다 터져나갔어야 한다. 후지는 그 정도로 페이스를 끌어올리고 있다. 그냥... 그냥 운이 없는 거다. 그래서 더 실망스러웠다.
“아직 아무도 모르지. 자네 손가락이 이런 건 말이야.”
“아오! 깜짝이야.”
신이다.
“흐흐. 운이 없구만, 자네.”
“그러게요. 젠장맞을...”
“보아하니 새 살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투구가 여의치 않겠군. 한 번 정도 등판을 걸러야 할 게야.”
“... 그렇겠네요.”
“어떤가? 두 번 등판을 거르는 건?”
지혁은 고개를 벌떡 들어 신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는 분명히 아주 흥미로워 보였다. 저 인자한 얼굴에서 아주 악랄한 취미를 엿볼 수 있다. 신도 둘의 대결이 이렇게 끝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두 번이라. 일주일이면 괜찮아질 손가락이다. 두 배라고 해봤자 앞으로의 선수 생명에서 보름만 깎으면 된다. 선수 생명에서 이 주 정도는 큰 부담이 아니다. 신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결에서 그냥 물러나지 말라는 속삭임이 지혁을 솔깃하게 만들었다.
아직도 끓고 있다. 헨리 라미레즈에게 맞은 아찔한 타구도, 지혁의 손가락이 정상이었다면 분명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바로 괜찮아질 수 있습니까?”
“뭐, 자네가 원한다면.”
“좋아요, 그럼...”
말을 다 마치기 직전이었다. 문고리 소리가 들렸다. 곧장 화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문!”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혹시라도 신이 들켰을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지혁의 놀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윌슨 라모스가 터벅터벅 다가왔다. 그리곤 지혁의 왼손을 낚아챘다.
“이럴 줄 알았어. 언제부터야?”
라모스는 스페인식 억양이 짙게 깔린 말투로 물었다. 그는 지혁의 중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헤이, 맨.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마지막 싱커는 이상했다고. 훨씬 덜 움직였어. 그리고 여기가 이미 떨어져 나갔잖아.”
라모스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자 미간에 깊게 패인 주름이 두드러졌다.
“언제부터야?”
“음... 베츠에게 아웃카운트를 잡았을 때 인가봐. 정확히는 모르겠어.”
“그래서 계속 싱커를 거절했군? 어쩐지 이상했어. 그 전까지는 자신 있게 뿌리더니. 갑자기 커브로 틀고 하는 게.”
“내려오고 싶지 않아서. 한 타자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지.”
“어쨌든 이 정도라면 더 이상은 안 되겠어. 트레이너에게는 말했겠지?”
“아, 아직.”
“더 던질 생각이라고? 미쳤군! 안 돼.”
“헤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정작 느낌은 평소랑 똑같아.”
지혁은 방금 전까지 신이 나타났던 곳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신이 괜찮게 만들어 줄 수 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은 반만 거짓말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몇 분 뒤에는 괜찮아질 테니까.
“No way!”
라모스가 버럭 소리를 치는 바람에 지혁음 움찔했다.
“헤이. 후지에게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경기를 망칠 생각은 하지 마. 너는 이미 헨리를 상대하면서 우리를 위기에 몰아넣었어.”
“위기라고?”
“그래. 네가 팀을 위험에 빠트렸다고. 알아들어? 케빈이 아니었으면 오늘 경기는 졌을지도 몰라. 라이벌리 때문에 평소보다 오버페이스를 한 건 좋아. 그렇다고 쳐. 하지만 그 의식 때문에 팀이 위기에 빠지는 건 안 될 말이지. 너 혼자 경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
“네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운드에 오르는 건 우리에게 실례야. 베스트 상태에서 경기를 치르고 싶은 동료들에게 무례한 짓이라고. 네가 에이스로써 책임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마운드에 더 있고 싶어하는 거라면 그건 불펜에 대한 신뢰가 없는 거야. 정신 차리라고, 문.”
라모스가 허리에 두 손을 턱 하고 얹어 지혁을 노려봤다.
“하.”
맞는 말이긴 하다.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욕심을 부리는 건, 분명 팀원들에게는 잘못하는 일이긴 했다. 한 타자를 상대하더라도 몸에 이상이 있으면 그건 위기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 그냥 잡아내고 넘어갔으니 됐다는 말은 지나치게 결과론적이다.
“나도 알아. 욕심이 나겠지. 그렇지만, 맨. 생각해 봐.”
“뭘?”
“이 경기는 그냥 아무 것도 아니야. 그저께, 어제. 우리가 흠씬 얻어맞았지만 오늘은 팽팽한 경기를 하잖아. 내일은 또 다른 경기를 할 거고. 그러니까 내 말은. 그냥 한 경기일 뿐이라고. 평범한 시즌의 한 경기야. 중요한 경기가 아니잖아. 집착할 필요 없어. 오늘 진다고 시즌이 끝나는 게 아니잖아? 포스트시즌도, 월드시리즈도 아니잖아. 대수롭지 않은 경기야. 그렇지 않아?”
지혁은 다시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오늘 경기는 욕심을 부린 경기였다. 후지가 페이스를 끌어올렸고, 지기 싫었기에 지혁도 따라 올렸다. 지금도 질 수 없다는 마음은 똑같지만.
“욕심낼 것 없어. 욕심은 와일드카드 매치에서, 그리고 포스트시즌에서 내도 충분해.”
라모스의 말이 맞다. 욕심은, 다음에 내도 괜찮다. 진짜 중요한 경기에서. 후지와의 대결이라는 것 말고는 중요할 게 하나 없는 이 경기에서는 굳이 선수 생명을 소모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래. 알았어. 트레이너한테 얘기할게.”
“좋아. 뒤는 불펜에게 맡겨.”
라모스가 먼저 화장실을 빠져나갔고, 곧 지혁도 따라나왔다. 아마 신이 보였다면, 그는 못내 아쉬워하고 있을 것이었다. 분명히.
*
탬파베이 레이스 0 vs 2 보스턴 레드삭스.
승리투수 : 후지 미유타(16-2), 8IP, 1H, 0BB, 0R, 13K.
패전투수 : 라인 스타넥(1-5), 0.2IP, 2H, 2R.
* 문지혁 : 7IP, 1H, 10K.
* 젠더 보가츠 : 1/4, 1HR, 2RBI.
*
랭카스터는 지혁을 15일 DL에 올렸다. 손가락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그저 새 살이 단단히 자리잡히기만 기다리면 될 일이었지만. 많은 이닝을 소화했고, 진짜 욕심을 부려야 할 무대를 위한 휴식 차원이라고 고집했다.
보스턴의 존 패럴 감독도 후지를 DL에 올렸다. 명목상으로는 팔꿈치 통증이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저 휴식과 이닝 관리 차원에서였다. 이번 시즌도 후지는 200이닝을 조금 넘긴 상태에서 시즌 마무리까지 휴식을 부여받았다. 후지는 전화로 툴툴거렸지만, 보스턴 입장에서는 후지를 무리시키고 싶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후지의 대체제도 충분히 차고 넘치는 상황이고.
그렇게 2017년 메이저리그 정규 시즌이 끝나간다. 가을 야구 진출을 확정지은 여섯 팀이 결정되었고, 와일드카드 매치를 치를 네 팀도 사실상 확정되었다.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1위, 보스턴 레드삭스.
아메리칸리그 중부지구 1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1위, 휴스턴 애스트로스.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1위, 워싱턴 내셔널스.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1위, 시카고 컵스.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1위, LA 다저스.
아메리칸리그 와일드카드 매치업, 뉴욕 양키스 vs 탬파베이 레이스.
내셔널리그 와일드카드 매치업, 콜로라도 로키스 vs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가을 야구가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