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 준비태세. >
162차전, 2017년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 트로피카나 필드에서 열린 탬파베이 레이스와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경기는 초반에 승부가 갈렸다. 탬파베이의 선발로 나선 블레이크 스넬이 1회와 2회 여섯 타자를 상대로 모두 삼진을 잡아내는 기염을 토했고, 토론토의 선발이었던 마이크 볼싱어는 2이닝을 버티지 못하고 5실점으로 강판되었다.
루키인 케이시 질라스피는 홈런 두 개를 때려내며 기세를 올렸고, 백업 포수인 헤수스 수크레는 3타점 2루타를 포함해 6타점 경기를 했다. 12대3의 최종 결과. 2017년 메이저리그 정규 시즌의 마지막 경기로 손색이 없는 완벽한 내용이었다.
“우! 우! 우! 우!”
덕분에 라커룸 안은 평소보다 훨씬 더 시끌벅적하다. 흥이 흘러넘치는 흑인 선수들은 뒤뚱거리는 몸을 이끌고 스웨그를 뽐내는 중이고, 점잖은 백인 녀석들조차도 펄쩍펄쩍 뛰며 한 시즌을 잘 끝냈음을 만끽하고 있었다. 탬파베이는 정말 좋은 시즌을 보냈다.
“자, 자! 감독님 오신다!”
“우! 우! 들소! 들소! 들소!”
확실히 루키들이 들어온 이후 라커룸의 분위기도 어려지고 당돌해졌다. 특히 질라스피는 지혁이 보기에 겁대가리를 상실한 녀석이었다. 랭카스터 감독에게 들소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선수니까. 그래도 랭카스터는 경기 내용이 좋은 날에는 유쾌하게 웃으며 넘어가곤 했다. 오늘 질라스피는 홈런 두 방이나 때려냈으니 자격이 충분하다.
“그래. 들소 왔다. 자, 전부 주목!”
기자들과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바로 라커룸으로 들어온 랭카스터는 웃으며 벽을 쿵쿵 쳤다. 선수들이 서서히 조용해졌다. 승리의 열기만이 여전히 남아 선수들을 감돌고 있다.
“이번 시즌 야구가 끝났다. 아주 좋아. 마지막 경기에서 너희는 할 수 있는 최고의 경기를 했다. 특히 어린놈들. 아주 잘했어.”
“예아아아!”
확실히 탬파베이의 컬러가 바뀌기는 했다. 이번 후반기를 기점으로, 완전히. 루키들로 가득한 라커룸 안이 이제는 익숙해졌다.
루키들이 한 명이나 두 명씩 있을 때는 선배들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면, 지금은 루키들 투성이인지라 서로 눈치 보지 않는 분위기가 만들어져 있다. 심지어 감독이 그 험상궂게 생겼다는 랭카스터인데도.
당돌한 녀석들이 단체로 몰려다니기 시작하자 기자들도 그 모습들을 잔뜩 보도해댔다. 탬파베이가 후반기에 잘 나가기 시작하면서 루키들의 이런 모습들이 ‘패기’라는 좋은 말로 잘 포장될 수 있었다.
사실 시즌 시작 전만 해도 이 광경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불펜에 있던 애매한 나이대의 선수들은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작년까지의 탬파베이는 유망주들을 찬찬히 올려 쓰고, 25인 로스터의 30% 정도는 싸고 효율이 좋을 것이라 기대하는 ‘로또 선수들’로 채워졌었다.
그러니 한 시즌이 마무리되었을 때 팀을 떠날 것이라고 마음을 먹은 선수들이 여럿이었다. 또 팀에서 재계약을 제시받지 못할 것이라고 좌절하는 선수들도 있었고.
물론 루키들이 많아지며 기세에 쉽게 휩쓸린다는 문제는 있다. 8월에 연승이 많았던 반면, 9월에는 연패도 제법 되었다. 한 번 분위기를 타기 시작하면 파도처럼 몰아치다가도 한 번 주눅이 들기 시작하면 그 흐름을 끊어내기 쉽지 않은 팀이 되었다.
안 좋은 분위기를 타기 시작했을 때 그 흐름을 빨리 끊어줘야 할 역할을 롱고리아나 아처, 라모스 같이 경력이 좀 되는 선수들의 역할이다.
“좋아. 소리는 다 질렀나?”
무서울 것 없는 루키들이 소리를 질러대는 것을 한참 듣고 있던 랭카스터가 목소리를 착 내리깔았다.
“내가 이 팀에 온 이후로, 올해가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할 순 없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제일 중요한 한 경기가 남아 있다.”
가을 야구로 갈 마지막 한 경기. 와일드카드 매치. 선수들이 눈빛을 빛냈다. 랭카스터는 잠깐의 침묵을 만끽하다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목소리에 더 강한 힘이 실렸다.
“정규 시즌은 끝났다. 하지만 우리의 야구는 끝나지 않았다. 한 경기! 그 한 경기를 넘어서서 휴스턴 녀석들을 만날 것이다!”
“예쓰!”
“양키스 녀석들을 넘어서야 한다. 가장 중요한 한 경기야. 우리가 이번 시즌 정말 잘 했다는 걸, 8월에 보여줬던 결과가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게 아니라 진짜 실력이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기회다.”
랭카스터가 커다란 주먹을 앞으로 툭 내밀었다.
“우리가 가을 야구로 간다. 지금의 이 분위기를 잊지 말고, 긴장을 늦추지 마!”
선수들도 모두 주먹을 내밀었다.
“원, 투, 쓰리. 레이스!”
“Whoooo!”
주먹을 높이 들어올렸다가 허공에 힘껏 내리친다. 지혁은 랭카스터가 분위기를 유지하는 방식이 꽤 마음에 들었다. 경기 후 미팅이 평소보다도 훨씬 더 짧았다. 랭카스터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크게 강조하지도 않았고 디테일한 부분을 잡아내지도 않았다. 그저 목표만 한 번 되새겼을 뿐이다.
‘그게 좋았어. 다행이야.’
별다를 것 없는 짧은 말이었지만, 오히려 이 정도가 루키들이 기세만 살릴 수 있는 적당한 정도라는 느낌이 든다. 와일드카드 매치는 말 그대로 단두대 매치다. 뒤가 없는 벼랑 끝 매치. 한 경기로 시즌이 끝날 수도 있는 중압감이 큰 매치를 앞둔 상태.
자칫 잘못했다가는 선수들의 부담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수도 있다고 봤는데. 게다가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루키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매치업을 눈앞에 두고 움츠러들 위험도 있다.
선발 투수로 올라가는데, 야수들의 심리 상태에 문제가 있는 건 정말 최악의 사태다. 절대로 피하고 싶은 사태. 그런 의미에서 랭카스터가 방금 보여준 라커룸 분위기 컨트롤은 아주 훌륭했다. 루키들이 지금까지의 좋은 기억만 가지고, 평소처럼만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경기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문.”
“네?”
“이 녀석들을 끌고 갈 수 있겠지?”
랭카스터가 지혁의 등 뒤로 슬쩍 다가와서 등허리를 쿡 찔렀다. 랭카스터는 아처가 아니라 지혁을 와일드카드 매치에 내세우기로 결정했다. 아처는 분명히 내심 실망했겠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만약 탬파베이가 디비전시리즈에 진출하게 된다면 1차전 선발은 아처가 맡을 것이다.
“잘 해 봐야죠.”
“좋아. 내가 기대했던 대답이군.”
랭카스터는 흡족하게 웃었다. 아마 루키들처럼 들뜨지도 않고, 또 롱고리아처럼 지나치게 여유를 갖지도 않은, 딱 그 상태를 원하는 것이리라.
“내일은 바쁘겠지만 몸 관리를 잘 하도록 해. 컨디션을 최고로 끌어올리라고.”
“넵.”
랭카스터의 믿음이 담긴 손길이 지혁의 등판을 짝짝 때렸다. 감독에게서 신뢰받는다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솔직히 맞은 자리가 조금 아프긴 했지만.
*
10월 1일로 2017년 정규 시즌이 마무리되고, 와일드카드 매치를 치러야 할 네 팀에게 하루의 휴식일이 주어졌다. 물론, 온전한 의미에서의 휴식은 아니었지만.
슬픈 말처럼 들릴지는 모르지만 프로 스포츠는 돈의 지배를 받고 있다. 야구는 스포츠지만 야구선수는 상품이다. 특히 갈수록 돈의 비중이 커져가고 있는 시장에서, 모든 야구선수들은 상품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
현장의 코칭스태프들은 절대로 싫어하는 일이지만.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상품들은 상품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 미디어 계통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팬을 위한 일’이라고 힘주어 강조하곤 한다.
프로 스포츠의 근간이 팬들에게 있고, 팬들이 소비할 수 있는 컨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한편으로 그건 굉장히 귀찮은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지금처럼, 아침 일찍부터 모여서 카메라 앞에 서 있어야만 하는 상황. 평소 같았으면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침대 속에서 선수들 영상이나 돌려보다가 슬슬 출근해 볼까, 해야 할 시간대에 말이다. 풀 메이크업을 받고, 머리 손질을 하고, 옷도 여러 차례 갈아입어야 하고.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조금만 더 강렬하게, 강렬한 눈빛으로요! 그래야 사람들이 좋아하죠. 자, 문? 이쪽을 봐 주세요!”
스킨헤드의 포토그래퍼 데빈이 커다란 액션으로 손을 휘둘러댔다. 플래쉬가 번쩍하고 터지는 게 눈이 시리다. 하지만 참아내야 한다. 스타의 숙명이기도 하고, 상품으로써의 의무이기도 하다.
“하.”
한숨이 저절로 나오네.
데빈이 눈을 커다랗게 치켜뜨며 손으로 입꼬리의 형태를 만들었다. 저런 표정을 지어 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촬영장과 조명들, 카메라, 지켜보는 수많은 스태프들 앞에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은 광대짓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선수들 사이에서도 방송 인터뷰나 프로필 촬영에 임하는 태도가 다 다르지만. 특히 지혁은 이런 요란스러운 촬영은 질색하는 스타일이었다.
“자, 모두 수고하셨습니다아! 잠시 쉬었다 다시 갈게요~”
데빈이 마지막 커트를 다 찍고 나서야 현장 스태프들이 바지런해진다.
“문, 혹시 불편한 곳 있어요?”
“아. 네. 카메라가 이렇게 많은 건 별로 안 좋아해서.”
“어머. 슈퍼스타인데, 카메라에 익숙해지셔야지.”
“네, 뭐. 저도 아는데... 쉽지 않네요. 성격에 잘 안 맞아요.”
데빈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리곤 자기가 봐 온 스타들은 이런 촬영을 재미있게 즐겨왔다고 한참을 떠들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선발로 7이닝을 던지는 것보다 지금 데빈과 보내고 있는 이 시간이 훨씬 더 힘들다.
시즌 중에는 이런 일이 그렇게 잦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전국의 야구팬들이 아주 적은 경기에 집중하게 된다. 새로운 영상, 보다 나은 시청각 자료, 단번에 눈길을 잡아챌 수 있는 화려한 내용물이 필요한 시점이 된 것이다. 귀찮고 거슬리지만, 팀을 대표하고 있는 슈퍼스타들이라면 응당 받아들여야 할 책임이나 다름없다.
지혁은 꼼짝없이 카메라 앞에 앉아 몇 마디 대답을 위해 수십 번의 재촬영을 해야 했다. 롱고리아도 그렇고, 케이시 질라스피도 그랬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와일드카드 매치에서 승리한다는 걸 가정한 이후의 일들까지 미리 촬영을 해 놓는다는 점. 앞으로는 이런 자리에 다시 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점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며 오전 스케쥴을 마쳤다. 정신없이 바쁜 일정은 계속된다. 탬파의 지역 네트워크 채널과의 30분짜리 인터뷰를 소화하고, 랭카스터 감독과 함께 mlb.com의 인터뷰도 해야 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야 트로피카나 필드에 들어섰다. 플레이오프 로스터에 포함된 25명의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이 짐과 장비를 점검하고, 일제히 버스에 올라타 공항으로 향했다.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까지 선수들을 배웅 나온 팬들에게 수백 장의 싸인을 해 줬고, 수십 번 핸드폰 카메라를 향해 웃어보였고, 셀 수도 없는 사람들과 악수를 했다. 두 시간 조금 안 되는 비행시간에 잠시 머리를 식힌 뒤, 뉴욕 공항에 내려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한다. 버스에 올라타 원정용 호텔방에 도착하고 나서야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아아. 피곤해.”
곧장 침대에 몸을 던졌다. 오후 다섯 시를 갓 넘어선 시간.
“딱 24시간 남았네.”
시계를 바라보며 중얼거려 본다. 정신없는 하루였다. 시즌 중에 이런 일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닌데, 그때보다도 훨씬 더 피곤한 것 같다. 가만히 누워서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면서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거... 떨리는 건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이게 떨리는 마음인건지. 전생에서 딱 한 번 포스트시즌 로스터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 때도 엄청 떨렸던 것 같기는 한데.
지금처럼 중요한 경기, 단 한 경기로 시즌의 승패가 좌우되는 경기에서 선발로 나서본 적은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까, 지금의 이 피곤함이 정신적인 부담감에서 오는 것임을 조금은 알 것 같다.
“후.”
마음을 추슬러 보려고 TV를 켰다. TV를 틀자마자 나온 스포츠 채널에서는 메이저리그 프리뷰가 한창이다.
- 아메리칸리그와 내셔널리그의 와일드카드 매치, 양키 스타디움과 쿠어스 필드의 표가 일찌감치 매진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드디어 가을 야구가 시작되려고 하고 있군요. 미국의 모든 야구팬들이 두 곳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희 CBS의 리포터들이 단판 승부를 벌일 두 경기장에 나가 있습니다. 먼저 양키 스타디움을 연결해 보도록 하죠. 버리스?
버리스라는 리포터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양키 스타디움 앞에 서서 리포팅을 하는 걸 보자니, 서서히 실감이 난다. 양키 스타디움의 금빛 조명이 반짝거리는 대리석 외벽이 평소와 같으면서도 다르다.
내일이면 저 곳에서. 가을 야구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결정하는 단판 승부를 치르겠지. 자꾸만 큰 숨을 들이마시고 깊게 내쉬게 된다. 본능적으로. ‘가을 야구 모드’로의 전환을 위한 혼자만의 시간 동안, 지혁은 평소와 같은 마음가짐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집중해야만 했다. 뉴욕의 밤이 그렇게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