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37화 (138/204)

< 137 - 외나무다리 매치. >

2017년 10월 3일, 오후 4시. 한국시간 새벽 5시.

미국의 야구 프로그램은 이미 프리뷰 방송을 진행 중이다.

“자. 두 팀의 선발 라인업이 발표되었다고 하네요. 확인해 보시죠.”

2017년 아메리칸리그 와일드카드 매치.

탬파베이 레이스 vs 뉴욕 양키스 탬파베이 레이스 선발 라인업

1. 코리 디커슨 LF - (.311/.397/.602, 32HR, 94RBI)

2. 케빈 키어마이어 CF - (.249/.337/.408, 13HR, 52RBI)

3. 에반 롱고리아 3B - (.284/.339/.520, 28HR, 96RBI)

4. 로건 모리슨 DH - (.232/.350/.567, 30HR, 82RBI)

5. 케이시 질라스피 1B - (.322/.378/.502, 9HR, 32RBI)

6. 스티븐 수자 주니어 RF - (.267/.342/.479, 19HR, 78RBI)

7. 윌슨 라모스 C - (.256/.332/.419, 11HR, 44RBI)

8. 윌리 아다메스 SS - (.277/.323/.399, 4HR, 20RBI)

9. 맷 더피 2B - (.249/.322/.361, 6HR, 21RBI) P. 문지혁 (15-2, 2.21)

뉴욕 양키스 선발 라인업

1. 브렛 가드너 LF (.277/.353/.422, 20HR, 67RBI)

2. 디디 그레고리우스 SS (.308/.331/.462, 11HR, 58RBI)

3. 애런 저지 RF (.330/.409/.676, 42HR, 107RBI)

4. 개리 산체스 C (.285/.360/.599, 27HR, 95RBI)

5. 맷 홀리데이 DH (.262/.377/.502, 21HR, 69RBI)

6. 글레이버 토레스 3B (.310/.392/.441, 4HR, 28RBI)

7. 크리스 카터 1B (.208/.241/.443, 13HR, 44RBI)

8. 애런 힉스 CF (.289/.410/.498, 15HR, 69RBI)

9. 스탈린 카스트로 2B (.274/.331/.395, 15HR 51RBI) P. 마이클 피네다 (14-8, 3.71)

“대단한 라인업입니다. 두 팀 모두 아주 공격적인 선택을 했네요. 이 명단을 좀 보세요. 확 느껴지지 않습니까?”

“빌,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합니다. 하하. 저 같은 일반인들은 쉽게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하하. 미안해요, 마크. 자, 우선 일단 두 팀의 공격 지표를 보세요. 양키스는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리그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공격 지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선수들 중에 후반기에 합류한 글레이버 토레스를 제외하면 전부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올 시즌의 트렌드를 정확히 보여준다는 뜻이군요? 홈런이 엄청나게 급증한 것 말이에요.”

“정확합니다. 오, 마이. 저 숫자들을 보고 나면 정말로, 정말로 마운드에 올라가기 싫어질 것 같네요.”

몇 년 전부터 메이저리그의 트렌드는 바뀌기 시작했다. 시작은 움직임이 있는 패스트볼 계열의 발전이었다. 투수들은 단순한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는 것에서 벗어나 투심 패스트볼, 싱커, 커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무수히 많은 땅볼을 유도했다.

그러자 타자들이 낮은 공에 공격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고, 타자들이 적응을 마칠 무렵에는 다시 존의 높은 쪽을 공략하는 패스트볼과 커브의 시대가 도래했다.

높은 쪽을 찌르는 공을 응징하는 것이 바로 파워. 파워다. 아주 조금이라도 애매한 공간으로 날아드는 공은 여지없이 담장을 넘어갔다. 탬파베이 레이스도, 뉴욕 양키스도, 이 파워를 중심으로 공격을 재편한 대표적인 팀들이다.

그 중에서도 뉴욕 양키스는 엄청난 파워를 자랑하는 루키들을 대거 배출해냈다. 오늘은 벤치에 있는 그렉 버드를 포함한 1992년생 트리오, 애런 저지 ? 그렉 버드 ? 개리 산체스는 도합 85홈런이라는 경악스러운 수치를 자랑했다.

“모든 타자들이 담장 밖으로 공을 넘길 수 있는 파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게 투수에게 얼마나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탬파베이는 어떨까요? 공격적인 면에서요.”

“좋죠. 양키스에게 어마어마하다는 표현을 썼지만, 탬파베이도 나쁜 팀이 아닙니다. 특히 코리 디커슨 ? 에반 롱고리아 ? 로건 모리슨으로 이어지는 라인도 홈런 90개를 합작했어요. 하지만 전반적인 수치만 놓고 볼 때는 양키스의 파괴력이 더 위다, 이렇게 볼 수 있겠네요.”

*

“우리 문지혁 선수의 기록을 보셔야죠? 정말 엄청난 시즌이었죠, 위원님?”

“그럼요. 허허허. 현재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라고 할 수 있죠.”

“15승 2패, 2.21의 방어율. 이닝당 주자허용률은 1.11이네요. 어유~ 수치상으로 보더라도 정말 훌륭한 기록이라는 게 느껴질 정도인데요. 메이저리그 전문가인 송 기자님께 한 번 여쭤볼게요. 문지혁 선수의 이 기록.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올 시즌은 아메리칸리그와 내셔널리그 모두 세 명의 투수가 리그를 이끌어나가는 모양이 만들어졌는데요. 아메리칸리그의 ‘삼대장’ 중 한 명이라고 당당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메리칸리그에서 방어율은 3위, 다승은 공동 4위이지만 세부 지표를 조금 봐야 해요. 이렇게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이게 운이 아주 좋지 않은 편에 속했다는 걸 또 감안해야 하거든요. 홈런허용률, 탈삼진율, 그라운드볼 유도 비율, 실점억제율 같은 수치들을 보면 분명히 리그 최정상에 있는 투수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록이 조금 더 좋을 수 있는데, 참 아쉽기도 하네요. 유독 득점 지원이 조금 짰어요. 탬파베이 선수들. 오늘은 꼭 파이팅해서 화끈하게! 도와주셨으면 좋겠네요. 호호호.”

한국의 공중파에서도 새벽 5시부터 라이브 중계가 시작됐다. 포스트시즌이나 디비전시리즈, 심지어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을 했던 한국인 선수도 있었다. 하지만 와일드카드 매치라는, 팀의 모든 운명을 건 단판 승부에서 선발로 나섰던 한국 선수는 역사상 없었다.

월드시리즈의 중요성과 비교하자면 아무 것도 아닌 경기일지도 모르지만. 물러설 곳 없는 단판 승부라는 환경이 주는 기대감과 설렘은 야구팬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니 해가 뜨기 한참 전인 새벽 5시부터 프리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시즌 문지혁 선수가 기록한 뉴욕 양키스와의 상대전적을 한 번 보실까요? 네 경기 등판해서 2승 무패, 방어율은 2.50이네요. 평균보다는 조금 높은 기록이네요.”

“문지혁 투수의 장점은 이닝을 많이 소화한다는 것이죠. 투구수를 절약하기 위해서 가볍게 던져서 맞춰 잡는 능력이 좋아요. 그런데 양키스의 타자들이 워낙 파워가 좋으니까. 가볍게 던진 공들이 홈런으로 연결된 경우가 조금 있었죠. 허허.”

“오늘 경기는 단판 승부여서 그런 피칭을 할 걸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타자 별 상대전적을 보면 애런 저지, 이번 시즌 신인왕이 확정적인 선수인데요. MVP 후보에까지 올랐구요. 이 애런 저지에게 홈런을 두 개 허용했습니다. 오늘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군요. 문지혁 선수! 양키스의 홈런 타선을 어떻게 상대할지, 잘 요리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그러면 이번 시즌 문지혁 선수가 양키스를 상대로 했던 하이라이트를 보시고, 다시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

달아오른다.

방송국도, 방송을 지켜보고 있는 팬들도, 양키 스타디움의 번쩍거리는 금빛 기둥과 푸른 잔디도, 양키 스타디움의 3층까지 가득 채운 양키스 팬들의 분위기도. 계속해서 흘러가는 시간을 즐기면서, 앞으로 다가올 외나무다리 매치를 기대하고 있다.

간단한 워밍업과 불펜 피칭 몇 개를 위해 그라운드에 나선 지혁은 평소와는 명백히 다른 분위기를 읽어냈다. 아직 경기가 시작되려면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양키 스타디움에 모인 관중들의 수가 시즌 중 경기 때보다 훨씬 더 많다.

“꽉 차겠죠?”

“당연하지.”

힉키 코치가 지혁에게 다가와 팔짱을 끼고 섰다.

“딱 열 개만 던져 봐. 밸런스만 확인하면 되니까.”

“음... 네.”

관중석을 계속 돌아보는 지혁이 걱정되지도 않는지, 힉키는 아무 말도 없었다.

“패스트볼!”

“음, 이번엔 싱커.”

“커브 하나 해 봐! 이렇게 떨어뜨려, 여기까지!”

데릭 노리스가 홈플레이트에 앉아 지혁의 리듬을 끌어올리기 위해 소리를 질러댔다. 외야의 관중석에 앉은 양키스의 팬 몇몇은 지혁의 불펜 피칭을 내려다보며 벌써부터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으니까. 지혁의 공이 노리스의 미트에 빨려들어갈 때마다 울리는 묵직한 소리가 양키스 팬들의 전의를 자극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굿! 아주 좋아!”

마지막 공을 받은 노리스가 마치 양키스의 팬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아마 불펜에서 공 열 개를 받는 도중에 목이 다 쉬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컨디션은 나쁘지 않아 보이네. 혹시라도 뭐 불편한 건 없고?”

“네. 뭐. 평소랑 비슷하네요.”

불펜의 철창 너머로 펼쳐진 양키 스타디움의 광활한 외야를 바라보며 지혁은 대답했다.

“평소랑 분위기가 다르지만... 너 정도면 아무렇지도 않잖아?”

“하하... 솔직히 말하면, 조금 긴장되기는 하네요.”

“What? 뭐라고?”

그 말에 힉키의 안색이 대번에 바뀌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네가? 네가 긴장된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제가 긴장된다는데 코치님이 왜 그러세요. 한 판에 모든 게 다 걸려 있는데, 조금 쫄릴 수도 있는 거잖아요.”

“What the fuck! 지금까지는 아무리 큰 경기에서도 돌로 만든 인형처럼 덤덤하더니, 오늘은 왜 난리야?”

어린 나이의 투수임에도 지혁은 당당한 멘탈을 자랑해 왔으니까. 투수코치인 힉키에게 심리적이나 정서적인 문제로는 단 한 번도 걱정을 끼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건 지혁의 아주 오래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제의 야구와 오늘의 야구, 그리고 내일의 야구가 매번 다른 상황을 만들어내지만, 지혁에게는 언젠가 한 번쯤 겪어봤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니 멘탈을 다잡고 추스르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고.

하지만 가을 야구 경험만큼은 없다 봐도 무방하다. 와일드카드 매치처럼 한 판에 모든 운명을 짊어져본 적? 당연히 없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는 시동이 조금 더 천천히 걸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긴장이 조금 된다고 얘기했던 것인데. 힉키의 입장에서는 큰 충격이었나 보다.

“이런 젠장. 하긴, 클레이튼 커쇼도 가을에는 제 실력을 내지 못한다는데. 내가 너무 안일했어. 내가 너무 안일했다고. 이런 젠장. 젠장!”

“푸하핫.”

지금까지는 천하태평이던 힉키가 갑자기 노골적으로 자책하기 시작하자 그 모습이 우스워 오히려 웃음이 나온다. 긴장이 조금 풀리는 기분도 든다. 만약 이 모든 걸 힉키가 다 의도했다면, 그에겐 투수코치라는 직업보다 헐리우드 배우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코치님이 그렇게 불안해하시면 어떡해요? 지금 진짜 불안한 건 전데요. 진정하세요.”

“불안? 문지혁이 불안하다고? 오 마이 갓. 신이시여.”

지혁은 힉키를 조금 놀릴 심산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나중에 혼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의 긴장을 좀 풀어줬다고 얘기하면 괜찮겠지. 그렇게 경기가 시작되기까지, 지혁은 당황해 하는 힉키 코치와 장난을 치며 긴장을 풀어나갔다.

*

“플레이- 볼!”

이번 시즌 양키스의 실질적 에이스 역할을 해 온 마이클 피네다가 마운드에 서고. 심판이 크게 플레이 볼을 외친다. 동시에 양키 스타디움을 꽉 채운 엄청난 사람들이 일제히 응원 구호를 외쳐대기 시작했다. 발을 쿵쿵 구르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더그아웃에서도 그대로 느껴질 정도다.

“야, 쫄지 마! 제대로 휘두르고 와!”

누군가의 외침이 잘 전달되었을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지혁은 심장이 평소보다 크게 뛰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피가 훨씬 빠르게 돌고, 손가락 끝도 미세하게 떨린다. 지혁조차 이러는데, 지혁보다 경험이 없는 신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

이제 막 메이저리그의 맛을 보고 있는 녀석들은 이렇게 적대적이고 열광적인 관중들 앞에서 경기를 치러본 적이 ‘아예’ 없을 테니.

“후우. 하아. 후우. 하아.”

질라스피 녀석이 옆에서 시끄럽게 심호흡을 한다. 5번 타순에 위치한 녀석은 1회 첫 타자가 들어서 있는데 벌써부터 헬멧을 쓰고 배팅 장갑을 수십 번째 고쳐 끼우고 있다. 그럴 법도 하지.

“아오~!”

첫 타자 디커슨이 힘차게 휘두른 타구가 빗맞으며 2루수 정면으로 흘렀다. 디커슨은 이를 악물고 전력 질주했지만 반도 못 가서 카스트로의 송구가 1루에 빨려든다. 피네다의 각도 큰 슬라이더에 당했다.

이어진 타석, 케빈 키어마이어. 수비 괴물인 녀석이지만 타격은 꽤 정체된 듯한 모습이다. 그래도 우투수를 상대로 한 타석에서는 꽤 쏠쏠했다. 랭카스터도 그걸 믿고 키어마이어를 2번에 전진 배치했다.

- Let’s go yankees! Let’s go yankees!

대여섯 살 즈음으로 보이는 꼬마부터 여든을 훌쩍 넘긴 것 같은 할아버지까지 한 목소리로 양키스 응원을 외쳐댄다. 키어마이어도 큰 에너지를 이겨내지 못했는지 5구만에 들어온 한복판 98마일짜리 패스트볼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난다. 투 아웃. 그러자 지혁의 앞을 서성거리던 질라스피가 헬멧과 배팅 장갑을 벗고 수비 장갑으로 갈아끼우기 시작했다.

“야, 케이시.”

“어?”

“벌써 수비 준비하게?”

“투 아웃이잖아요.”

타석에 롱고리아가 들어선다.

“이런 경기에서 에반이 들어서는데.”

벌써 수비를 준비하기엔 이르지. 공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초구. 몸쪽을 찔러 들어간 피네다의 패스트볼에 롱고리아의 방망이가 벼락 같이 돌았다. 호쾌한 타구음이 울림과 동시에, 웅웅거리던 양키 스타디움이 일제히 고요함에 빠져들었다.

오직 탬파베이의 더그아웃에서만 환호가 터져나왔다. 지혁과 질라스피를 포함한 모든 구성원이 더그아웃을 뛰쳐나와 타구의 방향을 쫓았다.

[ 이 타구! 멀리 갑니다! 담장을! 그대로! ]

해가 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양키 스타디움의 하늘은 새파란데. 그 새파란 하늘을 뚫고 하얀 야구공이 미사일처럼 날아간다.

[ 넘어갑니다! 선제 홈런, 에반 롱고리아!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정말 귀중한 솔로 홈런을 때려냅니다! ]

좌익수 가드너가 허탈하게 펜스 위를 쳐다보고 있는 그 순간, 2루를 돌고 있는 롱고리아도, 더그아웃을 뛰쳐나온 지혁도.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외나무다리 매치에서 한 발을 먼저 앞서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