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39화 (140/204)

< 139 - 도박, 승부, 그리고 경험. >

그렉 버드. 좌타자다. 리그의 감독들이 아무리 기존의 독한 관습에서 벗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하더라도, 좌완 투수에게 좌타자를 대타로 올리는 일은 흔치 않다. 하지만 지라디는 과감하게 버드를 내세웠다. 우타자 그레고리우스를 빼고 말이다.

이유는 명확했다. 양키스의 벤치에 남아 있는 야수들 중에 버드가 가장 힘이 좋기 때문. 주자가 1루에 있는 것도 아니라서 더블플레이의 위험도 적고, 버드에 이어지는 저지와 산체스도 홈런을 노리는 스윙을 한다.

파워를 장점으로 하는 타자들과 연이어 상대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큰 피로감을 준다. 그 피로는 알게 모르게 쌓이고, 결국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실투라는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세상의 그 어떤 투수라도 이 진리에서 피해갈 수는 없었다. 설령 이 자리에 랜디 존슨이나 샌디 쿠팩스가 있더라도. 그들도 실투를 던질 법한 상황이다.

“스윙! 스트라이크 원.”

떨어지는 커브를 쫓아가지 못한 버드가 헛스윙을 돌리며 첫 번째 카운트를 헌납했다. 하지만 버드의 무릎은 무너지지 않았다.

“젠장. 애새끼들 아주 작정을 했네.”

그게 지혁의 심기를 거슬렸다. 팔뚝을 타고 떨어지는 땀이 상쾌하면서도 또 묘하게 거슬리는 기분처럼. 약간은 맹해 보이는 버드는 방금 돌린 스스로의 스윙에 전혀 실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버드뿐 아니라 양키스의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그랬을 것이다.

억지로 커브를 따라가는 게 아닌 자신의 자세를 잃지 않고서 있는 힘껏 돌린 스윙. 공과 방망이의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났지만, 투수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바깥쪽으로 몸이 무너지며 따라와서 맞히는 게 마음이 편하다. 그렇게 억지로 맞힌 타구는 운이 따르지 않는 한 힘없는 타구가 되고 만다.

버드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공이 맞든 안 맞든 상관없다고. 대신 공이 맞게 된다면 그 공은 담장을 넘어갈 거라고 말이다. 그런 압박감은 투수를 옥죄어 온다. 단 한 개의 공이라도 잘못 던지면 멀리 뻗어나가 버리니까.

“볼.”

두 번째 공도 방금과 비슷한 코스의 커브. 좌타자의 바깥쪽으로 사라지며 낙하하는 공. 하지만 이번에는 버드가 스윙을 내지 않고 참는다. 투구수가 많으니 빨리 승부를 보고 싶은데, 버드는 제법 침착하다. 본인이 원하는 카운트에만 스윙을 내겠다는 의지가 확고해 보인다.

“볼.”

3구. 커브 뒤 높은 코스를 찌른 패스트볼. 하지만 존을 높게 빠져나가 라모스의 마스크가 있는 곳에 빨려들었다. 이 공은 스트라이크가 되었어야 했다. 투구수가 많았다. 손가락으로 끝까지 눌러줘야 할 힘이 모자라기 시작하다는 증거다.

“... 볼.”

4구. 바깥쪽 아슬아슬한 코스를 찌른 패스트볼. 92마일이 나온 이 공도 존을 빗겨나갔다. 억지로라도 집어넣고 싶었지만, 마음먹은 대로 잘 안 되었다. 지혁은 5구가 존보다 낮게 빨려 들어가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새카만 하늘과 그걸 둘러싸고 있는 양키 스타디움의 개미떼 같은 관중들이 하나같이 커다란 압박이었다.

“여기서 애런 저지라...”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똑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엄청난 몸의 저지가 한 손으로 방망이를 꽉 쥔 채 강렬한 위세를 내뿜는다. 새삼 그의 키가 더 커 보인다. 엄청난 넓이의 어깨와 기둥 두 개를 세워 넣은 듯한 허벅지도. 눈 밑에 강렬하게 칠해 놓은 아이 패치도.

“하여간... 하루하루가 참 쉽지 않네.”

마운드 위에서 저런 타자를 기다린다는 건. 동점 주자를 내보내고 등 뒤에 주자 두 명을 둔 상태에서, 저지를 맞이한다는 건.

참.

흥분되는 일이었다. 이상했다. 극한의 상황에서만 나오는 묘한 쾌감이 피어오르는 게.

*

길었던 3시간의 승부가, 아주 짧은 3분의 한 타석에서 갈릴 것이다. 저지가 타석에서 위협적인 콧김을 뿜으며 헬멧을 한 번 벗었다 썼다. 지혁도 모자를 벗었다 쓰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이 타석, 이 공 하나. 오늘의 하이라이트. 두 사람은 잔뜩 흥분된 마음으로 한 타석에 임하고 있다.

저지의 기록은 시즌 42홈런. 두 점 차이, 루상에 두 명의 주자. 홈런 한 방이면 승부가 단숨에 뒤집어진다는 뜻이었다. 지혁은 최대한 어려운 투구를 했다. 지혁뿐 아니라 그 어느 누가 오더라도 같은 투구를 했을 것이다. 어중간한 높이로 들어가는 공은 201cm의 저지가 보기에는 정말로 치기 딱 좋은 코스로 향하곤 하니까.

시작은 저지가 유리했다. 노 스트라이크 쓰리 볼 카운트를 선점했다. 지혁과 라모스 배터리는 코스를 다채롭게 섞어갔지만 저지는 매번 방망이를 출발만 시킬 뿐 절반 이상 끄집어내지도 않았다.

볼이 쌓여갈 때마다 양키스의 팬들은 휘파람과 환호를 쏟아냈다. 그리고 지혁을 향한 조롱과 저지를 향한 기대를 온몸으로 느낄수록, 이상한 쾌감에 대한 갈증이 점점 더 차올라 지혁의 몸과 마음을 가득 채우는 기분이었다.

볼 쓰리. 막다른 골목. 외나무다리 승부의 외나무다리 대결, 그리고 일방적으로 한 쪽이 유리한 카운트. 그 볼 쓰리가 되는 순간 저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혹시 아주 조금은 방심하지 않았을까? 쓰리볼이기 때문에, 공을 하나쯤 볼 수도 있다고 안이하게 대처하지는 않았을까?

극한 중에서도 극한의 상황. 지혁의 손끝에서 떠난 공이 힘없이 날아갔다. 저지는 타격을 할 것처럼 왼발을 살짝 들었다 내려놨다. 하지만.

“스트-라이크!”

저지는 스윙을 내지 못했다. 경기 내내 표정이 별로 없던 저지의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들이 순간적으로 스처가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 스트라이크. 이번 공은... ]

[ 실투였던 걸로 보이는데요? 저지가 놓쳤습니다. ]

[ 볼 하나를 보려는 생각이었겠죠? 아무래도 카운트에 여유가 있으니까요. ]

[ 그런... 걸로 보입니다. 하지만 양키스의 입장에서는 방금 이 공을 놓친 건 정말 아쉽겠는데요? 한가운데였습니다. ]

[ 구속이 지금.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84마일이 찍혔습니다. 94마일이 아니라, 84마일이네요. 스피드건의 오류일까요? 지금까지 문이 던져 온 패스트볼 구속들은 주로 93~95마일 사이에서 형성되었었는데요. ]

84마일. 패스트볼. 한복판.

저지는 반드시 휘둘러서 담장 밖으로 넘겼어야 할 공을 놓쳤다. 지혁이 지금까지 던진 공 중에서 커브를 제외하고는 가장 느린 공이었고, 가장 몰린 공이었으며, 가장 덜 회전하는 공이었다.

“그래. 너 못 휘두를 것 같더라.”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거렸다. 가장 위험한 곳에 애매한 공을 던져서 스트라이크를 잡아낸 것. 온전히 도박이었다. 팀의 운명을 걸고 있는 가장 막다른 골목에서 지혁은 도박을 택했다.

데이터를 바탕으로, 상대의 타격폼을 분석하며 철저하게 약점을 노려 투구했던 지혁이지만. 이 순간에는 알 수 없는 직감에 따랐다. 모든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었고, 짧은 시간에 수많은 생각을 하며 가장 짜릿할 것 같은 공을 선택했다.

그게 바로 한복판에 꽂히는 느린 패스트볼이었다.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공. 타석에 선 애런 저지라면 더더욱 예상할 수 없는 공.

정작 까무라칠 뻔 했던 건 공을 쥔 라모스였다. 공을 쥐자마자 고개를 푹 떨구는 게 마치 심장이 떨어진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윌슨 라모스 같은 베테랑 포수도 예상할 수 없었던 공에 루키인 애런 저지가 반응한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반응했다면 넘어가는 건 뻔했겠지만.

그리고 모 아니면 도의 피칭이 먹혀들어간 바로 그 순간, 승부는 끝났다.

5구. 몸쪽으로 파고든 92마일짜리 싱커가 아름답게 춤을 췄다. 방금 전의 패스트볼은 하늘이 내려준 유일한, 또 최후의 기회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오늘 경기의 121번째 공은 가장 화려한 움직임을 보이며 저지에게 날아갔다. 저지에겐 이미 직전에 본 84마일의 패스트볼이 저지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반응이 늦었고 손잡이 안쪽에 맞았다.

콰지직.

모든 투수들에게 희열에 가득 차게 하는 방망이 부러지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고. 지혁의 옆을 힘없이 스쳐간 공은 2루수 더피의 글러브에 미끄러져 들어갔다. 공은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2루 베이스 위를 거쳤다가 1루수의 미트 속으로 빨려들었다.

[ 더블 플레이! 애런 저지가 이 결정적인 순간에 더블 플레이로 무너집니다! 양키 스타디움이 충격의 침묵 속으로 빠져듭니다! ]

거대한 체구의 저지가 빈 1루 위에서 주저앉았다. 헬멧을 내동댕이치고 무릎을 꿇은 저지가 주먹으로 땅을 내려치는 장면을 지혁은 보지 못했다. 이미 마운드를 내려와 탬파베이의 더그아웃 앞까지 걸어내려온 상태였다. 모든 사람들이 생각했다. 201cm의 저지보다 지혁이 훨씬 더 거대해 보인다고.

*

“뒤는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저지를 거르는 건 애초에 선택지에 없는 내용이었어요.”

“하지만 베이스는 하나 비어있었고, 처음 세 개의 공이 모두 피해가는 것처럼 보였었거든요.”

“피해가려는 건 아닌데, 어렵게 가져가려는 생각은 있었습니다.”

“그 이후의 4구를 보면 전혀 그런 마음이 없었던 것 같은데요?”

“하하하.”

기자들이 웃었다. 지혁도 머쓱하게 웃었다. 경기가 끝난 뒤 돌이켜보니 대체 어떤 마음으로 4구를 한복판에, 그것도 힘을 완전히 뺀 84마일짜리 공으로 집어넣었는지 알 길이 없다. 그건 정말 미친 선택이었다. 승부를 하는 곳에서의 마음은, 승부를 하지 않는 곳에서는 짐작할 수도 없는 법이다.

양키스의 입장에서는 이 순간에 지혁이 실투를 던질 것이라 예상했던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게 문제였다. 타석에 서 있던 저지는 눈곱만큼도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순간에 지혁이 실투를 던진다는 건, 결코 고려할 수 없었던 일이니까.

어쨌든, 야구는 참 이상한 운동이다. 100마일이 넘는 공도 담장 밖으로 뻥뻥 때려내던 타자가, 84마일의 한가운데 패스트볼을 보고난 뒤 밸런스가 흐트러지기도 하는, 그런 운동이다.

“아주 위험해 보였던 4구를 그냥 흘려보낸 이후 저지의 타격 밸런스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는 스탯캐스트의 분석이 있었습니다. 혹시 의도하신 건가요?”

“오. 아뇨.”

지혁은 손사래를 쳤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걸 의도할 수 있었다면 제가 정말 특별한 선수였겠죠. 하지만 전 그 정도의 선수는 아니에요. 저지는 분명히 위협적인 타자이고, 리그에서 한 손 안에 들어가는 타자로 성장했지만, 그가 저에 비해 모자란 점이 딱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차이를 갈랐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게 뭐죠?”

“경험. 저지는 정말 훌륭한 타자가 되었지만, 그도 이런 큰 경기에서 뛴 경험이 적은 루키에 불과하니까요. 모든 루키가 다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지혁의 말에 일순간 기자회견장이 고요해졌다. 사람들은 위화감을 느꼈다. 이제 갓 메이저리그 데뷔 4년차, 그리고 풀타임 3년차 선수인 지혁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으니까. 지혁의 말은 마치 베테랑의 그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당신도... 프로 경력은 4년에 불과한데요.”

어떤 용기 있는 젊은 기자가 손을 들고 물었다.

“아... 네. 뭐. 생각해보니 그렇긴 하네요. 하하. 팀에 어린 선수들이 워낙 많아서 요새는 고참 같이 느껴져서 말이에요.”

“자. 여러분. 오늘 122개를 던진 문입니다. 굉장히 피로할 테니 기자회견은 이 정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모두 감사드립니다.”

진행자가 적절한 타이밍에 기자회견을 마무리지었다. 지혁과 랭카스터 감독은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서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회견장을 빠져나가는 중에도 많은 기자들과 악수를 나누며 축하의 메시지를 받았던 건 물론이다.

*

- 탬파베이 레이스, 4년 만에 포스트시즌 복귀!

- 슈퍼 문, 슈퍼 슈퍼 문! 8이닝 122구 역투. 탬파베이를 가을로 이끌다.

- [오늘의 승부처] 8회, 1아웃 1,2루. 문 vs 애런 저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

“아아...”

눈곱을 떼어내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거의 기절하듯 잤다. 탬파베이의 구성원들만 느꼈던 승리의 열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양키 스타디움을 빠져나온 직후부터 피곤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버스 안에서도, 뉴욕에서 휴스턴까지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그리고 휴스턴의 원정 호텔에 도착해서도 머리만 대면 곧장 잠에 빠져들어 버렸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서 다른 뭔가를 하려고 해도 할 수도 없었겠지만.

10시간을 넘게 잠들어 있다가 느지막히 눈을 뜨니 벌써 오후 2시. 어제 밤까지만 해도 뉴욕에서 양키스를 상대하던 지혁은 지금 휴스턴에 와 있다. 와일드카드 진출 티켓을 얻어 정식으로 가을 잔치에 합류했으니, 이제부터는 바로 가을 야구에 돌입하는 것이다.

“꿈 같네. 설마 꿈은 아니겠지?”

창밖으로 보이는 휴스턴의 시내를 멍하니 들여다보다 간신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한 세월이 걸렸다. 왼쪽 어깨와 팔꿈치는 아직도 비명을 질러대고 있다. 허리도 뻐근하고, 허벅지에 달고 사는 근육통은 이제 익숙해져 버렸고. 야구 선수의 숙명이긴 하지만 시즌이 다 끝난 이후에는 정말 훨씬 더 힘들다.

“크아. 머리야.”

차가운 물을 단번에 들이켰더니 머리가 띵하고 울린다. 몸은 피로하지만 정신은 조금 돌아오는 느낌이다.

부르르. 부르르르.

테이블 위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열었다.

“Holy shit.”

비상사태는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서 벌어지곤 한다.

- 문. 잡니까? 얘기가 들어갔는지 모르겠는데. 아처가 손가락 부상을 당했다던데, 사실이에요? - From, 패트릭 에이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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