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40화 (141/204)

< 140 - 1차전. >

“야, 브랜트. 아처가 다쳤다며? 어떻게 된 거야?”

전날 선발투수여서 늦게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지혁이 클럽하우스에서 처음 마주친 허니웰을 잡자마자 물었다.

“아, 문. 문? 이 시간에 벌써 왔어요? 아처 소식을 온건가? 어쨌든, 공이 튀었어요. 디커슨이 프리 배팅을 치고 있었거든요. 꽤 잘 맞은 타구였어요. 라이너성으로 쭉 뻗는 타구? 근데 좌중간 펜스에 맞고 튀어나온 공이 외야에서 스트레칭 하고 있던 아처 쪽으로 튀어서...”

허니웰은 평소에도 조금 이상한 녀석이었지만, 오늘은 더더욱 정신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숨도 쉬지 않고 상황 설명을 하는 허니웰은 오른손에 야구공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숨 좀 돌려. 넌 왜 그렇게 또 정신을 놓고 있어?”

“오늘... 내가 던져야 해요.”

“뭐?”

“오늘 선발이, 나라구요. 아. 너무 떨리는데.”

그제야 허니웰이 다리를 달달 떨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지혁과 함께 팀을 이끌어갔던 투수인 크리스 아처가 전열에서 이탈했다면. 로테이션대로 돌았을 때 다음 투수가 바로 허니웰이었다.

“이런. 이건 너무 가혹한데.”

지혁은 허니웰이 듣지 못하게 중얼거렸다. 1995년생 루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조차 미처 주어지지 않은 상황. 자신의 생애 첫 포스트시즌 경기에 나서는 게 경기 시작 세 시간 전에 결정되어 버렸으니 패닉에 빠져도 이상할 게 없긴 하다.

“긴장 풀어. 그냥 똑같은 경기야. 네가 후반기에 얼마나 잘 던졌는데. 딱 그렇게만 하면 돼.”

지혁은 허니웰의 등을 두드려주고는 클럽하우스를 빠져나왔다. 얼마 안 가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는 랭카스터 감독과 힉키 코치를 발견했다.

“감독님.”

“후. 문. 컨디션은?”

“조금 피곤하긴 해도 괜찮습니다.”

“너도 아픈 건 아니겠지?”

‘너도’라는 말에서 뼈아픈 감정이 느껴진다. 이제 막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승리하고 진짜 가을 무대로 들어온 판인데, 들어오자마자 대형 악재를 만났다.

“아처는 어떤가요?”

“병원으로 갔어. 조금 안 좋은 부위에 맞았어. 손가락이 붓기 시작하는 걸 보니...”

힉키가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확실히 좋지 않은 상황인 듯 했다. 손가락이라면 부러졌을 가능성도 있다. 부러진 게 아니라 실금이라도 갔다면 아처의 가을은 끝이다.

지금 탬파베이의 선발 로테이션은 지혁과 아처의 원투 펀치. 그리고 그 뒤를 받치는 세 명의 루키들이다. 허니웰, 드 레온, 스넬. 랭카스터는 좌완 불펜이 부실하다는 걸 고려해 블레이크 스넬을 롱릴리프 겸 스윙맨으로 내려 4인 선발 체제로 가을에 임하려 했다.

가을 야구에서 루키 두 명이 선발 로테이션을 차지하고 있는 것만 해도 엄청난 도박이자 부담인데. 아처가 갑작스런 부상으로 빠지게 되자 졸지에 지혁과 루키 세 명으로 선발 로테이션이 구성되게 생겼다.

“일단 세 녀석이 출장하는 경기에서는 항상 원 플러스 원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조합을 짤까요? 스넬이 불펜에서 빠져버렸으니...”

“허니웰이 나설 땐 오스틴 프루잇을 대기시키고. 드 레온일 때는... 하아. 제이콥 파리아로. 그리고 스넬이 나서는 경기에는 후 치웨이로 하지.”

“알겠습니다. 오늘은 프루잇에게 1회부터 몸을 풀게 하겠습니다.”

“그래.”

힉키가 서둘러 불펜으로 향하고, 랭카스터는 담배라도 태워야 되겠다며 감독실로 들어가 버렸다.

“넌 진짜 아프면 안 돼. 내가 죽일 거야. 몸 관리 똑바로 해.”

랭카스터가 지혁에게 쏟아낸 독설이 하나도 아프지 않다. 오히려 안쓰러웠다.

*

“오늘부터 우리가 하는 야구는 아주 독특할 거야. 이 무대에 들어와보지 않은 놈들은 너무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어. 평소처럼 하라고, 그러면 된다고.”

롱고리아는 선수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연설을 시작했다. 단언컨대 지혁이 탬파베이에 합류하고 나서 가장 진지하고 결연한 모습이었다. 클럽하우스 안에서 리더 역할을 하는 것, 팀의 기둥 역할을 하는 것. 결코 쉽지 않은 포지션에 있는 선수는 이번 시즌에서 롱고리아와 아처뿐이었다.

베테랑이긴 하지만 팀에 합류한 지 반년밖에 되지 않은 윌슨 라모스나 콜비 라스무스의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중간 세대인 지혁과 키어마이어라고 해봤자 겨우 3~4년차밖에 되지 않는 선수들이다. 그것도 가을 야구를 처음 경험하는.

결국 아처의 이탈은 오롯이 롱고리아에게 짐이 되었다. 모든 선수들이 아처가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걸 보고 패닉에 빠졌고, 당황하고 있었다.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잡아줄 수 있는 건, 그리고 잡아야만 하는 건 롱고리아의 역할이다.

“여기 있는 너희들 중에서 이 무대에서 뛰어보지 못한 녀석들이 훨씬 더 많아. 그러니 아직 모를 거야. 와일드카드 매치는 아무 것도 아니야. 이 무대에서 평소처럼 뛴다는 건 거의 불가능해. 진짜 선택받은 몇몇 녀석을 제외하고는 말이지. 왜인지 알아? 이 무대에 진출하는 것 자체가 선택받은 것이기 때문이지.”

평소 같았으면 롱고리아의 말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농담을 섞었을 바우어스를 포함해 어린 녀석들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롱고리아에게만 집중하고 있다. 이 녀석들도 사태의 심각성, 무대의 중압감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으니까.

“쉽지 않은 경기가 될 거야. 가을 야구의 모든 경기는 전부 다 쉽지 않아. 중요한 건, 우리는 나가서 할 수 있는 최고의 플레이를 펼치는 거야. 평소보다 훨씬 더 집중해서, 훨씬 더 파워풀하게, 훨씬 더 강한 야구를 해야만 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선수들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기세가 확 살아나지는 않았지만, 롱고리아는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듯 씨익 미소를 지었다. 지혁은 롱고리아가 분명히 일부러 웃었다고 생각했다.

“자. 다들 모여. 최소한 오늘 한 경기는, 아처를 위해서 하자고. 오늘 1차전에 등판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준비해 왔던 그 녀석에게 승리를 바쳐야 하지 않겠어? 너희들이 평소에 하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플레이로 말이야.”

선수들이 롱고리아 주위로 몰려들었다. 지혁은 일부러 슬쩍 자리를 옮겨 허니웰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그리곤 허니웰의 어깨에 오른팔을 턱 둘렀다.

“아처를 위해서.”

롱고리아가 구호를 외치는 동안, 지혁이 허니웰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 원, 투, 쓰리, 허슬!

라커룸에 울려 퍼지는 탬파베이 선수들의 구호 소리와 함께. 아처가 없는 탬파베이의 2017시즌 가을 야구가 시작되었다.

*

“달려! 달려! 달려 봐!”

윌리 아다메스가 1루를 돌아 2루까지 전력으로 달려나간다. 선수들이 전부 주루코치가 된 양 옆으로 빗자루를 쓸 듯 팔을 휘둘러댔다. 그리고 아다메스는 절묘한 코스로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해 들어가며 2루에 공보다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그 사이 3루에 있던 윌슨 라모스가 여유 있게 홈을 밟았다.

“촤하! 나이스! 예아아!”

라모스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더그아웃에 들어와 선수들 사이에 파묻혔다. 오늘 탬파베이의 타자들은 뛰어난 집중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운드에 서 있는 게 다른 누구도 아닌 아메리칸리그 다승 1위이자 유력한 사이영 상 후보인 댈러스 카이클이라는 걸 감안하면 더더욱.

“좋아! 아다메스를 불러들이면 동점이야! 집중해! 좋아, 제이크!”

게다가 투지는 압도적이다. 최소한 투지만큼은, 탬파베이의 선수들이 휴스턴 선수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전력은 휴스턴이 훨씬 더 강했지만 의지의 싸움에서는 탬파베이가 더 앞선다. 타자들의 눈빛은 같은 팀인 지혁이 봐도 무섭다고 느껴질 정도로 살벌했다.

카이클이 잘 던진 공을 상대로도 끊임없이 커트를 시도하며 투수를 괴롭혔다. 삼진 아웃을 당하거나 범타로 물러날 때에도 기합을 쓰거나 100m 달리기라도 하는 듯한 전력질주로 의지를 표현했다.

그런 의지가 경기장에서 나타나다 보니 천하의 카이클도 꽤나 당혹스러워 하는 모습이었다. 라모스를 볼넷으로 출루시켰다가 결국 홈으로 들여보냈고, 지금의 바우어스에게도.

따아악!

장타를 맞았다. 2루 주자 아다메스는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헬멧까지 벗어질 정도로 내달려 홈으로 뛰어들었고, 바우어스도 2루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들어갔다.

“오케이이이이!”

[ 탬파베이, 5회초 들어 기어이 동점을 만들어냅니다! 스코어는 5대5 동점! 댈러스 카이클이 5실점으로 무너지고 맙니다! ]

[ 하하. 크리스 아처가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경기에서 빠져서 휴스턴의 확실한 우세가 점쳐졌었는데요. 이제 이 경기는 모르겠네요. ]

[ 탬파베이의 득점이 참 묘합니다. 지금까지의 5타점을 모두 루키들이 기록했어요. 윌리 아다메스가 2타점, 케이시 질라스피가 투런 홈런, 그리고 지금 제이크 바우어스가 1타점을 기록합니다. ]

지혁은 아다메스가 홈으로 들어오는 걸 확인하고는 조용히 더그아웃을 빠져나갔다. 고요한 클럽하우스로.

“야. 동점이야.”

“...네. 다행이네요.”

허니웰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피칭은 잊어버려. 그래야 해.”

“하아.”

“넌 루키야. 못 던질 수도 있어. 게다가 오늘은 완벽히 준비된 경기도 아니었어.”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아요. 평생. 내가 왜 그렇게밖에 못 던졌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날도 있는 거야.”

허니웰에게는 꿈을 현실로 이루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포스트시즌 무대에 자신의 생애 처음으로 등판했으니까. 악마의 구종이라는 평가를 받던 스크류볼로 휴스턴 녀석들을 돌려세우는 상상을 수백, 수천 번은 했을 테지.

하지만 현실은 꿈과는 너무 달랐다. 0.2이닝 3피홈런 5실점. 브랜트 허니웰이라는 투수가 야구를 시작한 이래로 기록한 최악의 피칭이었을 것이다.

1회말. 휴스턴의 선두타자 알투베에게 리드오프 홈런을 맞았고, 2번 스프링어에게 백투백 홈런을 맞았다. 코레아에게는 볼넷, 레딕에게는 몸에 맞는 공. 브레그먼과 벨트란을 삼진으로 돌려세웠지만 7번 구리엘에게 쓰리런 홈런을 허용하며 단숨에 무너졌다. 랭카스터는 경기 시작 전부터 준비시켜 둔 오스틴 프루잇을 올렸다.

“마음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 오늘 투구는. 개판이었지.”

“휴...”

이렇게 경기를 망친 투수에게는 어떤 말도 귀에 들어가지 않는다. 같은 투수여서, 특히 전생에서는 경기를 망치는 투구가 훨씬 더 많았던 투수여서. 지혁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계속 여기 있어. 차라리 잔뜩 우울해하고 오늘 싹 잊어버리는 게 낫겠다.”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니까요.”

“시끄러워. 잊어야 돼. 넌 다음 경기에도 나가야 하잖아.”

“기회는 없을지도 몰라요. 감독님 엄청 화나셨는데.”

지혁은 허니웰의 뒤통수를 살짝 내리쳤다. 나름대로 애정의 손길을 담았는데, 느껴졌으려나.

“그럴 리 없어. 우리 팀은 네가 필요하니까. 난 나가볼 테니까 빨리 정신 차려라.”

*

경기는 엎치락뒤치락했다. 휴스턴이 1회에만 5점을 뽑아내며 기세를 올렸지만, 탬파베이는 오스틴 프루잇과 라인 스타넥, 체이스 휘틀리라는 기대하지 않았던 불펜이 6이닝을 합작하며 무실점 호투를 펼쳤다.

그러는 사이 카이클을 무너뜨리며 5점을 따라잡았고 6회초에는 키어마이어가 휴스턴의 두 번째 투수인 파이어스를 상대로 역전 솔로 홈런을 때려내 승부를 뒤집었다.

휴스턴의 방망이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7회말, 알렉스 브레그먼이 대니 파쿼를 상대로 재역전 투런포를 때려냈다. 탬파베이도 8회초에 맷 더피의 안타와 바우어스의 2루타로 경기를 원점으로 돌렸다.

“하. 5년은 일찍 죽겠다.”

힉키의 엄살이 가슴에 박힐 정도다. 오늘 경기는 그 정도로 치열했다. 그리고 이건 분명히 기대 이상의 선전이기도 했다. 댈러스 카이클 대 브랜트 허니웰의 대결이라는 특수성, 기존 전력의 차이까지 전부 감안하면 이 경기가 치열한 7대7 게임으로 진행되는 건 선전이다.

특히 타자들은 오늘 날을 제대로 잡은 모양새였다. 롱고리아가 경기 전에 어린 선수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한 보람이 있었던 것일까. 카이클을 상대로 하는데 선발타자 전원 안타를 기록했고, 휴스턴의 불펜들도 집요하게 공략하는 중이다.

9회초. 휴스턴의 셋업맨이자 마무리 출신인 루크 그레거슨이 마운드에 올라와 있는데도 그랬다. 까다로운 투구폼과 놀랍게 떨어지는 공을 던지는 그레거슨을 상대로 선두타자 롱고리아가 볼넷을 골라냈다. 큰 것 한 방으로 해결하고 싶었을 테지만 롱고리아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올라왔냐?”

지금까지 클럽하우스에 쳐박혀 있던 허니웰이 조용히 더그아웃에 들어와 앉았다. 지혁은 곧장 허니웰의 팔을 잡아끌었다. 난간에 데려다 놓은 허니웰의 눈가에는 빨간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못 본 척 했다.

“나는 오늘 목 다 나가겠다. 니가 소리 좀 질러.”

“...”

“빨랑.”

“케이시! 집중해! 해 보자, 집중! 집중!”

마지못해 응원을 보내는 것 같았지만. 허니웰의 마음이 전달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우와아아아! 좋아!”

케이시 질라스피가 있는 힘껏 당긴 타구가 높은 탄도를 그리며 외야를 향해 뻗어나갔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타구를 쫓았다. 제발. 제발 넘어가라고 짧은 시간에 수백번은 더 되뇌었다.

그리고 몇 초 후. 휴스턴의 미닛메이드 파크가 고요와 탄식으로 물들었다.

*

- [AL 포스트시즌] 탬파베이 레이스, 극적인 역전승으로 1차전 선취!

- 탬파베이 레이스 9 vs 7 휴스턴 애스트로스.

- 탬파베이의 루키 파워! 루키 삼총사가 8타점을 적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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