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41화 (142/204)

< 141 - Home, sweet home. >

*

2017년 포스트시즌 진행 현황.

1. 아메리칸리그

탬파베이 레이스 (2-1) vs 휴스턴 애스트로스 (1-2) 보스턴 레드삭스 (2-1) vs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2)

2. 내셔널리그

LA 다저스 (2-1) vs 워싱턴 내셔널스 (1-2) 시카고 컵스 (3-0) vs 콜로라도 로키스 (0-3) 시카고 컵스, 디비전시리즈 진출.

*

- 야. 너 무슨 일이야? 왜 연락도 안 돼?

지혁이 문자를 보낸 지 벌써 사흘이나 되었다. 여전히 답장은 오지 않았다. 지혁은 마지막으로 핸드폰을 확인한 뒤 라커룸 안에 던져 넣어 버렸다. 패트릭도 답장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패트릭에게보다 지혁에게 훨씬 더 말을 많이 하던 게 후지니까.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고 있었다. 포스트시즌이 시작되었는데, 보스턴은 3차전까지 진행되는 와중에 팀의 에이스인 후지 미유타를 등판시키지 않았다. 플레이오프 로스터에는 포함되어 있고, 더그아웃에서도 후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지가 마운드에 올라가지를 않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풍문들이 피어올랐다. 후지가 부상을 당했다는 설이 제일 유력하게 떠돌아다녔고, 또 일각에서는 패럴 감독과 후지 사이에 불화가 있다는 설도 힘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후지의 일은 후지의 일이고, 지혁의 일은 지혁의 일이다. 후지가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동생이라는 건 확실했지만. 지금 지혁의 눈앞에 있는 휴스턴과의 포스트시즌 경기의 집중력을 앗아갈 만큼 대단한 건 아니었다.

“슬슬 던져볼까? 윌슨!”

“준비됐어?”

“당연하지.”

라모스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장비를 챙겨 일어섰다. 편안한 라커룸을 지나가 익숙한 더그아웃을 거쳐 외야 옆에 조그맣게 마련된 불펜으로 향한다. 모든 것이 평소의 풍경 그대로였다. 아직 사람이 들어오지 않은 관중석의 색감이, 고개를 돌렸을 때 보이는 천장의 구조물들이, 커다란 전광판과 외야의 잔디들이 전부 다. 평소대로다.

“자, 패스트볼부터.”

라모스가 마스크를 눌러쓰고 자리에 앉아 가슴팍에 미트를 가져다댔다. 지혁의 패스트볼이 낮은 탄도를 그리며 미트에 상쾌하게 빨려든다. 연습 투구의 느낌도 평소와 아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오늘 좋은데?”

“좋긴요. 딱 평소에 던지던 공인걸요.”

“그게 좋다는 뜻이지. 넌 임마, 15승 투수잖아. 그리고 휴스턴 상대로 12경기에서 9승을 건져낸 녀석이고.”

“음. 숫자만 놓고 보니까 또 제가 엄청 좋은 투수인 것 같기도 하고?”

“흐흐. 그렇게만 하라고. 오늘도 평소처럼.”

지혁이 가장 좋은 상대전적을 보유한 팀은 토론토 블루제이스다. 3년 동안 토론토를 상대로 16경기에 등판해 13승 2패. 토론토를 상대로 한 평균자책점은 무려 1.42다. 토론토는 지혁이 등판하는 날이면 이미 졌다고 생각할 수준이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으로 상대전적이 좋은 팀이 휴스턴이다. 로테이션 상 댈러스 카이클과 서너 번 마주쳤어야 했던 걸 감안하면 휴스턴을 상대해서 9승이나 뽑아냈다는 건 엄청난 기록이다.

그래서 지혁도 자신감이 넘쳤다. 양키스와 치렀던 와일드카드 매치보다도 훨씬 더. 휴스턴은 양키스보다도 더 강한 팀이라고 평가받고 있지만, 그건 다른 선수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지혁에게는 마운드에 올라가면 다른 팀들보다 더욱 편하게 느껴지는 팀이 휴스턴이니까. 심지어 약체로 전락하고 만 캔자스시티 로얄스나 시카고 화이트삭스보다도 더.

“오-케이! 나이스 볼!”

지혁의 타자가 서 있어야 할 곳에서 화려하게 움직이며 미트에 박혀들었다. 컨디션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

[ 아메리칸리그 포스트시즌 4차전! 탬파베이 레이스와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맞대결입니다. 휴스턴이 칼을 뽑아들었습니다. 1차전 선발이었던 댈러스 카이클이 올라왔죠? ]

[ 그렇습니다. 사흘 휴식 후 등판. 힌치 감독의 절박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

[ 카이클은 1차전 선발로 올라왔다가 4.2이닝 동안 5실점으로 물러났습니다. 탬파베이 레이스의 루키 타자들에게 5타점을 허용했습니다. 오늘 그 선수들을 그대로 다시 마주해야 합니다. ]

[ 상황이 더욱 안 좋아졌죠. 1차전은 휴스턴의 홈이었다면, 오늘은 탬파베이의 홈이니까요. 게다가 평소보다 하루 일찍 등판했으니 몸에도 무리가 있을 겁니다. ]

[ 힌치 감독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벼랑 끝까지 몰렸다. 이 상황에서 팀의 운명을 맡길 수 있는 투수는 댈러스 카이클밖에 없다. ]

[ 정답입니다. 제가 감독이어도 카이클을 무리해서 올렸을 겁니다. 시즌 21승, 평균자책점 2.28. 댈러스 카이클이 아니면 이 상황을 맡길 투수가 없죠. ]

카이클은 표정에서 드러내고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더 강한 결의를 보이고 있었다. 1회 선두타자 디커슨을 상대로 던진 3구째 커터가 카이클의 의지를 증명했다. 디커슨은 3구만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서며 내려와야 했다.

원래 카이클은 전력피칭을 하는 투수가 아니다. 오히려 패스트볼 구속을 일부러 조금 떨어뜨리기도 하는 투수다. 그래야 비슷한 구속대의 싱커, 투심, 커터가 모두 빛을 발하기 때문이었다. 카이클이 던지는 네 가지 종류의 패스트볼은 모두 89~91마일 대에서 형성되곤 했다. 그런데 1회에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93마일. 카이클은 시작부터 기어를 끌어올렸다.

반면 지혁은 덤덤하게 평소의 피칭을 이어나갔다. 휴스턴의 타자들은 지혁의 패스트볼과 싱커의 조합에 온 신경을 몰아넣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허를 찌르는 커브에 속수무책으로 물러났다. 세 가지 레퍼토리를 자유자재로 쓰기 시작하자 지혁과 휴스턴 타자들 사이의 주도권은 단숨에 지혁 쪽으로 넘어왔다.

[ 스윙! 삼진으로 물러나는 카를로스 코레아. 문이 첫 번째 탈삼진을 잡아냅니다. ]

[ 뷰티풀 커브. 이 커브에는 꼼짝도 할 수 없었네요. ]

[ 1회가 0대0으로 마무리됩니다. 순식간에 끝났군요. 양 팀 모두 삼자범퇴였습니다. 탬파베이 쪽을 담당하는 FOX의 에디터인 샘 호킨스가 이런 표현을 썼다고 하는군요. 문은 휴스턴 타자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 같다. 휴스턴 타자들이 어떤 공을 노리는지를 알고 나서 농락하듯이 던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

[ 하하. 어떤가요, 빌? ]

[ 정확하네요. 제가 받은 인상도 딱 그랬어요. 오늘의 1회도 그랬고 말이죠. ]

[ 1패만 더 하면 탈락하고 마는 휴스턴에게는 악몽 같은 말이네요. 과연 문의 피칭이 계속해서 악몽을 선사할 수 있을지. 광고 보고 확인하시죠. ]

*

야구장 안의 분위기는 누가 결정하는가? 잔디 바로 위쪽에는 정말로 무수히 많은 감정들이 떠다닌다. 다이빙을 해서 간신히 공을 건져낸 수비수들의 짜릿한 쾌감이나, 혹은 수비의 옆을 뚫어내고 외야로 빠져나간 공을 때려낸 타자들의 희열이나. 그것을 보면서 환호하고 뛰쳐오르는 더그아웃의 선수들이나 코치들이 만들어내는 감정들이 분위기를 만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니다. 선수들의 플레이도, 벤치에 있는 사람들의 리액션도 경기장 안의 분위기를 온전히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경기장 안에 흐르는 거대한 분위기를 좌우하는 건 바로 관중석을 메운 사람들이다.

특히 이런 큰 경기에서는, 관중석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된다. 거대한 경기장의 한가운데에서 쏟아지는 관중들의 에너지를 받아내야만 하는 선수들은 관중들의 분위기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엄청나게 거대한 그 에너지들 속에서도 평정을 찾고 자신의 실력을 온전하게 쏟아낼 수 있는 선수는 그렇게 흔치 않다. 그들이야말로 정말 신에게 선택받은 선수들이라고 해야 한다. 그게 아닌 보통의 선수들은 관중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취하곤 한다.

그래서 홈이 좋은 것이다. 홈 팬들의 일방적인 응원, 상대편과 심지어 심판에게까지 가해지는 거대한 압박. 이런 것들은 야구장 안에서 잘 보이지 않던 숨어 있던 1%를 끄집어내는 역할을 한다.

6회말. 스코어 0대0의 상황.

- Let’s go rays! Let’s go rays!

- Evan! Evan! Evan!

평소의 카이클이었으면 탬파베이의 관중들이 펼치는 열렬한 응원을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몸에 무리를 줘 가면서까지 하루 일찍 등판한데다가, 카이클이 무너지면 휴스턴도 탈락한다는 거대한 중압감은 묘한 차이를 만들어냈다. 카이클은 타석에 들어선 롱고리아의 허리를 강하게 때리는 사구를 내줬다.

- 개자식아! 수염쟁이 자식!

아주 거센 비난이 일순간에 마운드로 몰려들었다. 상대편이 아니라 같은 투수의 입장에서 안쓰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로. 그렇게 강한 비난과 일방적인 야유 속에서 카이클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딱!

롱고리아의 뒤를 이어 등장한 로건 모리슨의 타구가 시프트를 뚫고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가 되었다. 1아웃에 주자가 두 명. 그리고 타석에는 1차전에서 카이클에게 투런 홈런을 뽑아냈던 케이시 질라스피.

“왔다. 이번에 한 점만 딱 뽑아주면 내가 지켜줄게.”

낮게 중얼거려 본다. 관중들도 지혁과 같은 마음으로 타석에 들어선 루키에게 열광을 쏟아낸다. 마운드에 선 카이클만 혼자였다. 카이클을 눌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일방적인 에너지를 감당하기엔. 카이클은 분명히 너무 지쳤다.

[ 밀었습니다! 중견수가 뒤로 달려갑니다! 카를로스 고메즈, 몸을 던집니다만 빠져나갑니다! 빠져나갑니다! 중견수를 넘어가는 타구, 롱고리아 홈으로! 1루주자 모리슨도 홈으로! 홈으로오오! 두 명의 주자가 나란히 들어옵니다! 팽팽했던 경기, 6회에 균형이 무너집니다! 두 점의 스코어, 리드를 가져가는 레이스! ]

2루에서 수줍게 세레머니를 보내는 질라스피, 그리고 랭카스터 감독을 포함해 더그아웃의 모든 사람들에게 뒤덮여서 헬멧을 맞고 있는 두 명의 주자들. 그 위로 쏟아지는 트로피카나 필드의 엄청난 박수 소리. 6회말. 먼저 무너진 것은 휴스턴 쪽이었다.

사이영 상 유력 후보자인 댈러스 카이클을 무너뜨린 것은 단순히 어느 한 명의 플레이가 아니라, 탬파베이 그 자체였다.

*

8회초. 2대1의 상황. 7과 1/3이닝을 던진 지혁의 투구수가 100개를 넘어섰다. 7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은 지혁은 8회에 네 번째 타석에 들어선 알렉스 브레그먼에게 솔로 홈런 한 방을 허용했다.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공인줄 알았는데 마지막 순간 회전이 풀리며 좌측 폴대를 직접 때리는 공이었다.

“공 끝에 힘이 많이 떨어졌어요.”

“아직 괜찮은 것 같은데.”

“저번 경기에서 확실히 너무 많이 던졌어. 지금은 공이 좀 날려.”

라모스가 단호하게 말했고, 힉키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불펜에게 맡겨.”

“한 점이면 조금 불안한데...”

“저번 경기는 원정이었어. 마운드 위에서 혼자 버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고, 너를 믿고 간 거야. 하지만 여기는 홈이야. 저 사람들이 여기 올라올 녀석을 지켜줄 거니까.”

힉키는 더그아웃 쪽을 슬쩍 바라봤다.

“감독님 단호한 표정 보이냐? 빨리 내려가. 여기까지야.”

“하.

불안하긴 했지만. 지혁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글러브 속에 쥐고 있던 공을 힉키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마운드 위를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 Whoooooaa!

- Super MOON! Super MOON!

지혁이 걸음을 옮기는 바로 그 순간부터 슈퍼 문의 외침으로 가득 차 버린 트로피카나 필드. 마운드에서 더그아웃까지, 그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마치 운동화 선전의 광고모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지혁의 등을 밀어주고 있는 것처럼 발걸음이 가볍다. 공 한 개도 던지지 않은 상태인 것처럼 상쾌했다. 이런 기분이라니.

가을 야구의 홈 등판 경기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손을 들어 관중들에게 응답하며 더그아웃에 들어간 이후로도 지혁을 연호하는 관중들의 함성은 계속되었다.

“야, 다시 나가 줘. 분위기를 더 살려 보라고. 그래야 휴스턴 녀석들이 더 쭈그러들지.”

“커튼콜?”

“그래. 얼른.”

힉키가 등을 떠밀었고, 지혁은 여전히 열광적인 더그아웃 바깥으로 몸을 잠시 내밀었다. 잠깐 사그라들던 함성이 다시 구장을 가득 메웠다.

“모자도 벗고, 임마. 흔들어 줘!”

지혁이 모자를 벗고 관중들에게 응답하다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구장 한 쪽에서 흔들리는 태극기를 보자마자 한국식 인사도 한 번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혁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환호가 다시 또 커졌다. 지금 여기서 지혁이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이 환호는 끊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건 그야말로, 구름을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

[ 9회초, 마지막 공격. 알렉스 콜로메가 휴스턴의 마지막 타자를 상대합니다. 대타, 제이크 마리스닉. ]

휴스턴의 더그아웃에 침통함이 흘렀다. 반면 탬파베이의 더그아웃은 이미 뛰쳐나갈 준비를 마친 선수들의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지혁도 아이싱을 뒤로 미뤄 두고 난간에 매달려 있었다.

“스윙! 스트라이크 투!”

콜로메의 100마일짜리 패스트볼에 마리스닉의 배트가 제대로 따라나오지 못한다. 어린 선수들이 많은 탬파베이는 이미 그 기세가 천장을 뚫어버린 듯했다. 지혁은 잠시 동안 가만히 눈을 감고, 오늘의 이 승리를 만끽했다. 두 번의 생을 통틀어서 가을 야구에서 거두는 첫 번째 승리가 눈앞에 있었다.

퍼어억!

바깥쪽 먼 코스. 콜로메가 던진 공이 스트라이크 존 가장 밖을 아슬아슬하게 찔렀다. 아주 잠깐 멈칫거렸던 구심이 이내 몸을 일으켜 호쾌한 액션과 함께 외쳤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게임 셋!”

공을 받아쥔 라모스가 마스크를 하늘로 집어던져 버리고 마운드의 콜로메에게 뛰어가 그를 껴안고 치켜들었다. 귀를 찢어버릴 것 같은 환호성이 트로피카나 필드를 뒤덮었다. 돔 구장인지라 화려한 폭죽을 터뜨리지는 못했지만, 형형색색의 색종이가 천장에서부터 떨어져내렸다.

지혁도 이상한 소리를 내지르면서 모든 선수들이 다함께 뒤엉켜 있는 마운드 위로 합세했다. 그의 귓속엔 Home, sweet home이 흘러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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