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42화 (143/204)

< 142 - 후지의 비밀. >

“무슨 일인지 말 없죠? 당신에게도?”

“네. 연락도 안 돼요. 전화도 안 받고, 문자는 안 보고.”

“미쳐버리겠네, 진짜로.”

“거기서 못 만났어요?”

“네. 보스턴 쪽에서도 못 만나게 합니다. 중요한 경기 중이라서 자제해 줬으면 좋겠다고.”

전화기 속 패트릭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패트릭의 에이전시가 데리고 있는 두 명의 선수가 보스턴과 클리블랜드의 핵심 선수들이다 보니 경기를 따라다니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선수인 후지는 만나지도 못하고 있는가 보다.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그냥 편하게 야구를 좀 즐겨요.”

“남의 일이라고 말은... 후.”

“멘데스는요? 컨디션이 절정이던데?”

“그 친구야 언제나 비슷하죠. 컨디션 관리도 아주 잘 해 놨고... 아마 올 시즌이 끝나고 나면 버스터 포지와 동급으로 평가받을 겁니다.”

확실히 멘데스는 리그 최고의 포수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더 무서운 건 아직도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고. 아메리칸리그에서는 멘데스가 가장 좋은 포수이고, 메이저리그 전체로 봐도 버스터 포지를 제외하고는 멘데스와 견줄 포수가 그리 많지 않다. 야디에르 몰리나는 이제 노쇠화의 길을 걷고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언제 돌아와요?”

“글쎄요. 5차전을 보고, 첫 경기를 치르는 곳에서 바로 봅시다. 클리블랜드가 됐든 보스턴이 됐든. 나는 여기서 할 일도 조금 있을 것 같으니까.”

“그래요. 고생해요.”

전화를 끊고 침대에 몸을 던진다. 등판 후 컨디션 조절을 명목으로 쏟아지는 모든 인터뷰도 다 거절해 놨다. 아메리칸리그 디비전시리즈, 탬파베이의 상대가 될 한 팀을 결정지을 5차전을 보며 하루를 보낼 예정이다. 디비전시리즈에 먼저 선착해서 상대를 기다리는 느낌이 어떤지를 만끽하면서.

*

“클리블랜드가 올라오면 멘데스가 상대고, 보스턴이면 후지라. 어디가 올라와도 어렵겠네.”

5차전.

여전히 후지는 등판하지 않았다. 양 팀이 2승씩 주고받은 치열한 시리즈의 마지막 경기는 최후의 최후답게 치열하게 진행되는 중이다. 보스턴은 1회에 코리 클루버를 공략해 3점을 선취해냈지만, 클리블랜드도 2회초 곧장 동점을 만들었다. 3대3의 스코어로 4회까지 진행된 경기는 5회에 균형이 무너졌다.

[ 잘 맞은 타구가 멀리! 좌측! 그린 몬스터를- 넘겨버립니다! 페르난도 멘데스!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세 개째 홈런을 쏘아올립니다! ]

멘데스가 한 손을 번쩍 치켜올리며 베이스를 차례로 돌아 홈에 들어오는 장면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또 섬뜩하기도 했다. 만약 클리블랜드가 결국 보스턴을 꺾고 올라와 탬파베이와 만나게 된다면, 저 장면은 절대로 봐서는 안 되는 장면이니까.

[ 이런, 프랑코나 감독을 보세요. 코리 클루버와 함께 앤드류 밀러가 불펜에 들어갔습니다. 하하하. 리그 최고의 마무리투수 중 하나였던 밀러를 이번 시즌부터 전천후로 쓰고 있는 프랑코나 감독인데요. 이런 장면은 참 보기 드문 장면입니다. ]

[ 5회부터 클루버와 밀러가 한 불펜에 있다뇨. 하하. 우리의 상식과는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만, 이게 또 클리블랜드가 강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

[ 밀러를 가장 중요한 순간에 쓰면서도 8회와 9회를 탄탄하게 지킬 수 있는 불펜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전략이겠죠. ]

[ 정확합니다. ]

해설진의 말대로였다. 클루버가 5.2이닝 동안 88구를 던지며 3실점한 뒤 더스틴 페드로이아를 출루시키자, 프랑코나 감독은 곧장 앤드류 밀러 카드를 꺼내들었다. 밀러는 공포의 슬라이더로 단숨에 위기를 탈출해냈고.

보스턴은 불펜 공략에 애를 먹었다. 밀러가 1.1이닝을 던지며 7회까지 마무리했고, 8회에는 분 로건과 브라이언 쇼가 나눠서 아웃카운트 세 개를 잡아냈다. 그리고 이건 이번 시리즈 내내 반복되어 온 결과였다.

통곡의 벽이라는 말은 야구보다는 축구나 풋볼에서 더 어울리는 수식어였지만, 클리블랜드만큼은 야구에서도 통곡의 벽을 실현해내고 있다. 보스턴이 잡아낸 두 경기는 선발투수인 대니 살라자르와 트레버 바우어를 일찍 공략한 경기였다.

“클리블랜드가 올라오려나.”

어느 팀이든 까다로운 건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탬파베이의 입장에서는 보스턴보다는 클리블랜드가 조금 편한 건 사실이었다. 같은 동부지구에 있던 보스턴은 시즌 내내 탬파베이에게 꽤 강했으니까. 순수한 전력만 놓고 보면 보스턴이 클리블랜드보다도, 그리고 탬파베이보다도 강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을 야구는 단기전. 단기전에서의 승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클리블랜드가 보스턴을 잡아내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9회초. 보스턴이 불펜으로 등판시킨 조 켈리가 로니 치즌홀에게 2루타를 맞았다. 보스턴의 입장에서는 벼랑 끝에 떠밀리다 못해 한 발이 절벽 아래로 떨어진 상황.

[ 보스턴이 투수를 교체합니다. 불펜에 크레이그 킴브럴이 있었는데요. 누가... 어? ]

[ 오, 이런. 믿을 수가 없네요. ]

[ 후지 미유타! 후지 미유타가 등판합니다! 팬웨이 파크는 의문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후지가 왜 지금...? ]

[ 하하. 글쎄요. 보스턴의 의도가 정말 궁금해지네요. 등판을 할 수 있는 몸상태이긴 한 걸까요? 보스턴의 어떤 입장 표명도 없었기 때문에 말이죠. 후지가 부상을 당했다는 게 일반적인 추측이었는데요. 일단 마운드에 올라오는 걸 보니 투구가 불가능한 상태는 또 아닌 것 같네요. ]

[ 그렇다면 지금까지 왜 등판시키지 않았을까요? 리그 최고의 에이스로 자리잡은 선수를 왜 아낀 걸까요? ]

[ 제게 물어보시면 안 됩니다. 하하. 저도 어떤 말도 해 드릴 수가 없어요. ]

“뭐야?!”

지혁은 비스듬히 누워 있다가 스프링처럼 튀어올랐다.

“여기서 나온다고? 왜?”

의문투성이였다. 대체 후지는 지금까지 왜 등판하지 않았던 것이며, 등판할 수 있는 몸상태라면 탈락이 눈앞으로 다가온 이제야 마운드에 올라온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

- [ALDS] 매치업 확정! 탬파베이 레이스 vs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 시즌 최고 승률을 기록했던 두 팀이 모두 탈락한 포스트시즌.

- 휴스턴과 보스턴, 시즌의 최강자였지만 단기전의 최강자는 되지 못한 이유.

*

“... 야. 너 왜 전화 안 받았어?”

“혀엉. 흐어엉...”

“뭐야. 너 울어?”

끅끅거리는 소리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후지는 계속해서 울었다. 9회초. 페르난도 멘데스가 후지의 패스트볼을 받쳐 놓고 잡아당긴 타구가 중앙 담장을 넘어가는 투런 홈런으로 연결되며 승부는 끝나버렸다. 보스턴은 탈락했다.

“임마. 괜찮아. 질 수도 있지.”

지혁은 스스로가 참 멋없다고 생각했지만, 울고 있는 후지를 달래기 위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위로는 해 줘야겠는데. 후지의 귀에 뭐가 들리기는 할지 의문이었다.

“하. 그래. 차라리 실컷 울어라.”

녀석에게는 라이벌 의식도 있지만 묘한 동질감이 더 강했다. 세상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녀석이니까. 지혁과 후지가 다른 건 신과의 거래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는 것뿐이었다.

후지는 계속해서 코를 훌쩍이며 울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후지가 조금 잠잠해졌다 싶자 지혁이 곧장 물었다.

“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디 아파?”

“아, 응... 조금.”

“어디가?”

“손가락 끝이 너무 저려요. 덜덜 떨려. 약간 마비된 것 같을 때도 있고...”

“언제부터?”

“시즌 중에는 괜찮았는데. 시즌이 끝나고 나서 갑자기 그래요.”

“병원은 가 봤고? 왜 그런데?”

가장 먼저 머리를 스친 건 린스컴의 비참한 마지막이었다. 짧고 굵은 전성기를 보낸 이후 각종 부상과 데드암 증세에 시달리며 자신의 장점을 잃어버리고 만 투수. 다이나믹하고 역동적인 폼은 린스컴을 최정상으로 끌어올렸지만, 그 정상의 달콤함을 금방 앗아가버리고 말았다. 후지에게도 그런 시점이 온 것일까.

“아뇨. 어디가 아파서 생긴 증상이 아니라서. 병원에서도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고...”

“그러면? 갑자기 왜 손가락이 떨려?”

“...”

후지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오! 복장 터져! 대체 왜 그러는데?”

“시즌 중에 형이랑 붙었을 때 있잖아요... 두 번째로 붙었을 때.”

“그래. 나 손가락에 굳은살 떨어져 나갔을 때. 그 때 뭐?”

“그 때 사실... 악마하고 내기를 했었는데.”

하. 이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

“클클. 후지가 뭐라던가?”

“내기를 했다던데요.”

“정확히 말하면 내기라고 할 수는 없지. 자네도 기억나지 않는가?”

“뭐가요?”

“자네 굳은살이 떨어졌을 때, 화장실에서. 내가 제안한 적이 있었잖은가.”

“아. 고쳐 준다고요?”

“그래. 흐흐.”

지혁과 후지 모두 불타올랐던 경기였다. 절대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던졌었다. 이를 악물고. 두 사람 다 명백히 오버페이스였다. 후지는 패스트볼을 102마일까지 기록했고, 지혁도 공을 하도 세게 긁어대서 굳은살이 떨어져나갈 정도였으니까.

이상하긴 했지. 후지도 분명히 오버페이스였는데, 걔는 멀쩡하게 8이닝을 소화했다. 삼진을 13개나 잡아가면서.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투구폼을 가진 선수라는 걸 감안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미처 몰랐을 뿐이다.

“후지는 자네와의 두 번째 대결에서 또 지는 걸 용납하려 하지 않았어. 그 경기를 준비하느라 무리를 좀 했지. 후지도 경기 전에 손가락에 문제가 좀 생겼었네.”

“그걸 뒤로 미뤄주셨고요?”

“그래.”

지혁은 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그 날 화장실에 따라 들어온 윌슨 라모스가 아니었더라면, 지혁도 신의 제안에 응답했을 것이다. 떨어져나간 굳은살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쌩쌩한 공을 던졌을 것이다. 그게 지혁과 후지가 서로의 대결에 임하는 자세였다.

“걔 손가락에는 큰 문제가 있는 건가요?”

“뭐, 아닐세. 손가락에 큰 문제는 없지. 그냥 쉬면 나을 걸세. 그 때 쉬었어야 할 것을 지금 쉬어야 한다고 보면 돼. 대신 결과적으로 큰 경기를 놓쳤으니, 자업자득이라네.”

“하. 멍청한 놈이. 적당히 좀 하지. 왜 이렇게 무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클클. 재밌지. 아주 재밌어. 만약 그 친구가 그냥 물러나고 자네와의 재대결을 포기했다면 지금처럼 재밌지는 않았을 거야.”

“신님하고 계약한 녀석이 큰 무대에서 완전히 주저앉았는데. 그게 뭐가 그렇게 재밌으세요? 하여튼 심보가 못되셨다니까.”

“내가 후지를 고른 이유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어찌 재미가 없겠는가?”

신은 재밌어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익살맞게 웃었다. 얄미워 죽겠다. 후지가 왜 신을 악마라고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후지를 고른 그 이유라는 게 대체 뭔데요?”

“두 가지가 있네. 하나는 비밀이지. 나머지 하나라도 듣겠는가?”

“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현재에 올인하는 게 후지라는 아이의 특징이네. 그 친구가 나랑 맺은 계약을 생각해 봐. 흐흐. 3년 동안 린스컴의 재능을 쓰기 위해 자신의 모든 야구 인생을 다 걸어버렸어!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이런 무모한 선택을 할 녀석은 없을 걸세.”

“네. 진짜 바보죠.”

“바보라고? 흐흐. 그렇지. 하지만 그 바보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녀석은 세상에 흔치 않아. 그래서 내가 후지를 고른 게지.”

지혁은 대꾸하지 않고 생각에 빠졌다.

*

신은 즐거워했다. 후지 미유타라는 존재를 굳이 지혁의 삶에 개입시킨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신은 굳이 얘기해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따로 얘기해주지 않아도 문지혁이라는 사람은 이미 그 의도에 어느 정도 따라오고 있었으니까.

이미 지혁은 지혁과 정반대의 선택을 하는 후지의 모습을 보면서 영향을 받고 있었다. 회귀한 직후의 지혁에게 경기 도중에 굳은살을 되돌려 줄 테니 승부에 더 욕심을 내보겠느냐고 물었다면, 지혁은 절대 아니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한 경기 쯤 그냥 넘기면 어떠냐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을 게 분명했다.

그 날 지혁이 신의 제안에 응하려고 했었던 건. 지혁도 후지의 현재만 보고 사는 강한 승부욕에 점점 영향을 받는 중이라는 증명이다. 지혁이 눈앞의 승부에 보다 욕심을 내게끔 만드는 것. 그게 신이 후지를 개입시킨 진짜 이유였다.

신은 이미 샌디 쿠팩스를 봐 왔으니까.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야구를 초토화해 버렸지만, 그에겐 승부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야구를 사랑하는 마음. 신을 통해 얻은 자신의 능력이 야구를 해치고 있다는 자괴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더 오랫동안 더 파괴적인 공을 던질 수 있었음에도 은퇴를 결정했던 쿠팩스다.

야구 내적으로는 쿠팩스가 끝을 봤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 쿠팩스의 끝은 거기가 아니었다. 신의 아쉬움은 그 지점에 있었고, 지금의 지혁도 그런 길을 밟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적당한 야구선수 문지혁의 일생을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인간 문지혁의 끝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후지는 최고의 파트너가 될 수 있는 녀석이다. 라쿠텐의 2군에서 뛰면서도 가슴 속으로는 항상 세계 최고를 품고 있던 허무맹랑한 녀석.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녀석. 눈앞의 모든 것들과 맞부딪혀서 뚫고 나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녀석. 지혁처럼 피할 때는 피하고 물러설 때는 물러서며 적당한 지점에서 타협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흐흐흐. 흐하하하.”

그래서 신은 웃었다. 후지가 지혁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든 간에, 그것을 지켜보는 일은 그 자체로 재미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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