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 언더독의 입장에서, 챔피언이 되기 위한. >
운이 꽤 따랐다. 탬파베이에게는 특히 더. ALDS의 다른 한 상대팀을 결정하는 경기가 5차전까지 진행되었고, NLDS도 5차전까지 진행되는 대혈투였다. 특히 4차전과 5차전 사이에는 우천으로 인해 하루 연기까지 되었으니.
4차전 등판 이후 휴식일 하루, 우천순연으로 인한 휴식 하루, 5차전 당일까지. 지혁은 총 사흘의 휴식을 취했다. 그래서 클리블랜드로 상대가 결정된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등판이 가능해졌다.
클리블랜드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직전. 랭카스터 감독은 선수단을 모아 놓고 계획을 발표했다.
“1차전은 허니웰. 2차전은 문. 3차전은 드 레온으로 간다.”
문제는 1차전이었지만, 랭카스터는 다시 한 번 허니웰을 믿었다. 아처가 복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로테이션까지 감안하면 허니웰이 1차전에 나서야만 했다. 대안이 없다.
“이번에는 단단히 준비했겠지?”
“옛!”
“좋아. 평소의 네가 던질 수 있는 투구만 하면 돼.”
“알겠습니다!”
허니웰이 생애 첫 가을 야구 등판의 충격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하는 행동거지를 봐서는 악몽에 시달리거나 트라우마에 깊이 빠져버린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클리블랜드 쪽은 결정됐나요?”
“1차전은 카를로스 카라스코. 그리고 2차전은 아마 대니 살라자르. 웬만해서는 변하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99마일 듀오네.”
“그렇지. 그러니 프리배팅이나 머신 배팅은 한 발 앞으로 당겨 놓고 실시할 거야.”
클리블랜드의 투수진이 지향하는 건 아주 명확했다. 빠른 공으로 윽박지르는 것. 에이스인 코리 클루버는 물론이고 카를로스 카라스코, 대니 살라자르 모두 평균 패스트볼 구속이 95마일을 넘어서는 강속구 피쳐다. 또 다른 선발인 트레버 바우어 역시 패스트볼 구속이 93~94마일까지 올라온 상태.
“타자들은 빠른 공에 특별히 중점을 맞춰 두도록 해.”
“네. 나쁘지 않지. 빠른 공을 때려 넘겼을 때 제일 짜릿하니까.”
롱고리아는 자신감 넘치게 대답했다. 그리곤 캐리어를 잡고 일어섰다. 비행기에 탈 시간이다. 목적지는 클리블랜드, 프로그레시브 필드다.
*
“자! 광고 보고 돌아왔습니다. 1부에서는 NLCS의 프리뷰를 해 봤습니다. 클레이튼 커쇼가 드디어 월드시리즈 반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시카고 컵스가 2연패를 기록할지. 흥미로운 주제였죠. 그러면 이제는 ALCS 차례로군요.”
“사실 ALCS는 이변의 연속이었죠. 리그 최고 승률팀이었던 보스턴 레드삭스와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모두 탈락했습니다. 그 자리를 채운 두 팀입니다. 보시죠.”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클리블랜드의 작년이 스쳐 지나간다. ALDS에서 보스턴을 3대0으로 스윕하고, ALCS에서는 토론토를 격파한 뒤 오른 월드시리즈. 107년간 지속되어 온 저주를 맞닥뜨린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시리즈 전적 3대1로 리드하던 클리블랜드는, 세 경기를 내리 패했다.
선수들의 고통스러워하는 표정과 허망한 눈빛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마지막 순간, 7차전 연장전. 컵스의 3루수 크리스 브라이언트가 살짝 미끄러지면서 1루로 송구한 공이 미트에 빨려들고. 눈앞에서 우승을 놓친 클리블랜드의 여정이 멈춰 서는 그 순간이 잔인하게 무대를 채웠다.
“첫 번째 주인공. 작년에 이어 올해도 또 한 번 보스턴을 무너뜨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입니다. 테디 프랑코나 감독에게 다시 지휘봉을 맡겼고, 작년보다 한층 더 단단해졌습니다. 핵심 선수들로는 누가 있을까요?”
“세 명을 뽑을 수 있죠. 팀의 에이스인 코리 클루버. 올 시즌 부상으로 시즌 출발을 늦게 해서 그렇지 정상적으로 시즌을 소화했다면 사이영 후보였을 겁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불펜의 에이스인 앤드류 밀러입니다. 프랑코나 감독의 가장 큰 무기죠. 언제든,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순간에 등판해서 무조건 상황을 타개해냅니다.”
“이제는 비밀무기라고 부를 수가 없게 되었네요. 하하. 모든 팀이 다 알고 있죠? 인디언스가 밀러를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는지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선수. 포수인 페르난도 멘데스입니다.”
“ALDS의 MVP이기도 했습니다. 홈런을 무려 다섯 개를 때려냈어요.”
“그렇습니다. 현재 컨디션만 보면 클리블랜드의 타선에서 가장 위협적인 타자죠. 스윙이 갈수록 컴팩트해지고 있습니다. 존을 커버하는 범위도 늘어났고요. 그러면서도 파워가 있어서 담장을 넘겨버립니다. 정말 무서워요.”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멘데스는 지금 절정으로 향해 가고 있다.
“하지만 멘데스의 진짜 가치는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을 때 드러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이 선수의 두뇌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건지 참 궁금할 정도입니다. 클리블랜드 투수진의 모든 리듬을 멘데스가 혼자서 이끌죠.”
“오호. 재미있는 얘기로군요.”
“프랑코나 감독이 다채롭게 불펜을 이용할 수 있는 가장 큰 근거가 바로 멘데스입니다. 어느 순간에 어떤 투수를 올리더라도, 멘데스가 완벽하게 투수를 이끌어 주거든요. 투수의 특징, 타자의 성향, 그라운드의 환경... 뭐, 고려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전부 다 체크하고 완벽한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괜히 전문가들이 입 모아 칭찬하는 게 아니에요.”
“또 주목받는 게 있죠? 그의 닉네임이요. ‘퀵 팝’.”
“그렇습니다. 이 선수 앞에서 도루를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일 정도니까요. 탬파베이는 꽤 적극적인 베이스러닝을 하는 팀인데, 멘데스의 앞에서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한참을 멘데스의 칭찬으로 떠들어대던 쇼의 진행자들이 눈치를 살짝 보더니 드디어 주제를 틀었다.
“자. 저희가 너무 클리블랜드의 이야기만 했네요. 다른 한 팀을 만나보시죠. 탬파베이 레이스입니다.”
탬파베이의 영상의 시작은 솔직하게 말하면 조금 밋밋했다. 프리드먼과 매든의 시대의 영상들이 흘러나왔다. 하긴 좋은 성적을 거뒀던 시절이 그때이니, 어쩔 수 없기도 했지만. 지금은 팀에 남아있지 않은 선수들이 영상에 훨씬 많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 소개영상의 분위기가 어느 순간 확 바뀌었다. 지혁이 마운드 위에서 삼진을 잡고 포효하는 장면이나 키어마이어가 믿기지 않는 거리를 뛰어가 다이빙을 해 떨어지는 공을 건져내는 장면이 서서히 화면을 채웠다. 그리고 루키들이 대활약한 ALDS의 모습이 다이나믹하게 흘러나온다.
“많은 언론들이 한 단어로 정리하죠. 루키 파워. 루키 파워로 ALCS에 합류한 탬파베이 레이스입니다.”
“아무도 큰 기대를 걸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의 성적이 예상 밖이라는 것도 인정해야 해요. 플레이오프 로스터에 루키가 일곱 명이 들어 있습니다. 놀라운 건, 이들이 모두 잘 하고 있다는 것이고요.”
“이들의 깜짝 활약이 과연 지속될 수 있을지가 포인트겠군요.”
“그렇습니다. 탬파베이 쪽도 ALDS의 MVP였던 케이시 질라스피가 지금의 활약을 유지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겠네요.”
진행자들의 주목도는 탬파베이보다는 클리블랜드에 쏠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클리블랜드는 사람들에게 먹히는 스토리가 더 많으니까. 작년 컵스에게 월드시리즈 우승을 내준 현재의 클리블랜드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오랫동안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팀이다. 이것만으로도 스토리는 충분하다.
상대적으로 생소한 선수들이 많은데다가 전국적인 인기로 치면 최악에 가까운 팀인 탬파베이보다는 클리블랜드에 포커스를 맞추는 게 당연스러웠다. 방송국의 입장에서는.
*
“난 이게 차라리 좋아. 계속해서 언더독이잖아.”
“언더독이 뭐가 좋아? 그만큼 주목을 못 받는다는 뜻인데. 인기도 없다는 뜻이고.”
“뭘 잘 모르네.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딱 하나야. 별 볼 일 없던 약팀이 강팀을 뒤집어 엎는 거지. 그 동안은 관심도 없던 녀석들이 자신들이 강팀이라고 생각했던 녀석들을 때려잡는 거에 열광한다니까.”
아처는 깁스를 두른 손을 휘두르며 신나게 얘기했다. 그는 전열에서 이탈한 것에 매우 침울해했지만, 어린 선수들 앞에서 그런 티를 낼 정도로 책임감이 없는 녀석은 아니었다. 본인 스스로에게는 고통스럽겠지만, 오히려 라커룸에 합류해 선수들의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자처했다.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책을 읽었는데. 영웅은 그림자 속에 있다고 했어. 그림자 속에서 주목받지 않고 슬쩍 움직이다가 갑자기 확 튀어나오는 거지.”
“호오. 말은 그럴 듯 한데요?”
“그렇지? 이제 우리가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갈 차례야. 이번 시리즈에서 클리블랜드를 잡으면 우리가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이라고! 월드시리즈는 나중에 생각하자고. 어? 챔피언! 챔피언이라는 말이 얼마나 설레?”
“좋아! 크리스. 내가 원하는 단어를 대신 말해줬군.”
어느 새 랭카스터가 라커룸에 들어와 아처의 말을 받는다.
“제군들! 우리가 지금부터 치러야 할 경기는 ALCS다.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이 말 그대로다. 우리는 아메리칸리그의 챔피언이 되기 위해 경기를 치르는 거다. 다른 것들이 너희들을 압박하고 있겠지. 월드시리즈라는 다음 단계를 미리 꿈꾸는 녀석들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런 건 다 집어 치워! 딱 하나. 챔피언이라는 목표만 보고 간다.”
“WOO!”
“너희들의 플레이 하나하나가 챔피언으로 가는 여정이 되어야 한다.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지 마. 챔피언의 자격에 걸맞는 플레이를 보여라. 알겠나?”
“예-써!”
언더독의 입장에서, 챔피언이 되기 위한. ALCS 1차전이 시작되었다.
*
2회초.
[ 센터 쪽 깊은 타구! 하지만 공이 뻗지 못합니다. 브래들리 짐머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펜스 앞에서 잡아내며 쓰리 아웃. 탬파베이, 기회를 잡았지만 선취점을 따내는 데는 실패합니다. ]
3회말.
[ 스윙 삼진! 브랜트 허니웰의 스크류볼에 물러나는 마이클 브랜틀리입니다. 허니웰이 1사 만루의 위기를 탈출합니다! 양 팀의 팽팽한 균형이 유지된 채 4회로 갑니다. ]
4회말.
[ 제이슨 킵니스의 타구가 3-유간을 빠져 나갑니다! 2루 주자 엔카나시온이 3루 돌아 홈으로! 디커슨이 잡아들어 홈으로 뿌립니다! 곧장 홈으로! 송구도 홈으로 향합니다! ]
“Ouuuut!”
[ 잡아냅니다! 환상적인 송구로 주자를 저격하는 코리 디커슨! 허니웰이 모자를 벗어 디커슨에게 감사 인사를 보냅니다. 저 같으면 뽀뽀라도 해 주겠네요! ]
5회초.
[ 잡아당긴 타구가 멀리 뻗어갑니다. 케이시 질라스피- 어우! 로니 치즌홀이 몸을 날려 잡아냈습니다! 펜스에 부딪히며 잡아내는 치즌홀입니다. 디커슨의 송구가 있었다면 치즌홀의 다이빙 캐치가 나오네요! ]
*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어. 걱정 많이 했는데 다행이네.”
“그러게. 오늘은 공이 날리지도 않고, 제구도 나쁘지 않고. 또 수비도 잘 도와주고 있고.”
“트라우마로 남을 줄 알았는데. 많이 가혹했었으니까.”
“쟤는 그 정도로 무너질 애는 아니야.”
지혁이 아처의 걱정을 덜어 줬다. 지금이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처럼 보이겠지만, 나중에는 결국 성공하는 녀석이니까. 이 정도를 극복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오늘의 피칭이 기대 이상이라는 건 확실했다. 시즌 중 좋았던 허니웰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여전히 조금은 투박하고 거친 제구였지만, 스크류볼의 구위와 움직임은 전문가들의 악마의 구종이라고 불렸던 그대로다.
“만약 오늘 경기를 잡는다면... 정말 해 볼 만 해. 네가 내일 잡아 줄 거니까. 맞지?”
“하하. 글쎄. 열심히 해야지.”
하지만 아처의 말은 입방정이 되고 말았다. 허니웰은 5회말 선두타자로 나온 1번 프란시스코 린도어에게 몸에 맞는 공을 내주었다. 초구에.
그리고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루키답다면 루키다운 피칭이었다. 투수들이 갑자기 흔들리는 데는 이유가 없으니까.
“볼. 베이스 온 볼스.”
[ 두 타자 연속 볼넷입니다. 허니웰. 무사 만루를 자초하고 맙니다. 3루에 린도어, 2루에 짐머. 그리고 1루에 브랜틀리. 타석엔 4번, 페르난도 멘데스가 들어섭니다. ]
[ 5회 들어 갑자기 제구가 안 되는 모습이네요. 끊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교체도 염두에 둬야겠어요. ]
[ 가장 상대하기 싫은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습니다. 탬파베이. 1차전 양 팀의 대결. 가장 중요한 승부처가 찾아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