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문 vs 홈 플레이트의 왕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 1차전. 탬파베이와 클리블랜드의 경기, 5회말.
1차전 선발이라는 특명을 받은 루키 투수 브랜트 허니웰은 디비전 시리즈에서의 악몽을 어느 정도 떨쳐 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최악의 피칭이었던 ALDS 경기와는 딴판이었다. 본래 허니웰에게 기대되었던 내용의 투구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제구 난조로 무사 만루의 위기를 자초했다. 지금까지는 잘 들어가던 스크류볼이 조금 일찍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타자들이 배트를 참아 낼 시간을 준 탓이다.
3루에는 린도어. 2루에는 짐머. 그리고 1루에는 브랜틀리. 타석에는 4번, 페르난도 멘데스.
“한 점 준다고 생각해도 돼!”
벤치에 있던 누군가가 외쳤다. 정답이다. 무사 만루에서 한 점 정도는 줘도 괜찮다. 대신 거기엔 중요한 조건이 있다. 아웃카운트와 교환할 수 있어야 할 것. 아웃카운트를 잡아내지 못하고 주자를 들여보내면 그 순간 대량 실점과 연결되는 것과 다름없다.
“파울!”
그런 의미에서, 지금 허니웰이 상대하고 있는 멘데스는 리그 전체를 통틀어 최악에 가까운 타자였다. 멘데스는 허니웰이 던지는 아슬아슬한 공들을 계속해서 커트해 내고 있었다. 집요하게,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날 정도로.
보통의 4번 타자라면. 지금의 상황에서 당연히 방망이 끝을 잡고 풀스윙을 돌릴 것이다. 외야로 보내기만 해도 리드를 가져오는 선취점을 따낼 수 있으니까. 이건 자존심의 문제도 걸려 있는 부분이다. 한 팀의 4번에 위치한 타자가 방망이를 짧게 잡고 커트에 집중하는 일은 흔치 않다.
하지만 멘데스는 달랐다. 클리블랜드의 팬들이, 또 많은 메이저리그 전문가들이 멘데스에게 괜한 별명을 붙여 준 게 아니니까.
홈 플레이트를 지배하는 왕. 멘데스가 좋은 평가를 받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굳이 ‘홈 플레이트’라는 수식어를 붙인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게임의 흐름을 기가 막히게 캐치한다는 것. 그리고 캐치한 그 상황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플레이를 해내고 만다는 것. 포수로써 경기를 관망하고 흐름을 읽어 내는 일, 분위기를 읽어내고 흐름을 좌우하는 일. 멘데스에게 20-80 스케일을 적용한다면 최소한 그 부분에서는 무조건 80을 받을 것이다.
“파울!”
허니웰의 공을 강하게 당긴 타구가 탬파베이의 더그아웃으로 날아든다. 선수들이 황급히 놀라서 피했다. 이번 타석에서만 벌써 세 개째다. 몸 쪽으로 붙어 들어오는 공은 조금 빠른 타이밍에라도 과감하게 휘둘러 3루 쪽으로 빠트리고, 바깥쪽 아슬아슬한 코스는 최대한 공을 보다가 늦은 타이밍에 배트를 내 바깥으로 걷어 내 버린다.
“불길하네.”
위태롭긴 했지만, 답답하지는 않은 피칭의 연속이다. 루키인 허니웰에게 오늘 기대한 것은 평소 허니웰의 피칭 그 자체였다. 허니웰은 벤치의 의도에 정확하게 부응했다. 오늘의 허니웰은 크게 긴장하거나 떨지도 않았고, 크게 제구가 어긋나지도 않는다. 던지던 대로 던졌다.
“아, 설마.”
따아악!
계속해서 파울로 걷어 내던 코스가 아주 약간 전형적이라고 생각했다. 투구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몸 쪽 가장 높은 쪽과 바깥쪽 가장 낮은 쪽을 오가던 피칭. 그 약간의 ‘전형적임’을 멘데스는 용납지 않았다. 타구음이 울리는 순간 지혁은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긴 다리의 허니웰도 양 무릎에 두 손을 대며 허리를 숙였다.
“평소에 던지던 대로 던지면…… 멘데스를 넘어설 수 없다는 거네.”
수비 범위에 있어서는 메이저리그 최고로 공인받는 키어마이어조차도 잡을 수 없는 지역에 멘데스의 타구가 떨어졌다. 3루 주자 린도어와 2루 주자 짐머는 물론이고 1루에 있던 브랜틀리마저 3루를 박차고 돌았다. 3루 쪽 더그아웃에서 그 장면을 똑바로 목도하고 있는 탬파베이의 더그아웃에 울리는 경고 음이 똑똑히 들리는 장면이었다.
이 시리즈. 가장 먼저 흐름을 읽어 내는 선수. 그리고 가장 먼저 흐름을 바꾸는 선수. 페르난도 멘데스와의 대결이었다.
* * *
아직 선수들이 없는 클럽하우스에서 유니폼을 갈아입는데, 이상하게 새롭다. 클리블랜드의 프로그레시브 필드는 탬파베이에 몸담은 지난 4년 동안 숱하게 와 봤던 곳인데도, 이 허름한 원정 라커룸 곳곳이 다른 느낌을 줬다. 벽에 남아 있는 얼룩들이나, 라커룸 손잡이가 미묘하게 까져 있는 모습까지도 일일이 눈에 들어오는 기분이다.
“아침 일찍부터 나왔네?”
“네, 코치님, 잠이 잘 안 와서요.”
“잠을 못 잤다고? 컨디션은?”
잠을 잘 못 잤다는 말에 힉키 코치의 표정이 대번에 어두워진다.
“나쁘지는 않아요. 딱히 걸리는 데도 없고.”
“몸은 괜찮다. 좋아, 그럼 정신은?”
“그건 좀 문제네요. 어제 경기가 너무 저쪽 흐름으로 흘러가 버려서. 골치가 아파요.”
어제의 1차전. 5회에 싹쓸이 3타점 2루타를 얻어맞은 허니웰은 이후에 플라이볼 두 개를 유도해 냈지만 멘데스가 홈을 밟는 것은 피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 회에 몰아 내준 4점이라는 스코어는 생각 이상으로 컸다. 클리블랜드의 뒷문을 생각하면 더더욱.
탬파베이도 카라스코를 공략하며 한 점을 따라갔지만 거기까지였다. 프랑코나 감독은 곧장 밀러를 선택했다. 앤드류 밀러와 잭 매컬리스터, 애치슨 쇼가 이어 던진 불펜을 상대로 꽁꽁 틀어막히는 동안 탬파베이의 패전조들이 3실점을 추가로 하며 무너졌다.
7 대 1. 그야말로 완패. 팽팽하던 경기를 단번에 원 사이드한 흐름으로 바꿔 놓은 것이 바로 멘데스의 2루타다. 그러니.
“오늘은 멘데스를 잘 잡아야 해.”
“알아요. 이 팀은 걔밖에 없죠.”
“나머지 녀석들을 그렇게 우습게 볼 건 아니지만, 반 정도는. 어제 경기에서 확실하게 드러났으니까…… 이상하게 클리블랜드는 중요한 순간 멘데스한테 걸려. 그게 이상하지.”
“프랑코나 감독이 타선을 잘 짜는 것도 있고요.”
“오늘은 몇 번으로 나올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늘 멘데스는 무조건 잡아야 해.”
“알고 있습니다. 비디오는 준비됐죠?”
“그럴 거야. 확인해 달라고 얘기해 뒀으니까.”
힉키는 지혁의 허리춤을 두어 번 두드려 준 뒤 심각한 표정으로 불펜으로 향했다. 클리블랜드의 타선과 마주쳐야 할 상대는 지혁만이 아니니까. 지혁이 9이닝을 소화해 준다면야 좋겠지만, 그건 말 그대로 이상론이다.
지혁도 평소의 루틴을 착실하게 소화한 뒤 작은 비디오 룸에 틀어박혔다. 클리블랜드가 보스턴을 물리쳤던 다섯 개의 경기와 어제 1차전 경기까지. 주요 분석 대상은 역시 멘데스였다. 멘데스를 넘어서기 위해서 모든 짓을 다 해 볼 작정이었다.
지혁의 첫 번째 챔피언십 시리즈니까.
* * *
“챔피언십 시리즈…….”
1회초. 클리블랜드의 선발투수 대니 살라자르가 세 타자를 범타로 간단히 처리한 이후 지혁의 차례가 되었다. 마운드로 걸어 올라가며 잔디에 페인팅 되어 있는 ALCS 로고를 한 번 쳐다보았다. 새삼스럽게도, 매번 이렇게 마운드에 올라갈 때면 새롭기 그지없다. 특히 오늘은 그 정도가 심했다.
두 번에 걸친 지혁의 인생에서 가장 높이 올라온 무대였다. 그게 탬파베이 레이스라는 작은 팀에서, 그것도 수많은 루키들을 라인업에 넣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오늘도 그의 등 뒤에는 세 명의 루키들이 선발로 출장했다. 지혁이 마운드에서 내려가고 나면 역시 루키들이 바통을 이어받을 것이고.
정말 말도 안 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루키들의 깜짝 활약으로 여기까지 온 것도 작은 기적이라고 봐야 할 정도다. 새로운 무대, 가장 높은 무대, 가장 중요한 무대에서 느껴지는 설렘과 희열에, 루키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이 같이 몰려들었다.
“후우우.”
글러브 안에 두 손을 모아 쥐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팀을 결국 이곳까지 끌어올린 루키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초구를 꽂아 넣었다.
“스트-라이크! 원!”
93마일의 싱커가 춤을 추며 날아갔다. 2차전이 시작되었다.
* * *
[투아웃, 주자는 2루. 브래들리 짐머가 기습 번트로 살아나간 뒤 도루에 성공했습니다. 타석에는 4번, 카를로스 산타나. 어려운 볼카운트에서도 잘 버텨 내고 있네요.]
[문의 공격적인 피칭은 돋보입니다만 산타나의 배트 컨트롤도 뒤지지 않습니다. 잘 따라붙고 있네요.]
[카운트 투 앤 투. 여섯 번째 공을 맞이합니다. 바깥쪽!]
[하하, 볼 선언이 되나요?]
[애매한 코스였나요? 심판이 스트라이크를 잡아 주지 않습니다. 문, 한동안 심판을 응시하는데요. 방금 전 코스는 반드시 스트라이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라모스가 공을 받는 순간 이미 마운드를 내려가려는 모습이었죠.]
[풀 카운트가 됩니다. 1회부터 탬파베이 레이스의 배터리는 심판의 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액션을 자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 씨바…….”
고의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존이 짜다. 산타나에게 던진 방금 공은 어떻게 봐도 존 안을 통과해서 지나간 공이었다. 라모스는 아주 똑같은 위치에다가 다시 한 번 미트를 댔다.
“조금만 안으로 들어와도 그냥 한복판이겠는데?”
미트를 조준하고 있자니 방금 전의 투구가 정말 완벽한 공이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만약 저기서 반 개 정도 안으로 넣는다면 산타나의 스윗 스팟에 정확하게 들어맞을 것이다. 그러니 라모스가 안쪽으로 미트를 대고 싶어도 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바깥쪽이 짠 만큼 몸 쪽이 후하냐면 그것도 또 아니었다.
“아오!”
이를 악물고 던진 공이 여전히 비슷한 위치에 박혔지만. 방금 전 그 코스가 볼로 선언되는 걸 봤는데도 산타나가 방망이를 낼 리도 없었고, 심판도 또 다시 외면했다. 오각형으로 된 홈 플레이트를 스친 게 분명해 보이는데도.
[베이스 온 볼스. 주자가 두 명으로 늘어납니다. 곤란하게 됐죠?]
[그렇습니다. 여기서 페르난도 멘데스를 상대해야 하는 문입니다. 오늘은 5번으로 한 칸 내려섰는데, 또 기가 막히게 득점권에서 들어서게 되네요.]
[지난 ALDS의 MVP였던 페르난도 멘데스. ALDS에서 5경기에 풀타임으로 나서 홈런 다섯 개를 뽑았습니다. 그 중 하나는 크리스 세일, 또 다른 하나는 후지 미유타에게 뽑아낸 홈런이었죠. ALDS 기간 동안 타율이 무려 .600입니다. 17타석에 들어서 볼넷 두 개를 얻어내고 9안타를 때려 냈어요.]
[어제도 결승 2루타를 쳤죠.]
[그렇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가을에 가장 뜨거운 선수입니다. 슈퍼 문과 페르난도 멘데스의 맞대결. 1회부터 흥미진진합니다.]
멘데스는 환하게 웃으면서 타석에 들어섰다. 헬멧의 챙을 붙잡고 살짝 움직이는 걸로 인사를 보냈다. 같은 도미니카 출신 포수인 라모스와도 무어라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확실히 친화력은 대단한 녀석이다. 이런 큰 무대, 승부의 순간에서도 멘데스는 여유가 넘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지혁은 어떤 답신도 보내지 않았다. 멘데스처럼 웃으면서 승부에 임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세트 포지션에서 복잡한 사인을 받고 나서, 곧장 초구를 던졌다. 있는 힘껏.
“스트-라이크!”
참나, 속으로는 욕지기가 치밀었지만 밖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방금 전 산타나가 볼넷을 골라 간 똑같은 코스로 공이 들어갔는데 이번엔 스트라이크 선언이다.
[초구 카운트를 잡고 출발하는 문. 96마일의 패스트볼입니다. 확실히 공의 움직임이 훌륭합니다. 리그를 대표하는 좌완 에이스 중 한 명이네요.]
[위기 상황에 몰렸을 때 더 좋은 공을 던지는 게 이 투수의 장점이죠. 하지만 멘데스도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매우 영리한 선수니까요.]
[클리블랜드가 선취점을 빼앗아 갈 수 있을지. 만약 2차전에도 선취점을 내고 출발한다면 인디언스는 아주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겠군요.]
[그렇죠.]
[2구. 바깥쪽 원바운드로 빠지는 볼. 라모스가 블로킹을 아주 잘 해냈습니다. 빠졌다면 위험했겠네요. 카운트 원 앤 원.]
멘데스 기준으로 안쪽 가장자리를 찌른 공 하나. 그리고 바깥쪽으로 멀리 도망가는 공 하나. 세 번째 공을 던지기 전에, 지혁은 발을 한 번 풀었다. 그다음에는 2루 주자를 견제하는 척 다시 한 번 발을 뺐다. 그동안 지혁의 머리는 팽팽 돌아갔다.
‘신중하게, 신중하게 던지는 것처럼 보여 주고.’
멘데스의 머리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지를 예단하는 건 공포스러운 일이다. 언제든 어디에서든 흐름을 완벽하게 잡아내는 선수니까. 하지만 그 머리싸움이 승부의 포인트다. 절대 져서는 안 되는 승부.
‘휘두를 거야.’
평소 지혁의 피칭을 머릿속에 완전히 담아 두고 있을 게 분명한 멘데스는, 이번 공을 분명히 노릴 것이다. 시즌 내내, 아니, 회귀한 이후로 내내 지혁은 아주 공격적으로 피칭을 해 왔으니까. 스트라이크를 볼보다 더 많이 던지는 게 철칙이니까. 언제나 스트라이크 카운트를 잡으러 들어갔었고, 지금의 투 아웃 주자 두 명을 둔 상황의 원 앤 원 카운트에서 존 바깥으로 공을 던지는 건 선택지에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멘데스는 반드시 노릴 것이다. 지혁은 그렇게 되뇌이며 오른쪽 어깨에 세 손가락을 펼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오히려 라모스가 당황한 듯 손가락이 조금 방황한다. 이내 곧 복잡한 사인 중에 진짜 사인이 스쳐 지나갔다.
[문, 3구. 던집니다. 때렸습니다!]
지혁의 예상대로 멘데스는 정확한 타이밍에 배트를 휘둘렀다. 만약 지혁이 던진 공이 평소처럼 싱커였다면 말이다.
[완전히 빗맞은 타구가 3루수 정면으로. 롱고리아가 직접 잡아 3루 베이스를 밟습니다. 이닝 종료. 위기를 넘어가는 탬파베이의 문.]
[역시 노련하네요.]
[방금 공은 싱커가 아니었던 것 같죠? 속도가 조금 느렸는데요.]
멘데스가 어떤 표정으로 지혁을 바라보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지혁은 멘데스 쪽을 돌아보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분명히 놀라긴 놀랐을 것이다. 경기 초반에는 단 한 개도 던지지 않던 체인지업으로 시작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