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전의 교훈 투구 패턴을 바꾸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투수라는 생물은 빌어먹게 예민하니까. 많은 투수들은 언제나 같은 패턴으로 던지고 싶어 한다. 평소대로, 평소처럼. 바뀌는 게 무엇이든지 간에 아주 조금이라도 평소의 리듬을 벗어나면 자신의 투구를 온전히 할 수 없는 게 바로 투수라는 종족이다.
물론 패턴을 자주 바꾸는 투수들도 있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구위만으로는 완벽하게 타선을 제압하기 힘들다고 판단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자신의 주 무기인 공으로 타자를 온전히 상대할 수 없기 때문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자신의 리듬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그러니 보통의 에이스들은 자신의 패턴을 웬만해서는 바꾸지 않는다. 에이스들의 가장 큰 무기는 어떤 방망이라도 힘으로 뚫고 나가기 마련이니까. 클레이튼 커쇼가 결정구를 던져야 할 타이밍에 패스트볼이나 커브가 아닌 다른 공을 선택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맥스 슈어져가 그의 투심이나 슬라이더가 아닌 공으로 승부하는 것? 아니면 다르빗슈 유가 슬라이더를 던지지 않는 것?
쉽게 상상할 수 없다. 이건 투수가 가져야 할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도망치는 거야?”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무슨 도망이야, 이게.”
하지만 지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라모스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를 찌르는 건 좋지.”
“그래. 무슨 공이든 예상하지 못하는 공을 던지는 게 좋으니까.”
“하지만 조금 위험했어. 만약 체인지업이 밋밋했으면 여지를 남기지 않았을 걸. 멘데스 녀석.”
“체인지업이 밋밋했으면 그랬겠지.”
“자주 안 던지던 공이잖아. 내가 얼마나 쫄렸는지 알아?”
“윌슨, 만약 체인지업이 아니었으면, 그때 무슨 공을 던졌을 것 같아?”
라모스는 배팅 장갑을 끼우며 왼손으로는 싱커 사인을 흔들어보였다.
“이거.”
“그래, 그거 던졌을 거야. 평소 같았으면.”
“그런데 왜 체인지업으로 틀었는데?”
“멘데스 녀석 스윙 타이밍 못 봤어?”
“난 온통 체인지업이 잘 떨어지고 있는지에만 집중해서. 타이밍은 전혀.”
“싱커 타이밍에 완벽하게 맞았어. 걔도 우리 생각을 읽고 있어.”
“읽고 있으면 뭐 어때? 힘으로 때린다고 무조건 히트가 되는 것도 아닌데.”
부웅-.
라모스의 연습 스윙이 위협적인 바람을 만들어 낸다. 지혁은 그 스윙이 제법 날카롭다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이번 시리즈를 생각해 봐. 저 녀석의 스윙 타이밍을 빼앗을 수 있는 녀석이 우리 팀에 누가 있는지. 단순히 오늘 경기에서 멘데스 녀석을 상대하는 게 문제가 아니야. 나 말고 저기 있는 애송이 놈들이 던질 경기까지 생각해야지.”
“응?”
“멘데스를 그냥 잡아내는 게 다가 아니야. 저 스윙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게 목표니까. 앞으로도 스윙이 무너질 수 있게.”
라모스는 휘두르던 배트를 내려놓고 조금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언제부터?”
“음…… 지금부터.”
“미친놈, 잘난 척은.”
말하면서도 방금은 조금 멋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냥 머리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했던 것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만들어야 했다. 멘데스의 스윙을 무너뜨리는 것. 단순한 승리를 넘어서.
* * *
3회초. 탬파베이의 오늘 경기 첫 번째 출루가 나왔다. 8번 타석에 들어선 윌슨 라모스였다. 연습 스윙이 꽤 날카롭다고 생각하자마자. 가을 야구에 들어서 타율은 매우 낮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윙은 가져갈 줄 아는 베테랑 포수답게 살라자르의 패스트볼 하나에만 초점을 맞추고 몸 쪽에 붙은 공을 짧은 임팩트로 잡아당겼다.
원아웃 1루. 하지만 한 타자를 출루시킨 살라자르의 자신감이 완전히 꺾이지는 않았다. 9번 타자인 루키 아다메스를 상대로 3루 쪽 땅볼을 유도해 냈다. 선행 주자인 라모스만 2루에서 아웃되며 투아웃에 1루.
의외의 상황은 그 뒤에 일어났다.
아다메스가 전력으로 달려서 1루에서 살아남은 게 다행이었다. 곧이어 살라자르의 1루 견제구가 뒤로 빠지며 2루까지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만약 아다메스가 힘빠진 주루로 1루에서 더블 플레이를 당해 버렸다면 일어날 수 없던 행운이 발생했다.
“기회가 왔다! 코리! 하나 해 줘!”
홈 플레이트에 앉아 있는 게 아무리 든든한 포수라고 해도, 투수가 스스로 흔들리는 데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 특히 살라자르는 불 같은 강속구처럼 성격도 다혈질인 모양이었다. 견제구 실수 이후 패스트볼이 미세하게 뜨기 시작했다. 경기 초반 낮게 깔려 들어가는 공은 어떻게 쳐야 할지 감도 안 잡히던 공이었다면, 이번 회 들어서 노출하기 시작한 애매한 높이의 공은 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타석에는 코리 디커슨. 탬파베이의 최고 타자는 단연 롱고리아지만. 최소한 이번 시즌만큼은 코리 디커슨이 그 위치를 차지했다. 리드오프로 나서며 서른두 개의 홈런을 때려 냈고, 올스타전에도 출장했으니까. 디커슨의 파괴력 있는 한 방을 기대할 법한 상황이다. 게다가 디커슨은 단순히 홈런 개수만 많은 공갈형 타자도 아니었다. 작년까지의 디커슨이 그런 공갈형 타자였다면, 올해의 디커슨은.
타악!
개안을 했다 싶을 정도로 배트 컨트롤이 좋아졌다. 낮게 깔리는 포심처럼 날아들다가 마지막 순간에 살짝 꺾이며 떨어지는 커터에. 디커슨은 한 손을 놓으면서 따라붙었다. 무릎을 살짝 굽히며, 오른손만으로 배트의 궤도를 조정했고. 낮은 쪽에 맞은 공이 빠르게 튀기며 내야를 빠져나갔다. 2루수 킵니스의 다이빙에도 미치지 못한 타구.
그 타구가 내야를 빠져나가는 순간, 모든 사람들이 일어섰다.
“좋아! 뛰어 봐! 홈까지 가!”
지혁은 난간에 매달렸고, 어린 선수들은 더그아웃을 박차고 나가 3루 코치인 찰리 몬토요와 같은 포즈로 어깨를 빙빙 돌렸다. 2루 주자였던 윌리 아다메스는 크게 3루를 돌아 이를 악물고 홈으로 내달렸다. 클리블랜드의 좌익수인 브랜틀리가 잡아내자마자 홈으로 뿌린 공이 아주 약간 홈에 먼저 도달했다.
“세잎! 세잎!”
아다메스의 몸통은 옆으로 비껴 들어갔지만 그가 쭉 뻗은 왼팔은 홈 플레이트를 스쳤다. 하지만 곰 같은 덩치의 멘데스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날렵하게 태그에 들어간 시간도 비슷했다. 살짝 벗어난 송구였지만 미트에 공을 받자마자 곧장 아다메스의 팔 위로 정확하게 스친 태그. 심판은…… 주먹을 쥐었다.
“아웃!”
“What? 말도 안 돼!”
프로그레시프 필드의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나 엄청난 환호를 보내는 통에 아다메스가 길길이 날뛰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랭카스터 감독은 당연히 곧장 더그아웃을 빠져나가 비디오 챌린지를 신청했다. 심판들이 뉴욕의 센터에 연결하는 커다란 헤드셋을 쓰고 있는 순간이 천 년 같이 느껴졌다. 탬파베이의 모든 선수들이 심판만 바라보고 서 있다. 지혁도 포함해서.
그렇게 한참 뒤. 상황이 여의치 않은지 오랜 시간이 흘러갔다.
“러너! 아웃!”
마침내 심판이 원심을 유지했다. 그러자 클리블랜드의 팬들이 다시금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랭카스터 감독은 심판에게 다가가 따지듯이 물었지만. 원심을 번복할 만큼 확실한 근거가 없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주지는 않겠다는 말이지?”
지혁은 랭카스터와 심판이 논쟁을 벌이고 있는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클리블랜드의 더그아웃에서 자신이 태그한 동작을 재연해 보이고 있는 멘데스의 등판만 노려보며 마운드에 올라갈 뿐이었다.
* * *
3회말 원아웃. 페르난도 멘데스와의 두 번째 대결.
주자가 없는 상황이어서인지, 이번에는 멘데스가 방망이를 길게 잡았다. 배트를 등에 끼고 허리를 돌려 보며 타석에 들어서는 멘데스의 모습에서는 알 수 없는 여유가 느껴졌다. 멘데스는 정말 좋은 친구지만, 상대로 만났을 때는 그렇게 눈에 거슬릴 수가 없다. 저 여유,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박살을 내고 싶어지는 그런 여유니까.
초구. 멘데스가 과연 초구부터 돌릴까? 마지막 공으로 체인지업을 봤으니, 지혁이 패턴을 바꾸려 한다는 것쯤은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하나 쯤은 공을 보면서 확인하고 싶겠지. 그러니 역으로 찔러서, 초구에는 패스트볼.
“스트-라이크!”
조금은 높은 코스였지만. 예상대로 멘데스는 배트를 내지 않고 지켜봤다. 고개를 끄덕이는 멘데스의 모습과 그걸 바라보는 지혁의 눈빛이 제대로 마주쳤다.
2구. 원 바운드가 될 정도로 떨어지는 커브. 멘데스는 왼발을 살짝 들었다가 내려놓으며 타이밍을 재고 있다. 카운트 원 볼 원 스트라이크.
3구. 초구처럼 애매한 코스로 들어가는 공이라면 스윙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카운트.
‘패턴을 바꾸려고 한다고 확신을 갖게 하려면…… 여기선 또 깜짝 투구가 필요한가?’
지혁은 패스트볼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슬라이더 그립을 쥐었다. 괜히 여러 번 사인을 거부하면 멘데스가 눈치를 챌지도 모르니까. 주자가 없는 상황이니 뒤로 살짝 빠지더라도 스윙은 스윙이다.
부-웅!
예상대로 멘데스는 큰 스윙을 돌렸다. 아마 패스트볼 쪽에 초점을 맞춰 뒀을 것이다. 당황한 라모스가 황급히 몸을 던지며 떨어지는 볼을 블로킹 해낸 건, 미안하지만 지금은 안중에 없는 모습이다. 멘데스의 저 스윙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에만 집중했다. 멘데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4구를 막 던지려던 찰나. 멘데스가 타임을 요청하며 발을 뺐다. 멘데스는 이번의 타임으로 지혁의 리듬을 끊었다고 생각했고, 지혁은 멘데스의 머리가 복잡해졌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 사이의 머리싸움이 절정을 향해 가고 있다.
누가 봐도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는 멘데스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지혁도 그 모습을 보면서 질 수 없다는 듯 슬쩍 웃어 보였다. 그리고 4구.
[4구. 파울팁 삼진! 어려운 타자인 멘데스를 파울팁 삼진으로 돌려세웁니다. 문, 기세를 올립니다. 주먹을 쥐고 흔들어 보이네요.]
[하하, 방금의 승부구는 꽤 신기한 공이네요. 실투라고 봐도 될 정도입니다. 높은 쪽에서 형성되는 싱커로 보였는데요. 싱커를 저렇게 높은 곳에 쓰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말이죠.]
[실투, 운이 좋았을까요. 멘데스도 조금 반응이 늦은 스윙이었죠? 어정쩡하게 나왔는데 방망이에 맞고 미트로 빨려들어 버렸습니다. 커트에 실패했습니다.]
[멘데스도 당황했으니 그런 스윙이 나왔겠죠. 높은 쪽 싱커는 정말 위험한 공이거든요. 저 공은 타이밍만 맞으면 무조건 장타로 이어질 수 있는 발사 각도가 나오는 공이니까요. 아마 문이 실투를 던질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렇군요. 자연스럽게 들어 칠 수 있다는 소리인가요?]
[물론입니다. 싱커가 마지막에 살짝 가라앉는 공이지 않습니까? 평범한 레벨 스윙으로 돌아 나오더라도, 배트에 맞는 순간에 자연스럽게 드라이브 스핀이 걸려 버립니다. 그냥 쭉 뻗어 나가게 되죠.]
지혁의 배짱에 모두가 놀랐다. 특히 공을 받은 라모스는 거의 진저리를 치고 있었고. 탬파베이 벤치에서는 실투였는데 잘 넘어갔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딱 두 사람은 확신하고 있었다. 멘데스가 높은 쪽 싱커만큼은 절대로 노리지 않을 것이라는, 그냥 눈 감고 돌리는 스윙에 맞아 넘어가는 건 감수하겠다는 배짱 어린 투구를 한 지혁과, 그 모든 것을 눈치챈 멘데스. 두 사람만큼은.
* * *
[유격수 정면으로 가는 타구. 아다메스가 살짝 더듬었습니다만 1루에선 여유가 있습니다. 원-투-쓰리 이닝. 오늘의 문은 정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군요. 든든하게 마운드를 지켜 냅니다.]
[대단합니다. 환상적인 피칭이네요. 기세를 제대로 탄 모습입니다.]
[3회부터 시작된 원-투-쓰리 이닝이 벌써 다섯 번째 반복되었습니다. 2회 마지막 타자부터 열여섯 타자 연속 범타 처리입니다. 하하.]
7회말. 여전히 부담스러운 0 대 0의 스코어가 유지되고 있었지만 지혁은 그대로 마운드를 지키고 서 있었다. 특히 멘데스를 두 번째 타석에서 삼진으로 돌려세운 이후로는 정말 완벽에 가까운 피칭이 이어졌다. 그동안 들어간 실투는 단 한 개도 없었다. 타자들이 까다로워 하는 코스를 어김없이 공략하는 싱커가 송곳같이 꽂혔다.
“오늘 날 잡았으니까. 딱 한 점만 내 봐. 내가 한 점 낼 때까지 지켜 줄 테니까.”
클리블랜드의 차가운 밤공기를 힘껏 들이마시며 지혁이 살벌한 멘트를 내뱉었다. 클리블랜드에게는 악몽 같은 말이었다. ALCS 2차전, 차갑게 얼어붙은 클리블랜드 안에서 유일하게 지혁만이 불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