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46화 (147/204)

마지막

[양 팀의 경기, 한 점 싸움으로 접어들었습니다. 8회에 접어들 때까지 홈플레이트를 밟은 타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치열하네요.]

[하지만 두 팀의 방법은 완전히 다릅니다. 클리블랜드는 다섯 번째 투수로 앤드류 밀러가 올라와 있습니다. 대니 살라자르가 선발로 나와서 4.2이닝을 막았고, 조쉬 톰린이 6회까지 던졌습니다. 분 로건이 한 타자를 상대했고 잭 매컬리스터가 두 타자를 막아 줬죠.]

[프랑코나 감독은 단기전에서 투수들을 빠르게 교체하는 걸 꽤 선호하는 감독이니까요.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반면 탬파베이는. 오, 마침 카메라가 잡아 주네요.]

몸의 열기를 식히지 않기 위해 두툼한 외투를 입고 더그아웃에 앉아 있는 지혁의 모습이 원샷으로 잡힌다. 오늘 탬파베이의 더그아웃에서 원 샷으로 잡을 만한 선수는 오직 지혁뿐이다.

[문, 이번 시즌 탬파베이의 에이스 역할을 해 온 문이 혼자서 7이닝을 버텼습니다. 지금까지 피안타 2개, 볼넷 1개만 내줬습니다. 그마저도 1회와 2회에 내준 게 다죠. 그 이후로는 완벽하게 틀어막고 있습니다.]

[음, 어찌 보면 이것도 전형적이라고 할 수 있네요. 랭카스터 감독은 팀의 핵심 투수들이 등판하는 경기에서는 최대한 선발 투수를 믿어 주는 경향이 있죠. 시즌 중에 문이나 아처가 등판하는 경기에서도 그랬고요. 특히 가을에 들어서는 굉장히 많은 투구 수를 기록한 문에게 끝까지 믿음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과도 항상 좋았죠?]

[그러니까 탬파베이가 이 자리에 있는 거죠.]

[하하하, 괜한 질문을 했군요.]

클리블랜드는 클리블랜드답게 빠른 공을 전력으로 던지는 선발투수들이 파워를 일찍 끌어다 쓰고, 파워가 떨어졌다 싶으면 불펜 투수들을 다채롭게 올려 단기전에 임했고.

탬파베이는 탬파베이답게 슈퍼 문에게 의존하는 경기를 치른다. 지혁을 제외하고는 긴 이닝을 기대할 수 있는 선발이 없으니 불펜을 아껴야 하고, 불펜조차도 불안한 선수들이 많다.

이렇게 전혀 다른 스타일의 두 팀의 2차전. 승부는 딱 한 점으로 갈릴 것이라는 걸 모두가 직감하고 있었다.

[헛스윙 삼진! 수자 주니어. 대타로 들어왔지만 결국 밀러의 슬라이더에 속아 넘어갑니다. 8회초를 세 타자로 정리하는 앤드류 밀러. 클리블랜드의 불펜은 오늘 정말 언터쳐블입니다. 8회말로 가죠.]

다시 말하면, 누가 먼저 무너지느냐의 싸움이었다. 지혁이냐, 아니면 클리블랜드의 불펜이냐.

*

“아시아가 우리한테 감정이 있는 게 분명해.”

“구단주가 아시아에서 뭔가 큰 잘못을 하고 있나?”

클리블랜드의 벤치도 사태의 심각성을 처절하게 깨닫고 있었다. 실없는 농담을 해야만 기분이 조금 풀릴 만큼.

야구장에서 상대할 때 공포를 자아내는 투수들이 몇 명 있다. 꽁꽁 틀어막히는 경험을 몇 번 반복해서 하다 보면, 습관이 되고, 공포가 되는 법이다. 특히 이번 시즌에는 동양에서 온 투수들이 더욱 그랬다.

후지는 어느 구단에게나 비슷했지만 보스턴의 후지가 그랬고, 텍사스의 다르빗슈는 클리블랜드만 만나면 호투를 반복했다. 심지어는 시즌을 말아먹었다는 양키스의 다나카조차도 클리블랜드를 상대로는 잘 던졌다.

그리고 오늘, 가을에 맞부딪힌 문은 이번 시즌 클리블랜드의 아시아 공포증에 정점을 찍는 피칭을 선보이는 중이다.

“대체 저 공은 왜 아직도 저렇게 사라지는 거야?”

“하하, 역시 문은 너한테서 루키 오브 더 이어를 빼앗아 갈 만한 녀석이야, 아미고.”

“헤이, 퀵 팝! 그렇게 녀석을 자극하지 말라고. 저 표정 봐. 진짜로 화가 났잖아.”

린도어는 8회 선두타자로 다섯 번째 타석에 들어섰다. 하지만 세 개째 삼진을 당한 채 터벅터벅 들어왔다. 지혁의 싱커는 마치 1회 때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날카로운 각도를 그리며 눈앞에서 사라지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미안, 미안. 그래도 마냥 그렇게 인상만 쓰고 있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이럴 때일수록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어야 된다니까.”

“시끄러워. 너도 오늘 한 번을 못 살아 나갔잖아.”

마운드 위의 지혁은 짐머에게 공 두 개만 던져서 또 다시 아웃카운트를 추가했다.

“열여덟 명 연속인가? 1루를 밟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건 줄 몰랐는데.”

누구도 농담을 하지 않고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멘데스만이 유일하게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클리블랜드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나마 멘데스라도 떠들어 대고 있기 때문에 분위기를 잡고 있다는 걸. 그래서 멘데스를 말리지 않는 것이다. 다만 대꾸할 정신이 없었을 뿐.

“마이클! 제대로 휘두르라고! 어정쩡하잖아!”

하지만 브랜틀리의 타구도 타이밍이 완전히 맞지 않았다. 무릎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간신히 가져다 맞추는 스윙. 경기 후반이라서 한 점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공에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있는 힘껏 강한 스윙을 돌리는 일이 필요하다. 올스타 출신의 브랜틀리가 그걸 모를 리도 없고. 아는데도 안 되는 것이다. 마운드 위의 문지혁이라는 친구는, 올스타 타자들조차도 자신의 공으로 끌고 다니는 녀석이다.

그래서 재미있었다.

“91구. 8이닝에 91구. 엄청난 놈이야, 역시.”

멘데스는 도미니카에서 처음 이 낯선 동양인 투수를 봤을 때를 떠올렸다. 같은 투수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가 되어 버린 괴물이 되어 지금 클리블랜드를 막아서고 있는 녀석을 보면서.

* * *

9회초. 8번부터 시작하는 탬파베이의 정규 이닝 마지막 공격. 지금까지 스물네 개의 아웃카운트를 헌납하는 동안 출루한 주자가 여섯 명. 모두 다른 선수였다. 바꿔 말하면 한 명도 두 번 이상 출루에 성공한 적이 없었다는 소리다.

이렇게 0 대 0으로 흘러가는 경기를 치르다 보면 타자들은 자연스럽게 투수들의 눈치를 보게 된다. 오늘은 여럿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오직 한 명의 눈치만 보면 되니까. 타격 코치는 지혁의 이름을 언급하며 타석에 나서는 선수들을 계속 자극시켰다.

“문을 좀 도와주자고! 문이 마지막까지 해 줄 거야!”

따악!

효과가 있었을까? 라모스의 살짝 먹힌 타구가 드디어 외야로 떨어졌다. 오늘 경기에서 유일하게 두 번 출루한 선수가 되었고.

“좋아, 오케이! 윌리! 사인 봐!”

곧장 번트 사인이 나왔다. 앤드류 밀러에게 연타를 때려낸다는 것? 확률이 너무 낮다. 스코어링 포지션에 어떻게든 가져다 두는 게 훨씬 낫다. 아다메스는 몸을 거북이처럼 웅크리고는 거의 얼굴을 공에 가져다 대듯이 딱 붙어 번트를 댔다. 다행히 공의 힘은 완전히 죽어 애매한 지역에 떨어졌다.

원아웃에 주자는 2루.

“너희들 잘 들어. 이렇게 후반에 오는 기회는 마…… 아니, 정말 거의 없어. 더 집중해야 돼!”

롱고리아는 마지막이라는 말을 입에 담으려다가 말았다. 말이 씨가 될 것 같아서겠지. 하지만 모두가 롱고리아가 꺼내려다 만 말을 알고 있다. 마지막 기회다. 한 점을 들여보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들이받아야 한다.

타석에는 디커슨. 그리고 키어마이어. 두 개의 아웃카운트가 잡히기 전에 2루에 있는 라모스를 홈으로 불러들여야 한다.

깊은 한숨을 들이마시느라 볼이 빵빵해졌던 디커슨이 밀러의 도망가는 슬라이더를 툭 밀어 냈다. 맞는 순간 방망이를 살짝 들어 올리는 고급 기술이 첨가된 아주 기술적인 배팅이었다. 하지만 3-유간을 향해 가던 공을 향해 유격수 린도어가 몸을 던졌다. 공중에서 몸을 일자로 쭉 뻗은 린도어의 글러브 끄트머리에 공이 멈춰 섰다.

“아아.”

야수들이 모두 깊은 한탄을 터뜨렸다. 지혁만 덤덤해 보였다.

그리고 키어마이어. 타격감이 많이 떨어져 있던 키어마이어는 슬라이더 두 개를 연속해서 헛치더니 갑자기 찔러 들어온 패스트볼에 늦은 대응으로 헛스윙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탬파베이 더그아웃 안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의 끈이 서서히 풀려 가고 있었다.

* * *

“문, 마지막까지 부탁한다.”

9회에도 마운드로 올라가는 지혁의 뒤에 힉키 코치가 남긴 말이 자꾸 머리에 맴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아는 데도 모르는 척하고 싶은 일이다.

“마지막…….”

문득 마운드가 고독하게 느껴진다. 18번을 달고 있는 유니폼. 가슴팍에 만져지는 가오리 형태의 마크. 4년을 뛰었다. 이 유니폼을 입고, 이 로고를 달고. 그동안 지혁의 뒤를 지켜주던 선수들도 많이 바뀌었다. 탬파베이라는 팀이 원래 그랬으니까.

그의 친구였던 형진도 잠깐이나마 메이저리그에서 지혁의 뒤를 지켰고,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백업 선수들이 번갈아 가며 지혁의 뒤에 있었다. 오직 롱고리아와 키어마이어만이 계속해서 지혁의 뒤에 남아 있었다.

그의 공을 받아 주던 파트너도 수도 없이 바뀌었다. 마이너리그에서부터 같이 뛰었던 메일리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아직도 더램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카살리도 있다. 메이저리그에 처음 데뷔했을 때의 파트너도 카살리였지, 참.

처음으로 선발로 뛰며 루키 오브 더 이어를 수상했을 때의 주된 파트너는 르네 리베라였고, 바비 윌슨이나 헤수스 수크레와도 몇 번 호흡을 맞췄다. 그 다음 시즌은 한국계 포수인 행크 콩거였고, 데릭 노리스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윌슨 라모스가 마스크를 쓰고 있다.

참 많이도 바뀌었다. 그만큼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ALCS 2차전 9회초.

이번 이닝이 마지막 투구일지도 모른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졌다. 순식간에. 탬파베이의 일원으로 던지는 마지막 경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는 머리에 가득 차 버렸다. 2차전인 이번 경기마저 빼앗기게 된다면 지혁에게 다음 경기는 허락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상하지. 클리블랜드는 휴스턴만큼 강한 것도 아니고, 막막한 느낌도 없는데 왜 못 이기는 걸까?”

궁금해하며, 초구를 던졌다. 산타나는 초구를 때렸지만 1루수인 모리슨의 정면으로 향하는 타구였다. 모리슨이 제자리에 서서 날아오는 공을 움켜쥐며 원아웃.

“클리블랜드가 엄청 끈끈한 것도 아니고, 휴스턴이나 보스턴만큼 전력이 압도적인 것도 아니고. 전체적으로는 우리랑 더 비슷한 팀인데. 왜.”

타석에는 5번 멘데스. 제일 경계해야 하는 타자. 하지만 앞선 네 번의 타석에서 멘데스의 타이밍은 완전히 어긋났다. 지혁의 타이밍에 쫓아오지 못했다. 싱커를 노리고 있을 때 체인지업을 던졌고, 패스트볼 타이밍에는 커브를 던졌다. 공을 보고 싶어할 때는 카운트를 잡았고, 카운트를 몰아넣은 뒤에는 예상하지 못한 코스로 허를 찔렀다.

적어도 오늘 경기에서만큼은, 지혁은 멘데스를 압도하는 피칭을 보였다.

틱.

빗맞은 타구가 높이 수직으로 떠올랐다. 라모스가 귀신 같은 반응속도로 마스크를 집어던지며 두 걸음 정도 옮기며 플라이 볼을 잡아냈다. 투아웃.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이기지 못하는 건 왜일까.”

지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마지막 타자인 호세 라미레즈는 바깥쪽 아웃코스를 완벽하게 찌르고 들어간 싱커로 루킹 삼진. 이것으로 스물두 개의 아웃카운트를 연속해서 잡아냈다. 투구 수도 100개를 넘겼다.

다시 마운드에 오를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시리즈를 포기하지는 않겠지만 강한 확신이 들었다.

“안녕. 레이스.”

* * *

2017 ALCS 2차전.

탬파베이 레이스 (0-2) 0 vs 1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2-0)

승리투수 : 코디 앨런

패전투수 : 후 치웨이

결승타점 : 프란시스코 린도어, 11회말, 홈런. (비거리 429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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