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47화 (148/204)

처절한 패자, 철저한 승자 클리블랜드와의 2차전, 지혁이 9이닝을 2피안타 1사사구로 틀어막는 동안 선취점을 얻어내지 못했고. 불안한 불펜이 등판하게 된 순간 게임의 흐름이 바뀌었다. 린도어의 결승 홈런은 시리즈 전체의 분위기를 완전히 기울게 만드는 결정타였다.

3차전. 탬파베이의 홈인 트로피카나 필드로 자리를 옮겼지만, 분위기에는 영향이 없었다. 홈 팬들은 계속 응원을 보내 줬지만 기본적인 실력 차이가 너무 났다.

아직 덜 영글은 호세 드 레온이 등판한 탬파베이와 에이스 코리 클루버가 등판한 클리블랜드. 힘겨운 매치 업이었고, 결과도 섭리에 따랐다.

4차전. 벼랑 끝까지 떠밀린 탬파베이의 루키들은 오히려 힘이 들어갔다. 필요하지 않은 플레이가 나왔고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에러가 나왔다. 처음으로 클리블랜드의 선발투수를 공략했지만 수비가 같이 무너져 버렸다.

결국 홈구장에서 시리즈 챔피언을 확보하고 일제히 마운드로 뛰쳐나오는 클리블랜드 선수들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루키들이 가장 먼저 눈물을 보였다. 그들은 감정적으로 아주 충만해지는 지난 2주일을 보냈다. 단기전의 야구는 항상 그런 법이니까. 시즌과는 다르게 짧은 기간 안에 승자와 패자가 명확하게 갈리는 이런 상황에서.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괜찮아, 너희들은 아직 어리니까. 기회는 엄청나게 많잖아.”

지혁은 어린 투수들 사이를 오가며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롱고리아는 야수진을 컨트롤하고 있을 것이다.

아처는 본인의 부상 때문에 기회를 망친 것 같다는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지금의 탬파베이에서 어린 선수들을 보듬을 역할을 할 선수는 지혁밖에 없었다.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전적 0승 4패. 2017년 탬파베이의 야구가 끝나는 날이었다.

* * *

후욱. 후욱. 후욱.

실내 연습장에 모락모락 아지랑이가 피어날 정도로, 지혁은 계속해서 달렸다.

시즌이 끝난 뒤의 마무리 훈련은 1년 동안 바짝 조여져 있던 몸의 근육들을 서서히 이완시키기 위한 피지컬 훈련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리고 보통 개인적으로 이뤄진다. 가끔씩 뜻이 맞는 몇몇 선수들이 뭉치기도 하고, 탬파베이는 특히 더 그런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혼자 임하기로 했다.

보통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이 과정을 생략하는 선수도 많고, 또 실시한다고 하더라도 공은 쥐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투수들은 피칭이 아닌 캐치볼과 롱 토스만 실시하고, 타자들은 토스 배팅을 몇 개 정도만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번 시즌의 지혁은 몸을 꽤 격하게 굴리고 있었다. 시즌 중만큼은 아니지만 아마 다른 선수들은 이렇게까지 운동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또? 또 이러고 있습니까?”

땀에 흥건하게 젖어 버린 유니폼을 입고 가쁜 숨을 내쉬는 지혁에게 패트릭이 다가왔다.

“어떻게 됐어요?”

“7차전으로. 멘데스가 류희주에게 그랜드 슬램을 뽑았어요.”

“이런, 한국이 또 난리가 났겠네.”

“그건 모르겠고, 언제까지 이렇게 운동하고 있을 겁니까, 혼자서?”

“월드시리즈가 끝날 때까지요.”

“…….”

“그래도 7차전인데. LA로 안 가 봐도 괜찮겠어요? 멘데스가 우승을 차지할지도 모르는데. 가서 눈으로 직접 봐야 하지 않나?”

“미팅에 진전이 없어서 쉽게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 친구한테 내가 미안한 짓을 하고 있네. 담당 에이전트가 경기도 못 보게 하는 꼴이네요.”

“난 당신들의 친구이기 이전에 에이전트입니다. 계약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지. 그게 내 업이니까요.”

지혁은 입술을 삐죽 내밀어 보이고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한 번 더 스프린트를 할 생각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패트릭이 팔짱을 낀 채 물었다.

“계약 상황은 궁금하지 않습니까?”

“음, 딱히, 별로요.”

“아직은 물밑에서 움직이고는 있지만 어느 팀이 접근을 해 왔는지 정도는 얘기해 줄 수 있는데요.”

“모르는 걸로 하죠. 뭐, 어차피 갈 수 있는 곳은 비슷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땀을 내던 지혁은 자리에 가만히 선 패트릭을 두고 다시 뛰쳐나갔다. 머릿속에 너무 많은 감정들이 스쳐 가는 중이어서 몸을 더 빨리 움직여야만 했다. 또 그러고 싶었다.

‘탬파베이…….’

전생의 그는 져니 맨에 가까웠다. 팀을 옮기는 일에도 꽤 익숙하다. 이곳저곳에서 방출을 당하고 새 팀을 구하고, 그런 건 일상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번의 이적은 얘기가 완전히 달랐다.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이 몸에 가득해서, 이걸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과정 속에 있었다. 그래서 더 다리를 높게 들어 정신없이 뛰었다.

지금같이 큰 성공을 거둔 채, 자의로 팀을 옮기는 것만큼은 처음이었다. 기존에 지혁이 경험했던 이적은 본래의 소속팀에게 원망만 남기곤 했다. 쫓겨나는 듯한 트레이드. 사실상 방출에 가까운 트레이드. 구단에서는 지혁을 잡으려고 하기는커녕 어떻게든 처리하기 위해 노력했고, 얼굴을 마주했던 담당자들은 일견 후련해 보일 정도의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탬파베이가 지혁을 잡아 두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다. 최종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그 순간까지도 탬파베이의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지혁을 보내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도, 돈이 없는 사정도, 지혁과 연관이 있는 모든 곳에 애걸복걸해 가면서까지 팀에 남겨 보려는 애달픈 수작도. 자꾸 눈에 밟힌다.

후욱. 후욱.

거센 숨소리만 남아 있는 실내연습장에서, 지혁은 계속 달렸다. 몸과 마음과 생각을 모두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 * *

패트릭은 사무실에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틀어 놓은 TV를 흘깃거리면서도, 양키스에서 보내 온 자료들을 훑어 내려가는 집중력에는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양키스는 확실히 급한 모양이었다. 오탈자를 벌써 세 개째 발견했으니까.

“어떻게 되어 갑니까?”

“어? 왔습니까?”

지혁은 정체 모를 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서류 더미를 쳐다보지도 않고 패트릭의 책상 앞을 가로질러 TV 앞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 모르겠어요. 어떻게 될지.”

“2 대 2네. 커쇼 상대로 2점이면 많이 뽑았네요.”

“이기기에 충분한 점수는 아니죠.”

“어? 클리블랜드는 클루버가 올라왔어요?”

“6회부터.”

“5차전 등판 아니었나? 빡세게 굴리네, 저쪽도.”

“우승 트로피라는 건 그런 거죠. 무슨 짓을 해서라도 붙잡아야 하는 거니까. 클루버는 팔이 아작 나더라도 던지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을 겁니다.”

“하긴…….”

월드시리즈 7차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내셔널리그 챔피언인 LA 다저스의 맞대결. 7차전 8회까지도 팽팽한 경기가 이어지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사무국 사람들은 입이 귀에 걸렸겠네요.”

“당연합니다. 작년에도 7차전까지 가는 혈투였고, 이번에도 7차전이고…… 돈을 아주 쓸어담고 있는 중이죠. 게다가 스토리도 엄청나고.”

“스토리?”

“작년에 컵스가 염소의 저주를 풀어내면서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오랫동안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팀이 바로 클리블랜드니까요. 거기다가 2년 연속 월드시리즈 도전이고.”

“다저스는요?”

“세계 최고의 투수인 커쇼가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커리어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새겨 넣을 수 있는가 하는 여부. 천재 단장이라는 앤드류 프리드먼이 처음으로 월드시리즈를 차지할 수 있을까 하는 것들. 뭐, 스토리야 만들면 되는 거니까. 이런, 보스턴 놈들도 오탈자가 있네. 도대체 담당자는 정신 줄을 어디다 팔아먹은 거야?”

서로 눈길도 주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하던 두 사람이다. 지혁은 TV에 시선을 고정했고, 패트릭은 서류 더미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나저나 월드시리즈는 보지 않겠다더니. 마음이 변했습니까?”

“패배에서 벗어날 시간이 좀 필요했던 것뿐입니다. 열흘이나 지났고.”

피식.

패트릭이 웃음을 흘렸다. 그는 마침내 서류를 던져 놓고 지혁의 옆에 와 앉았다.

“기회가 왔네요.”

“그러게요. 주자 두 명…… 아무리 커쇼라도 8회라면 지쳤을 테니까.”

[데이브 로버츠 감독이 커쇼의 등을 두드려 주고 내려갑니다. 켄리 젠슨이 아까부터 몸을 풀고 있었습니다만, 여기서 커쇼를 믿고 가는 로버츠 감독입니다.]

[배짱 있는 선택입니다. 또 커쇼라면 이런 대접을 받아야만 하는 투수고요.]

[98구를 던진 커쇼. 클리블랜드의 3번 타자인 마이클 브랜틀리를 상대합니다. 2루에는 린도어, 1루에는 짐머. 원아웃 상황입니다.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결정지을 수도 있는 타석이 되겠습니다.]

약간 붉게 상기된 듯한 뺨. 차가운 공기 속 몸에서 피어오르는 열기. 허리를 앞으로 숙인 채 포수 그랜달의 싸인을 응시하는 커쇼의 눈빛에서는 마치 레이저라도 쏟아져 나올 것 같다.

그리고 커쇼 특유의 폼에서 뻗어 나가는 커브. 아름다운 낙차를 그리며 떨어지는 공에 브랜틀리는 짧은 스윙으로 대응했지만.

[삼진! 헛스윙 삼진! 브랜틀리를 돌려세우는 클레이튼 커쇼!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의지를 가진 듯 보입니다!]

브랜틀리의 허망한 눈동자에서 수십 가지 감정이 읽혔다. 그리고 다음 타자, 멘데스. 멘데스는 위기에 몰려 있는 커쇼를 심리적으로 잔뜩 몰아넣었다.

아슬아슬한 공들은 빼어난 배트 컨트롤로 걷어 냈고, 유인하는 공에는 필사적으로 참아 냈다.

종착지는 풀 카운트. 투 아웃이기 때문에 주자들은 커쇼가 공을 던지는 순간에 자동 스타트다. 굳이 홈런이 아니더라도 장타만 나온다면 단번에 1루 주자까지 홈에 들어오는 상황.

[8구째, 던집니다!]

커쇼가 혼신의 힘을 다해 던지고 있다는 것이 모니터 너머로 전달될 정도였다. 기백이라고 해야 할까? 분위기? 그런 것들인 남달랐다. 세계 최정상의 투수라는 자리를 오랫동안 고수해 왔으면서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가져가지 못했던 그에게. 지금의 투구는 세상 그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투구일 것이다.

[스윙 삼진! 패스트볼로 찍어 눌렀습니다! 96마일의 아웃코스 패스트볼! 멘데스가 여기서 물러납니다, 클리블랜드도 여기서 물러납니다!]

멘데스도 패스트볼을 직감했던 듯 무시무시한 스윙을 돌렸지만. 커쇼의 패스트볼이 멘데스를 힘으로 뚫고 들어갔다. 배트 위쪽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나간 공이 그랜달의 미트에 꽂히는 순간 커쇼와 그랜달 모두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라 포효했다.

“이런 기회는 다시 안 올 텐데.”

지혁이, 아니, 경기를 시청하는 모두가 중얼거렸다.

* * *

[유격수 쪽 땅볼! 백핸드로 주워드는 코리! 시거! 1루로!]

“예에에에에아!”

[볼 게임 오버! 2017년! 월드! 챔피언! L! A! 다저스!]

* * *

“수고했어, 친구.”

-하하…… 그래, 고마워.

멘데스의 웃음소리는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억지로 웃고 있는 게 확실하니까. 패트릭의 전화로 멘데스와 통화를 하던 지혁은 어떤 말도 더 덧붙이지 못했다. 멘데스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는 지혁도 잘 알고 있다. 열흘 전에 지혁이 느꼈던 그 감정일 테니.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패자의 기분. 절망감. 허무함. 후회.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현실의 냉혹함. 이런 순간에는 어떤 말을 해도 위로가 아니라 공격이 되어 버린다. 지혁이 제일 잘 알고 있다.

“…….”

-끊자, 너무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네.

“그래, 푹 쉬라고. 조만간 한번 보자.”

-물론.

지혁은 조용히 전화를 끊고 패트릭에게 넘겨주려다가, 다시 손 안에서 진동하는 핸드폰 때문에 본능적으로 액정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헬로?”

-패트릭이 아닌데? 문? 당신입니까?

“……네.”

-Whoooooaaa!

“시끄럽네요.”

-미안, 미안합니다. 저 망할 녀석들이 단장실로 자꾸 쳐들어와서 말이죠.

“축하합니다. 당신은 자격이 있었어요.”

-하하, 고맙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으려고 전화한 건 아닙니다.

“그럼요?”

-당신을 원하기 때문이죠.

앤드류 프리드먼.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차지한 바로 그 순간에 다음을 생각하고 있는 단장. 그의 전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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