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48화 (149/204)

이 겨울, 종착역은?

시즌이 종료되고 나면 며칠 뒤 연봉 조정 신청 기간이 다가온다.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등록된 기간이 3년 이상이 되는 선수들은 최저 연봉에서 벗어나 연봉 조정을 거칠 수 있다.

슈퍼 2 조항이라는 것이 있어서 간혹 3년 차부터 연봉 조정이 가능한 선수들도 있지만, 지혁은 슈퍼 2 대상은 아니었기에 4년 차인 내년부터 조정된 연봉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데뷔 시즌부터 특출한 성적을 거둔 선수들은 보통 연봉 조정 신청을 갖기 전에 장기 재계약을 맺는다. 지혁도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천정부지로 뛰어오른 몸값을 스몰마켓인 탬파베이가 부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탬파베이 데빌레이스 시절 데이빗 프라이스가 맺었던 계약은 당시에도 염가에 가까웠으니, 시장이 폭등한 지금은 택도 없는 가격이었다.

탬파베이의 문제는 그 정도의 계약이 본인들이 제시할 수 있는 최고액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이번 연봉 조정 신청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800만 달러.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최소 금액입니다. 협상을 해도 여기서 더 올라가면 올라갔지 내려가지는 않을 거라는 점을 똑똑히 말씀드리죠.”

패트릭의 표정은 얼음장 같았다.

“하아…….”

랜디 마가리타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만약 타협하지 못한다면? 연봉 조정 중재위원회로 공이 넘어간다. 그렇다면 사이 영 상 최종 후보에까지 오른 지혁 측은 1,000만 달러 이상을 요구할 것이고, 중재위원회는 당연히 지혁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현재 시장에서 초특급 투수의 가치는 1,000만 달러를 훨씬 호가하니까. 1,000만도 싼 느낌이 있다.

“그렇게 하죠.”

“랜디, 이건 알아둬야 합니다. 이 금액은 만에 하나라도 일이 잘못되어 탬파베이에 남게 되는 경우까지 고려한 제시액이라는 걸요. 우리 모두 알다시피 라이언 하워드의 전례도 있잖습니까? 연봉 조정 첫 해에 1,000만 달러 이상을 가져가는 선수들도 있어요.”

“네, 알아요.”

“좋습니다. 그럼 일은 다 끝났군요.”

800만 달러. 당장 이번 시즌 탬파베이 선수들 중 최고액을 받고 있는 롱고리아의 바로 다음 위치다. FA 계약을 맺어 2년 차에 접어든 아처보다도 많은 금액이다.

마찬가지로 리그 특급 투수 반열에 올라 있는 크리스 아처를 말도 안 되는 계약으로 잡아놓았던 마녀 랜디 마가리타조차도, 패트릭의 단호한 입장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혁은 마가리타의 방법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지역적인 연고도, 사람 간의 관계도, 그 어떤 것도 소용없었다. 지혁이 원하는 것은 오직 월드시리즈 우승. 그 목표에 지속적으로 도전하는 것이 가능한 팀. 그것뿐이었다.

“건설적으로 끝나서 좋네요. 랜디, 조금 쉬길 바라요. 요새 당신 얼굴이 정말 핼쑥해진 거 알아요? 이건 에이전트가 아니라 친구로서 하는 충고입니다.”

“악마 같은 사람. 다 당신 때문인데.”

“휘유, 이게 일이니까. 미안합니다.”

패트릭은 다정하게 말했지만, 이 세상에서 패트릭만큼 인간적인 호감과 업무에서 필요한 감정을 완벽하게 구분하는 사람은 또 없었다. 패트릭은 탬파베이의 프런트 오피스를 나서자마자 핸드폰에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는 연락처 리스트를 열었다. 본격적인 무대가 펼쳐진 셈이다.

“아, 앤드류? 당신이 문에게 이렇게 말했다면서요? 꼭 당신에게 맨 처음으로 연락해야 한다고.”

첫 협상 상대는 앤드류 프리드먼, LA 다저스다.

* * *

“와하우, 내 고향, 플로리다.”

“고향이라고요? 여기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느낌이 그렇다는 거죠. 여기가 내 시작점이었으니까.”

“쓸데없는 농담은 여전하시네.”

프리드먼은 자신의 보좌관들을 데리고 곧장 탬파로 넘어왔다. 탬파베이의 사장 시절 즐겨 찾던 카페를 약속 장소로 잡은 프리드먼은 흡족하게 옛 생각을 떠올리는 듯했다.

하긴,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단장이니. 지금은 악어 떼 가득한 늪지대에 떨어뜨려 놔도 기분이 좋을 것이다.

“내가 기다리던 때가 왔네요. 결국 우승을 거머쥐고 고향을 찾는 그런 거. 내 꿈 중 하나였거든요. 오, 문! 반갑습니다.”

“오랜만이네요.”

지혁은 프리드먼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지혁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봐 줬던 사람이다.

“당신의 이번 시즌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빨리 리그 최고의 투수로 성장했더군요.”

“리그 최고의 투수는 클레이튼 커쇼죠. 월드시리즈 4게임에서 2승인데요.”

“하하, 순위를 세우는 건 정말 의미 없이 멍청한 짓이죠. 내 기준에서는 당신도 최고의 투수입니다.”

프리드먼은 여전히 넉살이 좋았다. 그리고 단숨에 이야기의 주도권을 쥐는 능력도 여전했다. 얼마 전 있었던 월드시리즈의 승자가 다저스였듯이, 프리드먼과 지혁과의 대화에 승자를 가린다면 당연히 프리드먼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패트릭도 같이 있다. 패트릭은 프리드먼이 은근한 분위기를 풍길 때마다 흐름을 끊는 역할을 했다.

“빨리 이야기나 들어 봅시다. 내 성격 알죠, 앤드류?”

“물론이지. 이런 소소한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사람이니까.”

“시끄럽습니다.”

“문, 다저스는 당신을 원합니다. 리그에서 가장 가치에 맞지 않는 연봉을 받고 있으니까. 저비용에 고효율이죠. 탬파가 당신을 잡기 위해서 쓸 수 있는 돈을 계산해 봤어요. 아마, 7백만에서 8백만 사이겠죠?”

“잠깐, 그건 아직 말해 줄 수 없습니다, 앤드류. 초보적인 유도 심문이네요.”

“하하하.”

패트릭이 날카롭게 끊었지만 프리드먼은 유쾌했다.

“불과 3년 전까지 탬파의 단장이었던 사람이 나입니다. 이건 내 추측이 아니라 팩트라고 말해 두죠. 돌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어쨌든!”

프리드먼은 박수를 짝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우리는 우승 팀입니다. 그리고 내년에도 우승 팀이 될 예정입니다. 내후년에도요. 우리의 목표는 왕조입니다. 왕조, 다이너스티!”

“쉽지는 않은 일이죠. 모든 구단들이 우승한 뒤 왕조 건설을 꿈꿨지만, 성공한 건 양키스뿐이니까요.”

“물론입니다. 그 뒤의 왕조는 다저스가 될 겁니다. 될 수 있고. 빅 마켓이란 그런 거더군요. 당장 이번 시즌 우승하고 나서 투자금이 더 들어올 것 같다는 얘기가 오가고 있으니까.”

원래도 프리드먼은 자신만만한 사람이었지만, 얼마 전의 우승은 그를 취하게 만든 것 같았다. 이야기가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프리드먼의 확신은 강하게 묻어 나왔다. 그리고 그건 아주 중요한 어필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지혁조차도, 왕조라는 이야기에 가슴이 뛰었던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왕조. 왕조다. 전설적인 뉴욕 양키스에게만 허락된 수식어. 역대급 선발진을 보유했던 90년대 초반의 애틀란타 브레이브스도, 파괴적인 타선을 뽐냈던 예전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도 왕조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지는 못했다.

“왕조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아주 특별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린 드디어 첫 발을 뗐어요. 이건 아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올해의 성공에서 우린 중요한 교훈을 얻었으니까. 앞으로 계속해서 월드시리즈를 제패할 수 있는 경험이라는 무기는 덤이고.”

지혁의 눈치를 살짝 살피던 패트릭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프리드먼이라는 사람의 대화술에 진심으로 감탄한 탓이다. 프리드먼은 이 자리의 핵심을 꿰고 있다.

‘어차피 문은 트레이드 거부권이 없어. 구단 간의 트레이드에는 개입할 방법이 없지. 문이 이적해 갈 곳은 그 대가를 보고 구단이 선택하는 건데. 이렇게까지 자신의 계획을 어필하는 건…….’

-카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맞춰 주겠다. 그러니 비슷한 오퍼가 들어온다면 고민하지 말고 다저스로 밀어 달라.

이것이었다. 물론 탬파베이는 지혁을 무시하고 구단의 방향대로만 트레이드를 진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다가 일이 엎어지는 날에는 탬파베이는 구단에 정이 떨어진 지혁이라는 시한폭탄을 안고 시즌을 보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생각하기 싫은 끔찍한 일이 될 테다.

특히 탬파베이에게는. 지혁 정도 되는 대형 선수의 트레이드가 있을 때에는, 알게 모르게 선수의 입김도 작용하기 마련이다.

프리드먼은 잔뼈가 굵다. 더 이상 어린 단장이 아니다. 이 테이블이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공략해야 할 바로 그 지점을 계속 자극하고 있다. 현재 패트릭에게 도착해 있는 메이저리그 구단의 상태 확인서만 열 개가 넘어간다.

지혁이 그 구단들 중 다저스를 더 선호한다는 의사를 비추면, 체임 블룸은 다저스에서 얻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얻어내려고 할 것이다. 억지로 다른 구단으로 보내는 게 아니라.

“왕조라…….”

지혁은 계속해서 되뇌고 있었다. 프리드먼이 꺼낸 단어는, 어쩌면 회귀한 이후 지혁의 목표에 가장 근접한 단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맴돌았다. 우승. 그리고 또 우승. 또 다시 우승.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집단, 왕조.

* * *

“후우, 수고했습니다.”

“이걸로 만날 팀들은 모두 만난 건가요?”

“네, 거의 다.”

다저스의 프리드먼을 만난 이후. 워싱턴 내셔널스,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 휴스턴 애스트로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카고 컵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까지. 여덟 팀을 더 만났다.

특히 마지막에 만난 애리조나의 관계자는 거의 무릎을 꿇고 비는 지경이었다. 잭 그레인키와 원투 펀치를 이루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듀오가 될 거라는 말을 짧은 시간에 어찌나 반복했는지, 아직도 귀에서 울리는 것만 같다.

“느낌이 좀 어떻습니까?”

패트릭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지금쯤 되면 탬파베이 쪽으로도 공식적인 오퍼가 수도 없이 쏟아지고 있을 것이다. 구단이 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으니, 이쪽에서 아직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다저스만 한 곳은 없는 느낌이네요.”

“양키스는?”

“같은 지구라서. 탬파베이를 좋게 떠나고 싶어요.”

“타당하네요.”

탬파베이는 어차피 양키스와 레드삭스로는 절대로 지혁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같은 지구에서 한 시즌에만도 스무 게임 정도 맞부딪혀야 하는 상대팀에 에이스를 보내는 구단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앤드류 프리드먼은 참 지독한 사람입니다. 푸우.”

“다저스가 제안한 조건을 알 수 있을까요?”

“연봉 보조를 얹은 마에다 켄타. 앤드류 톨스, 애덤 리베라토레, 여기에 유망주 한 명. 아마 야시엘 푸이그도 블록에 올라 있을 겁니다.”

“그 정도로 탬파베이가 오케이 할까요?”

“택도 없습니다. 프리드먼의 날강도 심보죠.”

지혁이 쓰게 웃었다. 비전을 확인한 이상, 다저스는 매력적인 팀이 되었다. 프리드먼도 완벽에 가까운 단장이고. 하지만 다저스가 보내 온 첫 번째 제안은 탬파베이를 만족시키기는 힘들어 보였다.

“아직 실망할 건 없습니다. 줄다리기가 이제 막 시작된 거니까.”

“다른 구단은요?”

“글쎄요…… 조건 자체는 양키스와 레드삭스가 가장 좋을 겁니다. 그 두 팀은 당신한테 당할 만큼 당했으니 더 필사적일 수밖에요. 하지만 협상이 될 가능성은 사실상 없고. 컵스 쪽도 나쁘지 않더군요. 그쪽은 제이크 아리에타를 잡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도 나오고 있어서.”

“컵스는 안 갑니다.”

“뭐, 그렇다면야.”

많고 많은 선택지 중 몇 개가 날아간 것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만큼, 지혁의 위상이 뒤바뀌었다. 다음 시즌 뛸 팀을 절박하게 구해야 하던 전생이 아니다. 이제는 지혁이 원하는 곳을 요리조리 따져서 스스로 결정할 일만 남았다.

“누누이 말하지만, 당신이 이 협상의 주인공이 될 겁니다. 그러니 조바심 내지 말아요.”

“압니다. 좀 뛰어야겠네요.”

지혁은 외투를 집어 들고 집을 나섰다. 간단한 조깅으로 동네의 실내 훈련장까지 뛰어가는 와중에 탬파베이의 팬들에게 사인을 몇 장 해 주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싱숭생숭하기는 했지만, 앞으로 몇 주 뒤 내려야 할 선택은 이 모든 걸 다 감안한 선택이 될 테니까.

그렇게 지혁은 오퍼가 왔던 모든 구단의 유니폼을 입어 보는 상상을 하며 몸을 움직였다.

그 시각.

지혁의 방, 테이블 위. 지혁의 핸드폰이 정신없이 울렸다가 꺼졌다가를 반복했다.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걸겠다는 각오가 느껴질 정도로, 계속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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