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수를 던지려는 자 LA 다저스의 전설적이자 상징적인 인물인 토미 라소다는 말했다. 1년 중 가장 슬픈 날은 야구 시즌이 끝나는 날이라고. 하지만 ‘내 몸에는 푸른 피가 흐른다’고 외쳤던 그는 무덤 속에서나마 2017년의 가장 슬픈 날에는 웃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저스의 월드시리즈 제패를 바라보면서. 1년 중 가장 슬픈 날이었어야 할 바로 그날에 다저스가 세계 최정상의 자리를 쟁취했으니까.
어쨌든, 다저스의 관계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야구인들에게 월드시리즈 7차전이 끝나는 그날은 라소다의 원래 말처럼 가장 슬픈 날이었을 것이다.
한동안 야구가 없는 냉혹한 겨울이 다시 찾아왔다. 선수들은 휴식을 취하고, 감독들은 휴가를 떠나고, 팬들은 실내 스포츠로 관심을 돌리는 시점 말이다.
하지만 그 겨울이야말로 가장 바쁘고 정신없는 계절인 사람들이 있다. 다저스를 제외한 모든 구단의 프런트들. 남들 모두에게는 오프 시즌인 겨울은, 그들에게는 온 더 시즌이나 다름없다. 그들이 맡은 역할은 명확하다.
건설.
쓰린 패배를 딛고, 아픈 상처를 씻고. 내년의 야구를 어떤 방식으로 지어 나갈 것인지 건설하는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인생의 진리는 이 바닥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므로,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일 뿐이니까.
몇몇 팀들은 단순히 내년의 야구를 건설하는 게 아니라 몇 년 뒤의 야구를 건설하기 위해서 아예 건물을 싹 갈아엎는다.
뿌리까지 전부 다 뽑아 버리고 새로운 주춧돌부터 담금질을 시작하기도 한다. 누구나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선수들을 트레이드해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유망주들을 데려다 키운다.
고통스럽고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시간을 인내했을 때의 결과물이 달콤하기를 바라면서. 리빌딩이라고 부르는 작업이다.
또 몇몇 팀들은 70층까지 쌓아 올린 건물을 더 높이 쌓기 위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모아 둔 기둥들을 팔아 치운다. 화려한 세공사를 데려다가 굳이 있어야 할까 싶을 정도의 보석들을 박아 넣기도 한다. 그러니 어마어마한 스타들이 한 팀에 모이는 경우도 많다. 이 바닥의 사람들은 그런 태세를 취하는 구단을 ‘윈 나우 모드’에 들어갔다고 부른다.
그러니 이 겨울을 관통하는 것은 결국 돈의 문제다. 애초에 70층짜리 빌딩을 세우는 것 자체가 돈이요, 거기에 또 다른 장식을 더하는 것도 돈이다.
70층짜리 건물을 가진 팀은 남들에겐 커다랗게 느껴지는 장식들도 주저 없이 팔아치울 수 있다.
반면 허름하기 짝이 없는 5층짜리 집을 가진 사람은 카페트 하나 제대로 팔 수 없는 셈이다.
그게 바로 메이저리그의 원칙이고, 자본주의의 원칙이다.
……하략…….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수석 에디터, 켄 치리노스.
* * *
“엿 같은 기사로군요.”
“뭐가요?”
“너무 당연한 얘기를 장황하게 늘여 쓴 것도 그렇고, 결국 돈에 의해서만 시장이 돌아간다는 결론도 그렇고.”
스몰마켓 팀인 탬파베이에 꽤 정이 든 탓일까. 치리노스인가 뭔가 하는 사람의 기사는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혁은 마저 읽어내려 가지 못하고 잡지를 테이블에 툭 던져놓고 말았다.
“내가 볼 땐 있는 그대로 사실만을 적어 낸 기사던데요. 뭐, 비유가 좀 구렸다는 건 동의.”
“야구는 야구입니다. 돈은 중요한 문제이지만 야구의 본질은 절대로 될 수 없죠. 선수는 야구를 하는 사람이지, 건물의 부속품이 아니에요.”
“그건 그냥 비유라니까요. 구린 비유.”
패트릭은 늘 그렇듯 싱겁게 웃어넘겼다. 하지만 치리노스의 기사는 틀렸다. 한 가지의 극히 적은 경우의 수를 배제하고 있었으니까.
빅마켓 팀이 리빌딩 버튼을 누르는 건 쉽다. 그렇게 몇 년 돈을 아꼈다가 윈 나우 모드로 들어갈 수 있는 것도 맞다.
하지만 스몰마켓 팀이라고 해서 윈 나우 모드에 들어가지 말라는 법은 없다. 가끔씩, 정말 천운이 따르는 경우가 있으니까. 미리 점찍어 둔 유망주들이 줄줄이 터져서 손꼽히는 자원이 되고, 상대적으로 싼 값에 사들인 선수들이 몸값 이상의 활약을 하고, 좋은 성적을 구경하러 관중들이 많이 찾아오면 그 수입으로 다시 괜찮은 선수들을 사들이는 선순환처럼.
오늘 그들이 만나기로 한 사람. 운동을 나간 지혁에게 1시간 내내 전화를 걸어 댔던 바로 그 사람이, 그 천운을 움켜쥐고 있는 주인공이었다.
* * *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생각보다 키가 작군.’
지혁은 눈앞의 안토네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당신과의 인연이…… 3년 전인가? 4년 전? 4년인 것 같군요. 그때는 앤드류 프리드먼이 단장이었는데. 시간이 빠릅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처음 듣는 얘긴데요.”
“아마 스물아홉 개 구단 중에서 가장 처음으로 당신에게 트레이드 제안을 넣었던 사람이 바로 나였을 겁니다.”
“네? 전혀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당연하죠. 프리드먼이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으니까.”
몽고메리 비스킷츠에서 이제 막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단장 겸 부사장인 크리스 안토네티는 그때부터 지혁을 주시하고 있었다.
“오랜 기간 기다린 만큼 할 말도 많습니다. 자리에 앉으시죠.”
대화는 오랜 시간 이어질 것 같았다.
* * *
스몰마켓 팀은 결코 포식자가 아니다. 정확히는 포식자일 수 없는 운명이다. 조금 괜찮은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으면 빅마켓 팀들이 그럴싸한 유망주 몇 명을 던져 주고 선수들을 낚아채 가는 것이 바로 치리노스가 지적한 시장의 원리다. 그렇게 받은 유망주를 또 키워 내고, 또 다른 유망주로 바꾸고…….
하지만 아주 가끔씩 스몰마켓 팀이 시장의 핵으로 자리 잡는 순간들이 있다. 엄청난 카드를 매물로 쥐었을 때다. 이런 상황은 극히 드물다. 사실 스몰마켓 팀들도 그런 매물이 있으면 팀에 장기 계약으로 잡아 두는 걸 최우선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 협상에 실패한 매물들만이 아주 가끔씩 시장에 나온다.
가장 최근에 시장에 나온 선수는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크리스 세일이었다. 보스턴이 낚아챘고. 그 이전에는 데이빗 프라이스였다. 디트로이트와 토론토를 거친 그 역시 보스턴으로 향했다. 초대형 매물의 최종 종착지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결국엔 빅마켓일 수밖에 없다는 증거다.
스몰마켓에서 리그를 휘어잡을 만한 선수가 등장하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인 데다가, 그런 선수가 시장에 나왔을 때 또 다른 스몰마켓 팀으로 향한다는 것은 극히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몇몇 사람들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에 뛰어드는 게 미련하다고 얘기하기도…… 했단다.
“오클랜드의 빌리 빈이 그랬습니다. 당신을 잡겠다는 꿈은 버리라더군요. 우리의 사정으로는 안 된다고. 그리고 캔자스시티의 데이튼 무어도 그러더군요. 쓸데없는 데 기웃거리지 말고 괜찮은 유망주나 알아보라고.”
지금 지혁의 눈앞에 있는 작은 사내 크리스 안토네티의 진중한 입에서 나온 말은. 뭔가 자조적이면서도 서글프기도 했다.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지혁은 분명하게 그걸 느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습니다.”
안토네티는 약간 다르다.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떤 구단 관계자들보다 훨씬 더 진중했다. 안토네티의 말투, 표정, 제스처, 눈빛 모든 것에 마주앉은 이를 몰입시키는 힘이 있었다.
“후우.”
안토네티는 잠시 눈을 감고 긴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혁은 그사이 안토네티를 살폈다. 애초에 단장 겸 부사장을 맡고 있을 정도의 사람이 직접 선수를 만나러 온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다저스의 프리드먼과 워싱턴 내셔널스의 마이크 리조 정도가 전부였으니까. 두 사람 모두 유쾌하고 유머를 잘 섞는 전형적인 미국인 스타일의 사람이었는데. 눈앞에 있는 안토네티는 정반대의 스타일임이 확실했다.
“난 승부를 걸기로 했습니다. 계속해서 걸어 왔던 것처럼, 올해에도 또. 미래의 나를 갉아먹는 선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또 다시 승부에 나설 예정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메이저리그에 남아 있는 마지막 저주를 풀어야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로고이기도 한 와후 추장의 저주. 시카고 컵스가 작년 클리블랜드를 상대로 108년의 지긋지긋한 ‘염소의 저주’에서 탈출하면서, 현재 메이저리그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지막 저주. 그게 바로 클리블랜드의 것이었다. 1948년을 마지막으로 69년 동안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현존 최장의 기록이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작년에 저주를 풀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올해에도 저주를 풀 수 있을 줄 알았고. ALCS에서 당신의 투구를 버텨 내고 끝끝내 이겼을 때, 확신했어요. 올해야말로 저주를 풀 수 있는 적기라고 말이죠. 하지만…….”
클레이튼 커쇼의 벽은 높았다. 아니, LA 다저스의 벽은 높았다.
“실패했죠, 또다시. 나는 매 년마다 내가 원하는 선수를 데려왔습니다. 유망주들을 내주고 앤드류 밀러를 잡아 왔고, 돈을 주고 에드윈 엔카나시온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이 지긋지긋한 저주에서 탈출해서 작은 도시인 클리블랜드로 우승 트로피를 가져오기에는.”
저주를 깰 수 있는 문턱 끝까지 두 번이나 도달했다. 두 번 모두 7차전까지 가는 대혈투였다. 클리블랜드에게 필요한 건 딱 1승뿐이었지만. 두 번 모두 마지막 한 경기를 잡지 못해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니 이렇게 단단해 보이는 안토네티도.
“실망하셨겠네요.”
“물론입니다. 좌절했죠.”
그때 패트릭이 잠시 끼어들었다.
“단장님, 감정적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지는 이해가 가지만. 단순히 감정적인 호소만 하시기 위해 여기까지 날아오신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떠신가요?”
“물론! 물론입니다. 다만, 내가 직접 문을 만나서 꼭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구단이 어떤 과정을 겪었고, 어떤 좌절을 했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또 도전할 것이라는 걸요.”
“협상은 여기서 하시는 게 아닙니다. 체임 블룸과 하셔야 하죠.”
안토네티는 패트릭 쪽으로 잠시 고개를 돌려 얼굴을 응시하더니, 그제야 굳은 표정을 조금 풀고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승부를 건다고 말했잖습니까?”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어떤 제안을 들고 오실 건지 들어봐도 괜찮을까요?”
패트릭은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여전히 한쪽 턱을 괸 채로 물었다. 그리고 안토네티의 이어지는 대답은 패트릭의 살짝 건방져 보이는 그 자세를 곧장 바로잡게 만들었다.
“트레버 바우어, 브래디 에이켄, 테일러 네이퀸, 1라운드 픽 한 장, 2라운드 픽 한 장. 체임 블룸이 원한다면 더.”
“……와우.”
지혁은 이게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 한번에 알아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패트릭의 표정을 봐서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까지 들어온 오퍼들 중 가장 좋은 내용이라는 것을.
“어…….”
뭔가 말하려던 패트릭의 말을 끊은 안토네티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승부를 볼 겁니다, 문. 당신의 영입이 클리블랜드의 마지막 승부수가 될 겁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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