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트릭은 다 알고 있어
11월이 훌쩍 지나갔다. 연봉 조정 중재위원회의 최종 결정이 끝나고 나면 본격적인 FA 시장이 열리고, 각종 시상식이 지나간다. 실버슬러거, 골드글러브,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 행크 아론 상, 루키 오브 더 이어…… 그리고 가장 치열했던 수상 부문이 하나 있었다.
사이 영 상.
아메리칸리그 MVP 최종 후보에도 모두 올라 있던 투수 세 명 간의 격전은 어느 때보다도 더 치열했다. 모든 사이 영 상 후보들이 다 그렇겠지만 올해는 더더욱 치열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기자들의 선호도에 맞는 투수들이 각 분야에서 독보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이다.
가장 유력했던 후보, 휴스턴의 댈러스 카이클. 압도적인 전력을 보여 줬던 휴스턴 애스트로스에서 시즌 21승 2패, 다승 1위. 평균자책점은 2.28로 3위. 그라운드 볼 비율은 무려 64%로 메이저리그 전체 1위다.
두 번째 후보, 보스턴의 후지 미유타. 엄청난 임팩트로 데뷔했던 지난 시즌에 이어 이번 시즌에는 거의 리그를 폭격하는 수준이었다. 시즌 19승 1패. 평균자책점 2.03으로 아메리칸리그 1위. 탈삼진은 281개로 리그 2위. 시즌 시작이 늦었고, 이닝 관리를 목적으로 후반에도 DL에 강제로 올라갔기 때문에 소화 이닝이 낮은 것이 유일한 흠이었다. 200.2이닝.
세 번쨰 후보. 탬파베이의 문지혁. 시즌 15승 2패, 평균자책점 2.21. 세 명의 후보 중에 소화 이닝이 가장 많았다. 219.1이닝. 눈에 보이는 클래식 스탯은 두 명에 비해 조금 모자라지만, 그건 탬파베이라는 팀에서 거둔 성적이라는 걸 감안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조정방어율을 적용하면 아메리칸리그 1위에 이름을 올린다. 운도 가장 따르지 않은 선수였다. 세 후보뿐 아니라 리그 전체에서도 득점 지원율이 가장 낮은 축에 속했다.
전통적인 가치, 그러니까 팀 순위나 다승, 승률 등에 중점을 두는 기자들은 카이클을 찍었다.
압도적인 퍼포먼스와 탈삼진처럼 소위 ‘보는 맛’을 충족시켜 주는 걸 좋아하는 기자들은 후지를 찍었고, 상대적으로 약팀의 에이스 역할을 하며 가을까지 팀을 끌어올렸다는 것에 방점을 찍은 기자들은 지혁에 투표했다.
기자들이 투표하는 각종 시상 부문에서 가장 표 차이가 치열한 부문이었다.
결과적으로 트로피는 댈러스 카이클에게 돌아갔다. 총합 152점. 2위는 놀랍게도 예상되던 후지가 아닌 지혁이었다. 총합 147점. 3위는 2점 차이로 후지. 145점. 총 510점 중 444점이 세 명에게 쏠렸다.
지혁은 사이 영을 놓친 것에 꽤 덤덤했다. 욕심이 아주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겠지만, 큰 기대를 걸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패트릭에게 듣기로는, 후지는 정말 아쉬워했다고 한다. 땅을 치면서 울었다나. 녀석은 선수 생명이 마지막 1년 남았으니까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그렇게 11월이 마무리 되어 갔다. 지혁의 트레이드 협상도 지지부진했지만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고. 11월이 넘어 겨울의 한복판으로 들어갈 즈음. 탬파베이의 프런트 오피스에서 호출이 들어왔다.
* * *
“잘 쉬고 있습니까?”
“그럼요. 11월부터는 운동을 딱 끊었습니다.”
“좋네요. 컨디션 문제로 말썽을 일으켰던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당신을 믿습니다.”
체임 블룸은 명백히 지쳐 보였다. 명백하게. 다크 서클은 물론이고 감지 못해서 기름이 잔뜩 낀 머리카락하며 배달 음식으로 대충 식사를 때운 게 확실해 보이는 셔츠의 얼룩까지.
“혹시 몇 시간이나 주무세요, 요새?”
“어…… 글쎄요. 재 보지는 않았는데. 아마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 하하하.”
손톱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는 블룸이다. 참, 저런 걸 보면 은퇴하고 나서 프런트에서 일할 일은 절대로 없겠다 싶다.
“어쨌든, 당신도 알겠지만, 트레이드 논의가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이건 우리의 약속이기도 하죠.”
시즌 중반에 있었던 식사 자리를 환기라도 하듯 지친 목소리의 블룸이 덧붙였다.
“프런트를 믿어 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트레이드 데드라인에 맞춰서 강한 요구를 할 수도 있었는데도요. 문. 당신 덕분에 우리 구단은 ALCS까지 올라갔어요. 그래서 더더욱 보내기 싫지만, 약속은 지킬 겁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구단으로, 섭섭하지 않은 조건으로, 우리 구단의 미래에도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트레이드가 진행될 거예요. 그러니 얘기를 해 봅시다.”
“잠깐, 패트릭은요? 에이전트 없이?”
“오늘 자리에서 결정할 건 아니니까요. 당신의 생각을 듣고 싶을 뿐입니다.”
조금 신경이 쓰이기는 했다. 하지만 블룸의 입장도 납득할 수 있었다. 패트릭을 상대로 말해야 하는 사람은 그곳이 어디든 피로함을 몇 배로 느낄 테니까. 블룸뿐 아니라 프런트 오피스의 모든 사람들이 피곤을 등에 지고 억지로 책상 앞에 붙어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다. 그저 의견을 나누고 검토하는 것 정도라면, 지혁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판단…….
“이봐요, 체임!”
아, 홍길동 같은 사람. 문이 벌컥 열렸고, 패트릭은 씩씩대며 서 있었다.
“패트릭.”
“이게 무슨 짓입니까? 에이전트 없이 단독으로 선수를 만나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패트릭은 그 잘생긴 얼굴로 화를 냈다. 그리고 지혁은 이제 패트릭의 수법을 거의 다 알고 있었다. 이건 앞으로의 협상에서 분위기를 가져오기 위한 전략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모든 순간에도 우세를 쥐기 위해 판단하는 사람이니까.
“난 소속 팀 프런트의 단장입니다. 그리고 문은 아직 우리 선수고. 단장과 선수가 만나는데 반드시 에이전트를 거쳐야 하는 건 아니에요. 이건 조금 무례하군요.”
“그냥 차 한잔하면서 시시콜콜한 얘기나 할 거면 둘이 백 번 만나도 상관 안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예정이 아닌 것 같은데요? 이적과 관련한 얘기를 하려면 문이 아니라 나를 만났어야 합니다!”
“하.”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패트릭의 말이 맞으니까. 패트릭은 틀린 말은 안 한다. 징그럽게 느껴질 때도 있을 만큼, 근거 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이적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거라면 지금 말해 주시죠. 당장이라도 무례한 행동을 사과하고 여기서 나가 드리겠습니다.”
“……좋아요. 앉으시죠.”
“사과는?”
“뭐라고요?”
“트레이드에 관한 사항을 몰래 진행하려고 했지 않습니까? 도의적 사과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아, 잠깐, 패트릭.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체임 블룸의 얼굴이 붉어지려고 할 때 지혁이 나섰다. 패트릭은 지혁 쪽을 한 번 쳐다보더니, 콧김을 뿜으며 지혁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고객이 됐다고 하니까 그만하는 겁니다, 단장님. 문이 레이스 구단과 나쁜 감정으로 헤어지기 싫어하기 때문에, 내가 참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패트릭이 쉬지 않고 떽떽거리듯이 몰아쳤다. 블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깊은 한숨을 쉬었다.
“좋아요. 자, 구단의 입장에서 추려 낸 제안들입니다. 말도 안 되는 오퍼들은 이미 다 거절했어요. 패트릭도 알겠지만.”
블룸은 옆에 놓여 있던 휴지통을 들어 보이며 잔뜩 구겨진 서류들로 눈짓을 보냈다. 양키스의 로고와 레드삭스의 로고도 언뜻 보였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A.J. 폴락, 크리스 오윙스, 크리스 아이아네타(연봉 보조), 랜달 델가도 ↔ 문지혁.
“애리조나는 대권 도전의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같은 지구에 다저스가 있음에도요. 엄청난 돈을 들여 잭 그레인키를 데려왔고, 유망주들을 쏟아부어 타이후안 워커를 데려왔습니다. 그러니 조건은 1군에서 뛸 수 있는 선수들이죠. 핵심 외야수인 폴락까지 포함시킨 걸 보면 의지는 확실합니다.”
“애리조나. 애리조나라…….”
“생각 있습니까?”
“다 보고 말씀드리죠.”
패트릭이 말하기도 전에 지혁이 치고 나왔다. 애리조나는 대권 도전을 말하지만. 그 지구에는 다저스가 있다. 이번 시즌 월드시리즈 우승팀이었던 다저스가. 게다가 다저스의 수장인 프리드먼은 바로 얼마 전에 지혁에게 왕조 건설이 목표라고 선언하고 가지 않았던가. 애리조나는 점점 강해지고 있는 팀인 건 맞지만, 다저스를 넘지 못하면 결국 지구 우승조차 힘든 게 현실이었다.
이후로 나온 제안은 워싱턴, 그리고 시애틀이었다. 지혁은 두 구단 모두에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워싱턴은 분명 월드시리즈 우승을 노릴 법한 전력이지만 선수들 사이에서 선호받지 못하는 구단 중 하나였고, 마이크 리조 단장과의 면담도 썩 만족스럽지 못했었다.
시애틀은 추억이 어린 구단이기는 했지만 우승에 도전하기는 힘들 것 같아 보였다.
“좋아요. 다음입니다. 다저스.”
[LA 다저스]
-야시엘 푸이그, 앤드류 톨스, 마에다 켄타(연봉 보조), 미첼 화이트 ↔ 문지혁.
“당신도 아시겠지만 프리드먼의 팀입니다. 여기서 우린 유망주 한 명을 더 얹기 위한 협상을 하고 있어요.”
“흠.”
프리드먼이 지키고자 하는 핵심 선수들은 한 명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제안서다. 블룸이 이것으로 얼마나 만족할지는 모르겠다. 코리 시거나 코디 벨린저처럼 올 시즌 주가를 올린 선수들은 몰라도, 쟉 피더슨이나 훌리오 유리아스처럼 요새는 조금 가치가 떨어지고 있는 선수들 중 한 명은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왕조를 건설하겠다더니, 지킬 건 다 지키고 딜을 하겠다는 건가.
“이걸로 만족하는 겁니까?”
지혁은 의아함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조금 날카롭게 나갔다.
“아, 글쎄요. 구단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딜이라고 봐요. 미첼 화이트라는 선수는 우리가 드래프트 때부터 주목하던 유망주였고, 터질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선수기도 하고…… 푸이그도 갱생의 여지가 충분하고요.”
“……다음 것 보죠.”
블룸은 바로 다음 서류를 내밀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트레버 바우어, 테일러 네이퀸, 브래디 에이켄, 1라운드 픽 1장, 2라운드 픽 2장, 룰5 드래프트 보상픽 1장 ↔ 문지혁.
“안토네티와는 네이퀸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말을 할 순 없지만 우리는 다른 카드를 더 선호해서요.”
지혁이 모든 선수들을 다 알고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다저스와 인디언스의 제안서는 척 봐도, 그냥 대충 느껴지기로도. 인디언스의 제안이 훨씬 더 좋아 보였다.
“자, 어떻습니까? 문? 구단은 당신이 선호하는 구단 쪽과 적극적인 딜에 임할 예정입니다.”
블룸은 지혁에게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패트릭이 했다.
“다저스와는 협상을 다시 처음부터 하셔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무슨 말이죠?”
“애리조나는 폴락과 오윙스를, 클리블랜드는 1라운드 출신 선수들을, 워싱턴은 조 로스와 연봉 보조를 얹은 제이슨 워스를 포함시켰습니다. 그런데 다저스는 이게 뭐죠?”
“…….”
“1군에서 쓸 수 있는 선수는 푸이그와 마에다 켄타. 그나마도 하락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선수들이군요. 미첼 화이트? 이 선수는 3년은 있어야 쓸 수 있겠네요. 톨스는 이미 레이스에서 제대로 키워 내지 못했던 선수잖습니까? 이 제안서는 다른 구단의 것들과 비교했을 때 무게감이 너무 떨어지는 것 같은데요.”
“구단의 전문가들이 판단한 결과입니다. 다저스의 선수들이 우리 구단으로 왔을 때의 변화, 효과를 모두 기대해서 말이죠. 패트릭, 오늘은 이상하게 계속 무례하시군요.”
패트릭이 뭐라고 대답하려 할 때 지혁이 그의 어깨를 누르며 말렸다.
“됐습니다. 패트릭, 알겠으니까 그만 좀 해요.”
그리곤 지혁은 블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애리조나, 클리블랜드, 다저스. 세 구단만 남겨 주세요. 그리고 다저스와는 조금 더 나은 딜을 하는 게 어떨까 싶네요. 이건 제 가치와도 직결되는 문제이고, 또 탬파베이 레이스라는 구단의 미래가 걸린 일이기도 하니까요. 솔직히 저도 좀 실망스러웠어요. 제 가치가 푸이그와 마에다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싶기도 하네요.”
“그런 건 아닙니다. 트레이드는 그렇게 단편적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에요, 문.”
“어쨌든 제 입장은 말씀드렸습니다. 다음에는 세 구단과 조금 더 진전된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피곤하실 텐데 쉬세요. 일어나겠습니다.”
지혁은 블룸에게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프런트 오피스를 나왔다.
복도는 고요했다. 다들 일에 파묻혀 있는 듯했다.
“……문.”
패트릭이 어느 새 지혁의 옆에서 발걸음을 맞춰 걸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왜요?”
“연기 잘 하는데요?”
“……하하.”
지혁이 어색하게 웃었다. 패트릭도 소리를 낮춰 웃었다. 프런트 오피스에서 지혁에게 전화가 왔던 순간부터, 패트릭이 이 모든 일을 꾸몄다.
패트릭의 말은 마치 예언처럼 들어맞았다. 블룸이 어떤 일로 지혁을 불렀으며, 어떤 자세로 나올 것이고, 어떤 내용을 가지고 어떻게 말할 것인지.
선수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트레이드 내용에 관한 언급을 함으로써 이번 딜에서 구단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블룸의 의도를 모두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패트릭이 깜짝 등장하는 것으로 계획을 짰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부실한 다저스와의 협상 내용에 불만을 표시하는 것까지도 전부 계획된 일이었다.
지혁은 전화가 왔을 때를 떠올렸다.
“프리드먼과 블룸은 특별한 관계죠. 사제지간이랄까? 블룸은 아직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 단장이에요. 두 사람 사이의 협상에서는 무조건 프리드먼이 주도권을 쥐고 있을 수밖에 없죠. 그러니 다저스의 제안은 아마 부실할 겁니다. 우리는 그쪽에 퇴짜를 놓으면서 이 판에서 더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구단으로 옮겨갔을 때에도 충분한 대우를 받을 수 있거든요.”
“그게 탬파베이에게도 더 도움이 되는 일이고?”
“물론.”
패트릭을 에이전트로 삼은 건, 정말 지혁 인생에서 최고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