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51화 (152/204)

결정

“나도 알아. 이건 구단의 일이지...”

휴가를 떠나 플로리다에는 없는 키어마이어를 제외하고는 탬파베이의 장기 계약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 롱고리아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커다란 손으로 턱수염이 구레나룻까지 연결되어 버린 하관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언제나 유쾌했던 아처도 마찬가지였다.

“……미안.”

사실 미안하다는 말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두 번의 생을 거슬러 생각해 봐도 이런 자리에서는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신기할 정도로 어리석은 일이지.

“됐어. 미안할 게 뭐 있어. 이게 프로의 세계인데.”

연봉 조정의 결과를 정확히 알 리 없지만, 지혁의 연봉이 최소한 1,000만 달러는 될 거라는 보도들은 연신 쏟아지고 있었다.

라이언 하워드가 세워 둔 기록을 뛰어넘어 연봉 조정 1년 차에 최고액을 갱신할 것이라는 짐작은 거의 진실처럼 돌아다녔고.

소속 팀이 하필이면 리그 최고의 스몰마켓인 탬파베이이기 때문에, 지혁의 이런 몸값을 챙겨 줄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은 추측을 넘어 확신에 가까웠다.

그러니 롱고리아같이 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선수들은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개인적인 아쉬움이 짙게 남았을 뿐이었다.

“어디로 가게 될지 들은 건 있고?”

“아직은, 딱히. 잘 모르겠어.”

지혁은 거짓말을 했다. 상황이 조금 묘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양키스나 보스턴으로는 안 갔으면 좋겠어. 매번 만나야 하니까.”

“그래. 너랑 마주치는 건 별로야.”

“하하, 그래. 어차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어서…… 구단이 알아서 해 주겠지.”

속 시원히 얘기할 수 없는 게 바로 트레이드의 세계다. 혹시라도 말을 잘못 꺼냈다가 어디서 말이 새어 나갈지 모른다. 선수들끼리도 그걸 너무 잘 알고 있으니 그 이상으로 캐묻지 않는다. 예의 같은 것이다.

“술이나 한잔하자. 언제 또 이런 자리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니까.”

맥주병 끄트머리를 들고 한 번씩 부딪쳐 본다. 지혁이 탬파베이에 남아 있는 동료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마음 표시였다. 정이라는 건 깊어도, 프로의 세계에서는 쓸데없는 일이기도 하다.

* * *

다저스의 2차 제안에는 마에다와 톨스가 빠지고 쟉 피더슨과 이름 모를 유망주 하나가 들어왔다. 프리드먼은 아마 속이 꽤나 쓰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피더슨의 이번 시즌 성적은 .237에 홈런 16개, 타점 48개. 다저스의 자체 팜에서 탄생한 대형 외야수가 될 것이라고 믿었던 선수다. 물론 그 평가는 아직도 유효하지만, 개선되지 않는 좌타자 상대의 컨택률과 오히려 점점 떨어지고 있는 선구안 때문에 최근의 가치는 조금 떨어졌다. 잔부상도 꽤 달고 있는 편이다.

코리 시거가 내야의 핵이 되어주고, 쟉 피더슨이 외야의 핵이 되어 주길 바랐던 다저스 입장에서는 아쉬운 일일 것이다. 게다가 외야에서 코디 벨린저가 갑자기 튀어나와 엄청난 활약을 보여 주었고, 마이너리그에는 다저스 조직의 모든 선수들 중 최고의 컨택을 자랑한다는 알렉스 버듀고도 대기하고 있다.

그러니 프리드먼이 굳이 자신의 카드 중 하나를 트레이드에 끼워 넣는다면 피더슨이 될 수밖에 없었을 터다. 여기까지가 지혁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프리드먼은 이게 문제입니다. 하, 참.”

소식을 들은 패트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죠?”

“프리드먼은 트레이드를 잘하는 사람이죠.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해요. 자신의 카드를 지나치게 아끼려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상대 팀의 가려운 곳을 정확하게 긁어 주지를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박을 쳤기 때문에 칭송을 받는 거라구요.”

“탬파베이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다?”

“네. 여기는 유리아스가 들어왔어야 해요. 탬파베이에는 이미 중견수 자리에 키어마이어가 있어요. 피더슨을 좌익수로 돌릴 수야 있겠지만 탬파베이가 기대하는 수비력에는 미치지 못하는 선수입니다. 훌리오 유리아스가 미래의 리그 에이스가 될 것이라고 얘기들 하지만, 어깨 수술도 했고. 그런데도 프리드먼은 아까워하고 있는 거죠.”

지혁이 기억하기에도 유리아스는 리그에서 손꼽히는 선수가 되는 투수 중 하나였다. 프리드먼의 선수 보는 눈은 확실하다. 왕조를 건설하기 위해 몇 년 뒤까지 내다보는 중이라면 그는 제대로 선택한 셈이다. 하지만 패트릭의 말이 타당하다면. 탬파베이의 입맛에 맞지 않는 제안이 계속된다면.

향하게 될 곳은 어쩌면 결정이 났는지도 모른다. 반전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 *

[속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탬파베이에 새로운 트레이드 제의. 프란시스코 메히아 포함!

탬파베이 레이스의 선발투수 문지혁을 영입하기 위한 경쟁이 뜨겁다. LA 다저스의 트레이드 제안에 쟉 피더슨이 포함되어 있다는 루머가 돌며 문지혁의 종착역이 다저스로 사실상 확정되어 가던 도중, 클리블랜드가 전미 마이너리그 유망주 랭킹 21위이자 팀 내 유망주 랭킹 1위인 포수 프란시스코 메히아를 포함시킨 새로운 제안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클리블랜드의 크리스 안토네티 단장은 이것을 사실이라고 확정지었다. 안토네티 단장은 “트레버 바우어, 브래디 에이켄, 프란시스코 메히아와 내년 2라운드 지명권, 내후년 1라운드 지명권을 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또한 “문을 영입하기 위해 우리는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라고 덧붙이며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반면 다저스의 프리드먼 단장은 이 소식에 대해 코멘트를 거부했다.

……하략…….

* * *

LA 다저스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건 두 팀 중 어느 곳으로 가더라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도전할 수 있는 팀이라는 건 같다.

다저스는 월드시리즈 우승팀이고, 클리블랜드는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준우승 팀이다.

지혁은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갑자기 제3의 후보지 중 하나로 떠올랐던 애리조나는 계속되는 두 팀의 입찰 레이스에 따라올 만한 총알이 없다. 어차피 결정권은 구단이 가지고 있고, 탬파베이가 어느 구단을 고르건 나쁘지 않다. 어디로 이적해도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판은 마련되었다.

다저스에 간다면 왕조 구축의 일원이 될 것이고.

인디언스에 간다면 저주를 풀어내는 공신이 될 것이다.

차분하게 협상 완료를 기다리는 12월이 지나가는 중이다. 탬파베이 생활을 잘 정리하고, 새로운 도전에 나설 날만 기다리는 한 달이다.

* * *

-좋습니다. 그러면 이 조건으로 하죠.

“오케이! 호우! 앤드류가 상대여서 걱정을 좀 했는데.”

체임 블룸의 입에서 오케이 소리를 듣기가 너무 어려운 지난 두 달이었다. 안토네티는 전화기 너머 블룸이 어떤 표정일지 상상하며, 또 LA의 따뜻한 날씨 속에서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을 프리드먼을 상상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많은 것들이 오가는 테이블이었다. 이동하는 선수들도 중요했지만, 이 테이블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프리드먼과 블룸과의 관계. 프리드먼과 탬파베이와의 관계. 앞으로 몇 년을 내다보는 프리드먼의 비전.

안토네티와 클리블랜드의 입장에서, 이겨야 할 것은 단순히 다저스가 아니었다. 전 탬파베이 단장 출신이자, 자신의 프런트를 그대로 탬파베이에 물려놓고 다저스로 향한 프리드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투자해야 했다. 1라운드 전체 3번 출신인 트레버 바우어. 1라운드 출신이자 문제가 조금 있었지만 전체 1픽으로 뽑혔던 경험도 있는 브래디 에이켄, 팀 내 최고의 유망주인 프란시스코 메히아. 여기에 유망주들이라면 환장하는 탬파베이에게 내줄 1라운드 지명권 한 장과 룰5 드래프트 지명권 한 장까지.

미래를 갈아 넣었다. 우승을 위해.

“사무국에 연락하겠습니다.”

-네.

“발표도 곧장 하죠.”

-음, 저희 쪽에서 처리할 일이 있어서, 처리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늦어도 이틀 안에는 해결하죠.

“Come on 체임, 당신도 알잖아요? 우리는 분명히 너무 많이 올려놨다구요. 이런 건에서까지 그렇게 빡빡하게 굴지 맙시다. 한번쯤 우리 쪽에 맞춰 줘도 괜찮잖아요?”

수화기 속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체임 블룸이 알겠다는 답변을 내놨다. 만족스럽게 전화를 끊은 안토네티가 자신의 책상을 쾅 내리치며 만세를 불렀다.

“예쓰! 예쓰! 예에쓰! 아비게일! 지금 당장 사무국에 팩스를 넣어! 던 딜이야!”

69년 동안 이어져 온 와후 추장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 클리블랜드가 슈퍼 문을 품었다.

* * *

따뜻했던 플로리다는 안녕이다. 지혁은 플로리다에서 처리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쳤다.

티미의 가게에 들러 멋지게 골든 벨을 울려 주었고, 탬파베이에서 안면이 있던 모든 스태프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연두와도.

여전히 연두는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세이버매트릭스상으로도 지혁을 보낸 게 더 손해일지도 모른다고 툴툴댔다.

플로리다 쪽 담당 기자인 샘 호킨스와도 식사를 한번 했고,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메이저리그 구단을 돌며 취재를 하고 있는 예은과도 인사를 나눴다. 내년에는 클리블랜드 쪽에서 자주 보자고 덧붙였다.

텍사스의 최성수 선배는 자신의 친정 팀이나 다름없는 클리블랜드로 향한다니까 신이 나 이것저것 얘기해 주며 언제든 연락만 달라고 했다.

랭카스터 감독, 힉키 코치와 캐쉬 코치. 그들과의 이별도 아쉬웠다. 전생의 지혁이었다면 코칭스태프로부터 이렇게 무한 신뢰를 받는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팀의 에이스 대접을 해 주는 코칭스탭들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팀을 옮겨도 여전히 당신들의 지도력을 그리워할 거라는 말을 덧붙여 주었다.

허니웰, 드 레온, 스넬. 앞날이 창창했고 유독 지혁을 잘 따라 배우려던 어린 녀석들도 떠나려니 눈에 밟혔다. 돌이켜 보니, 훗날 좋은 투수로 자랄 녀석들을 앞에서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퍽 자랑스럽기도 했다. 만약 나중에 잘되면 문 덕분에 제구를 잡았다고 꼭 인터뷰하라고 반 농담으로 말해 주었다.

그것이 따뜻한 남쪽 나라, 플로리다에서의 마지막이었다.

* * *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클리블랜드 홉킨스 국제공항.

한국에서 온 기자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게이트를 빠져나올 때부터 플래시를 터뜨리며 달라붙은 기자 무리 덕분에 주위의 이목이 확 집중되었다.

“문지혁 선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트레이드되었는데요, 느낌이 어떠세요?”

“문지혁 선수! 이쪽 한 번 봐 주세요! 이쪽이요!”

“탬파베이를 떠나 우승이 가능한 팀으로 이적하게 되셨는데……”

쏟아지는 마이크에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본심이 먼저 튀어나왔다.

“어우, 추워.”

공항 밖으로 소복이 내린 하얀 눈이 보인다. 고작 몇 시간을 날아왔을 뿐인데. 플로리다에서는 볼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입에서는 하얀 김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게, 진짜 북쪽으로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기자들의 호위 아닌 호위를 받으며 공항을 빠져나가는 동안 여러 질문들에 건성으로 대답을 해 주고는, 구단에서 마련해 준 차에 몸을 실었다. 차창에 살얼음이 낀 것이 신기했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글쎄요, 엄청 춥긴 하네요.”

“날씨에부터 빨리 적응해야겠네요.”

패트릭은 굳이 많이 묻지 않았다. 지혁의 표정만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기분이 스쳐 가고 있다는 것을.

이적이란 늘 그렇다.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고,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고, 또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니까. 클리블랜드에서도 탬파에서처럼 성공을 거둘지 아니면 처참하게 실패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최소한 새로운 미래를 시작하는 시점에서의 기분이란 언제나 비슷하다.

설렘과 공포의 공존이다.

“지금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클리블랜드의 랜드마크인 타워 시티 센터입니다. 이제 5분만 더 가면 구장에 도착합니다.”

구단의 운전기사가 창문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혁은 턱을 괴고 앉아 새로운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 차량이 멈추었다. 거대한 주차장에 들어서자 왼쪽에는 NBA 경기장인 쿼큰 론스 아레나가 보였고, 오른쪽으로는 프로그레시브 필드가 높이 솟아 있다.

“도착했습니다. 문.”

“감사합니다. 팁을 따로 드려야 하나요?”

“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구단에서 이미 충분히 받았습니다. 하하. 극진하게 모시라고요.”

“어유, 뭘 그런 말씀까지.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지혁은 웃으며 내리려 했다. 운전기사는 자신이 쓰고 있던 모자를 정중히 벗으며 지혁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Welcome to Cleveland. 당신이 우리의 저주를 풀어 주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운전기사의 손을 맞잡은 순간에, 마음이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감사합니다. 제가 그것 때문에 여기 왔으니까요.”

입성이다. 클리블랜드로. 높이 솟아 있는 프로그레시브 필드의 안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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