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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처리, 회귀하다-152화 (153/204)

Loser’s city Loser’s city

“웰컴! 문! 환영합니다. 하하하.”

안토네티는 단장실 안에 들어선 지혁과 패트릭을 보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달려 나왔다. 대대적인 환영식을 준비하고 있는 듯, 직원들은 매우 분주해 보였다.

“당신의 영입으로 우리는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네요, 하하.”

안토네티의 표정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지혁을 영입하고 이렇게까지 기뻐해 준 단장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내년은 우리가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지 딱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제는 지긋지긋했던 저주를 벗어날 때가 됐죠. 당신이 그 역할을 해 주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클리블랜드에 합류하게 되어 기쁘네요.”

지혁이 말을 할 틈도 없이 자신의 기쁨을 표현해 대던 안토네티는 지혁의 답변에 더욱 환하게 웃었다. 땅딸막한 체구의 안토네티는 의외로 표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클리블랜드로 꼭 합류해 주길 바란다며 진지하게 설득하던 모습만 기억에 남았었는데, 이건 또 나름대로 의외였다.

“단장님, 기자회견 준비가 끝났습니다. 바로 진행할까요?”

“아, 잠시만. 문, 피곤하진 않습니까?”

“뭐,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면 그냥 진행해도 괜찮습니다.”

“No! 당신이 조금이라도 피곤하면 기자들은 다시 부르면 그만이죠.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안 좋다면 말해 줘요.”

“아…… 전 괜찮습니다. 기자회견은 충분히 할 수 있어요.”

“Hell yes! 좋습니다. 지금 바로 이동하시죠.”

지나치게 텐션이 올라 있는 안토네티가 다시 한 번 지혁의 손을 꽉 맞잡았다. 안토네티의 손을 타고 그의 흥분이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 * *

첫 번째 질문이 시작되었다. 본인을 클리블랜드 지역 네트워크 채널에서 34년을 근속한 수석 기자라고 소개한 폴렌카는, 아주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며 물었다.

“클리블랜드의 첫인상은 어떠십니까?”

“어, 좋습니다. 좋고…… 뭐라고 할까요, 확 다른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까지 제가 살았던 플로리다의 탬파는 아주 조용하고,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었습니다. 겨울도 선선하다는 느낌이 더 어울리는 곳이었죠.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자리에 모인 클리블랜드 지역지 기자들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일단, 아주 춥네요. 하하.”

지혁의 농담에 기자들도 같이 웃었다. 옆에 같이 앉은 안토네티 단장도 웃었다. 기자회견장의 분위기는 시작부터 화기애애했다.

“농담이고요. 아, 물론 추운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겠네요. 제가 아직 클리블랜드라는 도시에 완전히 적응하지는 못했지만, 이곳은 아주 추우면서도 또 아주 화끈한 도시라는 걸요. 많은 여러분들의 열광적인 반응 때문에 추운데도 춥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요.”

“Yes!”

“클리블랜드를 금방 사랑할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폴렌카의 질문을 시작으로, 기자들의 질문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언제나 그렇듯이 적의를 가진 기자들도 있었지만 지혁과 안토네티는 유하게 넘겼다. 오늘은 좋은 자리니까.

“안토네티 단장님! 문의 등 번호는 어떻게 됩니까?”

“오, 마침 잘 질문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계속 질문만 받다가 공식 행사를 놓칠 뻔했어요. 지금부터 문의 유니폼을 공개하겠습니다.”

자신의 비서로부터 준비된 유니폼을 이어받은 안토네티 단장이 두어 번 탁탁 털더니 가슴 높이까지 들어 기자들의 카메라에 흔들어 보였다. 하얀 바탕, 가슴팍에 쓰인 CLEVELAND. 그리고 모자 한가운데에 위치한 와후 추장의 로고. 그리고 등 번호.

지혁이 탬파베이에서 달고 뛰었던 18번은 달 수 없었다. 클리블랜드의 영구결번이었기 때문이다. 통산 223승을 거둔 위대한 투수이자 동시에 위대한 투수코치이기도 했던 멜 하더의 번호였다. 더 이상 18번을 달 수 없다는 말에 그냥 아무 번호나 달라고,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한 지혁이었다.

“문의 등 번호를 무엇으로 정할지 꽤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여러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했는데요.”

“혹시 70번입니까?”

기자 중 한 명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안토네티의 말을 끊고 물었다.

“하하, 스마트하시군요. 우리는 문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70년의 아쉬움을 달래 줄 선수니까요. 현장의 테리 프랑코나 감독, 코칭스태프들, 선수들의 의견을 모두 종합했을 때. 70번을 달고 뛰는 문은 많은 선수들에게 의지를 고취시켜 줄 거라고 여겼습니다.”

안토네티는 유니폼을 크게 휘두르며 뒷면을 앞으로 내보였다.

MOON. 70.

“다시 한 번 공식적으로 발표하겠습니다. 슈퍼 문이 클리블랜드에 왔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찾던 마지막 퍼즐입니다. 문을 통해 우리는 70년의 한을 풀어낼 것입니다.”

안토네티는 지혁에게 유니폼을 입혀 주었다.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가 동시에 터지며 눈이 부시게 만들었다. 지혁은 웃으며 새 유니폼에 두 팔을 끼워 넣었다. 참 오랜만이었다. 다른 유니폼을 입는다는 것.

모든 것이 새롭다. 새로운 팀, 새로운 유니폼.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새로운 기자들, 새로운 언론. 내년부터 경기장을 찾아올 새로운 팬들까지. 마치 프로 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것 같은 설레는 기분이었다.

* * *

기자회견이 끝나고 나서, 지혁은 클리블랜드 구단 측의 협조하에 야구장 근처에 큰 집을 하나 장만했다. 자그마하긴 했지만 2층이 딸린 복층형 집이다. 더 크고 조용한 집을 살 수도 있었지만, 최대한 야구장에서 가까운 곳을 찾다 보니 조금 작은 집이라도 감수하기로 했다. 다만, 구단에서 중개해 준 부동산 관리인은 방음 장치를 꼭 설치하는 것이 좋다고 추천했다.

“방음이라고?”

지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도심 한복판에 거주해본 적은 없었던 터다. 하지만 부동산 관리인은 오늘 밤이면 알 수 있게 될 거라고 눈을 찡긋거릴 뿐이었다.

그날 밤. 야구장에서 불과 3~400미터 남짓 떨어진 거리에 있는 지혁의 방. 커튼 사이로 번쩍번쩍한 불빛이 언뜻언뜻 스쳐갔다. 한참 동안이나 웅성거림이 계속되었다. 조용한 휴양지에 불과했던 탬파에서는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었던 일이었기에, 지혁은 테라스로 나가 클리블랜드의 거리를 내다보았다.

“뭐야? 이거 대체 뭐야?”

마치 축제 퍼레이드라도 하는 것처럼 엄청난 인파가 한 곳을 향해 움직이는 장면. 정말 장관이었다. 그들은 모두 진홍색 바탕에 노란 줄무늬가 그려진 농구 져지를 입고 있었다.

“LBJ! LBJ! LBJ!”

“Beat the warriors!”

“Let’s go CAVS! Let’s go CAVS!”

거리 응원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대도시들이라고 보기에는 힘든, 오히려 낙후되고 조금은 비루해 보일 정도의 거리에 열정이 살아 꿈틀대고 있었다.

지혁은 재빨리 TV를 켜서 스포츠 채널을 틀었다. 오늘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NBA 경기가 바로 이곳 클리블랜드에서 펼쳐지는 날이었다.

“이런, 오늘 밤은 잠은 다 잤네.”

지혁은 농구장으로 향하는 인파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하, 아무래도 방음 장치는 꼭 설치해야 할 것 같았다.

* * *

지혁이 클리블랜드에 안착해서 적응하는 시기를 겪는 와중에 패트릭은 보스턴으로 향했다. 후지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함이었다. 후지 녀석은 남은 선수 생명이 1년뿐이다. 올해가 마지막이다. 힘겨울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언젠간 지혁에게도 찾아올 날이겠지. 아직 지혁에게는 7년이나 남아 있지만 말이다. 여튼 패트릭이 정서적으로 후지를 도와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패트릭이 누굴 정서적으로 도와준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 걸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 아니고 말고. 후지는 혼자서 그 중압감을 견뎌 내야만 할 것이다.

어쨌든,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시간을 보내는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후지는 후지대로, 패트릭은 패트릭대로. 또 도미니카에서 자신의 휴양을 자랑하는 셀카를 하루에 수십 장도 더 보내고 있는 페르난도 멘데스도.

지혁도 물론 지혁 나름대로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아침에는 실내 연습장에서 달리기를 하거나 웨이트를 하면서 몸을 서서히 끌어올릴 준비를 한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한 뒤에는 주로…… 다양하게 바빴다. 클리블랜드 구단은 지나칠 정도로 세심하게 배려를 해 주고 있었다.

덕분에 쿼큰 론스 아레나에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경기를 관람하기도 했고, 또 하루는 클리블랜드의 박물관 투어를 다니기도 했다. 때로는 귀찮을 정도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이런 약간의 일탈은 꽤 재미있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들이 몇 개 있다. 다른 도시의 사람들이 클리블랜드를 이렇게 부른다는 것.

‘Loser’s city(패배자들의 도시)‘.

클리블랜드는 패배자들의 도시였다. 인구가 많지도 않고, 탄광 도시였다 보니 경제적으로 봤을 때 도시의 전성기도 지나갔고, 스몰마켓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 도시. 미국의 4대 스포츠 중에서 세 개 종목의 스포츠단을 운영하고 있지만. 클리블랜드는 처절하게 음울한 지난날을 보낸 도시였다.

메이저리그의 인디언스는 69년째 우승을 못하고 있고, NFL(미식축구)의 브라운스 역시 52년째 우승이 없다. 인디언스는 저주에 걸려 있고, 브라운스에게는 ‘슬픔을 찍어 내는 공장’이라는 악명도 붙어 있다. 끊임없는 패배와 괄시의 나날들을 보냈다. 2015-16 시즌 르브론 제임스가 이끄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NBA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클리블랜드로 트로피를 가져오기 전까지.

그 전까지 클리블랜드가 미국의 챔피언이 된 가장 최근의 케이스는 NFL의 클리블랜드 브라운스가 거둔 1965년의 우승이었다. 무려 49년 만에 클리블랜드에서 챔피언이 탄생한 날이었으니, 그날의 미친 듯한 열광과 광란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NBA 우승 퍼레이드 당시 130만 명이나 거리로 달려 나와 우승의 달콤함을 노래했다고 한다. 지혁이 느끼기에 길거리를 가득 메운 클리블랜드의 축제는, 마치 시카고 컵스가 염소의 저주를 풀어냈을 때와 비슷했다.

“아니죠, 문. 그것보다 훨씬 더 대단했죠. 우린 정말 미친 사람들이라구요.”

“하하하.”

“인터뷰는 잠시 미뤄 두죠. 클리블랜드에서 나고 자란 제 입장에서는 시카고 녀석들이 하는 말을 참을 수가 없거든요. 그동안 시카고가 비참했다고? 하! 최소한 지들은 마이클 조던을 데리고 있었잖아요!”

지혁과 인터뷰를 하는 스포츠 기자들은 특히 더더욱 핏대를 올리곤 했다. 사람들의 말에 민감한 기자들이기에 더더욱 그럴 것이다.

“패배자들의 도시라는 조롱은 정말 겪어 본 사람만이 알아요. 내 나이가 올해로 서른여덟이거든요?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 언제나, 늘! 그런 조롱을 듣고 살았어요. 내 고향 클리블랜드는 안 되는 곳이라고 말이죠. 무슨 짓을 해도, 무슨 발악을 하더라도 클리블랜드는 절대 안 된다구요.”

“야구는 잠시 강했었지 않나요? 90년대인가?”

“시즌의 챔피언이었죠. 하지만 최고의 위치에는 올라가지 못했어요. 어떤 선수를 기억합니까?”

“매니 라미레즈, 짐 토미, 음…… 아, 오마 비즈켈. 케니 로프턴도 있었나요?”

“물론이죠. 로베르토 알로마를 빼 놓으면 안 됩니다. 하하. 투수진에서는 오렐 허샤이져가 대단했고 바톨로 콜론도 그 때는 좋았어요. 클로져에도 호세 메사가 있었구요.”

이미 이 기자는 인터뷰를 반쯤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클리블랜드의 역사를 늘어놓는 데 잔뜩 심취해 있었으니까.

“지금 돌이켜 봐도 멤버는 참 화려했는데. 어떻게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한 거죠? 아, 오해하지 마세요. 공격하려는 건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익숙하거든요. 1995년 월드시리즈에서는 글래빈, 스몰츠, 매덕스, 에이버리의 애틀란타를 만나서 졌고. 1997년 월드시리즈에서는 플로리다 말린스한테 7차전 11회에 끝내기 안타를 맞았죠. 후, 렌테리아. 그 이름은 아직도 잊지 못해요. 에드가 렌테리아.”

지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재작년에는 시카고 컵스에게…… 그리고 작년에는 LA 다저스에게. 하하, 이게 인디언스의 역사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도 이해가 되네요. 아, 미안해요. 조롱하려는 걸 옹호하는 건 아니고요.”

기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지혁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당신이 꼭 풀어 줬으면 좋겠어요. 클리블랜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숙원을. 당신이 슬픈 과거를 지닌 이 도시에 합류한 건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니까요.”

진지하기 그지없는 기자의 부탁에,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힘차게.

“저도 그러기 위해서 이 도시에 왔습니다. God Bless, Cleve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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