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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처리, 회귀하다-153화 (154/204)

이상한 의사와 이상한 코치

이상한 의사와 이상한 코치 유산소 운동, 웨이트 트레이닝, 휴식. 다시 러닝, 웨이트 트레이닝, 다시 휴식.

지혁의 겨울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단어였다. 물론 클리블랜드라는 도시에 녹아 들어가는 일도 짬짬이 병행했다. 그동안 메이저리그의 팀원들과 만나지는 못했지만, 팀 차원에서 진행하는 지역 봉사 활동에 몇 번 참가해서 마이너리그의 몇몇 선수들과는 안면을 텄다.

마치 허니웰이 그랬듯이, 클리블랜드의 마이너리그 선수들도 지혁을 보고는 우상처럼 떠받들어 주는 기분 좋은 경험을 한 것은 덤이다.

다시 새해를 맞았다. 2018년이 시작되었다. 1월 둘째 주가 되자마자, 지혁은 구단의 실내 훈련장을 예약했다. 이제 공을 슬슬 던지며 시즌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

구단 측에서도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원래 몸을 빨리 만들기 시작하는 지혁인데다가 지금의 페이스는 평소보다도 조금 일렀으니까.

그중 가장 놀란 건 단장이나 코치들이 아닌 의사였다. 클리블랜드의 담당 주치의 중 한 명인 닥터 시니에는 지혁이 공을 던질 거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짧은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구단으로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닥터 시니에라고 해요. 우린 구면이죠? 메디컬 테스트 때.”

“아, 네. 그때 봤죠.”

“다시 한 번 인디언스에 온 걸 환영해요. 그런데, 벌써부터 공을 던지겠다고요? 원래 루틴이 그런가요?”

“아뇨. 평소보다 2주 정도 이르긴 한데, 그래도 새 팀에 왔으니까요. 뭔가 좀 새로운 기분이라서. 하루라도 빨리 공을 잡고 싶네요.”

“보통 이 시기에 시작하는 투수들은 없는데.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어요.”

“탬파베이에 있을 때의 담당 주치의인 닥터 로즈베리도 항상 그런 말을 했죠. 하지만 저는 원래 일찍부터 몸을 만들어 올리는 게 습관이에요. 벌써 20년도 넘었어요.”

시니에의 푸른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20년이라고요?”

“아, 아뇨. 말이 그렇다는 거죠. 야구를 시작한 이후로 쭉 그랬다는 말이에요.”

“깜짝 놀랐잖아요. 스물여섯 살밖에 안 된 선수가 20년이나 그래 왔다고 해서요.”

탬파베이의 닥터 로즈베리는 깐깐한 사감 선생님 같은 느낌이었는데. 닥터 시니에는 살짝 웃을 때마다 눈꼬리가 강아지처럼 휘어지는 게 귀여운 상이었다.

“그럼 혹시 공을 던지는 걸 좀 봐도 괜찮을까요?”

“……직접요?”

“네.”

“상관은 없는데…… 그게 뭔가 의학적인 도움이랑 연결되나요?”

지혁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시니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뇨, 그냥요. 투수들이 공 던지는 건 언제나 멋있으니까요.”

“네?”

“멋있어서 본다구요. 책상 앞에 앉아서 차트만 바라보는 생활은 지겨워서요. 더구나 구단 주치의라는 사람들은 비시즌 중에 하는 일이 정말 없거든요.”

시니에가 몸을 지혁 쪽으로 숙이며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 음, 뭐라고 할까. 도토리를 숨겨 놓을 곳을 찾고 있는 다람쥐 같다고 해야 하나. 왜인지 모르겠지만 시니에라는 여자의 모습에서 자꾸 동물이 연상되곤 한다.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그럼 편한 대로 하세요. 어쨌든 공을 던져도 된다는 거죠?”

“네.”

“알겠습니다. 그럼 가실까요?”

“예!”

* * *

고요했다. 따로 경기가 없을 때에도 구단에 상주하곤 하는 불펜 포수들조차도 휴가를 받아 아무도 없는 실내 훈련장에서, 지혁은 익숙한 사람처럼 몸을 풀었다.

지혁이 혼자 달리면서 스파이크가 인조 잔디에 박히는 소리와, 내부 기온 유지를 위해 돌아가고 있는 히터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시니에는 구석 한쪽에 마련된 커다란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조몰락거리며 지혁을 흘깃흘깃 쳐다보곤 했다.

달리기로 몸에서 땀을 충분히 낸 이후에는 스트레칭이다. 손목과 발목에서 시작해 종아리, 무릎, 허벅지, 허리 순으로 하반신을 풀어 준다. 손가락과 손등, 손바닥도 꼼꼼하게 점검한 뒤 팔과 어깨를 빙빙 돌린다. 어깨를 잡고 팔을 안쪽으로 쭉 끌어당겼다가 놨다가를 반복하는 데 몇 분이나 쏟아야만 한다.

“꽤 유연한 편이시네요?”

“이 정도가요?”

한참을 지켜보던 시니에가 묻자, 지혁이 어이없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 정도는 투수라면 누구나 갖추고 있는 유연함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또 그게 사실이었다. 어디 가서 유연하다는 소리는 잘 듣지 못했다. 그렇기에 스트레칭에 큰 시간을 소화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뇨.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심심해서.”

“……그러니까 왜 여기 있는 건데요?”

“그냥 보려구요.”

다리를 양옆으로 넓게 벌리고 앉아 몸을 왼쪽으로 잔뜩 굽혔던 지혁이 숨을 참느라 조금 붉어진 얼굴을 일으켰다. 이상한 의사였다.

“그러면 이거나 좀 도와주세요. 그냥 그러고 있으면 심심할 테니까.”

“스트레칭? 좋아요. 내 전문 지식을 잘 살릴 수 있는 분야죠. 아주 좋은 선택이에요. 미스터 문.”

시니에는 지혁을 이상하게 불렀다. 어쨌든, 지혁은 몸을 있는 힘껏 앞으로 숙여 잔디에 배를 댈 정도까지 내려갔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 과정을 거쳐 내야만 롱 토스나 투구에 들어갔을 때 복부와 옆구리 쪽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하나. 둘. 셋. 넷…….”

시니에는 지혁의 뒤에서 등을 지그시 누르면서 숫자를 세어 주었다.

‘흠, 이상하네.’

누군가 밀어 줘서 그런가? 평소보다 훨씬 덜 힘든 것 같았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으로 아우성을 치는 배를 느끼며 참아 내야 하는 일인데.

“……헤-이, 닥터 시니에. 뭐 하는 중이야?”

스트레칭의 정적을 깬 건 낮은 목소리였다.

“앗, 코치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보네요?”

“그래. 그런데 지금 뭐 해? 깔고 있는 놈은 또 누구고?”

시니에가 지혁의 등 뒤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혁도 따라서 상체를 들어 올렸다.

짧게 자른 머리와 갈고리 같이 생긴 짙은 눈썹이 대번에 눈에 들어왔다. 지혁도 아는 얼굴이었다. 한국 선수가 한 명도 없는 클리블랜드 소속이고, 현역 선수가 아닌 코치임에도 한국에서도 꽤 유명한 사람.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문지혁입니다.”

“너로구만! 그래. 팀에 합류했다는 소식은 들었어. 마이클 캘러웨이. 그냥 미키라고 부르면 돼.”

“한국에서 뛰셨었죠? 알고 있습니다.”

“하하, 횬-대.”

미키 캘러웨이. KBO의 현대 유니콘스에서도 선수 생활을 한 경력이 있는 투수 코치다. 캘러웨이가 직접 키워 낸 선수들이 지금 클리블랜드의 선발진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사이 영 수상자였던 코리 클루버부터 시작해서 카를로스 카라스코, 대니 살라자르, 조쉬 톰린까지. 모두 캘러웨이를 만나고 나서 전혀 다른 투수가 된 선수들이다. 그래서 지혁도 나름 기대하고 있었다. 캘러웨이라는 좋은 투수 코치를 만나면 어떻게 또 바뀔 수 있을지.

“그런데 지금 뭐 하고 있던 거야?”

“보시다시피…… 스트레칭이요.”

“흠…… 그래?”

캘러웨이는 지혁과 시니에를 번갈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시니에는 눈꼬리를 다시 휘어 내며 물었다.

“코치님. 휴가는 잘 보내셨어요?”

“나야 뭐, 그냥 그랬지. 집에서 딸내미랑 놀아 주고, 영화나 보고, 노래나 부르고. 언제나 똑같으니까.”

“그게 휴양이죠! 가족들이랑 함께 집에서 쉬는 게 얼마나 좋아요? 전 하루 종일 연골만 바라보고 있거나 근육이나 인대랑 놀아 줬거든요.”

“대신 이걸 많이 받잖아.”

캘러웨이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동그라미 모양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닥터 시니에, 여기는 왜 왔어?”

“아, 문이 공을 던지기 시작할거라고 해서 보려고 왔어요.”

“병원에서 도망쳤구만?”

“네. 비밀로 해 주세요.”

시니에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왜 꼬리가 없는지 궁금해졌다. 짧은 꼬리만 달려 있으면 딱 사람 좋아하는 강아지 모습인데.

“여튼, 문. 마침 잘됐어. 꼭 해 보고 싶은 일이 있었거든. 네가 팀에 합류한다길래.”

“예? 저한테 뭘요?”

“너는 아주 흥미로운 녀석이야. 내가 널 상대하려고 얼마나 많은 연구를 했는지 모르지? 하하, 너보다 너를 더 잘 알게 됐거든. 좋아! 자. 일단 내가 공을 좀 받아 주지. 받아 보고 얘기하자고.”

캘러웨이는 자신의 글러브를 찾아와 끼고는 지혁과 간단한 캐치볼을 시작했다. 시니에는 어느새 벤치에 앉아서 두 사람의 캐치볼을 넋 놓고 구경 중이었다.

“오! 굿 볼!”

새삼스럽게도, 캘러웨이는 지혁의 공이 글러브로 빨려들 때마다 감탄사를 내뱉곤 했다. 프로 단계에서 캐치볼만으로? 이런 건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캘러웨이는 이게 한국식이라고 했다. 현대 유니콘스에서 뛸 때는 선배들의 공을 받은 후배들은 무조건 굿 볼을 외쳐야 했다나.

“자, 투구로 한번 들어가 볼까?”

“앉아서 받으시게요?”

“그래. 너, 겨울 내내 몸 관리를 제대로 했어. 팔이 정확하게 똑같은 각도에서 돌고 있으니까. 팔꿈치 높이도 아주 일정하고. 어깨가 들리는 정도도 똑같아. 겨울 내내 먹고 놀기만 했다면 몸의 밸런스가 분명히 틀어지게 되어 있거든. 그런데 넌 그런 게 전혀 없어. 그러니 투구를 해도 괜찮을 거다.”

캘러웨이는 폼만 보고도 지혁의 컨디션을 간파해 낸 듯 했다. 투구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공이 어떻든 상관없으니까, 지금 타석에 트라웃이 서 있다고 생각하고 던져 봐. 레퍼토리는 네가 원하는 대로.”

“변화구를 막 던져도 괜찮으시겠어요? 장비라도 좀 차시는 게 어때요?”

“괜찮아! 괜찮으니까 던져!”

후우, 간이 불펜의 마운드에 올라선 지혁은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클리블랜드라는 새로운 팀의 문화는 원래 이런 건가? 아니면 캘러웨이만 독특한 건가? 적응하기가 쉽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지혁은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선 시니에 쪽으로 눈길을 슬쩍 돌렸다. 캘러웨이가 포수 장비를 차지 않은 게 걱정되긴 했지만, 그래. 어차피 옆에 의사도 있으니까.

“자, 문! 트라웃이야! 여기 트라웃이 서 있다고 생각하고 던져.”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해야겠다.

상대가 트라웃이라면, 지혁의 초구는. 한복판에 꽂히는 패스트볼이다. 트라웃은 초구에 스윙을 절대 내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나이스! 원 스트라이크!”

캘러웨이는 만족스러워 보였다. 다음 공은 안쪽에 깊게 박히는 싱커. 치면 파울이 날 테고, 걸러 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아슬아슬했어. 볼. 카운트 원 앤 원!”

아직 몸이 덜 올라와서 그런지 싱커가 조금 덜 움직인다. 마지막에 조금 더 쥐어 챘으면 존 안으로 말려들어 왔을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3구는 스윙을 유도하는 공이다. 존으로 들어갈 것처럼 보이다가 마지막에 뚝 떨어지는 커브. 캘러웨이가 낭심 쪽 보호 장비를 차지 않았으니 바운드를 시키지는 않고. 조금 애매하더라도 안전한 지점에.

“아냐! 이 공은 담장을 넘어갔잖아! 헤이, 저기 날아간다, 날아가!”

캘러웨이는 연극을 하는 것처럼 웃었다. 그게 웃겼는지 옆에 서 있던 시니에도 깔깔거렸다. 지혁만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겠거니 했지만. 이상한 의사에 이상한 투수 코치라.

“방금 공은 원 바운드로 떨어졌으면 괜찮았을 거야. 그리고 트라웃이라면 골라냈을 거고. 투 볼 원 스트라이크. 자, 다음 공.”

카운트가 불리하다면 지혁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싱커를 던져 왔다. 그러니 지금도 싱커다. 바깥쪽 먼 곳 구석을 정확하게 찌르는 공으로. 미트에 빨려든 공을 한참 쥐고 있던 캘러웨이가 스트라이크를 판정했다.

“심판 덕을 좀 보는군. 투 앤 투야. 결정구를 던져 봐.”

더 생각할 것도 없다. 결정구라면 싱커다. 트라웃을 상대로라면 싱커를 던질 것이다.

뻐어엉!

캘러웨이의 미트질이 완벽했는지, 정말 기분 좋은 소리가 실내 연습장을 가득 메웠다.

“흐으음. 흐-음. 크으, 애매하군.”

“뭐가요? 방금 공은 존을 제대로 통과했다구요, 코치님.”

“아, 카운트? 그래. 스트라이크야. 그런데 아마 트라웃은 이 공을 걷어 냈을 것 같군. 파울 정도로 할까.”

“그럼 다시 던질까요?”

“아니, 됐어.”

캘러웨이가 미트에 공을 꽉 쥔 채 마운드 쪽으로 걸어 올라왔다. 지혁은 생각헀다. 아마 이번 시즌 내내 보게 될 광경이겠지. 캘러웨이가 무슨 말을 할지 정말로 기대되었다. 마치 실전을 치르고 난 다음인 것처럼. 칭찬이면 좋겠지. 나쁘지 않다는 격려라도 괜찮고.

“너, 공 하나 배워 볼래? 너클 포크라고 들어 봤냐?”

“…… 예?”

전혀 의외의 말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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