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55화 (156/204)

에이스는 누구?

캠프가 왁자지껄하다. 탬파베이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완전히 다르다. 1군의 핵심 선수들 중에는 상대적으로 조용한 선수들이 많았고 단년 계약으로 새로 들어온 선수들도 많았던 팀이 탬파베이다. 게다가 유망주들은 조금 많았었나? 이번에는 반드시 1군에 눈도장을 찍겠다는 의지로 가득 찼던 유망주들이 상당 부분을 채웠던 게 바로 작년까지 몸담았던 탬파베이다.

그러니 탬파베이의 스프링캠프는 상대적으로 조용했고,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욕망 같은 것들이 꿈틀대는 곳이었다. 새로 영입된 선수들이나 어린 선수들의 치열한 경쟁, 경쟁, 또 경쟁이 벌어지는 곳이었고. 지혁처럼 궤도에 오른 선수들에게는 티내지 않고 조용히 컨디션을 끌어올리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다르다.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선수들이 모이는 시점에서부터 이미 분위기가 완전히 딴판이었으니까. 당장 클리블랜드의 1군에서 뛰는 25인 명단에는 큰 변화가 없다. 재작년에 앤드류 밀러가 합류했고, 작년에는 에드윈 엔카나시온이 합류한 정도다. 한 해에 많아야 한두 명 정도의 변화만 있을 뿐. 그 한두 명에 해당하는 선수가 올해엔 지혁이었다. 이미 몇 년째 동료로 지내고 있는 선수들 사이의 유대감은 탬파베이와는차원이 달랐다. 이들은 이미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것처럼 보였다.

캠프 첫날, 간단한 스트레칭과 캐치볼로 훈련이 모두 끝나자 선수들은 무리를 지어 이곳저곳에서 수다를 떨어 댔다.

“학예회에 다녀왔다고?”

“그래.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니까. 바바라가 무대에 딱 나오는데, God! 하느님이 보내 주신 것 같더라고.”

누군가는 가족들의 이야기, 주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의 이야기로 한참을 떠들었고.

“슬라이더. 연습했어?”

“아니, 이거 안 돼. 각도가 안 나와. 너처럼 다리가 1미터가 넘어가야만 던질 수 있는가 봐. 괴물 같은 놈아.”

앤드류 밀러는 다른 불펜 투수들에게 자신의 슬라이더를 알려 주었었는지 결과를 확인하고 있었다.

잭 매컬리스터, 애치슨 쇼 같은 불펜 투수들이 밀러 주위에서 다시 슬라이더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고, 마무리인 코디 앨런도 먼발치서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다.

지혁은.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 당연할 것이다. 저 선수들도 근 세네 달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니까. 그래서 지혁은 캘러웨이 코치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코치님.”

“왜?”

“클리블랜드는 보통 언제쯤부터 피칭을 시작하나요?”

“보통 한 일주일 쯤 뒤부터 시작하지. 그 전까지 투수들은 몸을 만들어가고.”

“유망주들도요?”

“걔네는 좀 빠르지. 아마 오늘 오후에도 자율 피칭은 할 걸?”

잘 됐다. 팀에 적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건 차차 하면 될 일이다. 지혁은 새 팀에서 실력으로 증명해야 할 필요도 있다. 이 팀이 70년이나 묵은 저주를 풀기 위해 엄청난 유망주들을 쏟아부으면서까지 데려온 몸이니까. 증명하기 위해서는, 당장 눈앞에 주어진 과제인 너클 포크부터 어떻게 해결하고 싶었다.

“저도 던질까 해서요.”

“벌써? 아, 참, 넌 벌써가 아니지.”

캘러웨이는 지난 한 달 내내 공을 던져 온 게 눈앞의 지혁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은 듯했다.

“뭐, 보고는 해 둘게. 팀 메이트들이랑 먼저 친해지는 게 낫지 않겠어?”

“제 경험상, 야구 잘 하면 다 친해지게 돼 있어요.”

“흐하하, 그것도 정답이네. 좋아. 그런데 캐처는?”

“뭐…… 아무나 괜찮지 않을까요? 어차피 전력투구도 아니고, 너클 포크 위주로 연습하는 피칭인데.”

캘러웨이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인 뒤에, 더그아웃 반대편을 가리켰다.

“파트너가 받게 하라고. 너클 포크는 캐처 입장에서도 적응하기 힘든 볼이니까.”

하긴, 그것도 그런가. 기왕 팀에 합류해서 첫 공이면 멘데스가 받아 주는 것도 좋겠지. 지혁은 곧장 멘데스 쪽으로 발을 돌렸다.

“으하하하하!”

멘데스의 근처로 다가가기도 전에 이미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더그아웃에 가득했다. 프랑코나 감독을 주위로 뭉쳐 있는 몇몇 선수들이 배꼽을 잡고 구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주로 투수였다. 그것도 선발투수들. 팀의 에이스이자 사이 영 수상자 출신인 코리 클루버도 그중 한 명이었다.

“헤이, 멘데스.”

멘데스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눈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을 정도였다. 한참을 낄낄대던 멘데스가 지혁을 돌아본다.

“오! 문, 우리의 누에보 아미고(주 ; 새로운 친구), 왜?”

“공을 좀 던지려고. 받아 줬으면 해서.”

“벌써?”

멘데스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한쪽 눈썹은 내려가고 다른 한쪽 눈썹은 올라갔다.

“몸을 다 만들었나?”

대답을 한 건 프랑코나 감독이었다.

“네, 감독님, 전 원래 일찍 몸을 올리는 편이라서요. 한 달 전부터 개인 훈련으로 몸은 만들어 놨습니다.”

어, 이건 뭐지? 지혁이 말을 꺼낸 순간부터, 호탕한 웃음이 흐르던 공간에 긴장감 비슷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프랑코나 감독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같이 웃고 있던 선수들 중 한 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혁의 시선도 따라 돌아갔다. 모든 선수들도 한 명을 바라봤다. 에이스, 코리 클루버를.

“……좋아, 멘데스. 오후에 문의 공을 받아 줘. 나도 한번 봐야겠군. 겨울에 얼마나 준비를 했는지.”

“하하, 이런, 벌써 재밌어지겠네요. 준비하겠습니다.”

어색하다. 분위기가. 기류가. 이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어낸 당사자인 지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땐, 직접 물어보는 게 제일 낫다.

“왜? 지금 뭔가…… 내가 뭐 잘못했나?”

“아니, 아니야. 그냥…… 음, 뭐라고 해야 될까.”

“전통. 우리 팀에는 전통이 있네.”

뭔가 할 말을 찾으려던 조쉬 톰린 대신에 프랑코나가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구단 창단 때부터 있었던 전통이라더군. 선수단이 처음 모인 이래로, 가장 먼저 팀의 주전 포수에게 첫 공을 던진 투수가 오프닝 데이 선발로 나간다는 걸세.”

“……네?”

“재미있지 않은가? 우린 요 몇 년 사이 항상 클루버가 가장 먼저 공을 던졌지. 어느 해였던가, 카라스코 녀석이 클루버가 먼저 던진 줄 알고 공 한 개를 던진 적이 있었어. 클루버가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에. 그리고 전통대로, 우린 카라스코를 개막전 선발로 올렸네.”

“그건 좀 이상한데요. 그냥 공을 하나 던진 것뿐이잖아요?”

“그런 와중에도 룰을 지켜 왔으니 전통이 되었겠지.”

프랑코나는 몸을 일으키며 흥미롭다는 듯이 지혁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리곤 지혁을 지나치며 클루버에게도 똑같은 동작을 취했다.

“오후에 보자고. 밥들 먹어, 다들.”

***

투수조들은 같이 식사를 하기 마련이다. 선수단 전원이 모이고 난 뒤의 첫 식사에는 보통 새로 합류한 선수들을 정식으로 소개하는 코스를 넣는다. 일종의 환영 회식 같은 느낌이랄까. 클리블랜드도 마찬가지였다.

스프링캠프 첫날 점심 식사는 구단에서 마련한 뷔페에서 이뤄졌고, 모든 구성원들이 한곳에 모였다. 단장인 안토네티까지도 클리블랜드에서 이곳 브래든턴까지 날아와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접시에 음식을 채워 넣은 것을 확인하자, 안토네티가 자리에서 일어나 스푼으로 점시를 탕탕 쳤다.

“다시 보게 되어 반갑습니다, 여러분들. 올해도 야구가 시작됐습니다. 식사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정해진 절차만 최대한 빠르게 따라 보죠. 팀에…… 이 시간만 되면 꼭 이상한 짓으로 나를 놀려 대던 트레버 바우어를 보내고 데려온 선수를 환영해 주십시오.”

안토네티가 섞은 농담에 선수들이 낄낄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안토네티는 지혁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슈퍼 문! 컴온, 앞으로 나와요!”

지혁은 안토네티가 서 있는 곳으로 일어서 나갔다. 모든 선수들의 이목이 한곳에 쏠리는 게, 참 야구 선수답지 않지만 뻘쭘했다.

“지난 시즌 사이 영 2위 투수였습니다. 우리 팀에는 사이 영 위너 출신의 코리 클루버도 있는데, 그에 필적하는 선수가 또 합류했죠. 아주 좋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주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시너지도, 또 문이 투수진 전반에 고취시켜 줄 영감에도 말이죠. 자, 한마디 해요, 문.”

하, 부담스럽군. 자기소개 시간은 언제나 그렇지.

“어…… 클리블랜드는 처음입니다. 지금 제 눈에 보이는 모든 장면들이 다 새롭습니다. 이 식당도, 또 아주 맛있어 보이는 이 바비큐도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지만. 저는 압니다. 이 모든 게 다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가져오기 위한 것이라는 걸요. 제가 클리블랜드에 합류한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월드시리즈 우승. 우승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예에에아-.”

지혁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진다. 누군가는 식기로 테이블을 두드려 댔다. 안토네티는 아주 활짝 웃으며 지혁과 악수를 한 뒤, 지혁을 들여보내려 했다. 그때.

“단장님. 저도 한마디 주시죠.”

“테리! 당연하죠. 이리로 나오세요!”

모자를 벗은 프랑코나 감독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프랑코나는 순식간에 안토네티가 있는 곳까지 걸어 나오며 자리로 돌아가려던 지혁을 멈춰 세웠다.

“잠깐 여기 있게.”

“예?”

프랑코나는 단번에 안토네티 단장과 악수를 나누더니, 곧장 큰 목소리로 말했다.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순식간에 뷔페 안을 가득 채웠다.

“모두들 주목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이 팀에 감독으로 부임한 건, 여기 있는 크리스가 간절하게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보스턴에 있을 때 밤비노의 저주를 깨트렸습니다. 그리고 와후의 저주를 깨기 위해 클리블랜드에 있습니다. 하지만 재작년, 그리고 작년. 마지막 한 발을 딛지 못해 두 번의 쓴잔을 마셨습니다. 한 번은 내 절친한 친구인 테오 엡스타인(주 ; 시카고 컵스의 사장)에게 당했고, 한 번은 클레이튼 커쇼에게 당했군요.”

프랑코나의 목소리에는 강한 힘이 있다. 모든 감독들이 그렇지만 프랑코나는 유독 더 그랬다. 뷔페 안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순식간에 프랑코나의 말에 빨려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올해로 저주가 시작된 지 70년입니다. 나의 개인적으로는 세 번째 도전이기도 합니다. 올해만큼은. 절대로 실패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도와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제 옆에 서 있는 이 친구도 그렇고요.”

프랑코나가 턱짓으로 지혁을 가리킨다. 모두의 앞에서 보니, 수많은 사람들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지혁 쪽으로 쏠리는 것이 생생하게 보였다.

“개인적으로 생각했습니다. 70년이나 지속된 저주를 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겨울 휴가 동안 이걸 고민하느라 안 그래도 없는 머리가 더 빠졌군요. 어쨌든, 제 결론은 하나입니다. 모든 것을 원점으로. 초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여기 모인 선수들 모두, 작년까지의 좋은 기록을 전부 다 잊어 주길 바랍니다. 챔피언이 되지 못한 도전자는 언제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법이니까.”

다시 한 번 휘파람이 여러 차례 울린다. 프랑코나는 손을 들어 휘파람 소리에 응답했다. 연설이 끝난 줄 알았던 사람들이 식기를 집어 들었다. 프랑코나는 마치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덧붙이듯이 언급했다.

“그리고. 오늘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오후, 불펜에서 문의 피칭이 있을 겁니다.”

음식을 막 집으려던 포크들이 공중에서 멈췄다. 찰나의 순간에 모두 손을 멈추는 그 장면이 꽤…… 이상해 보였다. 모두가 어정쩡하게 포크를 든 채 지혁의 얼굴을 주목했으니까.

“저는 초심으로 돌아간다고 얘기했습니다. 물론, 우리 구단에 내려오는 전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저는 단언하겠습니다. 오프닝 데이 선발을 위한 경쟁은 이제 막 시작됐습니다. 문. 그리고 코리 클루버. 두 사람도 치열하게 해야 할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코리 클루버의 얼굴이 아주 선명하게, 그리고 똑똑하게 보였다. 클루버의 눈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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