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신고식
“식사는 잘 했나?”
“그럴 리가 있나요. 얹히는 줄 알았습니다.”
“하하.”
프랑코나 감독이 웃으며 지혁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툭 건드렸다.
“하지만 내 말은 100% 진심이었네. 초심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지. 우리 팀 모두가 그렇고, 물론 클루버도 그렇고. 요 몇 년 동안 클루버는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으니까. 우리 팀 안에서는 누구도 클루버를 침해할 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인 에이스였어. 하지만 자네가 들어오면서 분위기가 조금 달라질 거라고 여겼네. 물론.”
지혁을 바라보며 눈을 찡긋거린다.
“첫날부터 사건을 만들어 줄 줄은 몰랐지만 말일세.”
“사건은 감독님이 만드신 것 같은데요…….”
식사를 마친 모든 사람들이 전부 그라운드 주위로 몰려든 것처럼 바글바글하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구단의 오랜 전통을 보기 위해 모인 것이다. 마운드에 선 게, 몇 년째 이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클루버가 아니라 지혁이라는 게 바로 관전 포인트인 셈이고.
글러브를 끼고 마운드에 올라 있는 지혁의 옆으로 포수 장비를 찬 멘데스가 지나간다. 원래대로라면 오늘은 너클 포크를 던졌어야 할 것이다. 아직 모자란 공이니 이 공을 연마하려 했다. 하지만 구경꾼들이 이리 많이 몰려들어서야. 프랑코나 감독은 오프닝 데이 선발 자리를 두고 경쟁을 붙이고 싶어 했다. 그런 고로 오늘의 피칭은 존재감을 보여 줘야 하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너클 포크를 테스트하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문, 마이너리거 몇 명을 타석에 세워 두겠네. 녀석들한테는 좋은 경험이 될 테니까. 부담이 된다면 그냥 서서 지켜보게만 해도 되고.”
프랑코나 감독은 아예 판을 제대로 벌여 버렸다. 애초에 피칭을 하려던 불펜이 아닌 그라운드 안으로 장소를 옮긴 것부터가 그랬다. 이제는 형식마저 가벼운 불펜 피칭에서 라이브 배팅으로 바꿔 버렸다.
“아닙니다. 기왕 타석에 서는 거 제대로 치라고 하시죠.”
에라, 모르겠다. 지혁도 발을 맞췄다. 너클 포크는 오늘은 집어넣어야겠다. 어차피 당초의 계획에서 벗어난 지 한참이다. 지금의 이 피칭은 지혁의 신고식 같은 것이다. 클루버를 포함한 클리블랜드 선수들에게 얼마나 좋은 투수가 동료로 왔는지를 보여 줘야 할 무대. 전력 피칭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사인은?”
“됐어, 알려 주고 던져도 돼.”
“자신감이 넘치네?”
“잘 잡기나 해 줘.”
사실 마지막 말은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멘데스라면 완벽하게 잡을 테니까.
곧 헬멧을 쓰고 암가드Arm guard를 찬 마이너리거들이 줄줄이 타석 근처로 모여들었다. 가장 먼저 타석에 들어선 건 넬리 로드리게즈였다. 2012년 15라운드로 드래프트되었던 거포형 1루수. 물론 지혁은 마이너리거인 넬리의 정확한 정보를 몰랐지만, 덩치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형적인 공갈포 스타일이라는 게 몸에서부터 느껴졌다. 연습 스윙을 몇 번 돌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약점은 떨어지는 공이겠지.
“자, 싱커부터 갈게.”
지혁이 멘데스에게 말로 사인을 줬다. 아마 이렇게 구종을 알려 주고 피칭을 한다는 게 지혁을 상대하는 타자들에게는 큰 자극이 될지도 몰랐다. 넬리의 상체가 거칠게 들썩거린다. 숨을 크게 몰아쉬고 있다는 뜻이지. 저렇게 정보를 쉽게 주니까 아직 마이너리그에 있는 것이다.
쌔애액.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던 공이 마치 타석 바로 앞에서 사라지듯이 꺾이며 떨어졌다. 넬리의 스윙이 헛돈 것은 당연한 일이다. 프랑코나는 캘러웨이 코치와 만족스런 대화를 나눴다.
“몸을 아주 잘 만들어 놨군.”
“저 친구, 투구는 이미 한 달 전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래? 아주 바지런하군. 리그 탑 티어 녀석이 말이야.”
“그냥 원래 루틴이 그렇답니다.”
싱커 세 개에 방망이를 맞추지도 못한 넬리 로드리게즈는 헬멧을 벗으며 터덜터덜 타석 밖으로 걸어 나왔다. 연속해서 같은 공을 봤는데도 스윙이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저런 공은 아마 한 번도 못 봤을 터다.
“싱커!”
“커브!”
“패스트볼!”
알려 주고 던지는데도 제대로 된 타구가 나오지 않는다. 파울 라인을 벗어난 타구들이 나오거나 내야로 구르더라도 빗맞은 공이 나온다. 날카로운 코스로, 타자들이 까다로워하는 코스로 정확히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몸의 밸런스가 잡혀 있지 않으면 이런 제구는 나오지 않는다. 스프링캠프에서 투수들이 고전하는 건 바로 겨울 휴가 기간 잃어버린 밸런스를 찾는 과정이기 때문인데, 지혁은 그 부분에서만큼은 걱정이 없다. 일곱 타자를 상대하면서 지혁은 단 한 개의 정타도 허용하지 않았다.
“오케이, 이 정도로 하지. 삼십 개 정도 던졌나?”
프랑코나 감독은 흡족한 목소리로 그라운드 안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때 캘러웨이가 나섰다. 얄밉게도.
“문, 그 공도 한번 던져 보는 게 어때?”
“예?”
“그 공 말이야. 그 공.”
구경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하니까 필살기라도 준비해 놓은 것 같잖습니까.’
지혁은 속으로만 말을 삼켰다. 저 제안을 거절하기도 어정쩡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는 와중에 완성되지 않은 공을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는데.
‘가오 상하게스리……’
하아, 지혁은 깊은 한숨을 쉬며 멘데스를 마운드로 불렀다. 마스크를 벗고 터덜터덜 걸어 올라오는 멘데스는 무슨 일이냐 묻는 대신, 재미있다는 투로 말했다.
“문, 미키가 ‘그 공’이라고 하면 여기 있는 선수들 모두가 다 알아.”
“엉? 뭐라고?”
“너클 포크인지 하는 그거지? 지금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전부 시도했다가 죄다 실패한 공이거든.”
흐흐흐. 멘데스가 소리 죽여 웃었다.
“그 공은 아무도 못 던질 거야. 누구도 미키처럼은 못 던져. 그냥 저 사람이 특별한 거니까. 어쨌든, 얼마나 배웠어? 그립 잡는 거? 몇 번 정도 던져 봤어?”
“아…… 글쎄.”
“뭐, 상관없어. 보는 눈이 많아서 좀 쪽팔리긴 하겠지만. 어차피 안 들어갈 거라고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으니까 그냥 편하게 던지라구. 투 바운드로 홈까지 와도 상관없어. 하하하. 참고로 그게 클루버가 했던 짓이야.”
멘데스의 위로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말은 조금 괜찮았다. 기존 팀 내의 독보적인 에이스이던 클루버도 우스운 꼴을 보였다고 하니까. 이건 일종의 루키 헤이징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테다. 안 들어가면 그냥 한 번 쪽팔리고 마는 거지, 뭐.
자리를 뜨려던 사람들이 여전히 자리에 남아 지혁의 마지막 투구를 지켜보고 있다. 조금쯤은 떠나 줘도 괜찮은데. 일부러 마운드 흙을 고르는 척하며 늑장을 부려 봤지만 사람들은 쇼의 마지막까지 보고 떠날 심산이 확실해 보였다.
공을 던지기 전인데도 벌써부터 창피함이 몰려들었다. 지금 지혁이 던지는 공은…… 딱 이 정도에 불과하다. 회전하며 날아가는 공이 밋밋하게 회전을 멈추는 정도. 캘러웨이가 보여 줬던 공처럼 찰나의 순간에 시간을 멈춰버리면서 타이밍을 빼앗는 건 언감생심이다.
날아가던 공이 뻑뻑하게, 꿈뻑꿈뻑한 느낌으로, 마치 누군가가 억지로 돌아가던 공을 손으로 잡아챈 듯이, 회전이 멈추었다. 회전이 멈춘 곳도 멘데스의 바로 앞이어서 너클볼 상태가 된 포크가 떨어지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스트라이크 높이로 들어가던 공이라는 점? 흔들리고 떨어지고 할 게 없으니 아마 스트라이크가 되긴 하겠다. 이 정도까지가 한 달 동안 지혁이 이뤄 낸 결과였다.
아주 미세하게 낙폭을 가진 공이 멘데스의 미트 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지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나올 일만 남았다.
“What?”
하지만 반응은 기대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웅성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실눈을 슬그머니 떴다. 가만히 앉아 있던 멘데스가 자리에서 옆으로 몇 걸음 기어가 흘린 볼을 줍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오 마이 갓.”
“방금 비슷했지? 캘러웨이 코치 공이랑……”
“떨어지는 건 없었어. 흔들리지도 않았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회전이 멈추잖아. 회전이 멈추는 건 내가 똑똑히 봤어.”
야구를 모르는 사람들이 방금 지혁의 공을 봤다면, 한 120km 초중반 정도 나오는 밋밋한 패스트볼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선수들은 알고 있었다. 패스트볼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적은 회전으로 출발한 공이 떠 가는 도중에 그 회전을 완전히 멈춰 버렸다는 걸.
너클 포크의 핵심이었다. 날아가는 도중에 회전을 멈추며 너클볼로 변화하는 것. 지혁은 핵심적인 기능에 어느 정도 다가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지금까지 클리블랜드에서 뛰던 투수들이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건가?”
“하하…… 글쎄요. 그냥 무식하게 계속 던지기만 하던데요.”
“계속?”
“네. 자기가 원래 쓰던 공은 그냥 감만 잡는 정도로 해 두고서요. 너클 포크만 하루 종일 던져 댔어요. 그러다 보니까 어느 정도 손끝에 감을 잡은 게 아닐까요.”
펄쩍펄쩍 뛰는 선수들 사이에 파묻혀 있는 지혁을 바라보며, 프랑코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턱을 긁었다. 클리블랜드에 새 바람이 일어나고 있는 순간이었다.
***
정작 지혁은 어안이 벙벙했다. 타석에 자신이 손쉽게 돌려세웠던 마이너리거들을 데려다 놨어도 홈런이 나왔을 법한 공이었다. 도중에 회전을 멈추었다 뿐이지 올스타전 홈런 더비에서 투수 역할을 해 주는 사람들이 던지는 공과 전혀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캘러웨이의 공과 비교했을 때, 아니 비교도 불가능할 정도로 위력 없는 공.
하지만 동료들이 난리가 났다. 린도어와 라미레즈는 벌써부터 자신의 헬멧을 눌러쓰고 방망이를 휘둘러 대며 타석에 설 테니 그 공을 던져 달라고 난리 부르스를 피워 대는 중이다. 멘데스는 스트라이크 존 바로 앞에서 회전이 멈춰 버리는 바람에 당황했다고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더 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투수들이었다.
“대체 어떻게 했어? 어느 손가락에 힘을 주고 긁은 거야?”
“아니야, 방금 공은 긁어서 던지면 안 되는 공이야. 흘린 거야. 맞지? 흘렸지?”
“흘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처음부터 흘려 던졌으면 스피드가 더 낮았어야 해. 중지에 힘을 엄청나게 주고 밀어 던진 것 같아.”
“그러려면 얘 중지 힘이 헐크 정도는 돼야 해. 한 손가락으로 밀어 던져서 스피드가 저렇게 나올 리가 없지.”
모두가 시도해 봤으니까. 캘러웨이의 공. 포크도 아니고 너클도 아닌데 포크도 되었다가 너클도 되었다가 심지어 체인지업의 효과까지 낼 수 있는 공. 던질 수만 있다면 분명히 아주 위력적인 공일 테지만, 던지는 방법이 너무나 까다로워 던질 수 없는 공. 감각으로만 던져야 하는 공이기에 설명조차 해 줄 수 없는 공을.
처음 팀에 합류한 선수가 뚝딱 던져 낸 것이다. 투수들이 지혁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은 당연했다. 심지어 프랑코나 감독이 경쟁을 붙이려고 했던 클루버조차도 선수들 근처에서 맴돌면서 지혁의 말을 들으려 하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네. 긁기도 하면서 밀어 내기도 하면서 또 흘리기도 해야 돼. 그 중간 어딘가에서 딱. 놓는 순간에도 좀 힘을 빼야 하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느낌을 찾기 위해 지혁은 계속해서 너클 포크를 던져 왔었다. 노력의 대가는 팀의 동료들과 단번에 친해질 수 있는 계기와, 프랑코나 감독의 눈도장으로 돌아온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