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57화 (158/204)

조우

지혁이 스프링캠프 첫날 라이브 배팅을 상대하는 투구를 한 것. 기존의 클리블랜드에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어느 팀에든 관습적으로 이어져 오던 일정이 있다. 클리블랜드 같은 경우 투수들의 몸을 조금 더 늦게 끌어올리는 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첫날부터 지혁이 실전에 가까운 피칭을 한 것이 선수들을 연쇄적으로 자극시켰다. 시간을 조금 보내면서 알게 된 것인데, 테리 프랑코나는 선수들의 심리를 조종하는 데 능란한 감독이었다. 캠프의 분위기를 보다 타이트하게 조이기 위해, 지혁의 첫 번째 라이브 피칭을 보다 극적으로 활용한 게 확실해 보였다.

뻐어엉-.

불펜 포수들의 미트에 빨려 드는 강력한 투구 소리가 일찍부터 울려 퍼진다. 프랑코나 감독의 그런 의도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당연하게도 기존의 에이스 코리 클루버다. 캠프 첫날만 해도 일주일은 준비한 뒤에야 본격적인 투구를 할 것 같았던 클루버는 소집 사흘 만에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프랑코나 감독은 이미 전통조차도 무시할 수 있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여러 번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클루버도 오프닝 데이 선발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응답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팀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선수들은 강한 전염성을 갖고 있죠.”

평소보다 훨씬 이른 타이밍에 투구를 시작한 선수들에 대한 기자들의 의문에 프랑코나 감독이 대답한 답변이다. 스스로의 행동 자체만으로도 다른 선수들의 액션을 유발해 낼 수 있는 선수들이 바로 팀의 에이스다. 탬파베이에서는 롱고리아가 그랬고, 이곳에서는 클루버가 그렇다.

클루버가 생각보다 이른 타이밍부터 자신을 타이트하게 조이며 시즌을 준비하자,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 있는 다른 선수들도 거기에 응답했다. 카를로스 카라스코, 대니 살라자르, 조쉬 톰린. 그리고 예비 선발 후보인 마이크 클레빈져와 마이너리그 팀의 투수들까지.

“이런 분위기가 아주 마음에 듭니다. 투수들은 경쟁 속에 빨려 들어야 하는데, 지금 그런 경쟁의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죠.”

프랑코나는 투수라는 존재가 어떤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투수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그 변덕이 미묘하다가도, 또 어떨 때는 이렇게까지 단순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직접적인 사고 회로를 돌리는 존재들이다. 선발투수들이 오랫동안 불펜에 자리 잡고 있자, 이번엔 불펜 투수들이 페이스를 바짝 끌어당겼다. 마운드를 양보하기 싫다는 단순한 욕심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작업을 거친 복잡한 회로의 결과일수도 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앤드류 밀러, 코디 앨런. 그 사이를 지탱해 주는 분 로건과 브라이언 쇼, 댄 오테로, 잭 매컬리스터 같은 선수들. 특히 불펜 운용이라면 첫 손에 꼽히는 프랑코나의 주요 무기들도 덕분에 몸을 제대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스프링캠프가 변했다. 예년들과는 다른 스타트였다. 프랑코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

“흐읍!”

센 공을 던지는 것도 아니지만, 모든 공을 던질 때마다 기합 소리가 저절로 스며 나온다. 그만큼 집중해서 던지고 있다는 뜻이다.

스프링캠프가 진행되는 한 달 동안 지혁은 너클 포크에 상당한 공을 쏟았다. 덕분에 감은 어느 정도 잡았다. 손끝에서 공을 떠나 보내는 감각. 이제는 보다 확실하게 공의 회전을 멈출 수 있다. 멈출 수는 있다.

“아니야. 이 정도도 위험해.”

하지만 캘러웨이와 멘데스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지혁도 고개를 따라 저었다. 여전히 공이 멈추는 곳이 타석과 너무 가까웠다. 공이 충분히 움직이거나 떨어질 시간이 부족한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었지만, 2주 앞으로 다가온 시즌에서 쓰기는 힘들었다. 스프링캠프에서 펼쳐지는 시범 경기에서 사용하고 있지 않은 것은 당연했고.

“내가 타석에 들어서면…… 이 공은 그냥 잘못 던진 체인지업 정도? 그 정도로 느껴질 거야. 공이 빠른 것도 아니어서 보고 때릴 수 있을 것 같네.”

“길게 말할 것 없어. 쉽다는 뜻이지?”

“응.”

멘데스의 냉정한 소감은 지혁을 계속 자극하는 중요한 조언이다. 멘데스는 이제 리그 전체에서 가장 공격력이 좋은 포수 중 하나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멘데스의 느낌은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된다. 멘데스가 까다롭다고 느낄 정도가 되어야지 핵심적인 순간에 쓸 수 있다고, 지혁과 캘러웨이 코치는 판단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지혁의 현재 과제는 이것이었다. 회전을 보다 이른 타이밍에 멈추게 해야 공의 의미가 산다. 패스트볼 혹은 포크볼처럼 들어오던 공이 너클볼로 변화하는 것을 타자가 알게 해야 하니까. 모르고서는 그냥 체인지업 타이밍에 휘둘러도 공이 맞아 날아간다.

“뭐야? 왜 이렇게 우울해 보여? 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지금 넌 이 공 없이도 충분히 좋으니까. 불확실한 공 때문에 컨디션이 떨어지는 게 더 안 좋은 일이야.”

캘러웨이는 자신의 공을 이 정도까지라도 던져 준 유일한 선수인 지혁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지난 시간 동안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며 할 수 있는 선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혁처럼 이 공에 매달렸던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도무지 안 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던지면서 결국 감각을 찾아냈다는 게, 일반적인 투수들의 끈기와 근성으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겨울 내내, 그것도 남들보다 한 달 먼저 합류해서는 엄청난 반복 투구로 기어이 던지는 방법을 알아내 버렸으니까.

“곧 될 거야. 릴리스 포인트를 조금 더 뒤쪽에 두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고. 아니지, 뭐가 됐든 간에 넌 찾아낼 거야. 조바심 낼 필요 없어. 이미 넌 길을 알고 있으니까.”

반복하면 언젠간 될 거다. 근거 없는 믿음이라고 할 수는 있었지만, 캘러웨이는 눈앞에서 봤으니 믿을 수밖에 없다. 문지혁이라는 투수가 어떻게 여기까지 온 지를 눈앞에서 봤으니까. 초조해하는 지혁과는 달리, 캘러웨이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

[스프링캠프 시범 경기 중계를 맡은 딘 코놀리입니다. 여기는 브래든턴의 맥케치니 스포츠 필드입니다. 그리고 제 옆에는 언제나처럼 르로이 케인이 나와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르로이.]

[반갑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야구 시간입니다. 하하.]

[자, 따뜻한 플로리다에서 야구보다 좋은 게 또 없죠. 오늘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탬파베이 레이스의 경기입니다. 시범 경기인데도 벌써부터 큰 주목을 받고 있죠. 오늘 클리블랜드의 선발로 등판하는 바로 이 선수, 문 때문입니다.]

실제로 맥케치니 스타디움에는 엄청난 수의 기자들이 모였다. 이유는 분명했다. 시즌 경기가 아님에도, 지혁이 친정 팀 탬파베이를 처음 만나는 장면을 담아내는 건 꽤 가치가 있는 그림이었으니까. 지혁이 탬파베이의 유니폼을 입지 않고 있는 모습과 그런 지혁을 상대해야 하는 탬파베이. 오프 시즌에 수많은 거물급 선수들의 이동이 있었지만 가장 첫손에 꼽히는 건 바로 지혁의 이름이었다. 그런 선수가 친정 팀을 만났다.

지혁은 경기 전 탬파베이 쪽 더그아웃을 찾아 지난해까지만 해도 동료였던 사람들과 정답게 인사를 나눴다. 정답게라는 말은 완벽히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다. 약간 어색한 분위기가 기저에 깔려는 있었다. 하지만 랭카스터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들은 그래도 웃으며 지혁을 맞아 주었다.

일반적인 원정 시범 경기의 루틴대로 팀의 핵심 선수들은 원정에 동행하지 않았다. 롱고리아도, 키어마이어도, 아처나 디커슨도 없는 더그아웃이었지만, 지혁은 탬파베이의 어린 선수들과도 한 번씩 인사를 나눈 후 빠져나왔다. 묘한 기분이었다. 지혁을 보고 배우던 선수들과 상대로 만난다는 건.

그래서 마운드에서도 힘이 조금 들어갔던 건 사실이다. 초반 제구에 조금 애를 먹었다. 1번 타자로 나선 말렉스 스미스에게 몸에 맞는 볼을 주었고, 2번인 라일리 언로에게는 볼넷을 허용했다.

[이번 시범 경기 내내 주자 두 명을 쌓아 둔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문인데요. 오늘은 제구가 말을 잘 안 듣는군요.]

[친정팀과 상대한다는 게 가끔씩 감정적인 영향을 미치곤 합니다. 물론 컨디션 문제도 있겠죠. 어떤 투수도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요.]

[노 아웃 상황에서 제이크 바우어스를 상대합니다. 문.]

단순한 심리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된 결과였다. 여전히 지지부진한 너클 포크의 성취도라든지, 오늘 호흡을 맞추고 있는 포수가 멘데스가 아니라 백업 포수인 로베르토 페레즈라는 점이라든지, 해가 눈앞으로 정면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라든지. 이런 것들.

“으음.”

집중해야지. 부담 없는 시범 경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친정 팀과의 첫 만남인데 안 좋은 모습을 보이기는 좀 그렇지. 지혁은 마운드 위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을 다독였다. 너무 쉽게 생각하고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집중력의 끈이 조금 느슨했다던가.

지혁은 고개를 털어 내고 타석의 바우어스를 노려봤다. 배트 컨트롤이 상당히 좋고 타석에서의 수 싸움도 아주 좋은 외야수다. 수비가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타격에서의 능력으로 그것을 커버할 수 있을 정도로. 타격에 관한 재능은 진작부터 메이저리그 감이라고 평가받던 선수였고, 지난해 승부를 걸기로 한 랭카스터의 선택을 받은 어린 외야수.

페레즈는 안정적인 공을 원했다. 투수의 제구가 흔들릴 때는 다시 패스트볼부터 시작하는 게 정석이고,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한다. 하지만 지혁은 패스트볼을 던지면 맞아 나갈 거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지혁이 기억하는 바우어스의 스윙은 매우 날카로웠고, 아마 노림수도 제대로 갖고 나왔을 것이다.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승부는 가위바위보 싸움이다. 바우어스가 노리고 있는 공은 대충 알 수 있고, 지혁이 생각하기엔 바우어스도 지혁이 그걸 안다는 사실을 짐작쯤은 하고 있을 테지. 그렇다면 패스트볼을 대응하는 자세로 있다가 싱커가 꺾이는 걸 배트 컨트롤로 툭 맞춰 낼 생각을 할 것이다. 바우어스 정도 되는 재능이라면.

“그 정도는!”

지혁은 생각하던 걸 입 밖으로 내며 싱커를 던졌다. 제구가 완벽하게 된 공은 아니었다. 꽉 차게 들어가는 것 보다 공 한 개 반 정도가 존 안쪽으로 들어와 있는 공. 지혁의 생각대로, 바우어스의 스윙이 따라 나왔다. 매섭게 휘둘러지던 배트가 마지막에 살짝 흩어지며 싱커의 움직임에 맞춰 반응했다.

바우어스가 무리하지 않고 슬쩍 밀어 때린 타구가 꽤 잘 맞았다. 파울 라인 선상 쪽으로 아슬아슬하게 향하는 공. 하지만 베이스 위에는 호세 라미레즈가 정확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라미레즈가 잡아내서 3루 찍고 2루로! 킵니스, 다시 1루로! 오, 갓! 5-4-3의 트리플 플레이입니다!]

[와우, 탬파베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나오고 말았네요.]

베이스를 밟은 라미레즈의 송구가 2루로 향하는 순간, 지혁은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완성했다.

“해 줘야지. 많이 컸네, 제이크.”

유도해낸 대로다. 트리플 플레이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던 건 사실이지만. 바우어스라면 마지막까지 움직이는 싱커에 반응해서 밀어 낼 수 있을 거라고 봤고, 그대로 충실하게 따라와 줬다. 어물쩡한 스윙이었다면 허무한 스윙으로 끝났을 것이다. 탬파베이를 잘 알고 있는 지혁이기 때문에 유도해 낼 수 있었던 타구였다.

“헤이, 문. 너무한 거 아냐?”

“하하. 운입니다, 운.”

3루 코치로 나가 있던 몬토요의 투정에 지혁은 웃으며 응답했다. 탬파베이는 분명히 좋은 팀이지만, 아직은 어리다. 이 선수들을 끝까지 데리고 갈 수 있다면 정말 강한 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혁은 그걸 알면서도 이적을 택했다. 목표는 이번 시즌 우승이니까.

***

-스프링캠프 시범 경기, 탬파베이 레이스 vs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탬파베이 레이스 : 3 (제이크 바우어스 1HR, 2RBI)클리블랜드 인디언스 : 11 (에드윈 엔카나시온 2HR, 6RBI. 페르난도 멘데스 3RBI, 문지혁. 3IP, 3K, 2BB, 0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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