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블랜드여, 영웅을 맞이하라
처음 경기장 입구에 들어서서 선수들을 만났다. 어제 하루 푹 쉰 선수들은 그래도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 같아 보였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 설레고 들뜰 법도 하건만. 이틀 전, 프랑코나가 선수들의 나태해진 분위기를 비디오 룸에서의 길었던 분석으로 지적해 놓은 덕분이었다.
라커에 가득 찬 클러비들은 물론이고 개막 행사 준비로 수시로 오가는 구단 직원들 때문에 분위기 자체는 분주했다. 하지만 행사는 행사일 뿐, 경기를 치러야 할 선수들은 집중하고 있어야만 한다. 어쩌면 프랑코나 감독은 여기까지 의도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큰 행사를 앞두고도 집중력을 유지하는 일은 문자 그대로 노하우다. 지혁은 혼자 가장 늦게까지 팔 마사지를 받다가 느지막이 라커룸 안으로 들어왔는데, 최소한 이런 노하우와 관한 부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선수들을 찬찬히 관찰하던 지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자신의 라커 앞에 털썩 앉았다.
‘이래서 우승권 팀이구나.’
솔직히 말하자면, 스프링캠프 기간 동안 라커의 분위기 자체는 탬파베이나 클리블랜드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생에 많은 팀들을 다녀 봤지만, 어느 곳이든 비슷한 것 같았다. 중남미 쪽이나 히스패닉 계열 선수들이 많으면 라커룸 안에 흐르는 시끄러운 음악이 조금 더 크고, 선수들의 목소리도 조금 더 크고. 이 정도의 차이밖에는 없다. 어디나 비슷한 일반적인 분위기가 흐른다.
탬파베이에서의 지혁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일일이 관찰당하는 입장이었다. 어리고 경험 없는 선수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입장. 지혁의 말과 행동 하나 하나가, 심지어 지혁의 생각조차도 모든 선수들이 본받아야 할 것들처럼 여겨졌다. 워크 에씩에 있어서는 자부할 수 있을 정도지만, 그럼에도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많은 선수들에게 영향을 끼쳐야 하는 입장이란 늘 그렇듯이.
하지만 클리블랜드에서의 지혁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마음의 짐을 한결 덜 수 있다. 지금만 봐도, 중남미 쪽 선수들은 멘데스가 확 휘어잡고 있다. 나머지 선수들도 이미 메이저리그 경력이 꽤 있는 축이다. 작년에 데뷔한 브래들리 짐머 정도를 제외하면, 로스터에 들어 있는 선수들이 전부 4년 이상의 경력을 갖고 있으니까.
이 선수들에게 영향을 끼친다든가, 이끌어야 한다든가 하는 건 오만한 말이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메이저리그의 개막전 로스터에 들었다는 것 자체로도 이 선수들은 인정받는 선수들이니까. 최소한의 자기 관리는 충분히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선수들이다.
“문, 오늘은 개막 행사가 있어서 평소보다 조금 일찍 불펜 피칭을 해야 한다는 코치님 말씀이세요. 지금 불펜으로 오라시는데요?”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앳된 클러비 한 명이 혼자 라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 지혁에게 슬쩍 말을 전하고 간다. 멘데스에게도 같은 말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멘데스가 중남미 선수들 무리에서 슬쩍 고개를 내밀고 지혁에게 눈짓을 보낸다.
“오케이, 가자고.”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는 스파이크 끈을 동여맸다. 또다시 찾아온 것이다. 진짜 시즌을 시작하는 날이.
***
“기분이 어때?”
진짜 시즌을 시작하는 날, 불펜에서 마주친 프랑코나 감독의 첫 마디는 안부 인사였다.
“음, 뭐, 평소와 비슷합니다.”
“특별한 날이니까. 조금 들뜰 법도 한데. 자네가 이제…… 4년 차인가?”
“네.”
“지난 3년 동안 오프닝 데이에 나간 적이 있었나?”
그럴 리가. 절대로 없다.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의외로 꽤 덤덤하군? 감정적으로 크게 요동치는 스타일은 아니라고 알고 있었지만.”
“네. 야구는 똑같은 야구니까요.”
사실 전생에서부터 습관적으로 굳어져 온 의식이다. 특별한 날이라거나, 특별한 의식이나 사명감, 부담감 따위를 안고 마운드에 오르면 분명히 컨디션에 영향을 미친다. 한 경기 한 경기가 미친 듯이 소중했던 전생에서는 이런 것들조차도 컨트롤해야 했다. 예를 들면 생일이라든가, 기념일이라든가. 그런 날이라고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가는 어김없이 투구가 마음처럼 안 되곤 했다. 그러니 지혁은 야구 외적인 일 때문에 야구에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자세를 지니게 되었고, 이제는 그런 게 자연스러웠다.
오프닝 데이의 선발투수로 나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없어야 했고.
“좋아, 몸을 풀게. 몇 개 정도 지켜보지.”
“피칭을 할 준비는 언제나 되어 있습니다.”
곧 장비를 찬 멘데스가 도착했고, 지혁은 홈 플레이트를 향해 공을 뿌리기 시작했다. 어김없다. 평소의 투구 그대로다. 싱커가 손끝에 걸리는 느낌이 좋았고, 홈 플레이트 보더라인 근처에서 춤을 추듯이 미트에 빨려든다. 커브의 낙폭도 훌륭했다. 엄지를 튕겨 올리는 느낌은 이제 완전히 지혁의 것으로 굳어져서, 존으로 넣기도 했다가 떨어뜨리기도 했다가 하는 제구가 자연스럽다.
“그 공은 던질 생각인가?”
“너클 포크 말씀이십니까?”
“그래.”
“하, 글쎄요. 아직 완벽하지 않아서.”
때마침 멘데스가 엄지와 새끼를 동시에 벌리며 너클 포크 사인을 보내왔기에. 지혁은 한번 던져 보기로 했다. 꽤 이상하지만 이제는 조금은 낯익은 느낌으로 손에서 공이 떠나간다. 둥실 떠가던 공이 어느 순간 회전이 멈춰 버리며 슬쩍 흔들렸다. 존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바깥쪽으로 멀리 벗어났지만.
“나쁘지 않군.”
“존 안으로 넣기가 생각보다 힘들어서, 실전에서 쓰는 건 좀 무리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흠, 캘러웨이 코치는 뭐라던가?”
“지금까지 이 정도로 던진 선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조바심내지 말고 천천히 준비하다 보면 반드시 던질 수 있을 거라고요.”
“훗, 그래. 나도 똑같은 생각이네.”
“알겠습니다.”
프랑코나 감독은 그제야 슬쩍 미소를 띠었다. 지혁은 계속해서 피칭을 이어 갔다. 그동안 프랑코나는 귀신 같이 인기척을 숨긴 채, 옆에서 투구를 하고 있는 또 다른 선수에게 다가갔다.
“코리.”
“예스, 보스.”
“섭섭한가?”
“……전통에 따른 것뿐이죠.”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좋겠지.”
클루버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개막전 선발 자리를 빼앗긴 사내다. 이를 갈고 있을지도 모른다. 클리블랜드의 투수진 하면 누구나 클루버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문이 합류한 지금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니 개막전 선발투수, 그러니까 시즌의 최선봉에 서는 자리를 빼앗긴 클루버는 충분히 화가 나 있을 것이다.
“누가 에이스인지, 누가 1선발인지 하는 것 따위는, 나에겐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코리. 내게 중요한 건 여섯 달 뒤에도 야구를 하는 것이고, 10월이 끝났을 때 우리가 우승컵을 쥐는 걸세. 우리 모두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만 하고, 자네도 마찬가지야. 지금까지 우리가 같이 해 왔던 모든 시즌보다도 더 좋은 모습을 보여 주게. 그럼 내년에는 자네가 가장 먼저 공을 던질 수 있을 테니까.”
프랑코나는 클루버가 첫 번째 자리를 빼앗기고 나서 가만히 앉아 있을 성격이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잘만 이용하면, 두 놈의 시너지를 최대로 끌어낼 수 있겠지.’
묵묵히 공을 던지고 있는 두 명의 투수를 바라보며 프랑코나는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
경기 시작 전. 외야에서는 엄청난 크기의 성조기가 펼쳐져 있고, 군악대가 다이아몬드 안쪽에서 의전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벤치에서 출발하는 불펜 투수들과 유틸리티 선수들이 1루 쪽 파울라인에 일렬로 정렬해 있다. 장내 아나운서가 그 선수들을 호명할 때마다 관중석에서 열렬한 환호를 보내고 있는 수많은 관중들이 모자를 흔들어 댔다.
순서는 곧 주전들에게로 넘어갔다.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물론 프랑코나 감독이었고. 1번 타자인 유격수 프란시스코 린도어부터 더그아웃에서 뛰쳐나갔다. 더그아웃 앞에 양옆으로 도열한 직원들과 특별 귀빈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2번으로 나서는 우익수 테일러 네이퀸이 뒤를 이었고 클린업에 자리한 좌익수 마이클 브랜틀리, 지명타자 에드윈 엔카나시온, 포수 페르난도 멘데스가 뒤를 잇는다. 1루수 카를로스 산타나, 3루수 호세 라미레즈, 우익수 로니 치즌홀. 그리고 마지막으로 2루수 제이슨 킵니스까지.
-5툴 플레이어! 인디언스의 2루를 든든히 지키는 수호신! 올스타 플레이어- 세컨 베이스맨! 제이스으으으은- 킵! 니-스!
킵니스가 뛰쳐나가며 야수진의 모든 소개가 끝났다. 장내 아나운서가 목청을 한 번 가다듬고는, 마지막으로 지혁의 이름을 불렀다.
-웰컴 투 인디언스! 새로운 인디언스의 에이스, 슈퍼 문! 아메리칸리그 올스타 플레이어!
관중들이 아나운서와 함께 입을 맞추었다.
-지- 혁! 무우우우운!
“아, 선발투수라는 게 이건 안 좋네.”
불펜에서 막 투구를 하는 중이었다. 관중들 앞에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카메라맨이 황급한 신호를 보내자 지혁은 눈앞까지 다가온 카메라에 대고 모자를 벗어 인사를 보냈다. 외야의 펜스 너머 관중들이 휘파람을 불며 환호를 보내는 게 불펜까지 똑똑히 들려왔다.
“하나도 긴장되지 않는 모양이군?”
카메라에 불이 꺼지고 나자, 옆에 서 있던 캘러웨이 코치가 웃으며 물었다.
“긴장은 되는데 빨리 보고 싶어서 미치겠네요. 저 관중들.”
“하하, 그래. 웰컴 투 클리블랜드다.”
지혁은 심장이 점점 빨리 뛰기 시작하는 걸 똑똑하게 느끼며,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
-큰 환호를 보내 주십시오! 오늘의 선발 투수! No. 70! 지-혁, 문!
드디어 마운드로 올라간다. 클리블랜드의 유니폼을 입고, 정규 시즌 첫 경기에. 더그아웃에서 한 발을 올려놓자마자 쏟아지는 엄청난 환호성 때문에 순간적으로 귀가 먹먹해졌다. 기본적으로 인구가 많지 않은 스몰마켓 팀인지라 정말 웬만해서는 꽉 차지 않는 프로그레시브 필드가 오늘은 가득 차 있었다. 일부러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곳곳에 지혁의 이름을 새긴 플래카드가 휘날리고 있는 것도 눈에 보였다.
경기장 한복판 마운드에 올라가 연습 피칭을 하는 순간부터 이미 기분이 좋아졌다. 하늘 위를 둥둥 떠가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클리블랜드의 파란 하늘 속 구름이 된 기분이었다.
***
[브라이언 도지어가 때린 타구가 유격수 정면으로 향하고 맙니다. 7회에도 아주 여유롭게 첫 번째 아웃카운트를 잡아내고 있는 문.]
[꽁꽁 틀어막고 있네요. 와핫! 안토네티 단장의 저 표정을 좀 보세요. 카메라맨을 칭찬해야겠네요. 기가 막힌 포착이었습니다.]
[박장대소를 하고 있네요.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아주 시원해 보입니다. 하지만 안토네티 단장은 저렇게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문의 퍼포먼스를 보면 말이죠.]
[당연합니다! 안토네티를 포함해서 오늘 이곳 프로그레시브 필드를 꽉 채우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즐길 권리가 있습니다. 70년째로 접어든 저주를 끊어 내겠다는 의지로 데려온 문은 시즌 첫 경기부터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지 않습니까.]
[타석에는 미네소타의 2번 타자, 조 마우어. 오늘 두 번째 타석에서 볼넷을 골라냈습니다. 그게 미네소타 트윈스의 유일한 출루였습니다.]
지혁은 오늘 클리블랜드의 하늘에 거대하게 떠 있는 구름이었다. 누구도 지혁의 공에 손을 대지 못했다. 마치 월드시리즈 무대처럼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고 있는 관중들은 지혁의 어깨를 너무나 가볍게 만들어 주는 중이었다.
[툭 밀어 칩니다만, 다시 유격수 쪽으로. 백핸드로 잡아 든 린도어가 노스텝으로 1루에 뿌립니다. Got him! 두 번째 아웃카운트도 책임지는 린도어. 린도어의 좋은 수비입니다.]
[지금도 문의 싱커가 마우어의 타이밍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바깥쪽 먼 코스였다가 마지막에 존 안쪽으로 말려 들어왔기 때문에, 억지로 따라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문의 완벽한 피칭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걸로 스무 개째 아웃카운트를 잡아냅니다. 노히트를 이어 갑니다!]
[팀을 옮기자마자 개막전 노히트를 기록한 투수가 있었나요? 아마 없을 것 같은데요?]
[기록을 찾아볼까요? 역대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선수들 중…….]
캐스터는 잠시 말을 잃었다.
[개막전에 노히트를 기록한 선수가 딱 한 명 있군요. 바로 클리블랜드의 영구 결번자, 밥 펠러입니다.]
[오, 이런. 이런 스토리가 또 있나요? 하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 밥 펠러가 세웠던 메이저리그 유일한 기록에 지금 문이 도전하고 있습니다. 클리블랜드의 유니폼을 입고 말이죠! 말씀드리는 순간 미겔 사노가 공을 당겨 칩니다. 하지만 좌측…… 뻗지 못하고, 좌익수의 글러브로! 스물한 개째 아웃카운트! 7회에도 원-투-쓰리!]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날이다. 지혁은 멘데스와 글러브를 툭 맞대며 천천히 마운드를 내려갔다. 쏟아지는 환호성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클리블랜드에서의 첫날은 수식어가 필요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 되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