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출현!
“첫 경기부터 이렇게 할 줄은 몰랐어. 진짜로.”
노히트를 기록하고 있는 투수에게는 아무도 다가갈 수 없다. 만약 혹시라도 말을 걸었다가 투수의 리듬이 깨져 버리면, 노히트가 깨진 책임을 온전히 뒤집어써야만 할 테니까. 그러니 파트너인 멘데스에게 슬금슬금 접근해서 지혁의 상태를 물어 보는 선수들이 많았다.
아무리 동료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실전의 첫 피칭을 등 뒤에서 보는 것은 정말 색다른 느낌이니까.
“우리를 상대할 때 그 공 그대로야?”
“하하, 그렇지. 아니다, 받는 입장이 되어 보니까…….”
멘데스는 코를 쓱 훔치고는 웃었다.
“그것보다 더하네. 기어가 더 올라간 것 같아.”
“더? Holy shit. 나 같으면 절대로 상대 안 한다.”
“그래, 우리는 운이 좋은 거라고. 공이 더 좋아질 줄 누가 알았겠어?”
따아악!
“이예스! 넘어가라! 넘어가!”
투아웃 주자 없는 상황, 제이슨 킵니스의 타구가 높이 치솟으며 담장 근처까지 날아가자 선수들이 일제히 두 손을 치켜든다. 킵니스가 힘껏 들어 올린 타구는 상당히 높은 포물선을 그리고, 담장에 애타게 매달린 미네소타의 중견수 벅스턴의 글러브를 살짝 스치며 그대로 넘어갔다.
“호-우 예!”
이것으로 스코어는 7회말에 6대0. 2회에 터진 카를로스 산타나의 1타점 2루타로 득점을 내기 시작한 클리블랜드의 타선은 충분한 점수를 뽑아 주었다.
마운드에 선 지혁이 점수는커녕 안타 하나도 허용하지 않고 있는 와중에 여섯 점이라는 점수는 차고 넘친다.
“또 잘 맞았다!”
린도어의 타구도 빨랫줄같이 날아갔다. 하지만 미네소타의 1루수인 마우어는 한 손을 땅에 짚으며 넘어지면서까지 어려운 바운드를 맞춰 건져 올렸다.
워낙 빠른 타구였던 탓에 다이빙을 한 마우어가 직접 베이스를 밟아도 린도어보다 빨랐다. 발을 동동거리며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는 린도어에게 관중들의 격려가 쏟아진다.
“좋아, 자! 다들 집중하자고. 첫날부터 바짝 당겨야겠어. 문을 도와줘야 하니까, 발목들 잡지 마!”
프랑코나는 8회초 수비를 위해 뛰어나가는 야수들의 등 뒤에 대고 크게 외쳤다. 그리곤 덤덤하게 걸어 나가는 지혁의 모습을 애써 외면했다. 이쯤까지 온 노히트 투수들은 자신만의 세계에 완전히 갇혀 있는 상태니까. 그 공간을 조금이라도 침범하는 순간 리듬이 완전히 깨질 수도 있다.
“첫날부터 사고를 제대로 치네요.”
“오프닝 데이에 올린 보람이 있군 그래.”
“하하, 그러게요. 팀을 옮기고 나서는 부담을 갖는 놈들도 있는데. 쟤는 어찌된 게 그런 게 하나도 없네요. 마치 팀을 여러 번 옮겨 본 녀석처럼.”
“신기한 일이지. 아니면 정말 난놈이거나.”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투구에 임하는 지혁의 등판에 거대하게 걸린 70이라는 숫자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클리블랜드를 꽉 쥐어짜고 있던 오랜 저주를 풀어 줄 선수가 드디어 합류한 듯한 느낌이다. 정말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
[문, 정말 압도적인 존재감입니다. 핀치 히터인 에히레 아드리안자도 투수 땅볼로 물러납니다. 투아웃! 타석에는 6번, 지명타자, 로비 그로스먼…… 아니군요. 폴 몰리터 감독, 또다시 대타를 씁니다. 두 타자 연속 대타입니다. 타석에는 배, 병-후 배입니다.]
[재미있네요, 하하. 한국인 선수들 간의 대결입니다.]
[재작년 웨이버 되었다가 작년 후반기에 다시 메이저리그에 복귀했죠. 배, 한국에서 넘어온 슬러거입니다. 여전히 빠른 공 대처와 컨택트에 문제를 노출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이번 시즌은 메이저리그 로스터에서 시즌을 시작했는데요. 파워 하나만큼은 여전히 팀 내 최고를 다투고 있습니다.]
[경쟁자가 무려 미겔 사노죠! 사노의 엄청난 파워도 놀랄 정도입니다만, 미네소타의 선수들은 배의 파워가 사노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입 모아 말합니다.]
[실제로 재작년에는 그 엄청난 파워를 증명하기도 했었습니다. 초반기에 말이죠.]
8회초의 두 타자도 손쉽게 잡아냈다. 에두아르두 로사리오와 에히레 아드리안자는 멘데스의 리드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지혁은 멘데스가 낸 사인에 고개를 한 번도 젓지 않고 그냥 미트를 댄 곳에 던져 넣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8회의 마지막 상대로 들어선 건 배병후 선배였다. 따로 얘기를 나눠 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 지혁까지도 약간의 안쓰러움을 갖고 있을 만큼 메이저리그 적응에 애를 먹고 있는 선배다. 빠른 공에 대처가 잘 안 되는데다가 스윙 폼을 자주 바꾸려고 하다 보니 KBO에서의 좋은 폼까지 잃어버린 게 작년까지의 모습이었다.
“미안합니다. 승부는 승부니까.”
게다가 개막전 노히트, 이적해 온 뒤 첫 경기에서 노히트를 눈앞에 두고 있는데 다른 여지를 봐주면서 던질 정도로 지혁에게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멘데스도, 지혁도 몸 쪽 높은 공으로 붙는 패스트볼을 생각했다. 던질 수 있는 최대한의 구속으로. 그곳은 배병후의 공식적인 약점이나 다름없었다.
[초구!]
따아아악!
노리고 있었구나. 지혁이 공을 던지려는 순간 앞발을 슬쩍 열어 두는 폼을 보면서부터 아찔했다. 목덜미 뒤쪽부터 시작한 찌릿거리는 느낌이 척추를 타고 하반신까지 순식간에 퍼져 갔다. 정말 괴물 같은 타구 음이었다.
공이 쪼개지는 것 같은 소리.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을 때, 대체 어디까지 솟은 것인지 알 수도 없는 공이 하늘 저 멀리에 날아가는 중이었다.
[멀리 갑니다! 좌측으로! 이 타구는 볼 것도 없이 넘어…… 넘어갑니다!]
[이런.]
야구장이 침묵에 빠져들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3루심에게로 향했다. 두 무릎을 잔뜩 구부린 채 파울 라인 선상에서 공을 지켜보고 있던 3루심은, 이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두 손을 치켜들었다. 폴대 밖으로 나갔다는 시그널. 파울.
“아, 살았다.”
-후아아아.
지혁의 입에서, 관중들의 입에서, 또 꼼짝도 못 하고 날아가는 공을 지켜보던 야수들의 입에서 같은 안도가 흘러나왔다.
미네소타의 몰리터 감독은 곧장 달려나와 비디오 챌린지를 신청했다. 그 어수선한 시간 동안에 지혁은 덤덤하게 1루 베이스 위에 서 있는 배병후를 쳐다봤다.
아시아 선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떡 벌어진 어깨와 엄청난 허벅지가 새삼스럽게 다시 눈에 들어온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배병후가 먼저 눈빛으로 인사를 건넸다. 지혁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모자챙을 한 번 만지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저 선배도 엄청나게 절실한 타석이었는데.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어.’
메이저리그에서 자신의 가치를 보여 줘야만 하는 선수였다. 경기 후반에 뒤늦게 대타로 들어섰을 때 반드시 무언가를 증명해 내야만 하는 선수. 배병후는 마치 전생의 지혁처럼, 그런 절실한 마음으로 타석에 섰을 것이다.
그런 필사적인 마음을 조금 잊고 있었다. 전생과는 달리 대성공을 거둔 투수인 지혁조차도 여전히 성장하고 싶었고, 그래서 너클 포크에도 집착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정작 상대해야 할 타자의 절실함은 잊고 있었다. 배병후는 지금 이 그라운드 안에서 가장 절실하게 매달리고 있는 타자일 테니까.
통렬한 타구가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재생되는 시간은 억겁 같았다. 그렇게 몇 분이나 가만히 있었을까. 뉴욕의 비디오 센터에서 연락을 받던 주심이 마침내 헤드폰을 벗었다. 그리고는 똑같이 두 팔을 치켜올리며 원심 유지를 선언했다.
[파울로 최종 결정됩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문! 정말 엄청난 위기를 넘겼습니다.]
[카메라상으로도 확인이 힘들었을 거예요. 폴대의 높이를 넘어서 넘어가는 타구였으니까요. 정말 애매한 공처럼 보이기는 했는데, 아마 원심을 뒤집을 만한 확실한 근거를 찾기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프랑코나 감독이 가슴을 쓸어내리는군요. 어마어마하게 큰 타구를 맞았습니다만 여전히 문은 노히트를 이어 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타석으로 돌아가는 배병후도 볼을 크게 부풀렸다가 다시 내뱉으며 호흡을 가다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초심을 잊으면 안 돼. 어떤 상황에서도. 배병후 선배처럼 절실하게 하라는 하늘의 뜻이야.’
지혁은 눈을 감고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깊은 숨을 여러 번 내쉬었다. 8회초 2아웃, 노히트를 유지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배병후의 방금 타구는 정말 치명적인 교훈을 남겼다. 좋은 공보다 더 중요한 건 필사적인 마음이라는 것.
“으랴싸아아!”
싱커가 아웃코스 보더 라인에서 심하게 꿈틀거리며 멘데스의 미트에 박혔다. 마지막에 튀어나가는 공은 멘데스가 환상적인 미트질로 건져 올렸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배병후는 바깥쪽 공을 지켜보며 방망이를 떨궜다. 허망하게 하늘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곱씹고 있는 듯했다.
녹초가 된 지혁은 힘든 걸음으로 마운드를 내려왔고, 배병후 역시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더그아웃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승부는 이런 것이다.
***
[역사상 두 번째로 메이저리그 개막전 노히트 노런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지! 투구수는 이미 121개입니다. 상당히 많은 공을 던졌습니다만, 문! 앞으로 남은 고지는 아웃카운트 단 한 개입니다. 역사에 이름을 새길 기회입니다. 타석에는 미네소타의 9번, 맥스 케플러.]
꽉 찬 프로그레시브 필드가 쏟아 내는 에너지 때문에, 힘든 줄 모르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다리가 조금씩 떨리긴 하지만, 손가락 끝이 조금 저릿거리긴 하지만. 지혁의 첫 피칭을 보러 온 관중들은 3시간 넘게 자리를 꽉 채우고 한 명도 이탈하지 않았다.
여전히 가득 차 있는 관중석의 빽빽한 사람들이 지혁에게 노래를 부르며 힘을 실어 주고 있다.
지혁의 등 뒤에 선 야수들 역시 마찬가지다. 9회 들어 첫 번째 타구는 내야 안타가 될 뻔한 위험한 타구였지만 2루수 킵니스의 멋진 캐치와 백핸드 플립(주 ; 글러브에서 공을 빼지 않고 그대로 튕겨 올려 토스하는 행위)으로 아웃카운트를 쌓아 줬다. 두 번째 타구는 좌중간 깊숙한 타구였지만 좌익수 브랜틀리의 멋들어진 슬라이딩 캐치가 지혁을 살렸다.
“하나, 하나!”
신기하게도, 이렇게 시끄러운 경기장에서도 마지막 순간이 되면 선수들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린다. 탬파베이에서도 그랬다.
린도어가 글러브를 팡팡 치면서 내야수들의 주의를 환기하고 있는 목소리가 아주 똑똑하게 들렸다. 귀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리고 이건 아마 환청이겠지만, 포수 자리에 앉은 멘데스가 타석에 들어선 케플러에게 심리전을 걸고 있는 것도 들리는 듯했다.
좌타자인 케플러는 딱히 플레이트에 바짝 붙지 않았다.
몰리터 감독은 역사상 한 번밖에 없는 기록에 구차하게 대응하기보다는, 있는 능력으로 힘껏 승부하기를 택한 모양이었다. 아주 신사적인 감독이다. 덕분에 지혁은 초구를 몸쪽에 바짝 붙이며 존을 넓게 쓸 수 있었다. 물론 볼이 되었지만, 케플러가 움찔한 것이 확실했다. 다음 공이 바깥쪽 높은 존을 통과했을 때 케플러가 터무니없이 멀게 느낀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카운트 원 볼 원 스트라이크. 투구 수로는 이미 한계를 돌파했지만, 여전히 정신이 또렷이 살아 있었다. 지혁은 이 와중에도 지난 이닝 배병후의 커다란 타구를 떠올렸다. 하나의 공에도 방심이 어렸다가는 어김없이 장타가 나오는 곳이 바로 메이저리그니까.
‘절대로 방심하지 말자. 초구처럼 던져야 해.’
멘데스가 바깥쪽 사인을 내놓고는 몸 쪽으로 붙어 앉는다. 지혁도 의중을 파악하고는 한복판에 가까운 공처럼 보이게끔 던졌다. 지혁이 팔을 휘두르는 순간 재빨리 바깥쪽으로 옮겨 앉은 멘데스와, 멘데스의 그 움직임에 맞추어 바깥쪽으로 휘어져 나가는 슬라이더가 아름다운 합을 맞춘다. 케플러는 슬라이더를 의식하지 못했다. 눈곱만큼도.
타악!
[3루수! 호세! 라미레즈! 대쉬하면서 잡아냅니다, 그대로- 1루로!]
프로그레시브 필드 하늘에 불꽃이 터져 올랐다. 폭죽처럼 터지는 화약 소리가 지혁의 귀를 빽빽이 채웠고, 1루수 산타나가 다리를 쭉 뻗어 라미레즈의 송구를 움켜쥐는 순간. 지혁은 와후 추장의 로고가 그려진 모자를 하늘로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마운드를 향해 맹렬히 뛰쳐나온 선수들에게 덮어 쌓였다.
[역사상 두 번째 메이저리그 개막전 노히트 노런! 1940년 밥 펠러의 기록 이후 두 번째 기록을 작성합니다! 클리블랜드의 뉴 피쳐, 슈퍼 문입니다!]
하늘이 형형색색의 폭죽으로 아름답게 물들었다. 이번 시즌의 앞날을 축복하는 것처럼.